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os Carax: Holy Moto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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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에 대한 가장 친절하고 정확하면서 매혹적이기까지 한 설명은 씨네 21에 허문영이 기고한 평론일 것이다: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73274

평론은 가끔 예술을 비로소 예술답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는데, 허문영의 글이 그러한 기능을 수행하는 것 같다. 평론 그 자체가 예술이 되려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의 글은 항상 자신의 자리와 시선을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퐁네프의 연인들> 이 한참 인기 있을 당시 나는 너무 어려서 그 영화를 보지 못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보지 못한 채 지내고 있다. 앞으로도 그 영화를 시간을 내어 볼 일은 없을 것 같다. 레오 까락스는 그 영화를 만든 뒤 <폴라 X> 를 만들었고, 그 이후 십년이 넘는 세월동안 영화를 만들지 않다가 이 영화를 내놓았다. 평론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미지에서 서사로 넘어 갔다가 실패를 맛본 뒤 <홀리 모터스>를 통해 다시 이미지로 돌아온 셈이다. 하지만 그가 다시 찾은 이미지는 과거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 보인다. 허문영의 말처럼 시에 더 가까울 수도 있고, 영화 속에서 전통적인 문법의 서사를 파괴하는 서사가 이미지와 함께 공존한다는 점에서 서사와 이미지의 대립 구조를 무너뜨리는 새로운 영역으로의 진화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는 한 인물에서 시작해 그 인물을 지워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우리는 처음 등장한 인물이 아홉개의 각기 다른 인물을 연기하는 것이라고 가정한 채 출발하지만, 영화가 진행되면서 이 오스카라는 인물이 점점 사라지고 우리가 실재라고 믿었던 공간과 시간이 연기라고 추측되었던 그것들과의 경계를 점점 허물어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결국 연기는 실재적인 죽음과 충돌하게 되고, 혹은 죽음 자체를 연기의 영역으로 가져와 버리기도 한다. 무엇이 연기이고 무엇이 실재인지 혼란스러워 하는 순간 고용인과 피고용인의 관계가 뒤바뀌는 결말이 등장하고 그렇게 모든 인물들이 완벽한 역전을 달성한 뒤 떠나간 자리에 재미있는 리무진들끼리의 대화가 등장하면서 영화는 마무리된다. 유머러스하게 덧붙여진 이 마지막 씬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들 사이의 관계 마저도 파괴해 버리고 싶은 감독의 의도가 드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때문에 이 영화는 영화에 대한 영화는 아닌 셈이다. 연극 분장실처럼 꾸며진 리무진 내부와 그 안에서 진행되는 대화 중에 등장하는 카메라에 대한 언급, 그리고 셀린이 쓰게 되는 가면과 연기를 하는 연기자가 하는 연기에 대해 언급하는 장면등은 이 영화가 영화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심증을 갖게 하지만, 사실 이 영화는 기존의 영화가 가지고 있던 서사 구조를 파괴하는 데에 집중하고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영화 그 자체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하는 부분이 굉장히 적은 것이 사실이다. 오히려 이 영화의 주제는 프롤로그 부분에 압축되어 있는 듯 보인다. 레오 까락스 본인이 직접 등장하는 이 SF적인 영화의 시작은 감독이 가지고 있는 심리적인 갈등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관객들은 죽어 있는 듯 잠잠하고, 밖에서는 우주선이 착륙하고 있으며, 침실과 영화관은 문과 복도로 연결되어 있다. 감독이 꿈꾸고 있는 악몽을 그대로 영상화해놓은 듯한 이 오프닝씬은 본편고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본편으로 들어가기 위해 준비하는 관객들에게 꽤 친절한 안내문으로 기능하고 있다. 즉 이 영화는 감독이 지난 십몇년동안 가지고 있던 악몽을 치유하는 과정인 것이고, 관객은 감독이 자신의 페르소나였던 한 배우를 통해 영화로부터 당했던 괴로움에서 탈출하는 과정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동반자인 셈이다. 영화의 아홉가지 에피소드에는 영화의 각종 장르와 연기 기법, 영화적 장치들과 전통적인 영화들에서 다루어 왔던 주제들이 버무려져 있다. 그 안에서 연기를 했던 주인공은 마지막까지 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연기 속에 함몰되어 버린채 하루를 마감한다. 연기의 바깥에서만 머물러 있다고 생각되어졌던 운전기사는 사실 연기자를 고용한 사람이었고, 그녀 역시 가면을 쓴 채 퇴근한다. 중요한 사실은 이들은 모두 우리가 바라보는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며, 이 모든 이야기들 조차 하나의 영화라는 사실이다. 즉 우리는 연기자들을 찍는 카메라가 아닌, 네모난 직사각형의 화면에서 나오는 영상물 밖에 있는 거실과 전등과 발코니 따위를 인식할 때 비로소 이 영화를 영화로서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즉 이 영화는 자막이 올라가고 스탑 버튼을 누른 뒤 화면을 끄고 냉장고로 가서 물을 한잔 따라 마시는 과정까지 영화의 일부로서 잠식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지고 있다. 관객은 감독과 영화가 끝난 뒤에도 계속 소통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올해 가장 위대한 영화라고 부르는 사람들의 심리도 이해가 가는 것이 사실이다.

그리고 나 역시 막간극에 대한 언급을 반드시 해야 할 것 같다. 막간극은 한 대성당에서 드니 라방이 이끄는 연주단이 연주하는 노래 한토막으로 구성되어 있다. 행진은 대단히 에너지가 넘치고 영화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다. 라방을 따르는 연주자 (혹은 배우)들의 표정은 활기가 넘치고 음악은 심장을 때린다. 이 짧은 막간극이 가지는 위력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정말 이 짧은 연주곡에 영화의 주제가 함축되어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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