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신세 한탄

구직 활동중이다. new econ ph.d 들의 구직활동이라고 해서 특별한 것은 없다. 이들을 위한 시장이 존재하고, 그 기장에서 노동의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난다. 다만 한해에 전세계에서 공급되는 new econ ph.d 들이 대략 천명선으로 일정한 반면 수요는 경기에 영향을 많이 받아 조금 더 신축적이고 이렇게 시장 자체가 크지 않은 규모이기 때문에 디테일한 몇개의 분리된 과정을 거쳐서 시장의 청산이 이루어진다는 정도의 특징이 있을 뿐이다. 그리고 이 특별한 스킬셋을 가지고 있는 노동 공급자들을 평가하는 기준이 잡마켓 페이퍼 하나와 지도 교수의 추천서로 통일되어 있다는 특징도 있다. 물론 한국에서는 출신 학부와 지금까지 쌓아올린 업적같은 부수적인 요소들도 평가하겠지만, 이들을 원하는 전세계 대부분의 학교와 기관들은 이들이 앞으로 어떤 학문적 성과를 올릴 수 있는지 그 가능성만을 철저하게 체크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은 온라인으로 접수한 논문 한편에 고스란히 집약되어 있는 것이다. 날고 긴다는 학자들은 논문의 초록과 서문, 그리고 참고 문헌만을 읽고도 논문의 수준과 앞으로 이 저자가 얼마나 큰 그릇을 갖게 될지 감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이들에게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작은 차이가 있다면 그것은 영어로 글을 쓰는 잔재주 정도에서 오는 것일텐데 그조차 논문이 갖는 묵직한 공헌도가 있다면 무시될 수 있는 수준일 것이다.

지난 5년간 내가 무엇을 했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들이 내 논문을 자세히 읽어주지 않기를 바란다면 나는 지난 5년을 제대로 살아오지 않은 것이다. 조금이라도 더, 꼼꼼하게 읽어서 내가 들인 공을 제대로 평가해주기를 바란다면 나는 조금 더 나은 삶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애석하게도 전자였다. 이제는 만성화된 게으름과 앞으로 나아가는 것에 대한 두려움으로 나는 꽤나 낭비하는 삶을 살아온 것 같다. 타고난 재능도 없는데 노력까지 남들보다 배로 하지 않으니 눈이 번쩍 뜨이는 성과물이 당연히 나올리 없다. 이 바닥은 요행이 통하지 않고 운이라는 것도 거의 작용하지 않는, 그러니까 책상에 달라 붙은 엉덩이의 무게와 그동안 읽어 내려간 논문의 편수가 거의 솔직하게 자신의 내공으로 반영되는 그런 세상인 것이다. 처음 미국행 비행기를 탈 때 가졌던 각오와 심정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지만, 당시 품고 있었던 미약했던 희망, 그러니까 나의 보잘것 없는 재능이 대학원에서의 피나는 노력으로 보상받아 조금 더 나은 상태로 진화할 수 있을 것이라는 판타지는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는 그만큼 노력을 하지 않았고, 여전히 같은 상태에 머물러 있다. 두세 문제를 더 틀려 대학 간판이 바뀌는 것이 억울했다면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아주 약간의 추가적인 노력만으로 큰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의 세상에 살았다는 것이다. 대학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그보다 더 큰 노력을 해야만 했다. 수능을 준비할 때보다 조금 더 낮아진 가능성에 희망을 걸고 올인해야 했다. 한번의 기회를 더 얻기 위해서는 조금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한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이제 취업을 하게 된다면, 만약 할 수만 있다면, 그 다음에 나의 상태를 한단계 끌어 올리기 위한 기회를 다시 얻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훨씬 더 큰 희생을 감수해야 할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그런 것 같다. 인풋 대비 아웃풋이 많이 썩 않은 삶을 감수해야 하는 것.

다행히 보잘것 없는 논문을 제출했음에도 몇군데에서 연락이 왔다. 주로 한국에서 왔다. 전세계에서 배출된 수백명의 수재들을 상대하는 것보다 수십명의 한국인들을 상대하는 것이 상대적으로 수월했을 것이다. 그들은 나처럼 영어로 글쓰는 것에 익숙치 않았을 것이며 그들중 대부분은 나처럼 한국에서 학교를 나와 미국식 교육 시스템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을 것이다. 비슷한 과정을 거치고 비슷한 수준의 고생을 한 사람들과 경쟁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비감에 잠길 뻔 하기도 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서의 첫번째 면접을 통과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벽에 부딪혀 봐야만 그곳에 벽이 있다는 사실을 아는 멍청한 사람이다. 아픔을 겪어 봐야 아픔을 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 30분의 면접 시간동안 나를 어필하는 다양한 방법들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적은 수의 면접을 경험했고 그러한 시험의 한 형태에 부담을 느끼지는 않지만, 그 면접의 성패는 자신감에 달려 있음을 알고 있고 나는 현재 스스로에게 전혀 자신감이 없는 상태라는 사실이 앞으로 펼쳐질 일들을 대충이나마 예상하게끔 해준다. 그 면접을 통과한다고 해도 한번의 플라이아웃을 더 거쳐야 하고, 그렇게 며칠동안 진행되는 심층 면접을 한번 더 통과해야 비로소 돈이라는 것을 스스로 벌면서 나와 내가 꾸릴 가정을 지킬 수 있는 물질적인 힘을 얻게 된다.

한국으로 돌아갈지, 미국에 남을지의 결정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나의 의지와 실력이 모두 한 방향으로 일정 수준 이상 작용해야 내가 머물 곳을 스스로 결정할 수 있다. 그렇지 못하다면, 나는 주어진 상황에 순응하며 수동적으로 삶의 방향을 따라가야 할 것이다. 한국에서의 삶을 다시 시작한다는 상상은 매일 하루에도 몇번씩 해 왔다. 그만큼 한국이 그리웠고, 또 한국에 있는 사람들과 지금보다 더 멀어진다면 더이상 돌이킬 수 없을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그들을 완전히 놓아 버릴지는 대학원 이후 내 삶이 펼쳐질 장소에 전적으로 의존하고 있는 셈이다. 가난하고 배고픈 삶을 1년 더 연장하며 미국에서의 가능성을 적극적으로 타진할지, 한국에서 불러주는 곳이 있다면 그 순간 미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돌아갈지, 사실 아직 마음 속에 확신이 서 있지는 않은 상태다. 미국에 있으면 미국에 있는대로 좋고, 한국으로 간다면 한국으로 가는 것만으로도 기뻐할 것이다. 반대로 미국을 떠나면 아마도 다시는 미국으로 돌아오지 못할텐데, 생각보다 훨씬 좋은 나라였던 미국에서의 삶을 마감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 당연히 생길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한다면 이제 한국과 나를 연결하는 고리는 가족을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남지 않을 것이고,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완전히 홀로된 주체로서 미국에서 쓸쓸한 삶을 개척해 나가야 하는 것이다. 그 어떤 것도 완벽한 만족을 주지는 않을 것이고 나는 그 어디에서도 외로움을 느끼며 살아갈 것이다. 어쩔 수 없다. 그렇게 만들어져 왔으니.

한국에서의 삶은 많이 힘들 것이다. 한국 사회는 많이 힘들어 보인다. 그리고 나는 그 힘든 사회의 일원이 될테니 나 역시 많이 힘들 것이다. 이제 한국은 나에게 나와 같은 모국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 혹은 김치와 나물같은 맛있는 음식을 파는 곳, 혹은 나의 부모와 가족이 살고 있는 곳 이상의 의미는 아니게 되어 버렸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여권은 나의 국적이 어디인지를 명시하고 있고, 이런 순간에도 나는 한국 사회를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본능적으로 생각하고 있다. 고귀한 희생 혹은 봉사 정신 따위는 아니다. 그냥 내가 받은 만큼 돌려주고 싶을 뿐이다. 나는 그 나라에게서 받아만 왔다. 부모와 학교라는 테두리를 통해서 그 나라는 나에게 너무나 많은 것을 주었다. 군대라는 세금을 치루었지만 그것만으로 내가 책무에서 완전히 자유로워 진 것은 아니다. 내가 한국을 떠나 연마한 어떤 특별한 스킬셋을 통해 다시 환원해야 할 가치가 많이 남아 있다. 그리고 그 환원의 크기는 그동안 내가 어떤 삶을 살아 왔는지에 따라 결정될텐데, 이 부끄러운 수준의 논문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니 어찌 한탄스럽지 않단 말이냐. 부끄럽고 부끄럽다. 고개를 들고 조국으로 돌아갈 염치가 없다.

홍상수: 우리 선희

홍상수의 영화는 항상 구조의 영화였고, 그 구조 위에 깔려 있는 찌질한 인간 군상들의 모습들을 치워내야 비로소 음미할 수 있는 어떤 사색의 지점이 반드시 존재했기 때문에 곱씹을 수록 우러져 나오는 매력이 있는 영화였다. 그런데 최근 작품들을 보면서 그가 점점 구조와 서사 사이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최근에 본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과 이번에 본 <우리 선희> 모두 여자 주인공의 이름을 영화의 제목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동일하지만 전자가 “누구의 소유도 아닌” 여자 주인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면 후자는 “모두의 소유이기도 한” 어떤 여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에서 서사적으로 극적으로 대비되는 지점이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홍상수가 자신의 영화를 구조화시키는 과정에서 점점 이 서사를 직접적으로 이용한다는 ‘추세’에서 보면 두 영화 어떤 연장선상에 모두 위치하고 있고, 때문에 두 영화 사이에 존재하는 공통 분모를 찾아내는 것이 조금 더 흥미로운 영화보기의 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영화의 줄거리는 단순하지만 단순하지만은 않다. 유학을 가기 위해 교수에게 추천서를 받아 내야 하고 헤어진 남자 친구에게 감정이 남아 있으며 그 두명의 주변을 배회하는 선배와도 선후배 이상의 감정을 나누는 여자 선희는 가히 ‘위기의 여자’라고 할 만 하다. 그녀의 존재는 세명의 남자를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체와 같다는 점에서 사실 선희의 존재를 현존하는 인간이 아닌 다른 형이상학적인 가치로 치환해도 크게 어그러지지 않을 것이다. 즉 세명의 남자는 모두 선희가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다른 두명으로부터 선희를 노출시키지 않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다. 같은 장면을 대구처럼 반복하며 그 위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홍상수 특유의 화면 구성이 서사 구조와 맞아 떨어진다는 점에서는 전작들과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으나 이 영화는 거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선희가 가지고 있는 내적 갈등과 외적인 감정 표현이 세명의 남자에게 전이되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어그러지는 관계의 충돌에 조금 더 집중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전 작품들과의 미묘한 차이를 느끼게 하는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서사 구조를 중요하다고 느낀 이유는 바로 영화가 ‘인식’ 과 ‘실재’ 사이의 충돌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앞서 선희의 존재를 인간이 아닌 그 무엇으로 치환해도 서사의 진행에는 아무런 장애가 되지 않는다고 말했는데, 이건 다시 말하면 세명의 남자가 ‘인식’하고 있는 선희의 존재는 실재하는 선희와 완전히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짙게 드리우고 있다는 뜻이며, 그들의 선희에 대한 인식이 지극히 자기 중심적이며 더 나아가 남성중심적이라는 것이다. 선희가 진짜 누구에게 마음을 주었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문’을 ‘돌아 나왔’는지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이건 홍상수 영화가 가지고 있는 영원한 테마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문을 돌아 나오는 위기의 여자를 통해 각기 다른 세개의 인식이 한 지점에서 만나면서 어떻게 일그러질 수 있는지를 세심하게 관찰하고 있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홍상수의 진화라고 이해해야 할지 그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한 것이라고 해석해야 할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이번 영화도 흥미롭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처럼 머리를 꽝 때리는 영화적 마술은 일어나지 않지만 그럭저럭 생각하며 읽어내려가야 하는 영화.

Lance Hammer: Ballast

다르덴 형제가 만약 미국에서 태어나서 남부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었다면 어떤 모습일까. 벨기에의 한 공업 도시의 뒷골목에서 폭력에 시달리고 책임질 수 없이 잉태된 아기로부터 멀어지려고 하는 소년의 일생을 보는 대신 뉴올리언스 어딘가에서 총과 마약에 무방비로 노출된 한 흑인 소년의 삶을 보게 되지는 않았을까. USC 를 졸업하고 할리우드에서 특수효과 담당으로 오랜 기간 일해온 백인 감독 Lance Hammer는 현대 미국 사회를 바라보는 프리즘에 다르덴 형제의 방법론을 적극적으로 도입한 영화 한편을 2008년에 찍었다. 배경 음악도 없고 모든 장면은 자연광만을 이용한 핸드 헬드 카메라로 촬영되었다. 실제로 촬영 지역에 사는 비전문 배우들만으로 촬영이 이루어졌고 카메라는 인물들의 삶 속으로 깊게 개입하려 하지 않고 늘 가까운 거리에서, 하지만 일정 거리 이상을 반드시 유지하며 이들의 삶을 뒤쫓는다. 카메라는 이들의 시선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으며, 이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담담히 비추고 있을 뿐이다. 어쩌면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보다 더 극단적으로 사실주의적인 시각을 택한 이 영화로 그는 선댄스 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했지만 그 이후 Hammer의 필모그래피는 멈추어 있는 상태다.

뉴올리언스 미시시피 삼각지대의 시골 마을에 사는 Lawrence 는 쌍둥히 형이 있었다. 함께 작은 수퍼마켓을 운영하던 그의 형은 그가 보는 앞에서 권총으로 자살을 하고, 로렌스 역시 충격에 빠져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하지만 기적적으로 다시 살아난다. 로렌스의 형은 별거중인 아내와 그녀가 키우는 자식이 있는데, Marlee 는 화장실 변기를 닦으며 그녀의 아들 James 만을 바라보고 사는 가난한 여인이다. 학교 농구 프로그램에 가입하기 위한 $20도 구하지 못해 전전긍긍하는 그녀의 지난한 삶 속에서 James 는 거친 환경에 무방비로 노출된다. 동네 불량배들에게 걸핏하면 돈을 뜯기고 얻어 터지기 일쑤다. 이들 불량배들은 급기야 말리와 제임스가 탄 차를 들이 받고 그들에게 폭력을 행사하기까지 한다. 말리는 그 사고로 생긴 상처로 인해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 로렌스의 집 바로 옆에 있던 죽은 남편의 집으로 이사한다. 문제는 로렌스와 말리가 서로 매우 미워하는 사이라는 사실이다. 말리는 남편의 죽음과 자신에게 드리워진 가난의 짐이 모두 로렌스때문이라고 생각하고, 반대로 로렌스는 형의 비극적인 삶이 말리로부터 시작했다고 믿고 있다. 삶에 대한 의욕을 상실한 로렌스와 가난의 구렁텅이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말리를 다시 끈질긴 삶의 희망 속으로 끌어들이는 존재는 다름아닌 학교등의 제도권 교육에서 완전히 벗어난채 방치되어 있는 제임스이다. 로렌스와 말리는 제임스를 위해 문을 닫았던 가게를 다시 열고, 서툴지만 함께 살아가기 위해 노력한다. 여전히 퍼석퍼석한 마른 낙엽과도 같은 이들의 일상이지만 이들은 함께 저녁을 먹고, 제임스는 더이상 권총으로 상대방을 위협하지 않게 되었다.

영화의 마지막 두 시퀀스는 다르덴 형제의 영화들에서 보아 왔던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미국적인 방식으로 재현하고 있다. 제임스는 자신을 괴롭혔던 그 모든 거친 세상과의 작별을 상징적으로 고한다. 그에게 여전히 교과서는 너무나 어렵고 이해하기 힘든 존재이지만 어쨌든 어머니가 일하러 나간 적막한 집 한가운데서 끈질기에 연필을 잡고 글자를 읽기 위해 노력한다. 결국 그들이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심하고 시동이 잘 걸리지도 않는 고물차를 끌고 집을 나서는 순간, 로렌스의 집을 지나치며 이들 모자는 더이상 외롭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아마도 꽤 오랫동안 가난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제임스는 또다른 도전에 직면하게 될 것이며 로렌스는 간신히 잡은 삶에 대한 희망을 언제 다시 놓을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들은 위태위태하게나마 다시 삶을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 작품은 그동안 미국 영화 산업에서 완전히 무시당해 왔거나 과장되게 소개되어 왔던, 하지만 미국 남부 사회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특정 사회 계층의 삶을 정면으로 응시함으로써 영화가 가진 묵직한 힘을 재확인시켜주고 있다. 삶을 비추는 거울이자 그 이상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도구로서, 그리고 더 나아가 현실 속에서 이루고자 하는 작은 기적을 실현시키는 마술의 장으로서 기능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꽤 오랫동안 잊지 못할 것 같다.

Sky Ferreira: Night Time, My Time

1992년생 싱어송라이터 스카이 페레이라 (Sky Ferreira) 는 유명 뮤지션들의 헤어 스타일리스트였던 어머니를 따라 다니며 어렸을 때부터 팝음악 산업을 놀이터 삼아 성장했다. 9살부터 엘튼 존과 마이클 잭슨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고 15살이 되기 전에 이미 브리트니 스피어스의 “Toxic” 에 참여했으며 스피어스의 프로듀서와 함께 독자적인 작업을 했다고도 하니 음악정 재능과 운때가 적절히 맞아 떨어진 셈이다. 15세때 만든 데모 테잎이 스웨덴 프로듀서 Bloodshy 와 Avant 의 귀를 사로 잡아 본격적인 뮤지션으로서의 커리어를 걷게 되었고, 아직 미성년자 딱지를 떼지 못하던 2010년 발표한 싱글 “Obsession” 이 미국 드라마 “The Vampire Diary” 의 삽입곡으로 쓰이기 시작한 것을 보면 틴에이지 팝스타로서의 재능을 꽃 피울 만반의 준비는 애초에 끝낸 셈이었다.

그녀의 음악은 신스팝에 기반하고 있다. 하지만 그 위에 최근 관심 있어 한다는 인디 록 음악이 적절히 배합되어 있다. 즉 영미식 틴에이지 아이돌 뮤직에 8,90년대 신스팝, 그리고 베스트 코스트나 덤 덤 걸스 류의 펑키한 인디 록음악이 모두 함께 빼곡히 들어 차 있는 셈이다. 그래서 음악은 상당히 흥미롭다. 어떤 구절에서는 백스트릿 보이스나 리한나를 듣는 듯한 느낌을 받는데 강력하게 몰아치는 기타 리프나 쉴틈을 주지 않는 드럼 비트를 듣고 있자니 이건 전형적인 인디 록의 소스구나 싶기도 하다. allmusic.com 에서도 지적하고 있지만 이 앨범에서 가장 놀라운 부분은 앨범에 수록된 모든 곡들이 일관되게 좋다는 점이다.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의 퀄리티를 보여주고 있고 각각의 곡들이 가지고 있는 오리지널리티도 뛰어난 편이다. 방년 21살의 아티스트가 레퍼런스 없이 보여줄 수 있는 독창성에는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스카이 페레이라의 음악 역시 일차원적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하지만 당돌하고 힘있게 휘몰아 치는 그녀의 음악은 현 세대의 펑크 음악이라고 치켜 세워 줄 만한 에너지로 가득 차 있다. 약간은 나이브하고 너무 단순하며 가끔은 빈틈이 보일지언정 최소한 20대 초반의 야심만만한 뮤지션이 가지고 있어야 하는 패기는 잃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최소한 귀가 심심하지는 않은 앨범이다.

Nils Frahm: Spaces


독일 출신 뮤지션 Nils Frahm 의 신보 <Spaces> 를 처음 들었을 때의 느낌은 역속적인 다른 형태의 당혹스러움이었다. 정의를 내릴 수 없는 음악적인 형태때문에 느꼈던 당혹스러움이 첫번째였고, 그 이후 장르를 파괴하거나 특정 장르로의 귀속을 거부하며 “이것은 닐스 프람의 음악일 뿐이다” 라고 선언하는 듯한,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풍모에서 느껴지는 당혹스러움이 두번째 당혹스러움이었다. 차이코프스키를 전공한 학자에게 사사한 뒤 클래식 음악가로 키워진 유년 시절부터 치명적인 엄지 손가락 부상을 극복하고 전자 음악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최근의 행보까지 그의 커리어를 설명할 수 있는 한두개의 단어를 찾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건반을 연주하는 미니멀리스트라고 표현하면 근사치에 가까울 수 있겠으나, 이 표현 역시 깊게 따지고 들어가면 모두 틀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통상적으로 정의되는 미니멀리즘을 극복하기 위해 음악을 만드는 듯 하고, 건반만으로 낼 수 있는 소리들을 통해 건반이 주는 청각적인 느낌이라고 알려진 기존의 관념을 깨뜨리는 시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클래식한 느낌의 “Improvisation For Coughs and a Cell Phone” 과 아방가르드한 전자음악으로 앨범의 시작을 알리는 “An Aborted Beginning”, 실험적인 음악의 극단이라고 할 수 있는 “For-Peter-Toilet Brushes-More”, 그리고 감미로운 뉴에이지 발라드라고 할 수도 있을법한 “Over There, It’s Raining” 이 한 앨범 내에서 공존하고 있다. 대부분의 음악은 노이즈에 가까운 전자음과 클래식 피아노의 조합으로 이루어지며, 어떤 곡에서는 노이즈가 극대화되고 다른 곡에서는 오로지 피아노 한 대만으로 음악을 시작하고 끝내기도 한다.

그의 앨범을 관통하는 테마는 아마도 앨범 제목에 잘 나타나 있듯이 “공간” 에 대한 사유일 것이다. 그는 이 앨범에서 -여러가지 의미로 해석 가능한- 사운드스케이프를 재정의내리고 있다. The XX 의 데뷔 앨범이 한 시대를 대표하는 역사적인 사료로서 기록될 수 있는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공간을 침묵으로 채우는 발상의 전환때문일텐데, Nils Frahm 은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청자로 하여금 침묵의 공간 속으로 들어와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요구하고 있다. “Says” 등의 곡들을 통해 전통적인 형태의 미니멀리즘 (그러한 것이 존재한다면) 을 적극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한편 “Unter-Tristana-Ambre” 등의 피아노만으로 이루어진 곡들에서는 과거와 현재의 미니멀리즘을 자신의 음악 속에서 하나로 통합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다. 최근 미니멀리즘을 표방한 음악들이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시각적인 특성을 뛰어 넘어 시각 그 이상의 느낌을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렇듯 그는 청자에게 계속해서 생각할 것을 요구한다. 자신의 음악을 통해 기존의 상아탑을 부수기를 바라는 것 같기도 하고, 지금까지 경험해 왔던 음악들을 모두 새롭게 정의내리기를 원하는 것 같아 보이기도 한다. 아까도 언급했지만 그의 음악은 정의를 쉽게 내릴 수가 없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음악을 통해 새로운 경험을 했기 때문일 것이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청각적 경험, 그리고 그것이 시대와 장르, 그리고 과거의 음악 감상에서 존재했던 습관들을 모두 극복하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나가는 것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하지만 일차원적이지 않고, 직선적이지만 쉽게 독해되지 않으며, 아름답지만 마냥 착하지도 않은, 대단히 사려깊은 음악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The XX 의 데뷔앨범에서 공간을 침묵으로 채우려는 시도에서 받은 충격은 Nils Frahm 의 2013년작 <Spaces> 에서 공간 안으로 적극적으로 들어가 각각의 청자가 주체적으로 그 공간을 자신만의 침묵으로 채우려는 또다른 차원으로 확대된다.

베를린에 있는 유태인 박물관에는 이스라엘 현대미술가 메나쉐 카디쉬만(Menashe Kadishman)의 작품이 있다. 높은 천장에서 빛이 한줌 들어오는 좁은 공간의 바닥에는 유태인들을 상징하는 철골 구조물들이 깔려 있고, 방문객들은 스스로 그 바닥에 깔린 유태인들의 얼굴을 직접 밟아 소리를 내어 카디쉬만의 작품을 완성하게 된다. 그들이 느꼈던 고통을 작품을 스스로 밟는 행위를 통해서 온전히 전달받는 것이다. 그러한 감상의 주체성이 느껴지는 앨범이다. 공교롭게도 프람 역시 베를린 출신이다.

Mutual Benefit: Love’s Crushing Diamond

Ohio 주 Columbus 출신 싱어송라이터/멀티 인스트루맨탈리스트 Jordan Lee 의 1인 프로젝트인 Mutural Benefit 의 데뷔 EP 는 위로의 노래들로 채워져 있다. 중서부 Ohio 에서 시작해 남쪽의 Texas로, 저 동쪽의 Boston 의 버클리 음대로 (그는 싸이를 알까?), 그리고 다시 미드웨스트로 돌아와 Missouri 까지, 미국의 이곳 저곳을 떠돌아 다니며 완성한 그의 노래 일곱 곡에는 그 과정에서 만나고 사귄 친구들이 겪은 아픔의 기억들이 녹아 들어가 있다. 포크와 익스페리멘탈, 사이키델릭 음악이 고루 녹아들어간 음악적인 배경 위에 그의 감미로운 목소리가 여성 보컬리스트의 목소리와 듣기 좋은 화음을 이루며 청자의 귀로 전달될 때 목넘김이 좋은 커피를 한잔 마시며 삶의 고단함을 순간적으로나마 잊게 만드는 힘을 주는 것이다. 사랑에 좌절하고, 꿈을 좇다가 실패하고, 가족을 잃은 슬픔에서 헤어나오지 못하며, 과거의 아픔을 극복하지 못하는 사람들의 상처를 억지로 봉합하려 하지 않고 은은하지만 단단하게 위로해주고 싶어하는 그의 의지가 음악 전반에 걸쳐 강하게 드러나고 있는 듯 하다.

장르의 구분을 떠나 이러한 방식의 위로의 음악은 과거에도 몇번 들어본 적이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맛탱이가 가기 전의 Mercury Rev 가 발표한 희대의 역작 <Deserter’s Song> 이고, 현재와 같은 위치를 점하기 이전 소박했던 시절의 Grizzly Bear 가 내놓은 <Yellow House>도 떠오른다. 그리고 더 나아간다면 Red House Painters 나 Magnetic Fields 의 음악들, 혹은 Sufjan Stevens 음악의 어떤 한 순간들도 비슷한 심상을 전달해준다고 할 수 있겠다. 지나친 쿨함의 발현으로 인해 진정성을 상실해 버린듯한 요즈음의 Death Cab for Cutie 나 용납 가능한 수준 이상의 현학적인 탐미주의로 인해 메시지의 빛이 바래 버린 듯한 최근의 Animal Collective 의 음악들에서 그리워 했던 어떤  missing link 를 가지고 있는 앨범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핫팩이 아닌 사람의 체온으로 덥혀지는 진짜 따뜻함같은 느낌.

앨범은 일곱곡의 단촐한 구성이지만, 그 짜임새의 단단함은 웬만한 정규 앨범들 이상의 강도를 가지고 있다. 첫곡부터 마지막 곡까지의 이어짐이 자연스러우며 곡과 곡 사이에서 충분한 변화와 일관성을 동시에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 퍽 인상적이다. 각각의 곡들은 확실히 구분되지만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하나의 테마를 믿음직스럽게 따라가고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오리지널리티를 아주 능숙한 방법으로 획득하고 있는 음반이고, 많은 이들의 귀에서 꽤 오랫동안 울려 퍼질 것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 힘찬 데뷔작이다.

장준환: 화이 – 괴물을 삼킨 아이

나 역시 장준환 감독의 새 영화를 오랫동안 기다렸던 사람들중 하나다. 그가 캐릭터를 만들어 나가는 방식이나 서사구조를 직조하는 방식은 눈과 귀를 번쩍 뜨이게 만드는 무언가가 있었고, 그가 만든 탄탄한 세계 안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를 뚜렷한 목소리로 들려주는 천부적인 이야기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이: 괴물을 삼킨 아이> 는 그런 의미에서 그의 앞으로의 작품 활동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새로운 시작점으로 봐도 무방할 듯 하다. 루머로만 떠돌았던 수많은 영화들이 시나리오 단계, 혹은 그 이전의 단계에서 수 없이 좌초되었다는 이야기들만 수년동안 듣다가 겨우 마주한 그의 신작은, 한마디로 말하면 실소를 금할 수 없는 진지한 이야기가 되어 버린 듯 하다. 그는 이 영화를 통해 여전히 캐릭터를 옹골차게 만들어 내는 데에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고 다층적인 서사 구조를 무리 없이 설계할 수 있는 영민한 감독임을 다시 한번 증명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을 전혀 보여주지 못한채 한편의 킬링타임용 영화를 생산해 낸 것 같아 보인다.

영화는 아버지와 아들의 갈등으로 시작해서 성장으로 끝맺는다. 순종적인 아들은 자신의 핏줄에 대한 비밀을 알아버리자 순식간에 평생 함께 살던 대안 가족을 적으로 돌린다. 자신의 하나 남은 핏줄이라고 믿고 있는 인물을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지금까지 자신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은 그의 양아버지들을 하나씩 제거해 나간다. 괴물이 되어야만 더이상 괴물에게 괴롭힘을 당하지 않는다는 마지막 남은 아버지의 말은 영화의 끝부분에서 여전히 인간성을 유지한 채 조금 더 진화한 형태의, 즉 아버지를 극복한 아들의 모습으로 살아 남은 주인공을 모습을 통해 배반된다. 그는 자신의 친아버지를 자신의 손으로 쏘아 죽였고, 그가 자신의 어머니라고 믿고 있던 여자를 지켜주지 못했다. 그의 곁에 남은 사람들은 첫사랑의 두근거림을 선사해준 또래 여자 아이와 그를 평생 돌봐준 양어머니뿐인데, 그는 그녀들을 자신의 곁에 둠으로써 남자들에게 둘러싸인 과거의 대안 가족을 탈피해 자신의 의지로 설계한 또다른 대안 가족을 이끌어 나가는 듯한 모습을 보인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 그리고 아버지를 극복해야지만 인생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다는 주제 의식은 사실 특별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영화는 오히려 이러한 주제 의식이 독창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형식적인 면에서 진부한 클리셰들을 끊임없이 남용한다. 심지어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사람들이 다니는 거리 속으로 파묻혀 들어 가는 – 헤드폰과 첼로 케이스로 그의 순수성을 증명하면서 – 소년의 뒷모습은 과연 이 감독이 얼마나 많은 영화들을 보았으며 그 영화들의 형식에서 제대로 탈출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자아내게 한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이 영화가 보여주는 대부분의 액션씬과 자동차 추격신, 그리고 마지막 저격신은 모두 영화 본 시리즈에서 그대로 가지고 온 듯 한 기시감을 주며, 아버지에게 총구를 겨누고 “왜 저에게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았죠?” 라고 묻는 장면은 따로 레퍼런스를 적어 내기조차 미안할 정도로 수많은 영화들에서 이미 다루어진 구조다. 왜 그랬을까? 대체 왜 장준환은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었길래 오랜만에 내놓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진부한 피떡칠로 도배해 버린 것일까?

정말 긍정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고민을 많이 했는데, 나의 결론은 그가 현재 한국 사회의 모습을 드러내기 위해 이러한 표현 방식을 택했다는 것이다. 아주 착한 사람의 아들로 태어났지만 괴물들에게 납치되어 괴물로 키워진 한 소년이 자신의 뿌리를 알게 되자 괴물들에게서 받은 재능을 이용해 괴물들을 처치하고 환상속에 등장하는 괴물도 극복하며 그 결과 자신의 순수한 뿌리로 회귀한다는 이 영화의 간단한 줄거리는, 괴물같은 시대에 태어나고 자란 한국의 어떤 한 세대에 대한 은유로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물론 나는 네이버를 통해 이 영화에 대한 전문적인 리뷰를 검색하려고 시도했지만 제대로 검색이 되지 않는 개떡같은 네이버 시스템때문에 포기하고 이 영화에 대한 리뷰를 한개도 읽어보지 않았다. 이렇게 순수에 가까운 나의 무지에 기대어 이 영화를 바라보자면, 감독은 처음부터 주인공인 소년에게 자신과 자신의 세대가 살아온 역사를 투영하고 싶었을 것이고, 아직 결말이 제대로 보이지 않는 이 세대의 어두운 현재를 다소나마 황당하고 허황된 영화의 결말을 통해 위로받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영화는 허술하고 매끄럽지 못하다. 하지만 우직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 힘은 아마도 감독의 의지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 의지가 무엇인지 제대로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최소한 이 소년에 대한 연민의 감정을 쉽게 거두지 못하게 만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 이유는 아마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내 이웃들, 혹은 그냥 나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는 본능적인 느낌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군대 훈련병 시절 화장실 청소할 때 나오던 노래들

내가 화장실 청소 변기 담당 (..) 이었다. 변기에 얼굴이 비춰질 정도로 깨끗하게 하라는 엄명에 훈련 기간 6주 내내 어떻게 하면 변기를 깨끗히 닦을 수 있을까만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청소 시간엔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 줬는데 (대단히 인간적인 집단이었다) 당시 음악을 틀 수 있는 권한을 쥐고 있던 분대장이 휴가에서 돌아오며 구워온 CD 한장을 6주 내내 틀었다. 그래서 당시 함께 훈련을 받던 동기들 모두 이 노래들은 절대 다시 듣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내가 조교로 선발되고 훈련을 받던 바로 그 중대로 전입을 하게 됐다. 훈련병 시절 듣던 이 노래들을 이등병 시절까지 이어서 내내 들어야만 했다. 특히 CD 의 1,2번 곡인 싸이의 “낙원” 과 바이브의 “사진을 보다가” 는 지금도 결코 잊혀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