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우리 선희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구조의 영화였고, 그 구조 위에 깔려 있는 찌질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들을 치워내야 비로소 음미할 수 있는 어떤 사색의 지점이 반드시 존재했기 때문에 곱씹을 수록 우러져 나오는 매력이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점점 구조와 서사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과 이번에 본 <우리 선희> 모두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여자 주인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후자는 “모두의 소유이기도 한”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서사적으로 극적으로 대비되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를 구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점점 이 서사를 직접적으로 이용한다는 ‘추세’에서 보면 두 영화 어떤 연장선상에 모두 위치하고 있고, 때문에 두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이 조금 더 흥미로운 영화보기의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다. 유학을 가기 위해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아 내야 하고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감정이 남아 있으며 그 두명의 주변을 배회하는 선배와도 선후배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여자 선희는 가히 ‘위기의 여자’라고 할 만 하다. 그녀의 존재는 세명의 남자를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체와 같다는 점에서 사실 선희의 존재를 현존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치환해도 크게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즉 세명의 남자는 모두 선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두명으로부터 선희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같은 장면을 대구처럼 반복하며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홍상수 특유의 화면 구성이 서사 구조와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이 영화는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선희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과 외적인 감정 표현이 세명의 남자에게 전이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그러지는 관계의 충돌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서사 구조를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바로 영화가 ‘인식’ 과 ‘실재’ 사이의 충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선희의 존재를 인간이 아닌 그 무엇으로 치환해도 서사의 진행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건 다시 말하면 세명의 남자가 ‘인식’하고 있는 선희의 존재는 실재하는 선희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뜻이며, 그들의 선희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더 나아가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선희가 진짜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문’을 ‘돌아 나왔’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이건 홍상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테마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문을 돌아 나오는 위기의 여자를 통해 각기 다른 세개의 인식이 한 지점에서 만나면서 어떻게 일그러질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홍상수의 진화라고 이해해야 할지 그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영화도 흥미롭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처럼 머리를 꽝 때리는 영화적 마술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생각하며 읽어내려가야 하는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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