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ruki Murakami: Samsa in 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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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라카미 하루키가 뉴요커 10월 28일자 버전에 영어로 기재한 단편 소설이다. 카프카의 단편 <변신> 을 모티브로 하고 있는데 내용상 <변신> 의 결말 바로 직후부터 시작한다. 잠자(Samsa) 는 발가벗은 인간의 모습으로 깨어난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들어간 집은 원래 그가 살던 집. 그는 자신의 이름 외에 거의 대부분의 기억을 잊어 버리고, 심지어 “God” 이나 “Fuck” 같은 단어들의 뜻도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의 가족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는다. 그 집에 갑자기 찾아온 키가 아주 작은 여자. 그녀는 잠자를 가두었던 방의 잠금장치를 수리하러 온 사람이다. 단편의 제목에서 직접적으로 드러나듯, 잠자와 그녀가 사랑에 빠질 것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잠자와 그녀가 어떤 상황에 처해 있는지의 여부다. 잠자는 그녀의 키가 왜 그토록 작은지조차 이해하지 못할 정도로 순백의 상태에 가까운 상태로 ‘포멧’된 상태다. 그녀는 그에게 프라하가 어지러운 상태에 빠졌음을 알려주고, 그의 가족이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음을 상기시킨 뒤 자신 역시 무사히 집까지 귀가하기를 기도해 달라고 말한다. 그는 인간으로 돌아왔지만 세상이 이젠 미쳐 돌아가는 셈이다. 그는 그녀에게 꼭 다시 만나고 싶다고 거듭 간청한다. 그런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그녀. 그녀가 무사히 귀가할 수 있다면, 그리고 다시 그를 만나기 위해 그 집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그는 그녀에게 많은 것을 물어볼 것이다.

<변신> 이 한 가정을 떠받드는 근심 많은 사내가 커다란 벌레로 변한 뒤 그의 가족들의 돌변하는 태도에 상처를 받고 서서히 죽어가는 어두운 분위기였다면, <Samsa in Love> 는 인간으로 돌아온 그의 모습에서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침착하고 평화로운 분위기다. 잠자와 수리공 여자가 나누는 대화는 서로의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에서 발생하는 유머와 기존의 <변신> 이 가지고 있던 메타포를 뒤엎는 진지한 시도 사이에서 미묘한 줄타기를 한다. 세상의 욕망에 짖눌려 자기 자신을 파괴하고야 말았던 잠자는 가족과 회사로 상징되던 사회의 주변인들이 전혀 등장하는 배경 속에서 순수함 그 자체로 다시 태어난다. 그는 수리공 여자의 신체적인 특징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며, 어쩌면 현실 속에서 한평생을 ‘벌레’ 로 살아갔을 그녀에게 연민이 아닌 순수한 사랑을 느끼는 그의 모습에서 이제는 뒤바뀐 잠자-외부 세계 의 관계를 드러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벌레의 모습으로 죽어가던 <변신> 의 잠자가 사실 그를 짖누르던 가족과 사회의 병든 모습을 상징하는 거울과 같은 기제로 작용했다면, <Samsa in Love> 에서 잠자가 바라보는 유일한 세상인 여자의 모습은 관계의 역전을 통해 순수해진 잠자가 그 병든 세상에 어떻게 다가가는지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하루키의 소설을 별로 좋아하지 않고, 그의 여성에 대한 시각이나 연애관은 더더욱 좋아하지 않지만, 이 단편은 그럭저럭 읽을만 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뉴요커 사이트에서 무료로 읽을 수 있다.

http://www.newyorker.com/fiction/features/2013/10/28/131028fi_fiction_murakami?currentPage=1

Alfonso Cuaron: Grav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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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서사의 예술이다. 하지만 이와 동시에 영상의 예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두가지 요소를 단순히 포함하고 있는 것만으로는 영화가 성립하지는 않는다. 영화가 도달할 수 있는 경지가 있다. 영화만이 다다를 수 있는 어떤 새로운 세상이 있다. 어떤 이는 영화를 대사로 기억한다. 어떤 이는 특정 장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다른 이는 영화를 하나의 완성된 이야기로 기억한다. 모두가 영화를 받아들이는 법이 다르다. 하지만 영화가 영화로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영화만이 보여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어야 한다. 영화는 단순히 사각의 화면에서 소리와 영상이 함께 만들어 내는 특정 효과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만들어 내는 새로운 세상을 관객이 직접적으로 체험하고 그것을 관객의 내부 세계에서 구체적으로 체화하는 과정에서 영화는 비로소 영화다워지는 것이다.

<Gravity> 의 세계관은 단순하다. 그냥 우주다. 살아 있는 우주 그 자체. 인간이 살 수 없는 환경이라는 우주 그 자체가 세계관이다. 플롯도 아주 단순하다. 한 여성 우주인이 난파된 우주선에서 탈출해 지구로 귀환하는 이야기다. 이 여성이 지구로 무사히 돌아올 수 있는지의 여부가 만들어내는 서스펜스가 약간의 장르적인 쾌감을 안겨 주기도 하지만, 이 영화는 어떤 특정 장르에 기대지 않고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해 낸다. 그리고 영화가 창조한 그 세계 자체가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영화의 주인공은 단 둘이라고 할 수 있다. 산드라 블록이 연기하는 여성 우주인. 그리고 우주. 이 영화는 한 여성이 우주와 사투를 벌이는 이야기이고, 우주를 자신의 품안으로 거두어 들이는 이야기이기도 하며, 우주에서 벗어나고자 노력하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거대하고도 무서운 심해와도 같은 우주에서 한 인간이 자립할 수 있는 방법은 전무하다. 이 우주는 모든 것을 집어 삼키며 모든 것을 파괴하는 존재임과 동시에 모든 것을 아우르고 모든 것 위에 군림하는 전지전능한 존재다. 모든 것을 품고 있으며, 때문에 우리가 잊고 있었던 우리 자신의 이야기들도 이 우주 속 어딘가에 저장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한 여성이 가진 육체 안에서 또다른 세상을 체험한다. 이 여성은 딸을 잃은 슬픔과 믿고 따르던 상관의 손을 스스로 놓아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죄책감에서 자발적으로 생을 포기하려고 하지만, 그녀의 몸속 어딘가에서 꿈틀거리는 생명력을 끝끝내 다시 발견해내고야 만다. 우주복을 벗을때 드러나는 그녀의 육체는 이 사람이 얼마나 고독하게 자신을 단련해 왔으며 그 흔한 미소조차 쉽게 내비치지 않는 외로운 삶을 살아온 이 우주인이 자신의 생에 대한 의지를 그 육체 안에 얼마나 꼭꼭 잘 숨겨 놓았는지 증명하는, 거대한 우주에 극적으로 대비되는 또다른 숨은 주인공이다. 우주의 거친 바람에도 끝끝내 버티고 이겨내어 지구로 향하고야 마는 그녀의 육체는 어느 순간 그녀의 의지 자체를 초월하는 신비한 존재로 비추어진다. 우주는 말이 없고 냉엄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그녀가 끊임없이 방황하고 갈등하는 와중에도 그 우주에 맞서 굳건히 버티어낸다.

하나의 육체와 하나의 우주. 이 둘 사이의 대결은 사실 맞서 싸운다는 좁은 의미로만 해석할 수 없는 묘한 구석이 있다. 라이언 스톤 박사는 우주 속에 몸을 맡겨도 봤다가 다시 밝게 웃으며 지구로 돌아갈 준비를 하기도 하고, 어느 순간 생각 자체가 없는 무아지경의 경지에서 몸을 움직여 생의 활로를 찾아내기도 한다. 어쩌면 스톤 박사는 우주를 이기려고 했다기 보다는 우주 속에 숨어 있던 삶의 진리를 찾아 내어 그 보물과 함께 지구로 돌아가려 한 것일 수도 있다. 그리고 우주는, 그녀를 집어 삼켜 바람과 함께 없애 버리려고 했다기 보다는 그녀를 보듬어 안아 새롭게 태어나게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우주에 비하면 인간은 먼지 하나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보잘 것 없는 인간 하나가 우주를 품에 안을 수도 있다. 인간의 고귀함은 비루한 육체를 이겨내는 강인한 영혼에서부터 시작하고, 이 영화는 역설적으로 한 인간의 육체 안에서부터 새롭게 부활하는 인간의 영혼을 관찰함으로써 그 안에서 우주를 새롭게 조명해 내고 있다.

이 영화가 단순히 우주를 유영하는 듯한 새로운 영화적 체험을 할 수 있기 때문에 그 의미를 인정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영화를 비로소 영화답게 만드는 몇 안되는 마술을 부리고 있고, 그것이 단순한 기술의 향연에 그치지 않고 서사를 담아내는 장치로 기능함으로써 관객들로 하여금 영화를 ‘읽고’ 다시 ‘받아 쓰게’ 만든다.

영화의 음악도 아주 훌륭하다.

산드라 블록의 연기는 화면 속에서 보여지는 것보다 훨씬 많은 것을 담아내고 있다. 즉 그녀는 아마도 이 영화의 촬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영화를 몸으로 만들고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표정과 대사로 연기를 하기도 하지만 미세한 근육의 떨림으로 감정을 전하기도 한다. 우주복을 입고 있든 벗고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