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신세 한탄

구직 활동중이다. new econ ph.d 들의 구직활동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이들을 위한 시장이 존재하고, 그 기장에서 노동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난다. 다만 한해에 전세계에서 공급되는 new econ ph.d 들이 대략 천명선으로 일정한 반면 수요는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 조금 더 신축적이고 이렇게 시장 자체가 크지 않은 규모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몇개의 분리된 과정을 거쳐서 시장의 청산이 이루어진다는 정도의 특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특별한 스킬셋을 가지고 있는 노동 공급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잡마켓 페이퍼 하나와 지도 교수의 추천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출신 학부와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같은 부수적인 요소들도 평가하겠지만, 이들을 원하는 전세계 대부분의 학교와 기관들은 이들이 앞으로 어떤 학문적 성과를 올릴 수 있는지 그 가능성만을 철저하게 체크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온라인으로 접수한 논문 한편에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날고 긴다는 학자들은 논문의 초록과 서문, 그리고 참고 문헌만을 읽고도 논문의 수준과 앞으로 이 저자가 얼마나 큰 그릇을 갖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영어로 글을 쓰는 잔재주 정도에서 오는 것일텐데 그조차 논문이 갖는 묵직한 공헌도가 있다면 무시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지난 5년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들이 내 논문을 자세히 읽어주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는 지난 5년을 제대로 살아오지 않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꼼꼼하게 읽어서 내가 들인 공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바란다면 나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애석하게도 전자였다. 이제는 만성화된 게으름과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꽤나 낭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타고난 재능도 없는데 노력까지 남들보다 배로 하지 않으니 눈이 번쩍 뜨이는 성과물이 당연히 나올리 없다. 이 바닥은 요행이 통하지 않고 운이라는 것도 거의 작용하지 않는, 그러니까 책상에 달라 붙은 엉덩이의 무게와 그동안 읽어 내려간 논문의 편수가 거의 솔직하게 자신의 내공으로 반영되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가졌던 각오와 심정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지만, 당시 품고 있었던 미약했던 희망, 그러니까 나의 보잘것 없는 재능이 대학원에서의 피나는 노력으로 보상받아 조금 더 나은 상태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타지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두세 문제를 더 틀려 대학 간판이 바뀌는 것이 억울했다면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주 약간의 추가적인 노력만으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했다. 수능을 준비할 때보다 조금 더 낮아진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올인해야 했다. 한번의 기회를 더 얻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취업을 하게 된다면,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나의 상태를 한단계 끌어 올리기 위한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많이 썩 않은 삶을 감수해야 하는 것.

다행히 보잘것 없는 논문을 제출했음에도 몇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주로 한국에서 왔다. 전세계에서 배출된 수백명의 수재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수십명의 한국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영어로 글쓰는 것에 익숙치 않았을 것이며 그들중 대부분은 나처럼 한국에서 학교를 나와 미국식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수준의 고생을 한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비감에 잠길 뻔 하기도 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서의 첫번째 면접을 통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벽에 부딪혀 봐야만 그곳에 벽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멍청한 사람이다. 아픔을 겪어 봐야 아픔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 30분의 면접 시간동안 나를 어필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적은 수의 면접을 경험했고 그러한 시험의 한 형태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 면접의 성패는 자신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고 나는 현재 스스로에게 전혀 자신감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대충이나마 예상하게끔 해준다. 그 면접을 통과한다고 해도 한번의 플라이아웃을 더 거쳐야 하고, 그렇게 며칠동안 진행되는 심층 면접을 한번 더 통과해야 비로소 돈이라는 것을 스스로 벌면서 나와 내가 꾸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을 얻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갈지, 미국에 남을지의 결정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나의 의지와 실력이 모두 한 방향으로 일정 수준 이상 작용해야 내가 머물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삶의 방향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상상은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해 왔다. 그만큼 한국이 그리웠고, 또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지금보다 더 멀어진다면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완전히 놓아 버릴지는 대학원 이후 내 삶이 펼쳐질 장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가난하고 배고픈 삶을 1년 더 연장하며 미국에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할지, 한국에서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그 순간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지, 사실 아직 마음 속에 확신이 서 있지는 않은 상태다. 미국에 있으면 미국에 있는대로 좋고, 한국으로 간다면 한국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이다. 반대로 미국을 떠나면 아마도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할텐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나라였던 미국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당연히 생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제 한국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고,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완전히 홀로된 주체로서 미국에서 쓸쓸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만족을 주지는 않을 것이고 나는 그 어디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져 왔으니.

한국에서의 삶은 많이 힘들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힘든 사회의 일원이 될테니 나 역시 많이 힘들 것이다. 이제 한국은 나에게 나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혹은 김치와 나물같은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 혹은 나의 부모와 가족이 살고 있는 곳 이상의 의미는 아니게 되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권은 나의 국적이 어디인지를 명시하고 있고, 이런 순간에도 나는 한국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귀한 희생 혹은 봉사 정신 따위는 아니다. 그냥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 나라에게서 받아만 왔다. 부모와 학교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그 나라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다. 군대라는 세금을 치루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책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진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연마한 어떤 특별한 스킬셋을 통해 다시 환원해야 할 가치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환원의 크기는 그동안 내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따라 결정될텐데, 이 부끄러운 수준의 논문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단 말이냐. 부끄럽고 부끄럽다. 고개를 들고 조국으로 돌아갈 염치가 없다.

4 thoughts on “취업 신세 한탄

  1. 취업 한탄치고는 자기 객관화와 세계 인식이 너무 잘돼 있으신 것 아닌가요ㅎㅎ 어떤 길을 가시더라도, 저한텐 둘 다 가치 있어 보이네요. 멀리서 작게나마 응원해봅니다.

    • 응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어진 조건에 맞게 노력하고 또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는 것이 중요한데 부족한 인간인지라 늘 힘드네요 ㅎㅎ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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