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 벅, 제니퍼 리: 겨울왕국

한국 뿐만 아니라 전세계적으로 히트를 치고 있다면, 그것도 마케팅이나 개봉 시기의 이점때문이 아니라 장기적으로 입소문을 타고 꾸준히 관객몰이를 하고 있다면, 세대와 지역성을 초월해 어필하는 무언가가 반드시 존재한다는 뜻이다. 난 <겨울왕국>이 흥행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세가지 정도로 들고 싶다. 첫째, 뮤지컬 형식을 채용해 굉장히 빠른 서사의 진행을 보여준다. 영화 시작 후 몇분만에 부모가 죽고 그 이후 몇분만에 킬러 컨텐츠중 하나인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이 나온다. 그리고 영화의 중반부를 통과하기도 전에 “Let It Go” 가 나온다. 애니메이션에 국한시키지 않고 전체 영화를 통털어 이렇게 서사의 전개가 몹시 빠른 영화는 전에 보지 못했다. 스마트폰을 언어를 배우면서부터 가지고 놀기 시작한 세대에 어울리는 속도인지, 그들과 함께 극장을 찾아야 했던 부모들이 지겨워 하지 않을 정도로 “뻔한 이야기는 이쯤에서 그만 하도록 하지” 전략이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빠른 이야기의 전개와 뮤지컬 형식을 차용해 스토리의 많은 부분을 지루하지 않은 노래로 전달한 것이 주효하지 않았나 싶다. 관객은 <라푼젤>보다는 <레 미제라블> 의 만화 버전을 기대하고 영화관을 찾은 것 같다. 둘째, 진부한 결말에 기대지 않고 살아있는 캐릭터를 만들어냈다. <슈렉> 이후 거의 모든 애니메이션들이 과거의 전통적인 서사 구조를 어떻게 하면 더 심하게 비틀 수 있는데에만 몰두했다면 <겨울왕국>은 기존의 전통적인 전래동화의 이야기 구조를 그대로 따라가면서 현대적인 캐릭터를 구현해 영화의 중반까지 지루함을 달래주었고 그 캐릭터가 죽어버리는 영화 후반부에는 기존의 서사 구조를 비틀며 남녀간의 사랑이 아닌 자매간의 사랑으로 위기를 극복하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신선함을 유지할 수 있었다. 셋째, 컴퓨터 그래픽과 작화 자체의 완성도가 뛰어났고 성우들의 연기력이 훌륭했다. 새로운 기술을 도입했는지 전에 비해 유독 매끄러운 느낌이 많이 들었고, 화려한 카메라 앵글이라던가 액션씬도 무리없이 화면과 잘 어우러졌다. 안나와 엘사라는 두명의 매력적인 캐릭터를 연기한 성우들이나 올라프같은 감초 역할을 맡은 성우의 연기력이 캐릭터의 생생함을 더 잘 전달해 준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위에 언급한 이러한 요인들이 영화의 작품성을 훼손하는 주된 기제로 기능함 역시 적시해야 겠다. 난 이 영화를 굉장히 안좋게 봤다. 지루했고 재미가 없었으며 아무런 감동도 받지 못했다. 첫째, 뮤지컬 형식의 구조는 영화의 완성도를 저해하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많은 이들이 감동을 받았다는 “Let it Go” 는 사실 영화의 서사 전체를 놓고 봤을 때 굉장히 생뚱맞고 이질적인 부분이다. 엘사라는 캐릭터를 설명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는 이 노래를 부르기 전까지 늘 자신을 감추고 희생했으며 이 노래를 부른 뒤에도 늘 망설이고 머뭇거린다. 오직 이 노래를 부를 때에만 당당할 뿐이다. 영화 중반 이후에는 아예 킬러 송이 나오지조차 못한다. 영화는 언제부터인가 노래가 아닌 대사를 통해 모든 것을 전달하려고 하고, 심지어 영화의 클라이막스 부분에는 노래가 완전히 실종되어 버린다. 결국 영화는 뮤지컬도 아니고 극영화도 아닌 어중간한 형태가 되어 버렸고, 이는 영화 중반 관객이 기대하는 바를 전혀 충족시켜주지 못한채 질질 끌다가 자매간의 사랑이라는 예상 외의 결말을 통해 성급하게 막을 내려 버린다. 둘째, 영화의 유일한 미덕인 캐릭터 역시 중반 이후 완전히 죽어 버린다. 엘사는 “Let it Go” 를 제외하면 사실상 악역에 가까운 캐릭터다. 엘사가 대체 왜 그렇게 자신을 봉인시키고 동생을 고난에 빠트려야 했는지에 대한 설명이 충분치 않다. 이는 전적으로 지나치게 빠른 극의 전개 속도에 기인하고 있다. 영화는 엘사가 얼음 속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리는 과정을 조금 더 친절하게 설명해 주어야 했다. 안나는 고전을 현대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는데에 결정적으로 기여하는 현대적이고 진취적인 여성 캐릭터이지만 엘사에게 심장을 가격당한 후 힘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비실거린다. 그는 영화 속에 생기를 불어 넣고 유머를 지속시키는 역할을 담당하지만 그녀가 아픈 뒤 올라프마저 함께 심각해지면서 영화는 위트를 상실해버린다. 영화 속 남성 캐릭터들은 이미 많이 지적되어 왔던대로 주인공 자매를 보조해주는 역할에 지나지 않으며, 그나마 아무런 매력을 지니고 있지 못하다. 이 영화가 동성애 코드로 해석되는 데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 있는 셈이다. 관객중 그 누구도 안나와 크리스토프가 과연 결실을 맺게 될지에 관심을 갖지 않을 것이다. 영화는 그 어떤 결말도 담보하지 않고 있는데, 즉 안나와 엘사, 안나와 크리스토프, 혹은 엘사와 그 누구도 어떤 확실한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채 영화는 끝을 맺는다. 유일하게 관객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안나와 엘사가 다시 대충 행복하게 함께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인데, 그 지점에서 “I Love You”라고 서로에게 고백하는 장면까지 더해져 동성애 코드를 확신하게 되는 것이다. 이는 정말로 이 영화가 동성애 코드를 담고 있는지와는 별개로 영화의 완성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발생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엉망으로 끝난 영화를 “열린 결말”이라고 포장하는 셈이다) 셋째, 결국 한두개의 영화 삽입곡이 그 영화 전체를 대표하게 되는 상황, 게다가 그 노래들이 영화의 주제 의식을 확고하게 포함하지도 못하고 있는 상황은 비극적이라고 할 수 밖에 없다. 과연 “Let It Go” 와 “Do You Wanna Build a Snowman” 이 영화를 상징하는 키워드가 될 수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본다면, 오히려 눈속에서 만들어져 여름을 꿈꾸는 올라프의 주제가가 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아주 좋은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따뜻한 왕국에 사는 공주가 얼음을 만들어내는 저주에 걸려 동생을 해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스스로를 얼음 속에 가두어버리고 이런 언니를 해방시켜주려는 진취적인 동생이 갖은 역경을 극복하고 결국 언니를 따뜻한 왕국으로 귀환시킨다는 줄거리는 그럴듯하다. 문제는 이걸 어떻게 풀어내느냐였고, 그 방법론에서 <겨울왕국>이 택한 방향에 쉽게 동의를 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영화에는 악역이 뜬금없이 등장하고 그 악역의 등장 방식의 영화의 문법, 혹은 관객과의 약속을 배반한다. 안나와 엘사라는 매력적인 캐릭터의 가치는 영화 끝까지 이어지지 못한다. 일차원적인 남성 캐릭터들과 감초 캐릭터들이 관객들로 하여금 오로지 엘사와 안나에게 집중하게끔 강요하는 상황에서 이는 치명적이다. 서사 구조는 흔들리고 방황하며 지나친 속도로 인해 몰입과 충분한 이해를 방해한다. 아이들이 왜 이 영화에 열광했는지를 생각해보면 이 영화가 이룩한 최소한의 성취까지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의심하게 만드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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