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 수 없는 길

오늘 학부 시절 선배 한명을 만났다. 학번으로 보면 1년 위의 선배다. 우리는 함께 학교를 다녔고, 꽤 오랜 기간 같은 공간을 공유했다. 복도에서 지나쳤을 수도 있고 어쩌면 같은 수업을 들었을 수도 있다. 물론 학부 시절에는 서로 알지 못했다. 그 선배는 한국은행 스터디를 하거나 유학을 준비하던 경제학과 학부생들 사이에서는 전설로 통하는 사람이었고, 나는 그 선배가 남겨 놓은 전설적인 일화들을 친구들과 공유하며 수다를 떠는 수준의 사람이었다. 그 선배는 나보다 먼저 유학을 떠났고, 나는 그 선배보다 조금 늦게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준비하던 시기와 유학이 확정된 시점에서 그 선배에게 한번씩 이메일을 보냈고, 형식적이지만 굵직한 조언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선배는 내가 찾아가서 인사를 드렸던 모든 교수님들이 한번씩 거론하는 그런 자랑스러운 제자였고, 나는 추천서를 써 주신 분들조차 제대로 알지 못했던, 그저 그런 수준의, 즉 ‘겨우 유학을 갈만한 수준의’ 학생이었다. 그게 5년전의 일이다.

오늘은 2014년 ASSA/AEA 미팅이 공식적으로 종료되는 날이었고, 더불어 경제학 잡마켓에서 행해지는 사전 인터뷰 일정도 대부분 마무리되는 날이었다. 필라델피아로 오기 전부터 선배를 한번 꼭 보고 싶어 이메일을 주고 받으며 약속 일정을 조율했다. 마침 미팅이 열리는 도시에 있는 학교에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잡마켓 미팅 첫날 모교 교수님들을 뵌 자리에서 이 이야기가 우연히 흘러나와서 어쩌다가 오늘 저녁 식사 자리도 모교 교수님들과 함께 하는 덩치 큰 자리가 되어버렸다. 선배는 생각했던 것처럼 조용했고 침착한 사람이었다. 말을 무척 아꼈으며 대부분의 시간동안 교수님들이 하는 말을 주의깊게 경청했다. 선배와 내가 나눈 대화는 몇마디 되지 않을 정도로 적었다. 서로간에 나눌 수 있는 공통 분모 자체가 적은 탓도 있었을 것이다. 선배와 나는 세부 전공 분야도 달랐고, 무엇보다 서로 처한 위치가 너무 달랐다.

선배의 졸업 논문은 공식적으로 발표가 되기 전부터, 즉 working paper 의 형태로 circulate 되던 시절부터 대부분의 대학원 수업에서 교과서처럼 사용되기 시작했다. 선배가 잡마켓에 나갔을 때에는 아마도 좋은 학교들이 서로 모셔가기 위해 경쟁을 벌였을 것이다. 선배는 그 해 잡마켓에서 최고의 스타였다. 한국인들뿐만 아니라, 당시 잡마켓에 있던 new ph.d 들뿐만 아니라, 전세계의 경제학 석학들 사이에서 오르내리는 이름이 된 것이다. 선배가 진학했던 대학원은 경제학계에서는 -물론 최고 명문이었지만- 일종의 변방으로 취급되는 곳이었고 그래서 하버드나 예일같은 으리으리한 대학원 출신들로부터 알게 모르게 무시를 당했지만, 이제는 선배의 대학원 프로그램을 무시하던 사람들이 서로 그때 자신이 잘못 생각했다며 앞다투어 그의 앞에 머리를 조아린다.

약 5년전 유학을 떠나기 직전에 선배에게 받은 이메일중 인상 깊은 문구가 몇 있다. 그중 하나는 그가 나와 같은 평범한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을 강조하는 문장이었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선배는 자신이 특출나게 머리가 뛰어난 사람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며, 다만 친구들이 축제며 술자리며 놀러 다닐때 도서관에서 경제학 관련 책을 읽은 것이 자신이 한 전부라고 말했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그렇게 차분히 유학을 준비했고, 대학원 이후의 삶은 내가 전해 듣지 못했지만 아마도 비슷한 삶을 살아 왔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그렇게 10여년의 기간동안 꾸준하게 한 분야에 집중한 결과는 세계 경제학계에서 주목하는 젊은 석학의 위치였다. 저녁 식사를 위해 만난 자리에서 그는 학교에 있다가 나왔다고 말했다. 이제 몇달 뒤에 첫번째 아기가 태어나는데도, 심지어 오늘이 일요일이었음에도 그는 저녁까지 학교에서 공부를 하다가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나왔다.

물론 그러한 삶이 더 나은 방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을 수 있다. 다른 자리에서 식사를 제공한 한 기관의 ‘장’도 그 선배의 이름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는데, 그는 직설적으로 “그렇게 사는 것이 과연 행복한가” 라고 내게 반문했다. 물론 그도 한국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경제 기관에서 스스로의 위치를 가지고 끊임없이 연구를 하는 사람이지만, 그는 가족과의 시간이나 종교활동등 경제학 의외에 존재하는 개인적인 삶 역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듯 했다. 즉 경제학에서 최고의 위치에 오르지는 못할 지언정, 일반적이고 평범한 한 인간이 누릴 수 있는 최소한의 삶의 즐거움은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이제 졸업을 앞두고 있다. 2008년 처음 이 미국땅에 도착해서 지금까지 참 많은 일들이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리 게으르게 놀지만은 않은 것 같다. 공부도 열심히 했고 책도 논문도 많이 읽었고 건강을 잃지 않기 위해 음식도 가려 먹었으며 운동도 열심히 했다. 꽤 나쁘지 않은 삶이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오늘 저녁 내 옆자리에 앉아 있는 그 선배의 모습을 보며 왠지 그와 나 사이에 존재하는 간극이 점점 넓어지고 있음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친구들과 술도 마셨고 연애도 많이 했고 그냥 게으르게 침대에서 시간을 낭비하기도 했다. 운동도 많이 했고 스포츠 경기도 많이 봤고 논문을 읽는 것을 등한시하기도 했다. 논문을 수정해야 했는데도 그냥 내버려 두고 쳐다보지 않기도 했다. 물론 열심히 일할 때도 있었다. 집중해서 논문을 쓸 때도 있었고 정말 재미있게 논문을 읽을 때도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좋은 과정이 꾸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 결과 나는 잡마켓에서의 보잘것 없는 위치를 가지게 되었고 어떤 곳이든 나를 불러주는 곳에 가야 겠다고 마음 먹을 수 밖에 없는 입장이 되어 버렸다. 제발 저를 뽑아 주십시오, 열심히 일하겠습니다, 라고 말할 수 밖에 없는, 잡마켓이 즐거움이 아닌 괴로움으로 다가오는 삶을 살게 된 것이다.

내가 공부를 잘했다면, 그래서 정말 좋은 논문을 썼다면, 잡마켓처럼 행복한 순간은 없었을 것이다. 많은 곳에서 나를 찾고, 나의 논문에 대해 듣고 싶어하며, 더 나아가 그 논문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이야기하자면서 돈을 손에 쥐어주며 자신들의 학교로 오라고 부탁하는 상황처럼 행복한 순간이 또 있을까. 잡마켓은 천국일 것이다. 반대로 내가 좋지 않은 논문을 썼고 그래서 시장에서의 반응이 시큰둥하다면, 그처럼 절망스러운 순간도 찾기 힘들 것이다. 지난 5,6년동안 피땀흘려 만들어낸 결과물이 타인에게 인정받지 못한다면, 그래서 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할 길이 사라져 버린다면 도대체 나의 존재 가치는 누가 증명해줄 것인가. 인생을 잘못 살았다고 누군가 비판한다면 그것에 제대로 대꾸를 하지 못할 정도로 참담한 심정을 갖게 될 것이다.

<슬램덩크> 에서 정대만이 능남전에서 되내인 말이 있다. 나는 왜 그토록 헛된 시간을 보냈던가. 시간을 낭비하느라 그의 체력은 많이 떨어져 있었고, 그렇게 떨어진 체력은 단기간에 회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마도 정대만은, 한때 비슷한 수준에서 경쟁했던 이정환같은 선수를 다시는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재능만큼은 비슷했지만 꾸준한 노력의 유무가 정대만과 이정환을 그저 그런 선수 (물론 그는 여전히 참 좋은 선수다) 와 전국에서 주목받는 선수 정도의 차이를 불러왔다. 정대만에게 다시 기회가 있을까?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없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노력하지 않은 나에게 선배와 같은 위치로 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한번 주어질 수 있을까? 그렇게 쉽게 따라잡을 수 있는 차이라면 그 차이를 만들어내기 위해 노력한 자들을 무시하는 신의 의지가 작용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는 정당하지 못하다. 따라잡지 못해야 마땅하다. 차이를 감수해야만 한다. 고등학교 입시에서 한번, 대학 입시에서 한번, 그리도 대학원 입시에서 한번. 총 세번이나 신은 나에게 과오를 덮고 새로 출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그 기회를 발로 걷어차 버린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이다.

나는 그 선배의 옆에서 한없이 작아짐을 느꼈다. 교수님들과 웃으면서 대화하고 오히려 모교의 교수님들에게 진중한 조언을 하는 위치에 올라선 그 선배의 모습이 부럽다고 느껴지진 않았다. 질투도 아니었다. 그런 일방적인 감정과는 다른,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다시는 도달할 수 없는 위치를 더이상 꿈꾸지 말아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쓰디쓴 감정이었다. 이것이 꿈임을 깨닫지 못한채 5년이 넘는 시간동안 달콤한 꿈을 꾸었는데 이제 꿈에서 깨어나 더이상 그 꿈을 다시는 꾸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현실의 몽롱한 상태였던 것이다. 지난 5년동안 혹시라도, 그래도 노력한다면 혹시나, 감히 나 정도의 인간도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달콤한 꿈을 꾸었다. 참 길게도 꾸었다. 그리고 그 꿈이 이번 잡마켓에서 산산히 부서지는 과정을 확인하면서 나는 다시 현실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보잘것 없는 앎의 수준에서 영위할 수 있는 최선의 삶, 최선의 현실 속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이 성큼 다가왔음을 그 선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채 나에게 삶 그 자체로 가르쳐 주었다. 나는 5년전 고고하고 영롱하게 빛나며 순수하게 학문을 탐구할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할 수 있는 기회를 잡을 수 있는 마지막 티켓을 간신히 부여받았다. 그리고 그 종착역에 결코 도달할 수 없음을 5년이 지난 지금 확인했다. 참 좋은 5년이었다. 이제 정말 현실로 돌아갈 때인 것 같다.

5 thoughts on “갈 수 없는 길

  1. 우연히 들린 곳에서 공감과 응원의 마음이 서서 이렇게 댓글을 달아요~^^ 충분히 멋진 분일거라 상상이 되네요. 힘내세요! 정말 잘 되실거예요~!!

  2. 오랜 만에 들렀습니다. 처음 음악 검색하다 알게 되고, 소개하는 음악들이 좋아서 들락날락거리다 보니 본의 아니게 개인적인 이야기들도 보게 되고 아는 사람 같은 착각으로 요즘은 무슨 고민을 하시나 하는 생각으로 이 글을 보고 저도 씁슬한 미소를 짓게 됩니다. 그런 걸까요? 갈 수 없는 길을 꿈꿀 때가 있었고, 시간이 흐른 어느 지점에서 누군가는 그 길에 서 있고, 많은 이들은 멀어진 그 길 위에 서 있는 그를 존경하고 동경하고 자신은 애초에 그러할 수 없었슴을 뒤늦게 깨닫게 되는 걸까요? 오늘 생각 좀 해 봐야겠네요.
    그는 희생을 한 결과를 얻고, 나를 포함한 그저 그렇고 그런 사람들은 희생하지 않은 결과에 놓인 걸까요? 작년만큼 시간이 빨리 흘렀던 적이 없던 거 같아요. 앞으로도 더한 속도로 시간이 흐른다면, 아,, 내 인생이 감당이 안 되는군요. 생각보다 참 초라하게 끝나겠어요. 그리곤, 고작 떠오른 아이디어가 ‘실컷 놀고나 가자’ 이미 선택은 많이 멀어지고, 즐기는 인생 모드로.
    흥과 아취를 저버릴 수 없는 우리 날라리들은 그렇게 코딩되어 있는 것일지도. 어쨌든, 세상은 넓고 나의 호기심은 잠자지 않으니,.. 호기심 채우다 작살나는 것 같기도 합니다. 생각을 하는 게 맞을지 호기심을 하나라도 더 채우는 게 나을지, 나의 일이라 생각하는 것에 관한 것을 붙들고 있을지,.. 나의 시간은 순두부만큼 흐물흐물하고 그닥 알아 주지 않는 나와 대면합니다.

    2월 초의 뉴욕이 견딜 만 할까요? 낮에는 미술관 등에서 죽치고 저녁시간을 실속있게 경험할 만한, 인디그룹 공연이 있는 장소 등 좀 알려주실수 있나요?

    •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가끔씩 들어와서 읽어주셨다니 너무 감사하고 기분이 좋네요. 보잘것 없는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렇게라도 맺어진 것도 인연이니까 ‘아는 사람’ 맞죠 뭐 ㅋㅋ

      가지 못한 길을 그리워하는 것은 부족한 인간들이 갖는 숙명인 것 같습니다.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가야만 하는 길로 억지로 몸을 움직이는 것이 저같은 비루한 인간이 택할 수 있는 유일한 옵션이 아닐까 싶어요. 그럼에도 삶은 지속되어야 하고, 그 비루한 삶도 아름다울 자격이 있습니다. 그러니 그 안에서 어떻게든 행복하게 살아야겠죠. ㅎㅎ

      2월의 뉴욕은 약간 춥겠지만 무척 재미있을 것 같네요. 미술관들만 돌아다녀도 너무 좋고, 나이트 라이프를 즐기실 생각이라면 천국이겠죠. 다만 다리가 너무 아플 수 있으니 스마트폰에 yelp 같은 앱을 준비해 가시면 근처에 있는 근사한 카페에서 쉬시며 뉴요커들의 수다를 훔쳐 듣는 것도 즐거울 것 같아요. 인디 공연은 사실 뉴욕 근처에 너무 많기 때문에 무어라 딱 꼬집어 추천해 드릴 수는 없고, 미리 songkick 이나 jambase 같은 위치 기반 공연 검색 사이트에서 조사를 해가시면 좋을 것 같아요. 매일매일 좋은 공연들이 넘쳐나지만 그만큼 티켓 구입 경쟁도 치열해요. 여행 날짜를 확정하신 후 미리 티켓을 사셔서 뉴욕에 도착하시면 여유로운 공연 관람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부럽네요. 저도 뉴욕에서 공연 못봤는데!

  3. 감사합니다. 아직 미정이니 확정하면 소개하신 사이트를 검색해서 꼭 하나는 봐야하겠네요. 며칠을 물만 먹고서라도..ㅋㅋ 종혁님은 열심히 사시는 분이고 삶에 대해 따뜻한 성찰을 하려고 노력하시는 분이셔서 반드시 아름다운 인생을 살고 있고, 앞으로도 그러실 거예요. 그걸 알아가는 게 우리 인생의 숙제라는 걸 하늘에 계신 분이 증명해 주셨으면 해요. 각자의 삶이 다 아름답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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