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실패했는가 (상)

결국 재능을 살리는 것이 첫째라고 생각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는 것은 그 다음이다. 최고의 재능을 포기하고 그보다는 좀 덜 잘하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일을 택했음에도 불구하고 먹고 사는 데에 지장이 없다면 그 사람은 기본적으로 복을 타고난 사람이다. 가장 잘 하는 일을 하는 것조차 요즘 세상에서는 어려운 일이다. 그냥 저냥 자신의 랭킹에 맞게 주어지는 일을 시스템 안에서 해나가며 돈을 버는 것이 요즘 세상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주된 방식이고, 나는 이러한 삶을 ‘실패’라고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 다만 나의 경우에 한해 이야기한다면, 지금까지 목표로 했던 어떤 지점에 결코 도달하지 못하리라는 확신을 하게 되는 이 시점에서 실패라는 단어를 꺼내 놓고 왜 여기까지 올 수 밖에 없었는지를 생각해보고 싶어지는 것이다. 

나에게 있어 재능은 두가지 갈래로 주어졌다. 그것이 어떤 특수한 기술이나 영역에 있는 것은 아니고 그쪽 ‘바닥’에서 놀 수 있다면 가장 잘 놀았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드는 그런 개념이다. 하나는 가톨릭이었고, 다른 하나는 역사였다. 이 두가지 영역 모두 나에게는 ‘주어진’ 것이었다. 아주 엄격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보수적인 가톨릭 문화를 온 몸으로 받아 들이며 성장해야만 했다. 가족중 가장 가까운 분이 사제이고 수녀였으며 열살 무렵부터 6년동안 복사일을 해오면서 가톨릭 성직자들을 가까운 거리에서 체험할 수 있었다. 중학교 3년동안 매달 예비 신학생 모임에 나갔으며, 이대로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당연히 신학교에 들어가게 될 줄 알았다. introvert 한 성격에 모순되게 무대 위에서 어텐션을 받는 것을 좋아했던 성격, 매년 반장따위의 일을 맡아 하면서 친구들 대신 혼나고 친구들 몰래 도와주고 친구들을 움직여 어떤 권위있는 조직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끄는 행위 등에 희열을 느꼈던 성격등이 성직자와 잘 맞는다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성직자가 되면 천국에 갈 수 있는 확률이 조금은 높아지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컸다. 그만큼 십대 초반 나에게 죽음은 두려운 대상이었고 어떻게든 죽음 이후의 삶을 대비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주일학교에서 배운대로 타인을 위해 헌신하는 삶을 살면 천국에 가는 기회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얄팍한 마음이 있었다. 크로닌의 <천국의 열쇠> 의 영향도 컸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이 옵션은 외고에 진학하면서 자연스럽게 소멸되게 된다. 먼저 “대를 이어야 한다”는 우스운 이유에 굴복한 탓이 컸는데, 보수적인 대구 출신 가족의 남아선호사상은 가톨릭 집안에서 사제를 배출한다는 영광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존재했나보다. 남녀공학으로 진학하면서 여자의 존재에 대해 뒤늦게 눈을 뜬 탓도 있었다. 여자를 꼭 사귀어 보고 싶었고, 손도 잡고 키스도 하고 싶었는데 대충 눈치를 보아하니 아무래도 고등학교 졸업 전까지는 요원해 보였다. 내가 가장 자연스럽게 할 수 있는 것, 자연스럽게 체화된 문화, 그리고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들은 모두 가톨릭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일 수 있었다. 아무튼 나는 실제로 신학교에 입학 원서를 넣을 정도의 용기는 없었다. 매달 한번씩 신학교에 들어가 신학생들의 삶을 엿볼 수 있었고 그들과 며칠동안 함께 자고 먹으며 피정도 해보았지만 도저히 ‘여자가 없는 삶’을 꿈꿀 수는 없었던 것 같다. 평생 신자들만을 위해 살다가 결국 나쁜 병마만을 얻고 쓸쓸하게 돌아가신 큰아버지의 삶에서도 영향을 받았다. 

역사는 다른 차원으로 내 삶을 지배해 왔다. 사학자인 아버지 곁에서 아버지의 공부하는 모습을 흉내내는 것이 어릴적 놀이중 대부분을 차지했던 유년시절을 지나 시간이 날 때마다 박물관에 나를 던져 놓았던 부모님을 원망하던 어린 시절을 통과하고 나니 그냥 대략적인 눈치밥으로만 주변 아이들보다 역사에 대해 많이 아는 수준이 되어 버렸다. 다행히 글짓기도 나쁘지 않게 하는 수준이었고 중학교 입학과 동시에 솟아난 여드름때문에 대인기피증이 생긴 뒤부터 집에 틀어박혀 책만 읽기 시작한 이후 남들에게 풀어낼 수 있는 ‘썰’도 나쁘지 않은 수준이 되었다. 역사 선생님들의 사랑을 독차지했고, 가끔은 선생님들을 대신해 내가 프레젠테이션 자료를 만들어 발표함으로써 수업을 대체하기도 했다. 대중을 상대로 기술된 역사책들은 시시하게 느껴졌고, 조금 더 깊은 차원에서 역사를 공부해볼 요량으로 한자를 익혀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외고 입시 과정에서 아버지의 반대로 중국어과에 지원하지 못하게 되면서 역사에 대한 꿈도 함께 꺾였다. 아버지에 대한 반항때문이었는지, 서양사에 대한 흥미가 상대적으로 떨어져서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고등학교 입학 이후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국영수 중심의 수능 대비에만 집중하게 되었고 역사 공부를 따로 시간을 내어 할 정도의 여유는 아침 일곱시부터 밤 열시까지 학교에만 있어야 하는 외고생에게는 너무 과분한 사치였다. 결국 아버지의 바램대로 나는 한자 까막눈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되었고, 덤으로 나쁜 수능 점수를 받아 들게 됨으로써 원하는 학교에 지원할 수도 없게 되었다. 당시 아버지는 커트라인이 낮은 문과대에 일단 들어가서 고시를 준비하기를 원하셨지만, 정작 한자를 읽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한자로 가득찬 고시책을 읽으라고 하시는 아버지에게 심통이 나서 그쪽과 가장 거리가 멀어보였던 경제학과에 무작정 원서를 넣었다. 당연히 재수를 생각하고 있었는데 덜컥 합격이 되어버려서 경제학과에 입학했고, 그 결과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내가 사제가 되었든 역사를 전공으로 선택했든, 가지 않은 길이기 때문에 “이랬을 것이다”라고 확신할 수는 없는 일이다. 지금보다 더 인생이 꼬였을 수도 있다. 아무도 모르는 일이다. 다만 내가 십대시절 나름 확신을 가지고 있었던 나의 재능은 위의 두가지에 집중되어 있었다. 남들보다 확실히 잘하는 것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더 편하게 느껴졌고 더 익숙하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있었다. 그것을 대학 레벨에서 한번 더 숙성시키고 그것을 이용해 사회로 진출할 생각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경제학이 대학에서의 전공으로 확정된 이후 나는 이상한 오기가 생겼다. 십대 시절 수학을 잘 하지 못했고, 때문에 당연히 경제학도 잘 하지 못했다. 평균 이하였다. 남들은 쉽게 이해하는 개념도 잘 따라가지 못했고 그래프 하나 그리는 것, 수식 하나 계산하는 것도 남들보다 뒤쳐졌다. 경제학에 재능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을 꼭 극복하고 싶었다. 수학이라는 툴로 무장한 경제학은 문장과 ‘썰’로 논리를 풀어 나갔던 나에게 큰 장벽이었고, 이것을 극복하지 않으면 평생 열패감에 시달리게 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사실 그때 경제학에 대한 기대를 접고 무사히 졸업만 한 뒤 평범하게 경제학과 상관없는 일을 했다면, 지금처럼 꼬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도 가정이기에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우야돈동, 나는 군 제대 이후 본격적으로 경제학을 파기 시작했고, 실력이 미달되었음에도 당시 리더가 베풀어줄 획기적인 자비로움에 힘입어 한국은행 스터디에 들어가 어려운 경제학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실력은 바닥이었고, 비록 수업 성적은 잘 나오기 시작했지만 스스로에 대한 확신은 전혀 없었다. 나보다 경제학을 잘 하는 사람들이 바로 옆에서 기세를 뽐내고 있었는데 나는 스터디원들이 당연히 받는다는 A도 변변히 받지 못하는 실력이었다. 평균보다는 잘하지만 최고들과 비교하면 보잘것 없는 성적표를 들고 교수님들을 찾아갔고, 교수님들도 갸우뚱거리며 “아예 유학을 가지 못할 정도는 아니”라는 판정을 내려주셨다. 그렇게 준비하게 된 유학에서 또 덜컥 한 학교에서 합격 통보를 받아버린 것이다. 그 학교에서 장학금까지 준다길래 냉큼 오퍼를 받아 들였고 그렇게 유학을 떠나게 됐다. 

유학 생활은 힘들었다. 다른 유학생들보다 실력이 뒤쳐졌음에도 한국에서 대학원이라는 예비 과정도 건너뛰고 급하게 온 유학이었기에 수업 내용을 따라가는 것이 벅찼다. 매일 밤 늦게까지 도서관에 남아 있어도 돌아가지 않는 머리는 어쩔 수 없었다. 당연히 과목중 하나에서 빵꾸가 났고, 그 구멍을 메우기 위해 남들보다 1년이 또 뒤쳐졌다. 만약 거기서 짤렸다면, 즉 학교를 타의로 나오게 되었다면 일찌감치 경제학을 포기하고 한국으로 돌아가 평범하게 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지금보다 덜 꼬이지 않았을까. 물론 알 수 없는 일이다. 가정이기 때문에 지레 짐작할 수 없는 가지 않은 길이다. 우야돈동, 어찌어찌 짤리지 않고 버티면서 극복해내다 보니 석사를 받게 되었고, 석사를 받고 나서 또 한참동안 매너리즘에 빠져 논문 쓰는 일에 소홀히 하다 보니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그 시점부터 다시 논문에 집중할 수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나은 결과를 받아 들었을 것이다. 경제학 박사 잡마켓에 필요한 것은 딱 하나다. “A Damn Good Paper”. 그것을 5년 혹은 6년 이내에 만들어내느냐의 싸움이고, 나는 그것을 만들어내지 못했다. 석사를 받고 나서부터 2년, 좋은 논문 한편.. 정말 불가능한 일이었을까. 재능도 없고, 노력도 하지 않은 이에게는 결코 주어지지 않는 선물이라는 것 쯤은 알 수 있겠다. 

몇번의 기회가 있었다. 경제학을 포기할 수 있는 기회. 하지만 나는 그 때마다 경제학을 붙잡았다. 이 학문으로 승부를 보겠다는 당찬 결심따윈 없었다. 어떻게 하다보니 여기까지 흘러들어오게 된 것 같다. 나는 학자가 되고 싶었지만, 경제학을 통해 학자가 될 만큼의 재능도 없었고, 그 재능의 부족을 극복할 정도로 피를 토해가며 노력을 하지도 않았다. 게으른 성격과 사태를 냉정하게 보지 못하는 통찰력의 부족이 화를 키웠다. 학문적으로 고립된 지역에 있는 학교에 온 탓도 물론 있었겠지만, 그것은 개인의 노력으로 충분히 극복될 수 있는 부분이었다. 모든 과정이 논리적으로 이해가 된다. 납득이 가는 결과들의 연속이었고 나는 그 과정에서 흘러가는 방향을 바꿀 수 있는 수준의 그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무언가 획기적인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그렇기 때문에, 옳지 않다. 앞으로 이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라는 예상이 오히려 설득력있어 보인다.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하면 더 나쁘지 않은 결과를 피할 수 있을 정도의 머리는 부모님께 잘 물려 받았다. 머리가 나쁜 아이는 아니었다. 문제는 이 머리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한 나의 무능력함이다. 그리고 그 무능력함을 지난 11년동안 어떻게 잘 드러내왔는지는 누구보다 내가 더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억울하지조차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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