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humpa Lahiri: The Lowl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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줌파 라히리는 이민자 가정의 근본적인 어두움과 외로움을 세밀한 시선으로 포착해 내는 데에 천착해 왔다. 이민 1세대가 이민 과정에서 갖게 되는 예상 가능한 범주 내의 어려움을 교과서적으로 그려내는 것이 이전 세대의 이민자 문학이었다면, 줌파 라히리나 주노 디아즈, 크리스 킴등의 최근 작품에서 발견되는 이민자 문학은 미국이라는 거대한 다문화 사회 안에 하나의 고정된 요소로 자리잡은 이민자 문화를 미시적으로 탐구한다는 점에서 확실한 차이점을 가진다고 할 수 있다. 지금까지 라히리가 써낸 단편들은 하나같이 가정 안에서 미묘하게 뒤틀린 갈등과 고독의 심연을 파헤치고 있는데, 등장인물들은 이민자라는 거시적인 상황을 적극적으로 고려하고 있다기 보다는 그저 미국안에 자리잡은 하나의 세부 문화로서의 정체성을 조금 더 강하게 느끼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런 그녀가 장편을 냈다. 그것도 1970년대부터 현재까지를 조망하는 통시적인 구성이다. 소설은 수바시와 우다얀이라는 각기 다른 형질을 타고난 형제가 남기고 가꾸어 놓은 한 뒤틀린 가정의 변천사를 다루고 있다. 수바시와 우다얀, 가우리와 벨라라는 네명의 인물이 살아가는 과정을 침착하게 묘사하면서 라히리가 작품의 처음부터 끝까지 꾸준하게 응시하고 있는 주제는 여전히 고독이다. 이들 모두가 고독과 싸우는 평생을 보냈고, 각기 다른 방식으로 고독을 품에 끌어 안으며 인생을 흘려 보냈다. 대를 이어 전해지는 이 고독이라는 낯선 감정은 끊임없이 인물들을 괴롭히며 수세로 몰아 넣는다. 그 와중에 아주 약간의 평화를 성취한 사람도 있고, 끝까지 자신의 선택에 따른 대가를 고독으로 치환시키며 그곳에서 굳이 탈출하려고 애쓰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운명적으로 주어진 삶의 우여곡절을 처절하게 버티어 내며 다음 세대로 이어지는 교두보를 마련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도 있다.

사회주의 운동에 헌신한 형제 우다얀과 달리 조용하고 침착한 성격의 수바시가 공부를 위해 선택한 곳은 미국이었다. 동북부에 있는 로즈 아일랜드에서 시작된 수바시의 미국 생활은 ‘이민’이라는 말로는 담아낼 수 없는 묘한 경계성을 가지고 있다. 그는 공부를 위해 미국으로 건너 갔고, 그곳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났으며, 자신이 결코 미국 사회에 완전히 섞일 수 없다는 사실을 자각하는 젊은 시절을 보낸다. 이후 우다얀의 죽음을 겪으며 가우리를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와 시작하는 수바시의 두번째 미국 생활은 유학 시절과는 완전히 다른, 철저히 책임감과 생존 의식으로 점철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는 사랑없는 결혼을 받아들였고, 형제의 핏줄을 지키기 위해 인도에서 벗어나 미국에서의 외로운 생활을 스스로 선택했다. 그에게는 우다얀의 딸 벨라가 유일한 삶의 목표였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삶 역시 그런 차원에서만 정당성을 가질 수 있었다.

가우리는 조금 다른 상황을 맞닥뜨려야 했다.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눈 앞에서 목격했으며 남편의 아이를 잉태한 뒤 시댁으로부터 버려질 위기에 처했다. 수바시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하고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은 그녀는 이후 자신의 학문적 재능을 발견한 뒤 딸 벨라에 대한 양육과 자신의 실존 사이에서 극심한 방황을 하게 된다. 수바시와 가우리 모두에게 학문은 일종의 생계 수단이자 현실에서 도피하는 정도의 역할에 그친다는 점에서는 동일하다. 하지만 수바시는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을 피하지 않고 담담하게 받아들이며 고독한 삶에 꾸준히 의미를 부여하는 반면, 가우리는 그러한 실존적 고독을 극복하지 못한채 탈출하여 서부로 향한다. 서부에서 시작하는 그녀의 세번째 인생은, 그녀 자신을 제외하고는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은, 앙상한 나뭇가지보다 더 단촐하고 성마른 나날의 연속이다. 그녀는 딸의 양육을 포기한 대가를 삶의 고독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보속했다. 아마도 독자가 가장 이해하기 힘든 캐릭터가 가우리였을텐데, 가우리가 로즈 아일랜드에서 느꼈을 그 숨막힘, 잠시 아이를 집에 두고 나와 근처 수퍼마켓에 가거나 캠퍼스의 벤치에 앉아 숨을 돌릴때 느꼈을 그 찰나의 여유를 상상해보면 나는 그녀의 선택 역시 그리 엉뚱하거나 극단적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그녀는 조금 더 숨을 천천히 내쉬고 들이 마시기 위해 입을 닫고 귀를 막아 버리는 선택을 한 것이다. 그것이 남편의 죽음과 딸의 탄생, 남편의 형제를 또다른 남편으로 받아 들여야만 했던 그녀가 감당해야 할 삶의 무게를 치환한 고독의 크기였을 것이다.

수바시, 가우리와 달리 그들의 딸 벨라가 선택한 연고 없는 떠돌이 생활 역시 고독이라는 맥락에서 충분히 이해 가능하다. 그녀는 어머니가 자신을 버린 뒤 땅과 생명에 집착한다. 땅이 갖는 어머니로서의 이미지를 생각해 보면 역설적으로 수긍이 가는 부분이다. 그녀가 가정이라는 시스템을 온몸으로 거부하면서 수바시와는 최소한의 관계만을 유지한채 땅과 생명에 온 힘을 쏟는 동안, 그녀는 아마도 어머니로서의 정체성을 자기 자신만의 것으로 재해석할 수 있는 약간의 여유를 확보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가 수바시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딸을 잉태했음을 알렸을 때, 이 소설은 다시 한번 도약해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간다. 운명적으로 얽힌 한 남자와 한 여자, 그 둘이 만들어낸 소녀의 성장담에서 끝나지 않고 이들이 선택하고 받아 들인 고독의 무게가 이와는 아무 상관도 없을 것 같은 그 다음 세대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음을 자각하게 될때, 우리는 다시 거꾸로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끼게 된다. 그 의무감이 막 머릿속을 파고들 때 라히리는 다시 한번 우다얀의 이야기를 풀어 놓고, 그렇게 가우리와 우다얀의 출발 지점으로 거슬러 올라가 소설은 마무리되게 된다. 이들이 평생을 두고 싸워야만 했던 고독이라는 존재는 미국이라는 장소에서 극대화되는 경향을 가진다. 작품의 제목인 “lowland” 는 수바시와 우다얀이 어린 시절을 보낸 동네의 지정학적 위치에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수바시와 가우리, 벨라와 우다얀이 결코 탈출할 수 없었던 마음속의 심연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그들은 그 누구를 용서할 힘도 없었고, 그렇다고 다른 사람의 삶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 들어가 외로움을 함께 이겨내는 용기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운명이 그들을 그렇게 만들었든 삶의 굴곡들이 쌓이고 쌓여 이렇게 흘러 왔든, 그들은 어느 한 지점에 멈추어 서서 각자 거리를 만들어 냈을 뿐이다. 마침내 새로운 관계를 시작한 것은 오직 수바시뿐이다. 그는 가장 우직하게 한 자리와 시간을 견디어 냈고, 그에 따른 적절한 보상을 받았다. 라히리가 왜 가우리를 이렇게까지 가혹하게 대하고 있는지는 아직도 궁금할 따름인데, 이는 아마도 여성 작가만이 느꼈을 여성이 가지고 있는 고독에 대한 어떤 동질감의 왜곡된 표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leaving home, going home

지난 며칠동안 감정적으로 참 많이 힘들었다. 볼더를 떠나는 준비를 하면서 볼더에 남아 있는 지인들과 나누는 작별 인사 과정에서 참 많이 울었다. 지난 6년동안 내 대학원 생활에서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담당했던 파트리샤와 마지막으로 인사를 나누던 와중 항상 강철같던 모습의 그녀가 눈물을 훔치는 모습을 보고 적지 않게 당황했던 것이 계속 마음 깊숙한 곳에 박혀 있었던 것 같다. 볼더에서의 마지막 저녁을 스캇, 스티브와 함께 했는데 이후 이어진 술자리에서 많이 취해 있었고, 그 즈음 프리티와 그녀의 남자친구 댄이 들어와서 그들에게 파트리샤에 대해 이야기하던 도중 울음이 갑자기 터져 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 몇시간동안 정말 서럽게, 소리내어 울었다. 술집에서도, 스캇과 함께 집에 가는 길 위에서도, 작별 인사를 하고 걸어가는 스캇의 뒷모습을 보면서도 무척 서럽게 울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이렇게 울어본 적이 또 있었나 싶을 정도로 감정적으로 완전히 무너졌던 것 같다. 언젠가 다시 볼 친구들임에도 불구하고 쿨하게 헤어지지 못했던 이유는, 생각보다 내가 그들을 더 많이 사랑하고 있었음을 긴 이별을 약속해야 하는 순간에야 깨달았다는 자책감때문이었으며, 아마도 다시는 이들을 영영 보지 못할 것 같다는 본능적인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정말 볼더와 볼더에서 만난 사람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내 현재가 무너지지 않게 내 옆에 함께 버티고 서서 나를 지탱해 주었던 이들이었다. 한국에 있는 사람들이 결코 이해하지 못하는, 볼더에서의 나라는 존재를 가장 잘 이해해주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그들이 있었기 때문에 내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다. 그래서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참 힘들었다. 볼더에서 포틀랜드나 뉴햄프셔로 가는 거였다면 절대 울지 않았을 것이다. 도착하면 연락할게, 크리스마스쯤에 연휴 맞춰서 함 보자, 라고 쿨하게 술 한잔과 함께 이별할 수 있었겠지. 그런데 나는 태평양을 건너 나의 고국으로 돌아가야 했다. 그리고 아마도 그곳에서 다시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할 것임을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지난 6년은 정말 힘들었다. 지금 당장 무너져내릴 것 같은 극심한 통증에 시달렸다기 보다는 하루 하루 조금씩 쌓여 가는 감정적인 피로가 나를 서서히 녹아 내리게 만들었다. 미래가 없는 내일, 가난한 오늘, 한국에서 경제적으로 안락한 삶을 누리는 친구들, 매일 매일 벽에 부딪혀 좌절하는 하루하루, 눈에 띄게 늙어가는 부모님, 그리고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못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야 하는 고독감. 그런 하루 하루들이 나를 지치게 만들어도 결코 쓰러질 수 없었던 것은 알량한 자존심같은 하찮은 이유들때문은 아니었다. 지금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그 누구도 나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가슴이 서늘하게 덜컹 내려 앉는 듯한 기분과 함께 절감해야 할 때마다, 나의 재능과 능력은 즐겁게 인생을 즐기며 이 바닥에서 생존해 나갈 수 있을 정도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사실을 어느 순간부터 상당히 확실하게 인지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떻게든 입에 풀칠이라도 하며 살아가기 위해서는 이 바닥의 누군가의 발목이라도 붙잡고 늘어져서 비굴한 모습으로라도 스스로를 이쁘게 꾸며내어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부터 나는 그 누구에게도 힘들다는 말 한마디를 쉽게 내뱉을 수 없었다. 그렇게 입을 다물어 버리고 한국에 있는 누군가로부터 이해를 구하는 것을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국 여기까지 쓰러지지 않고 올 수 있었던 것은, 볼더라는 도시 자체가 나를 품어 주었기 때문이고, 볼더에서 내가 만난 사람들이 나이 표정과 숨소리만으로도 나를 이해해주는 공기를 형성해 주었기 때문이다. 난 그들에게 나의 상황을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었고, 그들은 나에게 무언가를 해주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전혀 갖지 않았다. 우리는 그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만으로도, 서로에게 필요한 기술적인 부분들을 충족시켜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위로를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바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들만이 가질 수 있는 일종의 특권일 것이다.

내가 트위터나 블로그에서 교류하던 사람들에게서 느꼈던 감정에서도 이와 비슷한 향내를 맡을 수 있는데, 현재성을 공유한다는 차원에서의 감정적인 동질성을 형성한다는 의미에서 공통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사람들 역시, 과연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소리내어 울어줄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지만, 기꺼이 내 마음의 한켠을 내주어 그 고마움에 대한 보답을 할 용의가 있는 대상임은 명확한 사실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들에게 내가 갖는 감정적인 헌신은, 지난 6년동안 내가 쌓아올린 인생의 한 축이 어떤 수준의 존중을 받을 수 있다면 그와 동일한 수준의 존중을 받아야 하는 셈이다. 그만큼 내 인생에서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들이고, 지워져서는 안되는 존재들이다. 이것을 다른 무언가와 헷갈려 한다면, 그것은 그 사람의 인식 체계에 따른 결과일 뿐이지 내가 신기루를 형성했다고 착각하는 것은 일종의 실례인 셈이다.

어쨌든, 헤어지는 과정은 무척 힘들었다. 그리고 지난 6년동안 떠나 왔던 나의 집, 혹은 이제 새롭게 다시 정착해야 할 어떤 곳으로 방금 막 돌아 왔다. 한국은 매년 최소한 한번은 방문했던 곳이다. 1년중 한달 정도는 이곳에 머물렀다. 그리고 무엇보다 유학을 떠나기 전 평생 이곳에서 살아 왔다. 적응은 생각보다 수월할 것이다. 혹은 생각보다 수월하지 않을 수도 있다. 내가 지난 6년동안 새롭게 깨닫고 배운 어떤 가치들을 이곳에서 포기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면, 그리고 그 다짐을 실천으로 이어갈 능력이 있다면, 나는 상당히 많은 부분에서 이 새로운 사회와 충돌할 것이다. 내가 어떻게 변해갈지 아직 잘 모르겠다. 나는 지금 막 서울의 한 아파트에 있는 작은 방에 짐을 풀었을 뿐이고, 부모님과 함께 식사를 했으며, 창문 넘어 들어오는 탁한 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갈지 아직 잘 모르겠다.

 

감사의 인사

안녕하세요.

전에 한번 블로그를 관둔다 만다 해서 편지를 쓴 적이 있습니다. 결국 그 이후에도 계속 이 블로그를 붙잡고 있게 되었지만, 항상 일기 형식을 빌어 일방적인 글만 써오던 제게 처음으로 이 블로그를 방문해 주시는 분들께 드리는 편지 형식의 글이었다는 점에서 신선하고 중요한 경험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두번째 편지를 쓰려고 해요. 사실 그동안 블로그에 글을 많이 쓰지 못했어요. 원채 게으른 탓이 제일 컸고 바쁜 일들이 많았기도 했죠. 짤막한 생각같은 것은 트위터를 통해 해소하다 보니 블로그에 긴 호흡으로 글을 적게 되는 경우가 더 적게 발생한 것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 같아요. 물론 이 블로그는 계속 할겁니다. 아직 할 이야기들이 많아요. 우선 지난 주말에는 보나루 페스티벌 (Bonnaroo Music and Arts Festival) 에 다녀 왔어요. Chvrches 부터 First Aid Kit 까지, Kanye West 부터 Jack White 까지 정말 많은 뮤지션들의 공연을 3박 4일동안 빽빽하게 채워서 보고 왔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짐정리를 하고 있어요. 내일 모레 미국을 떠나서 한국으로 향합니다. 책이나 옷같은 큰 짐들은 이미 부쳤어요. 미주 대륙에 사는 한국인들이 워낙 많다 보니 국제 이사같은 서비스도 요즘엔 잘 되어 있는 것 같네요. 생각보다 수월하게 바퀴 여덟개 짜리, 침실과 냉장고가 딸린 큰 트럭에 저의 6년을 실어 보냈습니다. 지금은 집에 남아 있는 모든 것들을 버리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이 집에서만 4년을 살았는데 그동안 묵혀 두었던 짐들이 참 많네요. 군대에서 배운 가장 값진 교훈은 ‘잘 버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언제 어디서라도 바로 자리를 털고 일어나 가볍게 떠날 수 있기 위해서는 가지고 있는 짐이 적어야 해요. 어깨에 짊어 지고 있는 가진 것들의 무게가 무거울 수록 한 자리에 계속 머물게 되고, 그렇게 다른 곳으로 갈 수 없게 됩니다. 처음에 태평양을 건너 올 때에는 책을 담은 큰 박스 두개와 옷을 담은 이민 가방 두개, 커리어 가방 한개가 전부였던 제 살림이 이젠 스물 두개의 박스와 이민가방 세개, 커리어 세개 정도의 분량으로 늘어 버렸어요. 많이 버린다고 버리는데도 쉽지 않네요.

제가 이렇게 이사를 하는 이유는, 비로소, 이제서야, 겨우 졸업을 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직장을 구한 것은 다들 아시죠. 바로 다음주부터 출근을 해야 해요. 그래서 부리나케 준비중입니다. 지난주 화요일에 박사 논문 최종 심사를 통과했고, 이제 자잘한 것들을 수정한 논문을 지도 교수님과 학교에 이메일로 전송하면 제가 이 박사 과정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이 끝나게 됩니다. 요즘엔 발에 채이고도 남는다는 그 흔한 박사를 받았다는게 무슨 큰 자랑이라고 이렇게 편지 형식을 빌어 큰소리로 이야기하냐고 하시는 분들이 계실거예요. 사실 그 말이 맞습니다. 별거 아니예요. 남들이 하는 일보다 더 어렵다고 생각하지도 않았고, 남들이 받는 고통보다 더 많은 고통을 받았다고 생각하지도 않아요. 다들 자신이 있는 곳이 가장 중요하고 가장 힘들고 가장 기쁜 장소가 되죠. 저 역시 그럴 뿐이었어요. 2008년 여름 처음 미국에 와서 정말 많은 일들을 겪었습니다. 미국에서 가장 살기 좋다는 이 곳에서 좋은 사람들을 많이 만났고, 그들과 부대끼며 하나의 학문을 공부하기 위해 애썼으며, 그 과정에서 수많은 좌절과 눈물과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기쁜 일도 참 많았고, 슬픈 일도 참 많았어요. 이십대 중반에 한국을 떠나 이곳에 온 저는 아마도 요즘 시대를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가장 좋은 시절일 이십대 중후반을 이곳에서 보내고 이제 삼십대 초반의 나이가 되어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가정을 꾸린 것도 아니고 밝은 미래가 보장된 그런 삶을 일군 것도 아니지만, 어쨌든 저는 어른들이 정해준 길을 따라 보낸 지난 25년을 지나 제가 능동적으로 선택한 하나의 도전을 무사히 완수했습니다. 이 도전은 저에겐 많이 힘든 것이었어요. 공부는 아무나 하는게 아니더라구요. 저는 극히 평범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보통의 사람이었고 그래서 뛰어난 사람들이 이룩한 이 학문이라는 세계에서 저만의 영역을 개척하는 과정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지구만한 별의 매끈한 평면에 바늘만한 돌기를 뾰족 튀어나오게 만드는 것이 박사 논문이라고들 해요. 그정도로 보잘것 없는 결과물이지만 어쨌든 이 공동체와 사회에 바늘만한 도움이라도 될 수 있다면, 제가 희생한 6년의 시간과 수억원의 비용이 아깝지 않을 것이라고 믿어야겠죠. 그렇게 믿고 싶습니다. 아침 여덟시에 도서관으로 출근해서 밤 열두시에 문을 닫는다는 방송과 함께 집으로 돌아올때는 정말 입에서 단내가 난다는 것이 무엇인지 실감할 수 있었고, 그렇게 공부를 했음에도 간단한 수식 하나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해 며칠을 허비해야 했으며, 결코 우수한 성적을 받지 못했음에도 포기하지 못하고 계속 스스로를 다독이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습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기 보다는 해야만 한다는 절박함이 저를 여기까지 이끌어 온 것 같아요. 이 과정을 제대로 소화하기 위한 능력이 저에게 있다는 확신은 지금까지도 한번도 해보지 않았습니다. 전 늘 제 능력과 재능을 의심해 왔고, 제가 눈에 띄는 학문적 공헌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다만 전 제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하나의 과제를 시작했고, 어느 순간 이후부터는 다시 돌아가거나 진로의 방향을 변경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에 반드시 앞으로 나아 가야만 한다는 가슴 시린 절박함으로 하루 하루를 살아 왔습니다. 그 결과가 이렇게 나왔기 때문에 전 자부심과 성취감보다는 안도의 한숨과 기분 좋은 피로감을 먼저 느끼고 있는 것 같아요. 꼴찌로라도 마라톤을 완주했을 때 느끼는 그런 자기 위안같은거죠.

이 블로그는 저의 학위와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2007년, 전 유학 생활의 하루 하루를 담아낼 요량으로 이 블로그를 만들었습니다. 워드프레스를 선택한 이유도 기존에 사용하던 티스토리가 미국에서는 너무 느리게 반응했기 때문이었어요. 유학 생활 내내, 이 블로그는 저에게 하나의 커다란 위로였습니다. 전 글을 잘 쓰지도 못할 뿐더러 듣는 음악이나 보는 영화도 참 얕고 한정적이죠. 그래서 사실 전 이 블로그에 일상을 기록하거나 음악이나 영화 이야기를 할 때에도 결국 나 혼자만 재미있어 하겠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처음부터 그럴 목적이기도 했구요.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블로그를 통해 여러분들을 하나 하나 알아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의 작은 기적과도 같은 기쁨이었어요. 다들 저와 성향이 비슷하신지는 몰라도 조용히 글만 읽고 가시는 여러분들의 발자취를 워드프레스가 제공해주는 간단한 통계 수치에서 확인하면서 피곤한 하루 하루를 위로받았습니다. 여러분들에게는 별 것 아닌 한번의 클릭이 쌓이고 쌓여 저의 6년을 만들어 준 것이나 다름 없어요. 이 블로그를 처음 시작할 당시에는 “SNS” 같은 개념이 널리 퍼지지 않을 때였죠. 나중에 트위터나 페이스북같은 단발적인 의사 교환 수단이 각광받기 시작하면서 긴 호흡을 필요로 하는 블로그는 전문적인 성격으로 변화되거나 관심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지만, 여전히, 지금 이 시간까지도 이 공간에서 저와 함께 호흡하고 계신 여러분들이 계시다는 것이 저에게는 정말 큰 축복입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저의 하루 하루를 보살펴 주시고 보듬어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 감사의 인사를 꼭 하고 싶었습니다. 박사 학위를 마치는 시기가 조금씩 늦어질수록 조바심이 많이 들었는데, 그 이유중 하나가 바로 제가 고마움을 표현해야 할 사람들에게 인사를 하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는 불안감이었어요. 행여나 제가 학위를 받지 못하고 한국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평생 한이 될 것만 같았거든요. 정말, 진심으로 감사드려요. 이 블로그가 저에게 큰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이해해주실 필요는 없습니다. ‘얘가 왜이리 호들갑인가’ 하고 생각하셔도 하는수 없지요. 다만 저는, 이 블로그를 통해 하루 하루를 버티어 낼 수 있었고 어느 순간부터 이 블로그가 존재하는 이유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도 모르는, 한국어를 읽을 수 있는 어떤 사람들을 생각하기 시작했으며,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고 느꼈기 때문에 이렇게 감사의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을 뿐입니다.

저는 이제 한국으로 돌아갑니다. 돌아가서 직장을 다닐거예요. 생전 처음으로 8시 몇분쯤에 출근해 여섯시 이후에 퇴근하는 삶을 살겠죠. 통장에는 돈이 쌓일 것이고, 외식같은 것도 어쩌면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넥타이와 구두가 일상이 되는 삶을 살 것이며 친구들과 이태원 어딘가의 펍에서 미국 생활을 그리워하며 수제 맥주를 들이켜고 있을거예요. 그렇게 살아갈겁니다. 언젠가는 사랑하는 여자와 가정을 이룰 것이고 그렇게 가정과 일과 함께 늙어갈 겁니다. 언제까지 이 블로그가 그런 저의 삶과 함께 할런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루에 백명에서 삼백명 사이의 사람들이 들어와 무언가를 읽고 가는 이 작은 블로그가 언제까지 여러분과 저의 소통의 수단으로서 기능하게 될런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마도 제가 하고 싶을 때까지만 이 공간이 존재하겠죠. 이 블로그가 사라지는 그 순간까지, 전 제 일상과, 제가 듣는 음악과 제가 보는 영화들을 기록할겁니다. 그렇게 여러분과 함께 하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김종혁 드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