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un Kil Moon: Benj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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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un Kil Moon 의 일곱번째 스튜디오 앨범 <Benji> 는 Mark Kozelek 의 오하이오에서의 기억과 그 기억의 중심에 위치한 여러가지 죽음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는 그곳을 오래전에 떠나 왔지만 아직 자신이 “so Ohio” 라고 생각하고, 이제 더이상 25살때 무엇을 했는지 자세히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한다. 앨범 제목은 그가 1974년 로스 엔젤레스에 있는 할머니댁을 방문했을때 근처 영화관에서 본 영화에서 따왔다. 아주 좋은 기억이었다고 한다. 앨범의 첫곡이자 아마 가장 오래 여운이 남을 것이 분명한 곡인 “Carissa”가 15세부터 아이들을 키우기 시작해 35세때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난 코젤렉의 사촌 동생에 관한 이야기임을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 앨범 전체에 드리운 회색빛의 기억의 파편들을 대변하기에 썩 좋은 제목은 아님 셈이다. 이 지점에서 코젤렉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자세가 한껏 뭍어나는 것 같다. 달콤쌉사름한 기억을 애써 포장하지 않으며, 눈물이나 감동을 강요하지도 않고 그저 흥얼거리며 그 과거에 적당한 멜로디를 입혀 하나의 이야기로 만드는 것. 역설적이긴 하지만 어쩌면 영화관에 들어서는 설레이는 십대의 미소와 사촌의 죽음을 어머니의 전화를 통해 들어야 했던 40대의 코젤렉의 주름살 사이의 간극을 표현하기엔 적당한 제목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앨범을 위해 제일 처음 완성되었다는 “Truck Driver” 는 앞서 언급한 “Carissa”와 대구를 이루는 곡이다. 트럭 화재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코젤렉의 삼촌에 대한 노래인 이곡을 완성할 때 즈음 그 삼촌의 죽음으로부터 불과 6개월 뒤 코젤렉은 사촌 동생이 똑같은 화재 사고로 사망했음을 전해 듣게 된다. 가족들의 연속된 사망, 그것도 같은 이유에서. 코젤렉은 오하이오와 같은 미드웨스트의 시골 마을에 산다면 단순히 쓰레기통을 소각시키는 일만으로도 충분히 죽음에 이를 수 있다고 말한다. 그것이 그렇게 이상한 이야기는 아니라고 말하면서, 그래서 자신이 오하이오에 대한 노래를 할 수 밖에 없음을 역설한다. “Jim Wise” 는 아버지의 친구이자 너무 사랑한 나머지 자신의 아내를 살해한 사람에 대한 노래다. 코젤렉은 불과 3주전만 해도 아버지와 파네라에서 함께 차를 마시던 남자를 감옥의 면회장에서 만났을 때의 충격을 잊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 기묘한 감정의 뒤틀림의 순간을 섬세하게 포착해 내는 것이 이 앨범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노래가 “I Love My Dad” 바로 전에 위치한 것이 바로 코젤렉이 의도하는 달콤쌉사름한 음악적 색채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앨범의 마지막 곡이자 앨범을 위해 추가적으로 만들어진 “Ben’s My Friend” 는 Death Cab for Cutie 의 프런트맨 Ben Gibbard 에게 헌정된 곡이다. 앨범을 다 완성하고 나니 왠지 한곡이 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의 친한 친구인 기바드를 위해 곡을 쓰게 되었다고 한다. 코젤렉은 단 한번도 그를 질투한 적은 없지만, 기바드가 17,000장의 티켓을 순식간에 팔아 해치우는 동안 자신은 500장의 티켓을 제대로 팔지 못해 고생하는 등의 경험을 하면서 기바드에 대한 어떤 열등감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나는 왜 그처럼 되지 못했는가’ 라는 고민에 휩싸인 적도 있다고 하고.. 나는 데쓰 캡 포 큐티나 포스탈 서비스의 최근 행보보다 이 선길문의 일곱번째 앨범이 훨씬 좋다. 훨씬 솔직하고, 가식이 없으며, 투명하고, 아름답다. 내면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좋은 앨범이다. 그는 좋은 스토리텔러다.

Lykke Li: I Never Lea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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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ykke Li 가 두번째 앨범 <Wounded Rhymes> 에서 집중했던 것은 형식에서의 완벽함이었다. 그녀는 실로 빈틈없는 사운드를 꽉꽉 채워 넣음으로써 자신이 가지고 있는 재능이 팝의 형식에 대한 완전무결함으로 실현될 수 있음을 증명해냈다. 그리고 세번째 앨범 <I Never Learn> 에서 그녀는 한단계 더 앞으로 나아가는 진화를 선보이고 있다.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담대한 곡 진행 방식은 여전히 간직한 채 곡마다 존재하는 뚜렷한 목적으로 가차없이 돌진해 나가는 속도감을 더했고, 전작에서 귀를 약간은 피곤하게 만들기도 했던 빼곡한 느낌의 사운드스케이프는 ‘빈 공간’ 이 주는 미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여유로움을 더함과 동시에 그 폭과 넓이를 더했다. 실로 광대한 평원에 당당하게 우뚝 서 있는 어떤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새로운 전형을 보는 느낌이다.

앨범에서 가장 이질적인 곡이라고 할 수 있는 “Love Me Like I’m Not Made of Stone” 을 가장 먼저 뮤직미디오 버전으로 만든 것도 이채로운 부분이다. 그녀가 가지고 있는 깔끔하게 정돈된 리듬감을 완전히 거세한채 로파이한 녹음 방식을 채택해 단촐한 악기 구성으로 완성한 이 곡은 리키 리가 새로운 영역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고 할 수도 있겠다. 앨범에서 두번째로 뮤직비디오를 만든 “No Rest for the Wicked” 는 전형적인 리키 리 스타일의 곡으로 심장을 뛰게 만드는 리듬파트와 비현실적인 시/공간감을 선사하는 건반 파트가 묘하게 어울리는, 이질적인 느낌을 주는데에 있어 거의 달인의 경지에 오른 듯한 그녀의 장기가 십분 발휘되는 곡이다. 이외에도 “Gunshot” 이나 “I Never Learn” 같은 특유의 속도감과 둔부를 때리는 듯한 강렬한 훅을 느낄 수 있는 곡들과 “Hear of Steel” 이나 “Sleeping Alone” 처럼 느린 템포로 진행되는 멜로딕한 곡들이 두루 섞여 있다. 버릴 곡이 하나도 없고 흘려 들을 곡 역시 하나도 없는, 실로 완벽한 구성의 음반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된다.

리키 리가 유사한 음악적 스타일을 가진 비치 하우스등과 구분되는 뚜렷한 지점은 바로 메시지의 명확성과 그 전달 방식에 있을 것이다.  그녀는 여성의 솔직한 감정과 본능을 가감없이 날것으로 드러내는 것에 집중한다. 그것이 내지르는 듯한 그녀의 창법을 익숙하지 않은, 차가운 에메랄드 톤의 사운드에 실어 전달될 때 비로소 형식과 내용의 완벽한 일치를 체험하게 된다. 즉 그녀는 애써 좋은 말로 자신의 감정을 포장하려 하지 않고 짧은 버스에 간략하게 감정의 발로를 묘사한 다음 급격하게 폭발하는 후렴구를 반복하면서 감정을 굵고 강하게 표현해 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흔히 말하는 연약한 소녀 감성도 아니고 성장을 채 마치지 못한 미숙한 성인의 자기 고백도 아니다. 확실한 욕망을 가지고 있고 그욕망의 실현과 좌절의 반복 속에서 완전히 성숙하게 자신의 길을 찾아낸 어른이 된 여성이 자신있게 내지를 수 있는 자기 자신만의 목소리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리키 리의 이 세번째 앨범은 음악적으로나 인격적으로 성숙의 단계에 다다른 한 아티스트의 당당한 자기 선언을 보는 느낌이다. 단연코 올해의 앨범을 이야기할때 그 담론의 중심에 있어야 할 앨범이다.

Dum Dum Girls: Too Tr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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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름 슈게이징/로파이 계열에서 성공적인 데뷔를 이끌어낸 Dum Dum Girls 가 지난 2,3년동안 살짝 비틀거렸던 이유는 두번째 앨범 <Only in Dreams> 에서 미세하게나마 감지된 매너리즘이 EP <End of Daze> 에서 심화되면서 이들만이 가지고 있던 정체성이 상당부분 희석되었기 때문이다. Dee Dee 가 어느 지점에서 방향을 상실했는지는 사실 명확하지 않다. 다만 그녀가 가지고 있던 음악적인 에고가 단지 시끌벅적한 노이즈록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었다면, 그녀와 비슷한 수준으로 기타 리프를 만들고 후렴구 멜로디를 만들며 더 섹시하고 매력적으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가수들은 많이 있다는 점을 기억해야 했다. 2012년 발표된 두번째 앨범과 EP에서 덤 덤 걸스는 더이상 그들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어떤 특유의 색깔을 잃어 버린 듯 보였는데, 굳이 덧붙이자면 이게 덤 덤 걸스의 음악인지 베스트 코스트의 음악인지 웨이브스의 음악인지 잘 모를 때조차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런 그들이 2013년 절치부심한 끝에 만들어낸 세번째 앨범 <Too True>는 완벽하지는 않지만 원래 그들이 가지고 있던 오리지널리티를 어느 정도 회복한 듯한 느낌을 받는다.

두가지 큰 변화가 눈에 띈다. 하나는 완급 조절이고, 두번째는 그들이 삼고 있는 레퍼런스로의 본격적인 회귀다. 같은 리듬에 같은 톤으로 같은 메시지를 담아 불러 제끼는 디디의 목소리는 크게 매력이 없었다. 이번 앨범에서는 “Rimbaud Eyes” 와 같은 빠른 템포의 곡부터 “Too True to be Good” 같은 미디엄 템포의 곡, 그리고 “Trouble in My Name” 처럼 전에는 볼 수 없었던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 나오는 느린 곡까지 다양하게 포진되어 있다. 그러다보니 앨범이 전체적으로 지루하지 않고 한 호흡에 몰아서 들어도 좋고 몇번 반복해서 들어도 지치지 않을 만큼의 흡인력을 자랑한다. 디디는 이제야 비로소 곡 단위 혹은 EP같은 짧은 호흡에서 벗어나 조금 더 큰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된 것일까? 각각의 곡들이 가지는 매력은 그들이 각 곡마다 뚜렷한 레퍼런스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두드러진다. 디디는 인터뷰에서 수지 앤 더 밴쉬스, 스웨이드, 스톤 로지스와 같은 8,90년대 고딕/매드채스터 음악을 주된 레퍼런스로 삼았다고 이야기했고 더 나아가 마돈나와 같은 히로인들으 음악에서도 영감을 받았다고 이야기했는데, 과연 첫곡 “Cult of Love” 는 수지 앤 더 밴쉬스가 딱 떠오를만큼 명료한 이미지로 형상화되고 있고 “Are You Okay?” 나 “In the Wake of You” 에서는 처음 기타 리프부터 곡의 전개 과정이 스웨이드나 스톤 로지스와 같은 매드채스터 브릿팝을 그대로 연상시킨다. 디디가 밴드에서 가지는 위상이나 덤덤 걸스가 디디의 이미지에 의해 만들어지는 정체성의 부분에서 히로인 음악에서 느껴지는 이미지의 명료화, 상징화 방법이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어쩐지 조금 더 화사해진듯? 문제는 이들 각각의 곡들이 덤 덤 걸스의 이름 아래 하나로 통합되고 있느냐인데, 여기에서 아쉬움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앨범 전체적인 호흡, 각각의 곡들에 대한 해석 능력 모두 나무랄데가 없지만 하나의 앨범 안에 동일한 주제로 묶일 수 있는가에 대해서는 의구심이 남는 것이다. 하지만 전에 비해 성숙해 진 것만큼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얼마나 더 이들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인지가 앞으로의 성공을 가늠하는 하나의 기준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윤영배: 위험한 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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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영배의 음악에서 가장 크게 두드러지는 부분은 정확하고도 분명한 메시지다. 그 메시지에는 단호한 입장이 있다. 2010년대 한국 대중 음악계가 이 메시지에 대한 가치를 완전히 상실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앵무새같은 말만 되풀이하며 음악마저 이미지화시켜버리는 아이돌 음악이나 90년대 소녀 감성을 포장만 바꾸어가며 판매하는 되돌이음표같은 ‘한국형 이지 리스닝’ 혹은 ‘한국형 컨템프로리 어덜트’ 음악, 더 나아가 메시징을 주된 상품화의 수단으로 삼을 수 밖에 없음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하면 여자를 더 ‘쿨’하고 ‘칠’하게 꼬실 수 있는지에만 탐닉하는 흑인 음악 계열에서는 절대 찾아볼 수 없는, 이 굉장한 미덕을 윤영배는 침착하지만 확실한 방법으로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이것이 그의 음악의 정체성을 결정하는 주된 요소로 기능한다. 엘리엇 스미스를 떠올리게 한다는 그의 목소리나 음악 스타일 역시 사실 하나음악/푸른곰팡이 음악 세계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하는 것이 더 합당하며, 오히려 이에 더해 바흐같은 클래시컬한 음악들을 더 많이 연상시킨다는 점에서 ‘답습’보다는 ‘정통성’의 개념에서 해석하는 편이 더 나을 것이다. 음악을 듣다 보면 그가 지난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았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그리고 그를 믿게 된다. 그의 의견에 동조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윤영배라는 사람 자체에 대한 믿음은 흔들리지 않는 것이다. 이는 그의 메시지가 첫곡 “자본주의”나 “점거”에서 적극적으로 드러나는 거시적인 사회 문제에 대한 탐구라는 범주에 머물지 않고 “선언”이나 “백년의 꿈”에서처럼 그와 비슷한 수준의, 혹은 그보다 더 깊은 수준의 자기 성찰로도 나아간다는 사실에 기인한다. 밖으로만 내지르며 전투적인 자세를 취하는 노래들이 갖지 못하는 따스함과 유려함을 가지고 있으며 사회의 부조리함을 애써 외면하며 탐미주의에 치중하는 연약한 요즘 인디 음악이 갖지 못한 강인함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그림과 글보다 사진과 영상이 더 익숙한 시대로 넘어 왔다. 하지만 그렇다고 장문의 글이 불필요해지는 세상은 아니다. 여전히 필요하고, 익숙해져야 한다. 윤영배는 무거운 주제를 피해가지 않는, 건조하지만 담백한 문체를 가진 긴 호흡의 소설을 떠올리게 한다. 요즘 젊은이들이 좀처럼 읽지 않는 그런. 떠들석하게 일을 벌이며 자신을 치장하는 데에는 아낌없이 돈과 시간을 투자하지만 정작 중요한 순간에는 침묵하는 대다수 ‘어른’들이 하지 못하는, 조용하지만 단호한 입장과 그 입장을 실천하는 행동이 음악 속에 담겨 있다. 이런 음악을 2014년에 들을 수 있다는 것은 행운이라는 말로는 표현하지 못하는 어떤 경건함을 느끼게 한다. 대충 뭉뚱그려 감사함이라고 해두자.

Noah Baumbach: Frances H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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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는 내내 <인사이드 르윈> 이 생각났다. 사회-반사회의 경계를 넘나드는 정신세계를 가진 주인공이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이곳저곳을 떠돌며 주변 사람들의 차가움에 시달리는 고난-여행기라는 점에서 닮은 점이 분명히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코언 형제가 특유의 냉소적인 시선을 완전히 거두지 못한채 주인공에 대한 씁슬한 애정을 어두운 톤으로 그릴 수 밖에 없었다면 이 <프랜시스 하>는 그보다는 조금 더 밝은 시선을 단보하고 있다. 또한 <인사이드 르윈>을 보면서 ‘한 개인이 거부할 수 없는 거대한 절대적 존재’에 대한 고찰이라는, 코언 형제가 천착해 왔던 주제의 연장선상에 있다는 점에서 새로운 것이 거의 없다고 받아들인 반면 (게다가 그 논의는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에서 거의 끝내지 않았나?) <프랜시스 하>를 보는 동안엔 그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 존재에 대한 인식을 충분히 하고 있는 와중에도 보잘것 없는 한 개인이 몸부림칠 수 있는 공간을 차분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서 훨씬 더 세심하고 사려깊은 시선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물론 <인사이드 르윈>은 대단히 뛰어난 영화다. 그해 거의 최고의 영화였지. ‘거의’..)

이 영화는 최고의 오프닝 크레딧과 엔딩 크레딧 씬을 가지고 있다. 이 영화의 감독은 영화라는 마법을 유려하게 부리고 있는 내성적이고 수줍은 마법사라는 상상을 하게 된다. 영화가 시작됨과 동시에 영화가 창조한 세계 속으로 완전히 동화될 수 있는 강렬한 장면을 보게 되고 영화가 끝남과 동시에 주이공이 창조한 삶의 한 조각에 진심으로 박수를 쳐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된다. 함께 웃고 울고 속상해하다가 주인공이 가까스로 탈출한 그런 종류의 삶을 여전히 살고 있는 나의 현실 속으로 돌아와야 할 때 느껴야 하는 쌉사름한 감정도 없다. 오히려 영화와 그 주인공에게 큰 힘을 받은 느낌이다. 영화가 현실에게 해줄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다 해주고 있는 셈이다. 이 영화의 시작은 그래서 위대하고 끝은 그래서 창대하다.

주인공 프랜시스의 고달픈 삶은 그 자체로 지극히 현실적이지만 영화는 결코 냉소적인 시선을 보내지 않는다. 끊임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며 자신의 삶을 구석으로 몰아가는 주인공 프랜시스는 언뜻 봤을 때 정상이 아니라고 느낄 수도 있다. 그녀는 동성 단짝 친구에게 “섹스를 더이상 하지 않는 레즈비언 커플” 같은 감정을 느낀다. 그녀는 자상한 남자친구의 동거 제안도 뿌리친채 단짝 친구 소피에게 집착하지만 소피는 그녀를 버리고 더 나은 조건의 삶을 찾아 떠난다. 끊임없이 갈구하던 애정에서 완전히 버림받은 이후 프랜시스의 삶은 점점 나락으로 빠져들지만, 그 와중에도 그녀는 유머를 잃지 않으며 자신의 삶을 크게 부정하지도 않는다. 현실 인식이 없는 것도 아니며,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도 아니다. 지극히 정상적인 그녀가 반사회적으로 가끔 느껴지는 이유는 타인에 의한 삶의 강요를 온몸으로 거부하기 때문이다. 그녀는 재능이 뛰어난 댄서가 아니지만 댄서로서의 삶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자신의 곁을 떠난 친구의 속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가 별로 좋지 않은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을때 기꺼이 침대의 한자리를 내어주고 여전히 그 친구가 시키는대로 양말을 벗는 배려를 보여준다. 프랜시스는 분명 실패한 인생이다. 그녀는 월세를 내지 못하는 경제 능력을 가지고 있으며 가지고 있는 꿈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다. 르윈 데이비스와 똑같다. 르윈 데이비스가 다시 지하의 클럽으로 돌아갔던 것처럼, 그녀 역시 다시 어떤 ‘언저리’로 돌아간다. 그녀가 돌아가는 삶의 한 언저리에서 그녀는 밝게 웃는다. 프랜시스가 아파트 우체통에 자신의 이름을 적은 이름표를 거는 장면에서 그녀는 자신의 긴 성을 살짝 접어 ‘Ha’까지만 나오게끔 하는데, 그 장면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설명하는 것만 같았다. 그녀는 앞으로도 결코 자신의 ‘모든 것’을 실현하지는 못하는 삶을 살겠지만, 구겨 넣든 끼워 넣든 일정 부분 포기하는 법을 배우고 나서야 비로소 삶의 나머지 부분들을 온전히 즐길 수 있는 길을 찾아낸 것이다.

우리의 삶이 그렇다. 아니 내 삶이 그렇다. 텍스 리턴을 받아야 거창한 외식을 한번 할 수 있고 매달 렌트를 어떻게 낼지 걱정하며 높은 꿈을 이루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재능을 탓해야 하는 삶을 살고 있다. 언제나 나의 가장 가까운 곁에 있을거라 생각했던 사람은 언제 떠나갈지 모르는 신기루와 같으며 늘 나의 뒤에 든든히 버텨줄 것만 같았던 가족은 어느새 힘이 잔뜩 빠져 쉴 곳을 찾는 노인들이 되었음을 자각해야 한다. 충동적인 여행은 카드빚을 늘려줄 뿐이며 확정되고 보장된 미래는 전혀 없는 그런 삶을 살아가는 내가 프랜시스에게 느꼈던 감정은, ‘그래 우리의 삶은 이렇게 개판이구나’가 아닌, ‘부족한 삶은 부족한 삶 나름의 가치가 있다’는 긍정의 힘이었다. 그녀는 어찌 보면 실패한 댄서이자 “데이트가 불가능한” 여자로 살아왔고 또 살아갈 것이다. 나 역시 실패한 학자이자 데이트가 쉽지 않은 남자로 살아갈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아가야 하고, 살아갈 수 있으며, 또 살아가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이 영화가 <인사이드 르윈> 보다 훨씬 뛰어난 가치를 지닌다고 생각하고 올 한해 나에게 있어서만큼은 가장 중요한 영화로 남을 것임을 확신하는 것이다.

좋은 음악과 뉴욕의 거리들, 실내 공간들은 흑백 화면과 어울려 멜랑콜리한 감성을 자극한다. 하지만 반드시 이야기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주인공 프랜시스를 연기한 Greta Gerwig 이다. 그녀는 굉장히 복잡한 내면을 가진 프랜시스를 완벽하게 표현해냈다. 그녀의 실제 고향은 새크라멘토. 프랜시스가 영화속에서 잠깐 방문하는 고향도 새크라멘토다. 그녀가 구사하는 캘리포니아 억양은 뉴욕의 거친 환경 속에 놓인 순결한 영혼을 표현하는 중요한 기표다. 이외에도 매 장면, 매 컷에서 의미를 읽을 수 있는, 정말 소중한 영화다.

Spike Jonze: Her

<Her> 가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명확하다. 인간과 어울리는 것이 먼저인가, 혹은 인간과 어울림으로써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이 먼저인가. 주인공 Theodore 는 이혼의 아픔으로 인해 ‘세상’과 멀어졌지만, 컴퓨터 OS Samantha 의 도움으로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가 OS에게 느낀 것은 사랑이었다. 그 사랑의 감정을 바탕으로 그는 외로움을 이겨낼 수 있었고 다시 주변 지인들과 어울릴 수 있었다. 이혼 서류에 서명한 전처 캐서린은 묻는다. 실재하는 상대에게서 도망치기 위해 존재하지도 않는 프로그램에 감정을 투영하며 도피하는 것은 아니냐고. 씨어도어와 캐서린이 OS 를 인식하는 시각은 완전히 다르다. 영화속 OS 인 Samantha 는 그 어떤 인간보다 매력이 넘친다. 그녀는 감정이 있고, 타인을 느낄 수 있으며, 타인의 감정을 이해할 수도 있다. 즉 씨어도어가 컴퓨터 OS 와 대화를 나누고 사랑을 나누고 그로 인해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다시 세상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그를 그렇게 만든 사만다가 실재하는 육체를 가지고 있는지 아닌지의 여부가 계속 중요하느냐는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 그리고 영화의 결말은 그가 모든 것과 확실한 이별을 고하게 되는 장면으로 끝을 맺는데, 그 순간까지도 그이 옆에 남아 있는 것은 사만다나 캐서린이 아니라 그의 오랜 친구인 Amy 라는 점에서 영화는 그 질문에 대해 어느정도 스스로의 해답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Amy는 인간이지만 OS와 사랑에 빠진 씨어도어를 이해해주고, 그 자신도 사랑을 잃은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컴퓨터의 힘을 빌리는 그런 존재다. 이 영화는 씨어도어와 에이미가 어떤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내야만 했던 결핍된 자아를 스스로 자각해나가며 그 빈틈을 매워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사만다는 세상을 배워가면서 급격하게 진화한다. 그녀는 “세상을 그냥 보고 있어요” 라고 말한다. 그녀가 보고 듣고 느끼는 세상과 모니터를 통해 세상을 접하는 대다수의 현대인은 사실 크게 다를바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다. 어쩌면 노래도 만들고 그림도 그리는 그녀가 우리보다 훨씬 더 인간에 가까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씨어도어의 사랑은 때문에 솔직하고 타당한 것이었으며, 그가 프로그램이라는 한계를 깨달으며 좌절하게 되는 순간까지도 그의 마음은 결코 놀림받아서는 안될, 진정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었음을 잊으면 안된다. 그가 OS 와 사랑에 빠지는 것과 우리가 페이스북이나 트위터에서 실재하는지의 여부조차 확실하지 않은 누군가와 수다를 떨며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크게 다른 것 같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의 사만다이며, 어떤 사만다를 좋아하는 씨어도어일 수도 있고, 어쩌면 그런 씨어도어를 옆에서 지켜보는 에이미일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이 그렇다. 컴퓨터와 사랑에 빠지는 사람들이 속출하는 세상이 이상한 것이 아니라, 컴퓨터와 인간 사이의 경계가 모호해질 정도로 삭막하게 말라가는 인간 세상이 이상한 것이다.

호아퀸 피닉스는 다시 한번 격정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그를 조용히 뒷받침 하는 에이미 아담스의 연기도 굉장히 인상적이다. <어메리칸 허슬> 에서 보여준 모습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자연스럽게 선보인다. 목소리만으로도 영화속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성이 누구인지 확실히 어필하는 스칼렛 요한슨도 감히 ‘열연’을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요한슨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영화를 본다고 해도 그녀는 매력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