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홍상수 영화를 바라보는 다양한 시각들이 존재하겠지만 나에게 그의 영화는 구조의 영화이고 배열의 영화이다. 그는 편집을 통해 영화를 새로운 차원으로 만드는 사람이고 그 편집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집요한 배열의 규칙을 파악하는 즐거움이 그의 영화를 보는 가장 이유가 될 때가 많다. <북촌 방향> 을 지나 <다른 나라에서> 에서 이자벨 위페르와 잠시 시간을 함께 보낸 그는 이제 서촌에서 제인 버킨을 통해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의 문을 연다. 그는 친절하게도 그의 영화의 주제와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영화속 장소를 힌트로 제공할 때가 많은데, <극장전> 에서 돌아 나오는 회전문의 개념이 대표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 은 서촌에서 시작해 남한산성에서 끝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도서관에 있는 책들 사이에서 마무리되는 기묘한 구성의 영화다. 같은 장소를 미묘하게 비틀어 다시 보여주는 홍상수 특유의 구조화는 여전하지만 돌아나오는 개념이 아니라 “가지 않은 곳을 가보” 는 개념으로서의 남한 산성이 등장한다는 점이 이채롭다.

이 영화는 드러나는 것과 감추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 드러남과 감춤의 과정을 주인공인 해원의 꿈을 통해 현실과 비현실을 뒤섞는 기법을 통해 영화의 형식으로도 잘 드러내고 있다. 해원은 선생님과의 관계가 드러나는 것이 두렵고, 선생님또한 그것이 두렵다. 둘 사이의 대화는 – 홍상수 영화임을 감안하고 본다고 해도 – 어색하게 이어질 때가 많고 분명히 단절적이다. 엄마가 떠나 가뜩이나 더 불안해진 해원이 불륜 관계인 선생님을 비롯해 세명의 “아저씨”를 만나는 과정 또한 구조의 반복만으로 이해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어 보인다. 어쩌면 그녀가 꿈속에서 만나는 아저씨들은 그녀의 불편한 심리와 감추려는 노력 속에서 생겨나는 욕망을 발현시켜 주는 상징물들인지도 모르겠다. 미국 교수를 만나니 “한국이랑은 잘 안맞잖아” 라고 추임새를 넣어주는 일행이라던가 모르는 이에게 술을 선뜻 내어주는 낯선 이가 사실은 그녀와 그녀의 애인의 행동을 모조리 알고 있다던가 하는 설정은 그녀가 분명히 꿈속에 있다는 것을 보증해줌과 동시에 그녀가 꿈에서 깨면서 “꿈에 본 아저씨는 착한 아저씨같았다.” 라고 말하는 이유에 대한 명확한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즉 그녀는 “모두가 다 죽으면 된다”라고 말할 정도로 현재의 상황과 관계에 대해 극도의 두려움에 시달리고 있으며 그녀가 욕망하는 것을 꿈속에서 발견하며 조금 더 또렷한 목소리로 깨어나는 것이다. 영화의 결말은 90여분동안 지루하게 나열될 뿐이던 영화의 산개한 구조들을 순식간에 하나로 묶어주며 명료한 주제의식을 전달하는 마술과 같은 찰나의 몇초를 만들어낸다. 영화의 대부분은 꿈이었으며, 그녀는 여전히 잠들어 있지만 이와 동시에 말하고 있다. 그녀의 목소리는 아마도 며칠 뒤 쓰일 또다른 일기장에 등장하는 한 문장일 수도 있고 정말 그녀가 말한 대로 이미 죽은 상태의 그녀가 자신의 시체를 바라보며 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녀는 꽤나 긴 꿈을 꾸고 나서 도서관에 잠들어 있는 자신의 위치로 돌아 왔다. 꿈속에서 그녀는 남한 산성에서 가보지 않은 길을 갔으며, 헤어진 애인과 다시 만났고, 그 관계를 말하고 싶은 욕망과 관계를 끝내고 싶은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는 그녀를 뚜렷하게 드러냈다. 그녀가 서촌에서 시작할지 학교 수업에 다시 들어갈지는 모를 일이다. 분명한 것은 그녀에겐 다시 돌아 나올 수 있는 문과 그냥 지나쳐 나가버릴 수 있는 문, 두가지의 선택지가 남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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