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미없는 시간

더이상 한국이 병신같이 변해가고 있다고 불평하는 것이 부끄러워질 정도로 요즘 나의 삶 자체가 병신이 되어가고 있다.

40페이지 가까이 쓴 소논문은 다시 리젝되어 돌아왔다. 회사에서 원하는 ‘언어’와 ‘맥락’을 아직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인지, 평생 인생의 각 단계마다 그래왔듯이 이번에도 그저 적응이 느린 것 뿐인지 잘 모르겠다. 전자든 후자든 나는 회사에서 비틀거리고 있고, 아직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고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여덟시간동안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도 모자라 요즘엔 주말에도 슬금슬금 회사로 기어나가고 있고 오늘도 저녁 늦게까지 책상 앞에 앉아 있었다. 일을 잘 못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일을 잘 못하는 회사원이 되어가고 있다.

미국에 있는 은행 계좌는 돈이 빵꾸가 났는지 어쨌는지 확인도 안하고 있다. 덕분에 그 계좌에 아직 묶여 있는 미국 아이튠즈도 전혀 관리하지 않고 있다. 달리 말하면 음악을 듣고 있지 않다. 음악을 전혀 듣지 않고 있는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부끄러운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출근시간 이어폰을 꺼내어 아이튠즈 라디오를 켜는 그 번거로움조차 지금의 나에게는 버겁다. 3,40분 정도 귀로 들어오는 음악을 기꺼이 받아들여줄 정도의 마음의 여유조차 지금의 나에겐 존재하지 않는다. 설상가상으로 귀에 익숙한 음악만 내보내주던 아이튠즈 라디오 드림팝 채널이 최근 사라진건 치명적이었다.

농구 커뮤니티에 벌여놓은 일도 손을 완전히 놓고 있다. 카페 관리는 커녕 건의사항조차 제대로 체크하지 않고 있다. 다음 시즌이 다가오는데 전 시즌 플레이오프때 걸었던 이벤트의 정리조차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은 명백한 직무유기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게으름이다. 미국에 있었다면, 대학원생이었다면 넘치는 열의를 바탕으로 순식간에 해치웠을 것이다. 부족한 통장잔고에도 불구하고 나쁘지 않은 선물을 사서 국제우편으로 보냈을 것이다. 지금은 통장엔 돈이 넘치고 난 한국에 있지만, 무언가를 베풀 용기가 나지 않는다. 계속 숨게 된다.

트위터 계정을 없앴다. 모든 것은 트위터로부터 시작했다. 계정을 지우기 전 정말 내가 무슨말을 했는지 하나하나 다 읽어 보았다. 그녀가 열받을만 하다고 생각했다. “읽기에 따라”라는 조건부 수식어가 붙지 않아도 될 정도로 나의 말들에서는 역겨운 향기가 피어나왔다. 나는 그렇게 다른 여자들에게 수작을 부리는 놈으로 낙인 찍혀도 할말이 없을 정도로 형편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트위터는 지웠지만, 잘못은 사라지지 않으며, 그 잘못으로 인해 상처받은 이의 절규 역시 그대로 내 귓가에 남아 있다. 모든 것은 트위터로부터 시작되었지만, 모든 잘못은 나로부터 발생했다. 다른 어떤 것의 핑계도 필요없으며 다른 누군가의 도움도 필요하지 않다. 그 잘못으로 인한 책임과 피해를 나 혼자 감당해야 하는 것이 마땅하나, 이 짐의 가장 무거운 부분을 누군가와 나누어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나는 앞으로 당분간은 도저히 밝게 웃을 수 없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 밖에 없다.

멍하니 NFL 중계를 보거나, 글자조차 들어오지 않는 아주 가벼운 웹툰을 보거나, 가격흥정조차 필요치 않는, 무조건 좋은 말만 해주는 백화점에서 순식간에 쇼핑을 마치거나 하는 식의 의미없는 행동들만을 하고 있다. 그렇게 의미없이 흘려보내는 시간에 집착하고 있다. 회사에서는 글을 쓰고 글을 읽지만, 내가 쓰고 싶은 글이 아니며 내가 읽고 싶은 글이 아니다. 회사 밖에서는 도저히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생각이 나지 않기 때문에 차라리 회사에서 야근을 하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말에도 회사에 가서 팀장과 밥을 먹었고, 오늘도 회사에 남아 야근하는 팀원들과 밥을 먹었다. 의미없는 시간을 보내는 데에는 회사만한 곳이 없고, 회사 밖을 나서는 순간 어느 순간부터 내 삶에서 너무 멀리 떠나버린 주체성이라는 개념이 순식간에 다가오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친다.

음악도, 영화도, 책도, 스포츠도, 사람들도 모두 의미가 없어졌다. 내가 의미가 업어졌기 때문에, 나를 의미있게 만들어주었던 사람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당연히 내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의미가 없어졌다. 하루종일 멍하고 정신이 없다. 그렇게 살아야 할 것 같다. 의미없는 시간에 집착하고 있다. 음악조차 나를 위로해주지 못한다는 사실이 비참하다.

7 thoughts on “의미없는 시간

  1. 에효.. 힘내라고 하기도 그렇고..ㅠㅠ 같이 한숨 쉬어드릴게요. 시간이 지나면, 감각이 무뎌지면? 조금은 나아지지 않을까요?

    •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말씀하신 것처럼 시간이 지나면 무뎌지겠지요.

  2. 영국을 대표하는 인디 레이블 ‘도미노레코드’의 드림팝밴드,
    와일드비스츠가 이번주 수요일인 11월 5일에 내한공연을 갖습니다 ! ->www.mysameink.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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