내 재산

오늘은 국감 종합감사날이어서 본원으로 불려가 하루종일 국회의원들의 질의와 위원장님과 우리 원장님의 답변을 속기로 받아적는 일을 했다. 일종의 차출을 당한건데, 동기들과 동료 박사님들은 “어떻게 박사에게 이런 일을 시킬 수 있냐!”라고 대신 한탄해주셨지만 정작 나에게는 본원에 하루종일 짱박혀 있으면서 실제로 하나의 부서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분위기에서 사람들이 생활하는지 엿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예상했던대로 사무실은 조용했고 분위기는 권위적이었으며 사람들은 한없이 친절했지만 결코 마음을 섞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작은 회의 테이블에서 랩탑 네개를 나란히 켜두고 일한 사람들은 나와 비슷한 나이 또래의 젊은 조사역, 선임조사역들이었는데 내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없었던 ‘요즘’ 친구들을 만난 것 같아 살짝 반갑기도 했다. 하지만 그들 역시 똑같은 회사 사람들이었고, 나처럼 ‘짬’이 안돼 억지로 불려나온, 그날 해야할 업무를 이 국감 차출때문에 뒤로 미뤄야 하는 것에 안절부절하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일은 개떡같이 힘들었고 내 노동력은 찰떡같이 빨아먹혔다. 국회의원들의 짱짱한 목소리를 열시간 넘게 이어폰으로 듣고 있자니 현기증이 밀려왔다. 8시반쯤 이종걸 의원의 질의에 목이 반쯤 쉰 채로 대답하는 위원장님의 답변을 마지막으로 재재재보충질의가 끝나고 간단하게 사람들과 인사를 한 뒤 랩탑을 놓으러 원래 내 자리로 갔더니 팀사람들은 다들 퇴근하고 없었다. 아무도 없는 빈 공간에 밤늦게 혼자 앉아 이것저것 밀린 일들을 하는 생활을 6년동안 해왔는데, 이 회사라는 공간은 몇개월이 흘러도 그렇게 오랫동안 앉아있을 수 있는 공간이 되지 못하는 것 같다. 여섯시 땡, 하면 퇴근해야만 할 것 같고, 그렇지 못하면 기분 나쁜. 돈을 받고 노동력을 제공하는 계약을 맺었기 때문인가. 내가 원하는 공부를 내 돈 내고 하는 살떨리는 기쁨이 원천적으로 거세당한 상태이기 때문일까.

팀장부터 팀원까지, 대학교 친구들부터 고등학교 친구들까지, 오늘 처음 만난 차출인원들부터 인터넷에서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온라인 지인들까지, 모두 하나같이 헤어졌다는 말에 위로보다는 축하 인사를 먼저 건네는 것이 참 흥미롭다. 솔직히 말해 기분이 나쁘다. 당혹스럽다. 물론, 어제 함께 술을 마셨던 오래된 친구인 학교선배에게도 말했지만, 만 서른둘에 애인과 헤어졌다고 질질 짜고 술사달라고 조르고 마음이 아파서 잠도 못자고 밥도 못넘기고.. 그러면 안된다. 그건 스무살, 스물 두살들의 연애다. 서른둘의 연애는 달라야 한다. 왜 헤어졌는지 명확하게 파악되고 그 책임소재가 분명하면, 그 부분에 대해 수정하고 다음부터 그러지 않으면 된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꼭 해보고 싶었던 술먹고 전화한 뒤 트위터에 찌질하게 미주알고주알 풀어놓는 짓을 했다.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꼭 해보고 싶었고, 아주 시원하게 스트레스가 해소됐다) 아파하는 것은 내 몫이다. 다른 사람에게 굳이 보일 필요 없는, 나만의 몫으로 남겨 놓아야 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겉으로 티를 내지 않는다고 해서 나의 지난 사랑이 쉽게 이야기될 있는 것은 아니다. 어찌 그리 남의 사람에 대해 쉽게 평가하고 이야기할 수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오늘 들었던 말은
“이제 시장에서 잘 팔리시겠네요”였다.  이와 비슷한 말, 수도 없이 들었다. 들을 때마다 웃으면서 대꾸는 해주는데, 얼마전 헤어진 사람이 상대방 배려한답시고 웃으면서 괜찮아요, 해도 사실은 괜찮은게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알아서 눈치를 채야 하는게 30대, 40대 아닌가 싶다. 알아서 입을 다물어 줄수는 없는건지.

어쨌든, 오늘 잠깐 멍때리면서 한 부서의 사람들이 열심히 일하-거나 일하는 척하며 재주껏 노-는 모습을 보면서,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카디널스의 유망주 타베라스와 전 넥스트 보컬이자 “그대에게”를 작곡했던 신해철의 죽음을 동시에 접하면서, 이곳에서 나의 재산으로 허락된 것은 무엇이 있는지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했다. 나는 지난 2년동안 ‘줄 수 없는 것을 빼고 모든 것을 주었던’ 상대를 며칠 전 잃었다. 가진게 하나도 없었지만 그 사람만 옆에 있으면 배가 불렀고, 앞으로도 부를 것만 같았다. 물론 지금은 그 사람이 가진 그릇의 한계때문에 더이상 내 것이 아니게 되었고 그 결과에 대해 단 한톨의 후회도 가지고 있지 않지만(주변의 평가와 상관없이 나 스스로 ‘잘 헤어졌다’라고 생각하고 있다. 여러 이유에서), 어쨌든 있다가 없어진 것에 대한 공허함은 물리적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 가져온 컴퓨터는 펑 하고 터져버렸고, 랩탑에는 오렌지 쥬스를 쏟아서 키보드가 뻑뻑하다. 아홉시부터 여섯시까지 억지로 문장을 만들어내는 일을 하는데 퇴근 후에 또 글자를 보기엔 내 멘탈이 너무 무르다. 야동을 보자니 부모님을 봉양하는 삶을 살고 있고, 다른 여자를 만나자니 헤어진 여자를 다른 여자로 채운다는게 – 양쪽 모두에게 – 예의가 아닌 것 같다. 2k15를 하기 위해 컴퓨터를 다시 맞출까도 생각해봤는데 퇴근후에 농구게임을 하는 삶이 그닥 힙해 보이지 않았다. 음악은 출퇴근 길에 듣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고, (다시한번) 부모님을 봉양하는 삶을 살다 보니 시끄럽게 음악을 틀고 싶지도 않다. 결국 운동인가 싶다가도 최근 급격하게 떨어진 체력에 퇴근 후에는 늘 비몽사몽으로 침대로 쓰러지기 일쑤다. 답은 무엇일까. 가진 것도 없는 내가, 무언가를 가지려고도 하지 않는다. 통장에는 돈이 쌓이고 있지만 평생 모아도 자본가 계급은 될 수 없고, 자동차 하나 없으니 훌쩍 지방으로 여행을 가기도 버겁다. 아, 시간이 우선 없지. 마음도 비었고 주머니도 비었고 몸도 축났다. 답은 나도 알고 있다. 결국 다시 공부라는 것을.

나는 사랑하는 여자를 통해 인생이 완벽하게 충만해지는 느낌을 단 한순간도 느끼지 못했다. 물론 무척 기쁘고 흥분되는 순간이 있다. 손만 잡아도 좋고, 섹스를 하면 더 좋고. 그 사람을 위해 살고 싶고, 그 사람의 존재로 인해 행복하고.. 그건 연애의 일반적인 감정이다.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으로 인해 내가 가장 나다워지고 내 인생의 의미가 가장 충만해졌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 사람을 위해 항상 포기해야 하는 것이 생겼다. 뭔가 선택을 해야 했고, 그 선택은 선과악처럼 명확히 구분되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옳다고 믿었던 것을 포기해야 하는 때도 많았다. 그 모든 비논리적인 선택을 단지 사랑한다는 이유만으로 정당화시키기엔, 내가 너무 융통성이 없었다. 그래서 결국 내가 가진 재산은 풍부한 감수성도, 클래스 있는 취향도, 좋은 직장도, 교양 넘치는 부모님도, 밝은 미래도 아닌 것 같다. 그것들은 나를 정의내려주지도 못하고 날 제대로 설명하지도 못한다. 여자 꼬실 때는 좋겠지. 내가 가진 유일한 재산은 공부를 하고 싶어하고 공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질머리, 이거 딱 하나인 것 같다. 그게 나를 지금의 여기까지 끌고 왔고 앞으로 어딘가로 날 끌고 갈 것이다. 공부를 할 때에만, 그것도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할 때에만 나는 비로소 나다워 지고 100% 순수한 행복감을 느낀다. 결혼을 할 여자는 이런 나를 이해하고 배려해주는 여자여야 하고, 내가 앞으로 갖게 될 직장도 이런 나의 자아실현이 가능한 곳이어야 한다. 내 재산은 내가 이룩한 무언가가 아니라, 나를 이끄는 나만의 뿌리, 딱 그정도인 것 같다.

7 thoughts on “내 재산

  1. 나를 온전한 나로써 존재하게 해주고 또한 상대를 온전한 상대로써 존재하게 해주는 그런 사랑을 하시게 되길 바라겠습니다. 오랜만에 글 남기네요. ^^

  2. 공부가 진짜 좋은가 봐요 박사 학위 취득 후에도 이런 얘기 하시는 거 보면 ㅎㅎ 저는 공부가 좋긴 하지만 전문가로서의 자질함양이라는 윤리적인 측면과 더 많은 페이라는 경제적 동기가 훨씬 크게 작용하네요. 영어라는 언어적인 장벽이 너무 크게 느껴져서 좋아하는 게 반감되는 것도 같구요. 종혁님처럼 영어권에서 한 번 공부해 보면 마음이 달라질 수도 있을 것 같긴 한데.. ㅎㅎ 열공하세요 책도 쓰세요 두 번 쓰세요 ㅎㅎ

    • 사실 말만 이렇게 하고 늘 게으름 피우는걸요 ㅎㅎ 저는 막상 공부를 시작할 때에는 경제적인 부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는데, 이렇게 공부를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오니 경제적인 부분이 생각보다 컸구나 하는 걸 느낍니다. 경제적 동기를 반드시 고려하시는 것이 더 나은 행동같아보입니다.

      미국이나 영국, 혹은 유럽같은 교육 선진국에서 공부를 한번쯤 해보시는 걸 추천드려요. 물론 여건이 허락한다면요. 억지로 나가실 필요는 없구요. 저는 가기 전과 후, 많은 부분에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일방적으로 배운 부분이 크죠. 제가 배운걸 한국에 적용하는건 또 다른 차원의 문제입니다만..

      책을 쓸 자질은 영원히 갖추지 못할 듯 합니다. 저같은 3류 경제학자는 회사에서 주는 돈으로 살아가는 것 자체가 큰 영광이죠.. ㅎㅎ

  3. 필자님보다는 어리지만(아마도..ㅎㅎ) 공감 가는 부분이 많아요. 특히 저 또한 ‘나를 100% 가득 채워주는 여자’를 원했지만 그건 너무 큰 바람이더라구요. 나를 만족시키는 여자, 기꺼이 다 주고 싶은 여자도 좋지만, 결국 필요한건 함께 있을 때 ‘가장 나 다워 질 수 있는’ 사람인 것 같아요. 이기적이고 이상적으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그래야만이 100%에 다가가며 행복한 관계를 이어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런 여자는 여러 만남을 통해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 자연스레 오게 될 거라 믿는 편입니다. ㅎㅎ 그러니 기회가 된다면 마음의 문을 조금은 열어 두시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아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마음을 열어두기 위해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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