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있는 삶

나는 지금 서울에 있다. 지난 6월 21일 서울에 도착한 이후 딱 한달을 이곳에서 보냈다. 25일부터 출근하기 시작했고, 오늘부로 정확하게 20일의 출근 일수를 채웠다. 그동안 세번의 회식을 경험했고 야근은 한번도 하지 않았으며 지각도 한번도 하지 않았다.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는 개인 오피스에서 여의도 공원과 빌딩들이 보이는 큰 창문을 뒤로 한채 책을 읽거나 자료를 찾거나 휴대폰으로 웹툰을 보면서 시간을 보냈다. 한국에서의 사회생활은 군대 이후 처음이었다. 20대의 거의 대부분을 학교에서 보낸 나로서는 갑자기 변한 환경만큼이나 모든 것이 꿈처럼 느껴졌다. 불과 열흘 전까지만 하더라도 테네시의 들판에 누워 공연을 밤새도록 보고 있던 나는 여의도의 한 한식집에 각을 잡고 앉아 높은 분들의 무용담을 새겨 듣고 있었다. 나는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인생이 다른 누군가에게는 실패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 여기 조직 안에서부터 바깥에서 나의 인생을 지켜보는 사람들까지, 많은 이들이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독실에서 일하며 야근은 생각지도 않는 삶을 사는 내가 배부른 소리를 하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 그 배부른 소리들을 자세하게 괘 오랫동안 할 생각이다.

여섯시에 칼퇴근하고 저녁 약속을 잡지 않은채 집에 오면 여섯시 반쯤. 집으로 오는 버스에 앉아 오늘은 블로그에 무언가를 반드시 기록해야겠다고 다짐한다. 하지만 집에 오면 그렇게 차분히 마음을 큰 폭으로 움직일 기운이 나지 않는다. 그렇게 한달을 보냈다. 6월초부터 지금 7월말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음악은 거의 듣지 못했고 (최근에야 다시 주섬주섬 조금씩 챙겨듣기 시작했다) 영화도 거의 보지 못했으며 책은 꿈도 못꾸고 있다. 그렇게 무언가 많은 일들이 순식간에 일어났다. 그것들을 기록해야 한다는 생각은 하루에도 몇번씩 한다. 늘 마음 속에 남아 있다. 하지만 그 기록을 위해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 버거울 정도로 지금 나는 서울에 종속되어 있다. 앞으로는 저녁을 거르더라도 퇴근 후 근처 카페에 가서 한두시간은 꼭 노트북을 열고 무언가를 담아내야 겠다고 (다시 한번 헛된) 다짐을 한다.

최근에 우는 일이 잦아졌다. 한국에 와서 벌써 세번쯤 울었다. 그렇게 볼더가 그립다. 꿈에도 나오고 걷다가도 문득, 밥먹다가도 문득 떠오른다. 그렇게 많이 그립다. 다시 갈 수 있을까, 두렵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마냥 대학원생인 것만 같다. 통장에 무서운 속도로 쌓이는 돈도 어색하고, 일년에 한번 입을까 말까 했던 정장 바지와 짱짱한 셔츠를 매일 입고 출근하는 내 모습도 어색하고, 여섯시에 여의도의 회사원들 틈에 끼여 퇴근하는 나의 걸음걸이도 뭔가 어색하고, 전공과 영 상관없는 논문을 읽으며 윗분들이 관심있어 하시는 사안에 대해 혜안을 제시하려고 노력하는 그 과정 자체도 너무 어색하다. 나는 여전히 하루 한잔 사 마시는 차이 티 라떼가 너무 소중하고 일주일에 한번 큰맘먹고 외식을 하는 것에 감사하며 아마존에서 책을 두어권 주문할 수 있는 통장 잔고를 가지고 있음에 행복해 하는 대학원생인 것만 같다. 지도교수님에게 메일이 오면 전전긍긍해 하고 논문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으며 가끔은 늦잠을 자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는, 그런 가난한 학생인 것만 같다. 몸에 아로새겨진 그 습관들은 6년이라는 세월동안 깊숙히 박혀버려서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볼더를 그리워하는 것만큼 볼더에서의 내 모습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것 같다.

이제부터 조금씩 기록해 나갈 것이다. 지난 한달반 정도 되는 기간동안 내 삶에서 어떤 일들이 있었는지. 굉장히 큰 일들이 있었다. 우선, 나는 지금 서울에 있다.

4 thoughts on “여기 있는 삶

  1. 저도 일이 바쁘고 심적 여유가 없을 때는 글은 커녕 영화도 음악도 책도 쉬이 손에 잡지를 못해요. 재충전하기에만도 버거울 때가 있습니다만… 종혁님 화이팅…! :-)

    • 그쵸.. 맞아요. 마음이 바쁘고 황망할 때에는 물리적 시간이 주어져도 결코 여유로운 생활을 보낼 수 없더라구요. 그냥 가만히 앉아있는 것밖엔 ㅋ 사은님도 화이팅입니다!

  2. 인생의 한 고비를 넘으신 것 같아요. 볼더를 그리워 하는 그 기분이 어떤 건지 알 것 같아요.
    지금의 낯선 기분도.
    왠지 빳빳한 와이셔츠가 종혁님의 것 같진 않지만 볼더의 삶이 영원하지 않았듯, 아마 이 삶도 영원치는 않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살짝 재미 없을 것 같은데.. 현재 통장에 무서운 속도로 쌓이는 돈은 나쁘지는 않은 것 같네요. 아니, 반가운 일이죠^^
    종혁님의 페이스대로 잘 꾸려가시길. 저도 오늘 아침 문득 많은 생각들을 하게 되었어요. 삶도, 물질도, 인연도 지나가는 것들 일 뿐인걸요…

    • 그 말씀이 맞아요. 모든 것들은 그저 저를 스쳐갈 뿐이죠. 제 곁에 영원히 머무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니, 그 어떤 것도 꽉 붙잡으려고 노력해서도 안되고 이별을 익숙하게 생각해야 하는 거죠. 그걸 머리로는 다 알지만 역시 막상 제 일이 되면.. ^^ 제가 외국생활을 몇년 하면서 물건들에 대해서는 집착을 하지 않게 됐어요. 이사를 자주 다니니까 잘 버리게 됐거든요. 그런데 아직 장소에 대한 애착은 쉽게 사그러들지를 않네요. 부암동이 저에겐 그런 곳이예요. 부암동, 효자동, 광화문, 세검정 그쪽 동네요. 언제든지 돌아가고 싶은, 돌아갈 수 있을 것만 같은 그런 고향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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