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시마 테츠야: 고백

나카시마 테츠야 감독은 영화는 철저히 영화적인 세계 안에서 영화적인 언어를 통해 구현되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영화속에서 현실을 해체하는 와중에도 영화와 현실이 서로 조응해야 한다는 믿음 역시 굳게 가지고 있는 감독이다. <혐오스러운 마츠코의 일생>에서 어처구니없는 사건들의 비논리적인 연계를 뮤지컬과 극단적인 고속 카메라 기법, 그리고 어이없을 정도로 화려한 컴퓨터 그래픽 효과등의 형식과 결부시켜 그 자체로 인생과 사회의 부조리함을 여과없이 드러낸 것이 그의 철학을 그대로 대변한다고 할 수 있겠다. <고백> 은 미나토 가나에의 원작 소설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이때문인지 전작들에서 감독이 보여준 내러티브상의 미숙함이 많이 줄어든 느낌이다. 원작 혹은 각본의 도움을 받는 스타일리스트가 성취할 수 있는 최대치가 아닌가 싶다. (비슷한 예로 류승완 감독의 <부당거래>가 있다. 그는 자신이 다시 각본을 쓴 <베를린> 으로 완벽한 후퇴를 경험한 바 있다. 때문에 테츠야 감독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지 말라는 법도 없는 것이다)

원작에서 독립적인 단편으로 기능한 “성직자” 부분에 해당하는 “유코의 고백” 은 근래 본 최고의 오프닝 시퀀스로 기억될만 하다. 이 역시 거의 대부분 원작의 힘이지만, 테츠야 특유의 과장된 화면 구성과 극단적인 클로즈업과 대비 효과등으로 인한 상승효과가 존재하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사실상 영화의 주제는 이 오프닝씬에 거의 대부분 담겨 나온다고 할 수 있지만, 그 이후 전개되는 과정 또한 확실하게 매듶지어 줌으로써 크게 늘어지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도 영화가 소설에 비해 가지는 또다른 미덕이 아닐까 싶다. 즉 감독의 인터뷰대로 소설의 뒷부분이 “변명을 하는 느낌” 이라면 영화는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를 현대적으로 변용해 자식-부모간의 일그러진 애정 관계와 이 관계가 타인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의 고통같은 것을 잘 버무린 느낌이다. 유코가 당한 아픔과 소년B, A가 감당해야 하는 아픔이 조응하면서 고통이 되물림되는 듯한 효과를 느낄 수 있다. 감독은 이에 그치지 않고 유코와 소년들이 만들어나가는 이 생지옥과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유일한 인물, 즉 유코의 죽은 애인의 메시지를 끝까지 버리지 않고 엔딩까지 가지고 오는 끈기도 보여준다. 이들이 만들어내는 지옥도를 더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 대비효과를 내기 위한 도구로써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이 교과서적인 메시지가 엔딩에서 한번 더 뒤틀리며  유코가 창조해낸 지옥이 끝없이 영원히 이어질 것이라는 섬뜩함까지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감독은 전작들에서 이미 현대 사회의 병폐를 미시적인 차원에서 발견하고 이를 영화적인 언어로 비판하는 능력이 매우 뛰어남을 꾸준히 증명해 왔다. 이번 영화에서도 원작의 메시지를 심하게 변주하지 않는 범위내에서 감독이 원래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 즉 뒤틀린 모자 관계와 엉망진창이 되어 버린 교육계, 인터넷 시대의 허황된 영웅 주의와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는 삶을 사는 현대인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좌절과 그것의 파괴적인 해소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에이즈나 청소년 처벌법같은 도구들을 빌려와 훨씬 더 본질적인 부분들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영화의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다.

물론 감독 특유의 불필요한 장면의 쓸데없는 삽입이라던가 지나치게 방만하게 이어져서 눈과 머리를 피곤하게 만드는 특수 촬영, 특수 효과들은 이 영화에서도 어김없이 등장한다. 하지만 전작에 비해 그 수위가 매우 양호한 편이며, 때문에 영화의 형식적인 부분에 의해 주제 의식이 함몰당하는 위험 또한 현저하게 줄어드는 것도 사실이다. 이 역시 원작의 힘에 기대고 있다고 아니 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감독은 점점 더 성숙해져 가고 있으며, 일본 영화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어떤 특수한 재미를 잔뜩 가지고 있음은 분명하다. 단순히 ‘영화적’ 인 재미만을 추구한다고 해도 그 목적을 충실히 달성한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반드시 오래 기억되어야 할 것이다.

people is having way better life through SNS, even though you hate it.

나는 아침에 눈을 뜨면 스마트폰부터 집어 든다. 이불 속에서 꼼지락거리며 여자친구에게 문자를 보낸다. iMessage 로 보내는거라 따로 돈이 들지 않는다. 사진도 주고 받고, 여건이 허락되면 Viber를 이용해 역시 공짜로 전화 통화를 하거나 Facetime 을 이용해 화상 통화를 하기도 한다. 아이폰끼리는 페이스타임도 공짜다. 이불 속에 조금 더 누워 있고 싶으면 트위터를 켠다. 자는 동안 삼백명이 넘는 사람들이 각자 자신과 주변의 이야기를 지껄였던 흔적들을 훑어 본다. 요즘은 화장실에 갈 때도 책이나 신문 대신 휴대폰을 들고 간다. 짤막하게 끊어지는 무한도전을 유튜브로 보면 안성맞춤이다. 공부를 하거나 일을 하다가 지겨우면 트위터를 수시로 연다. 졸음이 몰려오는 늦은 오후는 한국에서 사람들이 하나둘 일어나 (나와 마찬가지로) 이불 속에서 트위터를 열어볼 시간이다. 타이밍이 맞으면 여러 사람들과 수다를 떨기도 한다. 주로 신변 잡기다. 아스널 욕을 하다가 르브론 제임스 흉을 보기도 하고 세계 경제에 대해 짐짓 심각한 척 토론을 하기도 한다. 하루, 혹은 이틀에 한번은 페이스북에 들어간다. 페이스북은 오프라인 지인들과 온라인 상에서 교류를 나누는 장소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이 소식을 업데이트하기도 하고 여기 볼더에서 함께 생활하는 대학원 친구들이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Like 버튼을 눌러주면 내가 그들의 소식을 잘 접하고 있다는 시그널이 될 것 같아 가끔 정말 좋아하지 않아도 누를 때가 있다. 인스타그램을 이용해 사진을 올리기도 한다. 여러가지 구차스러운 말을 덧붙이지 않아도 그냥 사진 한장을 올림으로써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무엇을 느끼는지 잘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이폰은 화면도 작아서 그냥 대충 찍어서 필터만 좀 뒤집어 씌우면 꽤 그럴듯해 보이기도 한다. 사진을 잘 못 찍는 사람들도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올릴 때 두려워하지 않는 이유다. 여기서 더 나가면 자신이 어디에 가는지 위치 정보를 공유하는 포스퀘어를 할 수도 있다. 난 포스퀘어는 즐기지 않는 편이다.

어떤 평범한 축구팀의 노감독이 “트위터는 인생의 낭비” 라고 말했다. 소속팀의 평범한 축구선수가 SNS를 통해 팬과 언쟁을 벌인 것을 두고 한 말이었다. 이 말은 후에 SNS 를 하다가 큰 사고를 치는 사람들을 비꼴때마다 “트인낭” 이라는 줄임말로 대차게 쓰이고 있다. 최근에는 NBA 의 한 평범한 팀에 소속된 르브론 제임스라는 선수가 공연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경찰의 호위 속에 역주행을 얼마간 했는데 이것을 비디오로 찍어 인스타그램에 올리고 이를 자랑하듯 트위터에 밝혀서 화제가 된 바 있다. 그리고 많은 농구팬들이 이런 그의 행동을 비난하자 “바이러스나 풍기고 있다” 며 자신을 비난한 사람들을 비하하는 멘트를 추가로 덧붙였다. 이럴때 “트인낭” 이라며 SNS 전체를 깎아 내리는 사람들이 꼭 등장한다. 마치 르브론 제임스가 SNS 를 하지 않았으면 이런 불미스러운 사건이 생기지 않았을 것처럼 생각하는 것 같다. 제임스라는 상식 수준 이하의 인격을 가진 농구 선수가 SNS 를 잘못 사용하면서 벌어진 하나의 큰 해프닝이 어떤 이에게는 SNS 때문에 그의 인격이 공개되는 것처럼 비추어지나보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SNS 라는 매개체가 인류의 삶을 궁극적으로 더 나은 방향으로 이끌어 준다고 믿는다. 물론 인류가 만들어낸 거의 모든 발명품이 그러하듯이 이 매체도 장단점이 분명하다. 르브론 제임스처럼 이 매체의 특성을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여기에 더해 자신의 상식 수준 이하의 판단력을 결부시키면 당연히 사고를 칠 수 밖에 없다. SNS 뿐만이 아닐 것이다. 만약 변희재가 20년전 사람이라면 그는 조선 일보나 일요 신문들의 매개체를 통해 입으로 똥을 싸는 행위를 반복했을 것이다. 만약 그에게 허락된 대중 매체가 없었다면 최소한 술자리에서 그의 지인들이 그의 똥을 받아내야 하는 고통을 부담해야 했을 것이다.

SNS 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해낸 신의 선물이 아니라는 뜻이다. 오히려 인류의 탄생때부터 존재해 왔던 이웃간의 담화를 온라인에 이식시켜 놓은 물리적인 작업 과정에 불과하다. 우리는 컴퓨터가 없던 시절부터 친구들과 다른 친구를 험담하는 행위를 즐겼다. 독재 시절 우리의 아버지들은 술집에 삼삼오오 모여 목소리를 낮추어 가며 박정희를 욕했다. 조선시대에도 못난 임금의 실정을 비꼬는 풍자극은 저잣거리에서 항상 호황이었다. 인간은 권력과 계급을 본능적으로 인식하고 있으며, 낮은 계급은 높은 계급을 비꼬는 행위를 통해 심리적으로 처벌하려고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이 얼마나 위트있게 구사되느냐는 그 다음의 문제다. 그러한 행위는 인류의 탄생때부터 존재해 왔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인터넷이 보급된 현대 사회에서 이러한 행위를 온라인에서 하지 못하리라는 법이 없다. 처음에는 온라인 상의 글과 댓글이라는, 상당히 고전적인 형태의 담화를 그대로 이식하는 수준에 머물렀지만 인간의 창의력과 과학 기술의 발전은 조금 더 재미있는 형태의 담화를 온라인상에서 가능케 만들었다. 모니터를 통해 긴 글을 보는 것이 지켜워질 무렵 트위터라는 초간단형 수다방이 개설되었고 크게 히트를 쳤다. 페이스북은 조금 더 무겁지만 “Like” 라는 아주 편리한 대꾸 방식을 도입함으로써 역시 히트했다.

인터넷 상의 수다방에는 물론 과거와 단절되는 특성이 분명히 존재한다. 기성 언론이 인터넷 시대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고 몰락하기 시작하면서 트위터와 페이스북은 기성 언론이 가지고 있던 권위를 대체하기 시작했다. 그저 시끄럽게 떠들기만 하는 것으로 소일삼던 트위터상의 담화들은 어느새 하나의 “발표문” 으로 거듭나기 시작했다. 사고를 친 유명 연예인들은 트위터를 통해 성명을 발표한다. 급기야 공중파 방송의 메인 뉴스에서 일어난 사고에 대한 해명이 트위터에서 공식적으로 발표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더이상 뉴스를 보지 않고 신문을 읽지 않는다. 대신 인터넷에 들어가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구글링하거나 트위터를 한번 휙 보는 것으로 자신의 주변에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고 있는지 대충 가늠하고 만다. 사실 그정도 노력만으로 대부분의 것들이 충분히 이해 가능한 것이 요즘 세상이기도 하다.

그래서 태어난 돌연변이가 이외수나 공지영같은 사람들이다. 이들은 자신의 팔로워가 마치 자신을 호위하는 군대라고 인식하고 있는 듯 하다. 많은 트위터 팔로워 수를 가지고 있을 수록 이들이 갖는 ‘보이스 파워’ 는 증가하며 때문에 이들이 사회에 일정 정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들의 파워가 진짜 존재하는 것처럼 믿는 어리석은 정치인들과 기타 등등의 사람들이 이런 “파워 트위터리안” 등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실제로 일어나서는 안되는 비극이 어리석은 사람들의 연쇄 충돌로 인해 실제로 일어나고 마는 현상이 연속적으로 발생했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이 SNS 를 통해 누리는 이익만큼 손해도 보면서 살아간다. 그럴 때마다 “트인낭” 이라는 비아냥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유명인들의 SNS 와 일반인들의 SNS 는 어떤 순간 그 층위를 달리 한다. 맨 처음 밝힌 바와 나는 개인적으로 SNS 를 통해 많은 혜택을 누리는 편이다. 애인과 공짜로 연락을 수시로 주고 받을 수 있으며 이는 7,8년 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아마도 나는 스마트폰과 SNS 가 없었다면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지도, 관계를 유지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또한 나는 SNS 를 통해 더 많은 정보를, 혹은 더 높은 수준의 정보를, 내가 임의적으로 지정한 특정 필터를 통해 선별적으로 접할 수 있다. 내가 팔로우하고 있는 경제학자들, 경제 기관들, 혹은 언론매체들은 트위터를 활용해 속보를 전하고 분석을 업데이트하며 자료를 공유한다. 예전같으면 도서관에서 며칠을 기다려야 접할 수 있던 자료들이 언제부턴가 인터넷에 둥둥 떠다녔으나 이를 선별할 수 있는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었다면 이제는 SNS를 통해 내가 정한 기준에 부합하는 자료들이 내 식탁에 자동으로 차려지는 셈이다. 나는 그저 트위터를 조금 들여다 보고 즐겨찾기에 저장해 두면 그만이다. 거의 모든 경제 분석 자료들의 출발점이 트위터에서 나온다. 스포츠에서의 변혁은 실로 획기적이다. NBA 를 필두로 거의 모든 서양 스포츠 스타들은 트위터 계정을 가지고 있으며 스포츠 기자들과 애널리스트 역시 트위터를 활용해 거의 모든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한다. 예전같으면 ESPN 홈페이지에 “찾아” 들어가야 했다면 이젠 이들이 나의 트위터 타임 라인에 모든 정보를 “배달” 해주는 셈이다.

이러한 정보의 “흐름” 의 변화는 간단하게 받아들일 문제가 아니다. 인터넷 세상이 점점 커지면서 정보 공급자들은 더 높은 수준의 경쟁을 감수해야 하고 트위터등의 SNS 를 통해 판촉활동을 해야 살아 남을 수 있다. 정보 공급자가 대부분의 권력을 가지고 있었던 pre-SNS era 에 비해 post-SNS era 는 정보 소비자들에게 권력이 많이 넘어온 상태다. 이걸 인터넷 세상에 조금 더 민주주의적인 색채가 강해졌다고 해석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인터넷 상에서의 민주주의는 계급의 출동과 함께 계급의 결속 또한 강화하는 효과를 가진다. 인터넷이 없던 시절, NBA 를 함께 즐길 수 있는 친구를 만나는 것은 순전히 운에 의존해야 했다. 같은 반에, 혹은 주변에 그런 취미를 가진 친구가 존재해야만 나는 누군가와 농구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부여 받았다. 인터넷이 생기면서 이러한 “거래비용” 은 큰 폭으로 감소되었다. NBA 커뮤니티에 가입해 활동하면 최소한의 공유 욕구를 풀리기 때문이다. SNS 를 이용하면 정보 소비자간의 거리를 더 큰 폭으로 좁힐 수 있다. 단순히 정보를 교환하는 것을 뛰어 넘어 친목을 다질 수도 있고 조금 더 오프라인에서의 수다에 가까운 대화 환경을 조성할 수 있는 것이다. 인터넷과 SNS 는 이러한 방식으로 정보의 소비를 조금 더 경제적인 방향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혹시 아직도 온라인 상에서의 관계가 오프라인 상에서의 그것보다 비교 열위에 있다고 단정적으로 말하는 멍청이는 없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다면 아직까지도 “트인낭” 이라고 중얼거리며 SNS 를 무시하는 사람들을 어찌할 것인가. 이들이 정녕 시대에 뒤떨어진, 보수적인 삶의 행태를 가지고 있는 불쌍한 중생들일까? 꼭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도 인터넷을 한다. 일베에 들어가서 노무현을 비꼬거나 엠팍에 들어가 운영진 물러나라며 투쟁하던가 소드에서 수다를 떨던가 이종에서 동물 대 인간 논쟁을 벌이고 있을 것이다. 현대 사회에서 인터넷을 하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 들여지고 일종의 필수적인 소비재로 인식되는 데에는 채 10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젠 늙은 노인들도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려야 뭔가 숨을 쉬는 기분이 드는 그런 분위기에 살고 있다. 전국민이 싸이월드를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시절 싸이를 하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들이 크게 잘못된 삶을 살았던 것 같지는 않다. 인터넷과 SNS 를 그저 삶의 한 부분, 혹은 부가적인 수단 정도로 인식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크게 틀리지 않은 이유다. 하지만 인터넷을 슬기롭게 활용하는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놀라운 수준의 부를 창출하거나 그에 훨씬 미치지 못하더라도 어느 정도 이상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극소수의 실패자들, 예를 들어 알몸 사진이 유출되었거나 해킹을 당하거나 사기를 치다가 실패해 감방에 들어간 그런 사람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우리는 이러한 개개인의 혜택을 통칭해 welfare 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고, 이러한 개개인의 혜택을 사회적으로 다 합치면 이것을 social welfare 라고 칭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넷이 social welfare 를 증가시켰는가?  maybe yes. 그렇다면 SNS 는? yes as well. 인류는 항상 진화한다. 거시적으로 항상 상승하는 그래프를 그리며 살아온 존재가 인류다. 부분적으로 침몰하는 시기도 있었고 허둥지둥하는 시기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추세선은 항상 상승 곡선이었다. SNS 는 그러한 인류가 세상에 내놓은 최신 발명품이고, 아직까지는 많은 사람들이 이를 통해 혜택을 얻고 있음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나는 한국에서 유독 “트인낭” 이 유행하는 현상을 한국인이 유전적으로 가지고 있는 특정 형질에 기인하기 때문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한국인들은 앞으로 나서는 것을 꺼려 한다. “뒷담화” 가 두렵기 때문이다. 그래서 트위터를 하는 사람들조차 대부분 가명을 사용하고 프로필 사진에 자신의 진짜 사진을 이용하기를 꺼려 한다. 차라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댓글을 하나 다는 것이 훨씬 마음이 편하다. 익명으로, 누군가의 뒤에 숨어서 마음껏 배설 욕구를 풀 수 있기 때문이다. 뒷담화를 두려워 하지만 그 누구보다 가열차게 타인에 대한 뒷담화에 열중하는 것이 또 이 한국인들이다. 이들은 겁이 많지만, 타인의 두려움을 이해할 정도로 마음이 넓지도 않다. 이것은 다분이 유전적인 요인에 기인한다. 통일 신라 이후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에 시달려 왔고 좁은 땅덩어리 안에서 전라도와 경상도로 갈라져 내부적으로 끊임없이 싸워 왔으며 계급 사회 안에서 말 한마디 잘못 하면 목숨이 날라가는 분위기에서 생존을 위해 살아야 했던 조상들이다. 그들의 피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이들이 일제시대와 독재 시대를 거치면서 그 “겁” 을 상당 수준으로 부풀려 왔고 현재 인터넷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젊은이들이 이러한 유전적 형질을 그대로 물려 받은 것이다. 물론 아직 한국 사회의 많은 부분들이 예전의 병폐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 그렇게 겁이 많은 사람들이 결국 SNS 를 통해 얻게될 혜택을 스스로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될까? 욕먹을 짓을 하지 않으면 된다! 너무나 간단한 일이다. 학교에서 배운대로 행동하고 말하며 상식 수준에서 생각하고 말하면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 그리고 만에 하나 SNS상에서 싸움이 일어나거나 문제가 생긴다 해도, 오프라인에서처럼 그냥 풀어 나가면 된다. 때로는 상처가 되고 때로는 도움이 될 것이다. 다른 사람과 싸우는 것이 싫어 사회 활동을 하지 않는 사람이 전체 인구중 몇퍼센트나 될까? 같은 맥락에서 이해하면 유독 한국에서 “트인낭” 이 유행하는 현상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사실 조금 더 깊게 파고들어가면 거짓말을 아주 좋아하는 한국인들의 또다른 국민성을 탓해야 겠지만, 그러면 너무 매국노로 몰릴까봐 이쯤에서 그만 두어야 할 것 같다.

베른하르트 슐링크: 주말

청년 시절을 테러리스트로 보낸 한 사내가 있다. 자신의 사상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사람들을 죽인 그는 체포되어 감옥에서 삶의 절반을 보낸다. 중년의 늙은이가 되어 출소한 그는 여전히 테러리스트다. 여전히 자신의 신념이 옳다고 믿고 있으며 단지 자신이 실패했음을 인정하고 있을 뿐이다. 그는 여전히 자신이 테러리스트라고 믿고 있다. 그런 그의 옥살이를 도운 누이가 막 출소하고 나온 동생을 위해 자리를 마련한다. 그를 아직 기억하고 있는 열한명의 지인들이 교외의 한적한 별장에 모여 그와 테러, 삶과 이데올로기, 그리고 삶의 배신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그곳에는 테러리스트를 배신한 예전의 친구도 있고, 개신교 목사도 있으며, 젊은 시절 한때 함께 혁명을 꿈꾸었으나 곧 현실로 돌아가 성공한 자본가가 된 친구도 있다. 그 자본가 친구의 딸은 이제는 늙고 병들어 자신의 몸 하나 가누기 힘든 실패한 혁명가를 유혹하려 하고, 감옥에 있던 24년동안 완전히 잊고 지냈던 그의 아들도 뒤늦게 찾아와 살인자의 아들로 살아가야 했던 지옥같은 날들을 고백하며 아버지를 저주한다. 아직도 그를 영웅으로 떠받드는 시대 착오적인 젊은 혁명가 지망생과 평생 그를 변호해온 변호사, 그리고 한때 이 몽상가를 짝사랑한 언론인이자 소설가 지망생인 여자까지 합류한 이 집은 그 자체로 하나의 근사한 연극 무대가 된다.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만 사흘이 되지 않는 짧은 시간동안 이들은 서로에게 신랄한 비판을 가하는가 하면 그 안에서 관계를 시작하고, 관계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하며, 관계를 포기하기도 한다.

판사 출신 법학자이자 소설가인 베른하르트 슐링크는 예의 그 건조하고도 간결한 문체를 통해 이 작지만 꽤 무거운 분위기의 소동극을 통해 삶과 이데올로기가 충돌하는 지점을 예민하게 파헤쳐 나간다. 실패한 테러리스트 외르크는 자신의 삶이 끝나가고 있음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자신의 신념이 틀리지 않았다고 생각한다. 뒤늦게 만난 하나뿐인 혈육인 자신을 꼭 닮은 아들은 그러한 자신을 저주하지만, 거기서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부정한다면 그건 자신의 삶을 조금 더 빠르고 쉽게 무너뜨리는 수단이 될 뿐임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그는 자본가 친구에게 몸을 의탁할 정도로 나약해진 육체를 가지고 있지만 완전한 삶의 부정과 끝까지 신념을 지키는 고독한 길 사이에서 끊임없이 갈등한다. 매력적인 젊은 여자가 유혹하는 와중에도 반응할 수 없는 늙고 병든 육체와 20년 넘게 갇혀 살면서 가지게 된 피폐한 정신 상태를 가진 그가 선택할 수 있는 삶의 방향은 그리 밝지도 않고 다양하지도 않을 것이다. 이와 더불어 그를 둘러싼 그의 가족과 친구들, 혹은 적들, 혹은 방관자들의 삶도 이 늙은 테러리스트와 크게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들은 외르크를 비난하거나 감싸면서 스스로의 나약하고 추한 모습을 여과없이 드러낸다. 그들중 그 누구도 외르크의 삶을 대신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투영한 자신의 모습을 통해 스스로의 존재 가치를 발견하기 위해 애쓴다. 적극적으로 타인의 삶 속으로 뛰어 들지 않고 단지 타인을 이용해 자신을 발견하고자 하는 비겁하고 나약한 현대인들의 전형적인 모습인 것이다.

슐링크는 작중 인물인 일제의 글을 액자식 구성으로 활용하면서 테러리스트의 삶을 직접적이고도 구체적으로 다룬다. 일제의 글 속에 등장하는 얀은 미국 911 테러와 직접적인 관련을 가지는 자다. 우리는 911 테러를 지시한 주동자들과 그 테러로 희생된 사람들에게만 집중해 왔지 비행기를 건물에 쳐 박는 과정에서 스스로의 목숨을 희생한 테러리스트의 정신 상태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둔감했던 것이 사실이다. 슐링크는 자신의 법학적 지식을 최대한 활용해 테러리스트의 행동 혹은 마음 상태를 프로파일링하는 듯 기술한다. 이 과정에서 우리가 테러리스트의 마음을 이해하고 그들의 행동에 동조하기를 바라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지 이 서늘한 소설 속에 등장하는 두명의 테러리스트, 즉 외르크와 얀이 어떻게 자신의 이데올로기를 삶 속에 녹여 내었고 그 행동의 비참한 결말을 어떻게 담담하게 받아 들이는지 관찰하기를 바라는 듯 보인다.

독일 적군파의 모습을 다룬 영화 <바더 마인호프>, 나치 시절 백장미파의 모습을 다룬 <소피 숄의 마지막 날들>, 국가의 이데올로기를 거부한 대가로 초라한 삶을 살아가는 한 사람을 다루는 <타인의 삶> 같은 독일 영화들이 떠올랐다. 현대 독일 문학이 내게 주는 인상은 한결같다. 건조하지만 메마르지 않았고, 뜨겁지 않지만 미지근하지도 않으며, 무겁지 않지만 짓누르지도 않는다. 화려하지 않지만 허투루 쓰이는 단어를 최소화 시키며 주제 의식을 향해 직진으로 치고 나가는 힘이 대단한 소설이다.

박종대 옮김, 시공사, 2013년.

Thomas McCarthy: The Visitor

the-visitor토마스 맥카시 감독은 현실에 대한 관찰력과 통찰력이 대단히 뛰어난 사람이다. 여기에 더해 영화를 현실의 어려움을 잊기 위한 몰핀으로 결코 사용하지 않고 오히려 현실을 그 안에서 되살려 내어 삶의 지표로 사용하기 위해 능동적으로 움직이는 사람이다. 농밀하고 대담하게 스토리를 직조해 내는 능력이 뛰어난 타고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일상의 소시민이 만들어내는 작은 균열은 현실에서 결코 원상복구되지 않으며 그에 대한 ‘보속’은 끊임없이 지속될 수 밖에 없다는 메시지를 담담하게 그려낸 [Win Win] 을 만들기 전 맥카시 감독은 조금 더 드라이하고 어두운 이야기로 세상에 대한 불만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방법을 택했다. 이야기는 조금 더 투박하고 메시지는 조금 더 강경하지만 그가 가지고 있는 기본적인 재능은 여전히 빛을 발한다.

[The Visitor]는 피아니스트인 아내와 사별하고 난 뒤 무미건조한 삶을 살아가는 한 경제학과 교수에 대한 이야기다. 코네티컷에 거주하는 그는 아내를 기억하기 위해 피아노를 배우지만 재능이 영 없어 보이고, 20년째 같은 과목을 가르치며 쓰지도 않는 책을 쓴다는 핑계로 뉴욕에서 열리는 컨퍼런스를 가지 않으려고 한다. 사실 컨퍼런스에 발표하는 논문도 자신이 쓴 것이 아니라 그냥 공동 저자로 이름만 올려 놓았기 때문에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상황이다. 동료 교수 (아마도 학장..)에 등떠밀려 억지로 뉴욕의 아파트에 도착한 그는 그곳에서 불법으로 거주하고 있던 젊은 부부를 만난다. 시리아에서 온 테렉과 세네갈 출신의 자이납은 불법 거주자일뿐만 아니라 불법이민자이기도 한 가진 것 없는 부부다. 갈 곳이 없는 그들과 기묘한 동거를 시작한 늙은 교수 월터는 테렉에게 젬베를 배우기 시작한다. 자이납과는 서서히 마음을 열어가고 테렉과 격의없는 친구가 되어 가는 이 모든 과정이 영화의 초반 30분에 보여지는데 여기서 나는 무언가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화면은 불안정하게 흔들리며 테렉이 연주하는 음악은 마냥 즐겁지만은 않아 보인다. 월터의 사소한 실수로 인해 테렉이 구속되고 추방될 위기에 몰리는 상황이 주어지는 것으로 사실상 영화의 네러티브는 모두 주어진 셈이다. 영화의 나머지 절반은 테렉의 어머니가 뉴욕으로 온 뒤 월터와 함께 나누는 시간들, 그리고 그 안에서 보여지는 미묘하고 섬세한 공기의 떨림을 전달하는 과정이다. 관객은 테렉이 결국 추방될 것임을 이미 알고 있다. 월터는 이미 영화 초반에 더이상 차갑고 무미건조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확실히 보여주었다. 이야기는 이미 끝을 정해 놓았지만, 결말로 향하는 과정까지 피상적으로 접근하지는 않는다. 월터와 테렉의 어머니인 무나가 나누는 감정을 딱히 무엇이라고 정의내릴 이유도 없고, 이들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함께 보내는 밤에 큰 의미를 부여할 것도 없으며, 월터가 분노를 쏟아내는 장면에 대한 상투성을 굳이 지적할 필요도 없다. 중요한 것은 월터라는 사람이 젬베를 들쳐메고 뉴욕의 지하철역 안으로 들어가는 그 순간 영화가 선사할 수 있는 작은 기적, 혹은 마법이 성취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이다. 그는 자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서 늘 바쁘게 무언가를 하는 척을 하면서 살았다고 무나에게 고백했고, 그 진실된 고백을 무나가 성실히 들어줌으로써 월터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부여받았다. 월터는 미국 주류 사회에서 성공한 중년의 백인 남성이지만 피아노를 팔고 젬베를 잡는 모습에서 상징되는 바와 같이, 혹은 뉴욕의 지저분한 지하철역 안으로 걸어 ‘내려가는’ 모습에서 보여지듯이 스스로 낮은 곳에 위치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라서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그는 테렉을 지켜주지 못했고 무나마져 떠나 보내야만 했다. 무나의 말대로 소시민인 월터가 미국의 법을 상대로 더이상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테렉과 무나의 영혼만큼은 지켜주고 싶었고, 그렇게 하는 쪽을 택했다. 이것은 대단히 큰 용기이며, 순수한 사랑의 결정체인 것이다.

제목인 [The Visitor]가 상징하는 것은 뉴욕을 방문한 월터일 수도 있고, 테렉의 말처럼 “미시건에 있어야만 했던” 무나일 수도 있고, 월터의 뉴욕 아파트를 무단 점거(?)해야만 했던 테렉과 자이납일 수도 있으며, 불법 이민자들에 대한 거친 추방 제도를 가지고 있는 미국이라는 사회에 불안한 마음과 함께 숨죽여 살아야 하는 모든 불법 이민자들일 수도 있다. 매달 빠듯한 월급으로 저축은 생각도 하지 못하고 살아가는 나같은 외국인 대학원생의 신세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대학원을 졸업하면 월터처럼 (그리고 실제로 코네티컷에 있는 한 대학에 조교수로 취직한 나의 동기 스캇처럼) 성공한 교수의 삶을 살 수도 있고, 테렉처럼 만기가 되어 그 존재 이유를 찾을 수 없는 비자가 찍힌 여권을 들고 어디선가 하루 하루의 생계를 잇기 위해 살아갈 수도 있다. 월터에게도 감정이 많이 이입되었지만 테렉과 무나에게도 감정이 많이 이입된 이유다. 내가 현재의 여자친구를 만나지 못했다면, 아마도 영화 초반 월터의 건조한 삶을 그대로 반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음악을 좋아하고 집도 잘 꾸며 놓았지만 속을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친구 한두명이 너무 고팠던 시절을 실제로 보내기도 했다. 뉴욕으로 컨퍼런스하러 가서 수많은 군중들 속에서 혼자 점심을 먹고 길거리 음악가들이 연주하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다가 다음 컨퍼런스 스케쥴을 놓쳤던 적도 있다. 비단 이 영화에 가슴을 적셨던 사람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미국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이 영화 어딘가에서 자신의 위치를 찾았을 것이다. 무나가 떠나는 공항에 공허히 걸려 있던 커다란 미국 성조기에 먹먹한 마음을 가졌던 사람도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영화의 구조는 투박하고 메시지는 노골적이지만, 영화의 한 순간 한 순간이 지나치게 아름다워 숨이 턱 막힌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자신있게 이야기할 수 있다. [Yi Yi]나 [The Beginners] 에서 느꼈던 공백 속에서의 충만함을 이 영화에서도 느꼈다.

연예인의 군대, 도박, 그리고 연애와 결혼 문제.

남자 연예인이 한번에 ‘훅’ 가는 케이스는 크게 도박과 군대, 마약, 그리고 돈과 관련된 문제로 나뉠 수 있다. 이중 탈세나 투기등 전형적인 금융 범죄를 제외한 군대 회피와 도박의 경우 그들이 공개적으로 ‘처벌’ 당하는 과정에서 실제 법이 가할 수 있는 범위가 공공연히 무시되는 상황을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즉 비의 재입대 논란에서 볼 수 있듯이 범을 상정하는 국회의원들이나 실제 연예인 출신 병사들을 관리하는 국방부등의 주체들은 대중들의 ‘분노’ 나 ‘여론’ 과 같은 대단히 형상화하기 힘든 어떤 근원적인 힘에 의해 타의적으로 움직일 때가 대부분이다. 국회의원이 머리가 나빠서 그런 아이디어를 떠올린 것이 아니라 그의 등을 떠미는 어떤 보이지 않는 거대한 집단적인 감정이 존재한다는 이야기다. 신정환의 도박 문제도 마찬가지다. 그가 까먹은 돈이 누구의 주머니에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가 대중들을 기만하고 거짓말을 했고, 그 과정에서 도박이라는 “나쁜” 짓을 상습적으로 저질렀기 때문에 당연히 방송에 다시 나올 수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것이다.

여자 연예인들의 경우 아이유의 ‘병문안 사진’ 논란을 떠올리면 본질적으로 거의 같은 선상에서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즉 아이유가 어떤 반라 차림의 남자 연예인과 다정한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고 해서 그것이 그녀의 사생활에 대해 그녀와 상관없는 대중 모두가 각각의 판단을 내려야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아이유와 같은 아이돌 여자 연예인을 바라보는 일반 대중의 심리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아이유에게 어떤 ‘배신감’과 비슷한 감정을 느낀 것이다. 그래서 더이상 아이유의 삼촌팬으로서 기능하고 싶어하지 않는 어떤 심리가 남자 성인들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연예를 공개한, 혹은 결혼을 한 여자 연예인들이 작품속에서 더이상 미혼의 여성 캐릭터를 연기할 수 없는 것도 마찬가지 맥락에서 이해 가능하다. 한국의 대중들에게는 브라운관에 나오는 연예인들을 실제 그들의 모습과 동일시하려는 경향이 무척 강하며, 또한 그들의 꾸며진 모습을 실제 생활로 억지로 끌고 나옴으로써 자신들과 가까운 거리에 있다고 착각하고 싶은 심리도 유독 강한 편이다.

왜 그럴까. 왜 한국의 대중들은 연예인들에게 ‘공인’이라는 허구의 개념을 뒤집어 씌어서 어떤 도덕적인 의무를 강제하려고 애쓰는 것일까. 첫째로 ‘교육’에 대한 강한 집착을 들 수 있다. 이들에게 미성년자는 보호해야 하는 존재들이며 어른들의 명령을 무조건 따라야 하는 수동적인 존재들이다. 이런 미약한 존재들에게 노출되어 있는 대중 매체를 잠식하고 있는 연예인들의 행동거지가 미성숙한 미성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래서 연예인들에게 ‘모범’ 을 보여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둘째, 그냥 괘씸해서 더 혼내려는 심리다. 어짜피 연예인과 일반인들과의 삶은 철저히 격리되어 있다. 평생 같은 동네에서 산다고 해도 말 한마디 제대로 건넬 수 없는 존재들이다. 하지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사회적, 물리적인 특권을 어떤 식으로든 빼앗아서 자신들이 디디고 서 있는 구질구질한 현실로 끌어 내리고 싶은 심리가 기저에 흐르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한국 헌법에 정의되어 있지 않은 징벌적 벌금이나 선고를 일반 대중들이 대신 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셋째, 여성 연예인에 특화되어 이야기하자면, 여자 연예인들은 대중들에게 판타지를 팔아 먹고 살아야만 하는 존재로 각인되어 있다. 결혼을 해서 ‘아줌마’가 되면 여성이 가진 성적 매력은 당연히 상실한다고 인식되는 것이다. 드라마에 나오는 아줌마 캐릭터를 연기하는 중년의 여성 연기자들이 희생하는 대가는 생각보다 크다. 만약 중년의 여성 캐릭터가 섹시하다면, 그 캐릭터는 반드시 젊은 남자와 바람을 피우거나 가정을 파탄내는 존재로 그려질 것이다. 한국 드라마가 실제 현실을 반영하는 거울이라면 한국의 여성들이 가지는 사회적 지위는 아직도 너무나 미약하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열심히 자신을 꾸며서 ‘잘 팔리는’ 것을 꿈꿀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진취적이며 젊고 이쁜 여성 캐릭터가 등장하면 ‘기가 세다’ 는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잘 팔리지 않는 것이다.

성현아라는 연예인이 한때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그녀는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처벌을 받았고, 그 이후 소위 말하는 ‘벗는’ 영화에 연속으로 출연하며 대단히 왕성한 활동을 벌이다가 어느 순간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사라졌다. 그녀에게 어떤 속사정이 있었는지 잘 알지 못하지만, 그녀가 택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행동은 어떤 특정 인물 앞에서만 벗거나, 아니면 대중들 앞에서 벗는 것 뿐이었을 것이다. ‘여배우’ 라는 허울 좋은 신기루 앞에서 수많은 여성들이 철저하게 소비되고 사라져 갔다.

대학교때 서강 헤럴드라는 영자 신문사를 아주 잠깐 했었는데 당시 수습기자 세미나에서 ‘마약을 사회가 금지하는 것이 합당한가?’를 두고 토론을 벌인 적이 있었다. 나는 사회를 조직하고 운영하는 입장에서 마약을 하는 사람은 생산능력을 상실한 구성원이므로 사회 총 생산성을 향상시키기 위해 마약을 금지하는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물론 모두에게 거부당했다. 세미나를 주도한 선배는 속으로 이미 마약을 금지하는 법안이 옳지 못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개인의 선택을 왜 사회가 강요하냐는 것이다. 그녀는 마약이 전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건강을 스스로 해칠 수 있는 자유 정도는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학교 2학년다운 생각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마약을 한 연예인에 대한 처벌이 일반인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는 사실 자체도 사실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공인’이기 때문이란다. 공인이 마약을 하면 왜 더 강한 처벌을 받아야 하는가. 아마도 ‘사회 지도층’ 이 그렇게 판단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이 사회를 계도해야 한다는 의무감 비슷한 것을 가지고 있을 것이고, 대중 매체에 쉽게 노출되는 연예인들이 그들이 생각하기에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면 헛기침 두어번 정도 하며 그러면 안되지, 하며 훈계를 해야 한다는 믿음 정도를 가지고 있을 것이다.

연예인들은 가공된 이미지를 통해 판타지를 만들고 그 판타지를 팔아 장사를 하는 장사꾼들이다. 대중들이 충분히 현명하다면, 마치 프로레슬링 게임처럼, 연예인의 이미지 생산 과정과 그것을 소비하는 자신들 사이에 어떤 ‘기믹’ 이 존재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일종의 게임인 셈이다. 그 달콤한 게임의 댓가로 시간을 소비하고 약간의 돈을 소비할 뿐이다. 만약 연예인들이 어떤 범법 행위를 저질렀다면 그에 대한 합당한 법적인 절차를 밟는지 확인해볼 정도면 된다. 법적으로 하자가 없다면 그 연예인이 다시 만들어내는 이미지를 자신이 소비할지 여부만을 판단하면 된다. 철저히 개인적인 과정인 셈이다. 다 함께 모여 누구는 재입대 해라, 누구는 방송에 다시는 나오면 안된다, 누구의 생명은 끝났다, 라고 떠드는 행위가 참 소모적으로 느껴진다. 심지어 그러한 개인적인 판단 과정 역시 상당히 유치해보인다는 문제가 있다. 아이유, 비, 신정환, 성현아 등등의 연예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형벌의 기준이 대단히 감정적이고 또한 생각보다 훨씬 더 저급한 기준에서 나온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냥 단순히 그들이 가지고 있는 높은 계급에 대한 질투이던지, 사실 자신에게 속해 있지도 않은 것을 빼앗긴 듯한 착각에서 비롯된 유아적인 분노라던지, 악의적인 리플 한두개로 그들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줄 수 있다고 믿는 그릇된 영웅 심리라던지, 그냥 단지 타인을 괴롭히면서 느끼는 변태적인 쾌락이라던지, 뭐 이런 감정들에 기인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아니면 대중 매체에 너무 깊숙히 빠져 들어가서 현실과 가상을 구분하지 못하는 심각한 수준의 정신병을 앓고 있거나.

연예인들에 대한 시각을 조금 더 명확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기업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에게는 그 어떤 도덕적인 책무도 없다. 그건 사실 우리 누구에게나 없는 의무다. 도덕이라는 것은, 개인의 인격적인 됨됨이에 따라 스스로 지우는 짐이지 타인에 의해 강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자신의 그릇을 남이 판단해 주기를 바라는 것처럼 수동적인 자세도 없을 것이다. 법적인 의무는 법으로 규정된 카테고리 안에서만 논의되어야 한다. 법을 어긴 이들을 실제적으로 구속하고 처벌하는 것은 대다수 국민의 분노와 같은 형상화할 수 없는 에너지가 아니라 국가기관과 같은 실제적인 주체들이다. 만약 연예인들의 불법 행위에 대한 처벌이 미흡하다고 생각하면 그 과정을 제대로 집행하지 못한 관계 당국을 비판해야 한다. 시스템은 그런 식으로 발전하는 것이다. 국위를 선양했다고 해서 월드컵에서 선전한 축구 선수들에게 병역 혜택을 주는 것도 웃기고, (도대체 ‘국위’ 가 무엇인지 명확히 설명하는 사람을 아직 단 한명도 만나보지 못했다) 존재 하지 않는 민족이나 국격, 공인 등의 개념을 떠벌리면서 그들에게 자신들은 잘 하지도 않는 엄격한 삶의 잣대를 들이미는 것도 우습다. 자기 한 몸부터 먼저 잘 챙기고 볼 일이다. 연예인은 옛날로 치면 광대다. 저잣거리 한쪽편에 판을 깔고 높은 분들을 조롱하거나 우리네 삶의 해학적인 부분을 과장해서 보여줌으로써 약간의 돈을 받는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우리가 요구할 수 있는 것은 현실의 시름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는 판타지다. 그 판타지 안에서 잠시 살다가 나오면 그걸로 끝인 것이다. 그들을 현실로 끌고 나온다고 해서 우리의 비루한 삶이 달라지는 것은 아니다.

Disclosure: Settle

disclosure-settle-artwork-4.16
영국 Surrey 지방 출신의 듀오 Disclosure 의 [Settle] 은 그 정체성이 Hot Chip 이나 Basement Jaxx, 혹은 (심지어) Burial 의 세례에서 나왔음을 당당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그 위에 이쁘장한 보컬과 힙하고 짝짝 달라붙는 댄스 리듬을 끼얹어 아름다운 데뷔 앨범 한장이 완성되었다. 1991년생 형제 Howard and Guy Lawrence 는 약관 만 스물둘이라는 나이에 어울리는 젊은 감각과 나이에 어울리지 노련한 믹스 스킬을 동시에 보여준다. 제시 웨어의 믹스에 참여하며 이 바닥에서의 커리어를 시작했는데, 다년간의 디제잉 경력이 말해주듯 이들이 만들어내는 음악들의 만듦새는 굉장히 세련되고 견고하다. 여러 게스트 보컬들의 특색을 잘 살리면서도 통통 취는 플로어용 댄스 음악을 만들어 냈는데 완성도가 뛰어나다 보니 감상용으로도 전혀 손색이 없다. 칠아웃부터 드럼앤 베이스, 덥스텝까지 현재 클럽에서 좀 논다 싶은 친구들이 끼고 사는 장르들을 전부 아우르고 있다. 영국에서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Latch” 뿐만 아니라 앨범에 수록된 꽤 많은 곡들이 랜덤하게 싱글 커트되어도 많은 사랑을 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팝적인 감각 또한 괜찮은 편이다. “Latch” 의 뮤직비디오는 이들 음악이 가지는 정체성을 잘 드러내고 있는 재미있는 작품이다.

Jean-Pierre and Luc Dardenne: The Kid with a Bike

kid

[프로메제] 에서 비윤리적인 아버지를 보며 갈등을 거듭하던 소년은 더 자라 [더 차일드] 에서 자신의 아기를 버리려는 시도를 하다가 참회의 눈물을 흘린 어린 아버지가 되고, [자전거를 탄 소년]에서 결국 새로운 삶을 시작하기 위해 자전거를 탈 정도로 성장한 자신의 아들을 포기하고 만다. 물론 이 세 영화는 내용이 이어지지 않으며 연작도 아니다. 하지만 다르덴 형제가 사랑하는 벨기에 배우 제레미 레니에가 연기하는 각기 다른 세 캐릭터는 모두 하나의 인물의 고통스러운 성장기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이 남자는 거친 환경에 노출된 채 어린 시절을 보냈고 자신 역시 거친 환경의 일부가 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의 피를 물려 받은 새로운 소년, 시릴에게 허락된 유일한 재산은 낡은 자전거 한대 뿐이다.

이 영화는 굉장히 단순하다. 다르덴 형제의 전작들과 같이 그 어떤 화려한 카메라 무빙도 없으며 그 흔한 배경 음악 역시 거의 쓰이지 않는다. (이 형제의 영화에서 음악이 나온 것은 아마도 최초같은데, 나는 이 음악이 연극의 장과 장 사이를 구분 짓는 두터운 막의 오르내림이라고 받아 들였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배경 음악은 아닌 셈이다) 이들의 카메라는 늘 한대, 주인공의 뒷통수를 쫓아가며 그들의 거친 숨소리를 그저 담아낼 뿐이다. 시릴은 아버지를 갈구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거부한다. 마음 둘 곳이 없는 이 가여운 소년에게 법적 보호자인 사만다의 존재는 완전치 않아 보인다. 갈등하고 방황화는 와중에 죄를 짓게 된다. 거친 환경에 노출된 어린아이 -혹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을 가진 성인- 가 저지르게 되는 미숙한 잘못과 그에 대한 속죄는 늘 다르덴 형제의 주요 테마였다. 시릴 역시 죄에 대한 보속을 충분히 받는다. 그리고 그 죗값이 치루어지는 순간 영화는 마술처럼 기적을 선보인다. 아마도 최근 몇년간 본 모든 영화들을 통틀어 최고의 엔딩씬이라고 할 수 있는 이 마지막 씬은 평생 삶과 영화를 고민해온 거장이 우리에게 선물하는 은혜로운 가르침이다. 영화는 기적이 될 수 있으며, 우리가 사는 세상은 영화가 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영화의 구조는 아주 단순하다. 소년은 뛰거나, 자전거를 타거나, 차를 (얻어) 탄다. 이 소년이 뛴다는 것은 그의 갈등과 갈망을 상징한다. 그는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유일한 물건인 자전거에 집착한다. 자전거를 훔친 다른 소년을 쫓아가거나 사만다로 상징되는 가족에서 벗어나려고 애쓸때 그는 뛴다. 차를 얻어 탄다는 것은 소년이 성인의 세계로 다가가는 과정에 대한 어려움과 두려움을 상징한다. 사만다의 차 안에서 그는 늘 불안해 하고 반항하며 고통스럽게 슬퍼한다. 죄를 짓는 순간에도 그는 차를 얻어 타는데 그의 얼굴에는 거친 세상에 치인 어른의 피곤함이 언뜻 느껴진다. 자전거는 시릴에게 완전히 얻고자 하는 가족의 사랑으로 기능하는 것 같다. 그는 아버지의 부재를 고통스럽게 받아 들이지만 자전거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영화의 엔딩씬이 그와 자전거 사이의 관계에 대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에게 자전거는 살아가야 할 이유이며 목적이다. 그 자전거를 이용해 차코일을 실어 날라야만 하는 것이다. 피를 흘리면서도, 뇌진탕에 우려되는 상황에서도 이 소년은 차코일을 사만다에게 가져다 주기 위해 자전거를 운전한다. 사만다 역시 그에게 자전거와 같은 존재일 것이다. 처음엔 아니었겠지만 아마도 이제는 그럴 것이다. 처음 아버지를 찾아 갔을때 벽 위로 소년을 밀어 올린건 사만다였다. 아버지가 떠나고 비어버린 방을 혼자 애타고 노크하던 소년은 이제 사만다가 함께 옆에서 노크해 주기 때문에 외롭지 않다. 두번째로 아버지를 찾아 갔을때 소년이 지탱하던 것은 자전거였다. 그에게 자전거는 이제 곧 사만다가 될 것이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자전거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사만다와 자전거를 바꿔 타는 장면에서 우리는 그것을 느낄 수 있다.

이 영화는 기적이다. 극도의 리얼리즘을 구사한 영화에서 삶의 기적을 맛보는 체험 자체가 기적이다. 이제는 다르덴 형제가 더이상 할 말이 없지 않을까, 하는 의구심을 잠시나마 품었던 내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이들은 새로운 경지에 다다랐고, 어쩌면 이 작품이 이들의 작품세계에서 한 절정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이 영화에 삽입된 음악은 베토벤 교향곡 5번 “황제” 2악장이다. 다르덴 형제는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소년이 성장해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고 소년의 감정이 변하는 시점, 혹은 쉼표라고 이야기할 수 있는 부분에서 음악을 사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Deafheaven: Sunbather

이들에 대한 정보를 찾아보던중 Deafheaven 이 각종 음악 사이트에서 데스 메탈, 혹은 블랙 메탈 밴드로 소개되어 있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앨범을 여러번 반복해서 들을 때에도 한번도 이들을 데스 메탈, 아니 메탈과 연관되어 있다고는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보컬이 좀 소리를 지르네?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들이 그쪽 카테고리로 엮일 줄은 몰랐다. 속지조차 없는 심플한 핑크빛 디자인이 앨범 커버 탓이었는지, 아니면 이들의 음악이 가지고 있는 극도의 서정성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기타와 드럼으로 이루어져 있는 2인조 포스트록 밴드는 이미 지겹도록 들어 왔다. 뉴 에이지, 재팬드로이즈, 그리고 퍽 버튼까지. 각기 색깔은 조금씩 달리 할지언정 기본적으로 쉴새 없이 몰아치는 기타와 드럼 사이에서 희미하고 뿌연 멜로디 라인을 만들어 낸다는 골격은 비슷했다. 아마 이러한 형태는 더이상 새로울 것이 없을 것이다. 하지만 데프헤븐은 조금 더 슈게이징한 형태에 가까운 2인조 록음악을 창조해 냈다. 보컬의 중요성은 최대한 뒤로 빠진 상태에서 중첩된 기타톤이 만들어 내는 노이즈의 대 향연이 펼쳐진다. 드럼이 고삐를 늦추지 않도록 뒤에서 백업해 주는 사이 기타는 신디사이저의 도움을 받아 노이즈 속에서의 아름다움이라는 슈게이징 본연의 미덕을 잃지 않는다. 넘치는 에너지를 잘 컨트롤함과 동시에 어디에서 훅이 터져주어야 하는지도 잘 캐치한 절묘한 균형 감각이 돋보인다. 아마 이 듀오는 커리어에서 이런 수준의 앨범을 다시 만들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 미묘한 균형점은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13년의 음악을 말할 때 반드시 언급되어야만 하는 훌륭한 음반을 만들었다는 사실 자체를 폄하할 필요는 전혀 없을 것이다. 10분 가까이 되는 대곡을 여러곡 포함하고 있지만 한번도 지루하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았다.

Speedy Ortiz: Major Arcana

“Tiger Tank” 를 듣는 순간 귀가 번쩍 뜨였다. 페이브먼트의 현대적인 재해석이라는 느낌도 들고, 베스트코스트등을 위시한 네오웨이브 펑크 음악에 대한 신선한 대안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매사추세츠 출신 혼성 4인조 밴드 Speedy Ortiz 의 데뷔 앨범 [Major Arcana] 는 그 곳의 파워에 견줄 수 있는 다른 음악이 전무하다는 한계를 지닌 음반이다. 40분이 채 되지 않는 러닝 타임동안 비슷한 무게감을 지닌 넘버들을 균등하게 들려줄 수 없다는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 자체는 나쁘지 않다. 디스토션이 걸린 기타가 육중하게 내리 꽂히고 보컬의 음색은 불안정하게 흔들린다. Could Nothing 의 최신 음반을 참고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했다. 잊고 있던 90년대 초중반에 유행하던 기타중심의 얼터너티브 음악이 되살아난 듯한 인상이다. 페이브먼트나 다이노서 주니어, 세바도 등의 음악을 좋아했던 사람들에게는 꽤나 괜찮은 선물이 될 것 같다.

NBA: Jennings-Knight 트레이드에 대해.

138166813.jpg

제닝스와 나잇이 트레이드되었다. 형식상 사인 앤 트레이드고, 제닝스를 받는 대가로 나잇과 크리스 미들턴, 크라프트초프를 보냈다. 제닝스의 계약은 3년 총 $24m, 1년당 $8m 로 제닝스를 쓸 수 있게 되었다. 스터키의 계약 규모와 비슷하다는 점에서 계약 규모만 놓고 봤을 때에는 악성 계약이 될 확률은 극히 적어 보인다. 제닝스는 돌파를 할 수 있으며 3점을 던질 수 있다. 현대 농구에서 가장 중요한 두 스팟인 3점 라인과 페인트존 모두를 공략할 수 있다는 점에서 엘리트 가드로 성장할 수 있는 여지 또한 남아 있는 편이다. 나잇과의 나이 차이는 두살, 젊은 재능을 포기하고 늙은 완성형 플레이어를 얻은 것도 아니다. 나잇이 2가드로서의 자질이 더 보인다고 판단했다면 드래프트에서 KCP 를 선탰했고 천시 빌럽스를 다시 데려온 피스톤스에게 나잇의 가치는 상대적으로 적었을 것이다.

Screen Shot 2013-08-01 at 11.13.41 AM ESPN 에서 실시한 설문 조사는 이 트레이드가 갖는 가치를 단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는 듯 하다. 이미 FA 시장에서 조쉬 스미스를 데려온 피스톤스는 정말 간절하게 플레이오프 진출을 희망하고 있다 이미 극강의 클래스로 평가받는 2014년 1라운드 드래프트픽은 샬럿에게 넘어간 상태다. (2014년 탑8 보호, 2015년 탑1 보호) 이미 먼로가 성장의 꼭지점에 다다른 듯 보이고 드루먼드가 즉시 전력감임을 증명한 이상 피스톤스는 나잇의 성장을 차분히 기다려줄 인내심을 상실했을 것이다. 제닝스는 데뷔 시즌부터 NBA 에서 통하는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스미스, 먼로등의 코어와 비슷한 수준의 성장 곡선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이들이 함께 하나의 ‘세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다고 기대하는 듯 하다. 하지만 제닝스-KCP-스미스-먼로-드루먼드 라는 코어 라인업은 올 시즌 당장 플레이오프 진출을 걱정해야 할 정도의 전력이며 미래를 내다 봐도 우승은 꿈도 꾸지 못할 전력이라고 대부분의 대중들은 생각하고 있는 듯 하다. 또한 지역 라이벌 캐벌리어스가 어빙이라는 수퍼 스타 위에 웨이터스, 탐슨, 바레장, 바이넘과 같은 좋은 롤 플레이어들을 더하며 피스톤스보다 플레이오프 진출에 한발자국 더 다가간 모양새다.

게다가 제닝스는 생각보다 더 나쁜 선수일 확률이 높다.

Screen Shot 2013-08-01 at 12.11.01 PM케빈 펠튼은 피스톤스에게 이번 트레이드 성적으로 B+ 를 주면서 위와 같은 비교표를 제시했다. 당연히 제닝스는 위의 두명중 하나이다. 다른 한명은 올스타에 선정된 전도 유망한 포인트가드다. 이 둘의 지난 시즌 성적은 크게 다르지 않다. 물론 이 올스타 가드는 제닝스보다 약간 더 높은 PER 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조금 더 높은 패싱 마인드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펠튼이 고안한 (개인적으로 WS 보다 더 좋은 statistic 이라고 생각하는) WARP 는 제닝스와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제닝스의 스탯이 발전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고, 이것이 발전 과정에서 엘리스와의 공존으로 인한 손해때문이라고 하기에는 그가 실제 게임에서 보여주는 모습 또한 실망스럽다는 점이다. 즉 그는 지난 2년동안 볼호그 기질을 고치지도 못했으며 여전히 낮은 슈팅% (이 난사 기질을 3점슛과 자유투로 극복하며 TS% 는 50% 를 넘기고 있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팀 성적은 지속적으로 하락해 왔다. 한마디로 위닝팀에 적합하지 않은 난사 포인트가드라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를 기록하고 있다. 그의 팀은 루키 시즌을 제외하면 3시즌 연속 루징 시즌을 보냈다.

제닝스의 영입은 더 높은 수준의 탈렌트를 원하면서도 즉시 전력감을 원했던, 그러면서도 오버페이는 결코 하고 싶지 않은 피스톤스의 욕망을 그대로 충족시켜주는 무브다. 조쉬 스미스의 3번 컨버젼에 대해서 이미 큰 우려가 전국을 감싸고 있는 가운데 볼을 잡고 있어야만 하는 제닝스가 라인업에 들어 오면서 나잇이 가지고 있던 거의 유일한 장점인 픽을 이용한 캐치 앤 슛 전략도 쓸 수 없게 되었다. 스터키는 그러한 능력이 없고, KCP 도 코너 3점 보다는 탑에서 스스로 만들어 내는 스페이싱에 능한 선수다. 과연 볼을 누가 오래 잡을 것인가? 먼로는 한경기당 몇번이나 슛을 쏠 수 있을까? 게다가 제닝스는 수비가 좋은 선수도 아니다. (DRtg 108, 나잇은 111이었다) 그는 나잇보다 분명 효율적인 공격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수비에서는 별 차이가 없고 게다가 포제션을 많이 잡아 먹는 난사쟁이라는 점에서 피스톤스의 유기적인 공격력 향상에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의구심이 많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지금 현재 시점에서 예상해 볼 수 있는 라인업은 제닝스 – 빌럽스 (스터키 or KCP) – 스미스 – 먼로 -드루먼드 선발 라인업에 스미스가 4번으로 간다면 아마 3번에서 다토메나 싱글러가 나오는 형태가 될 것이다. 듀마스는 스미스가 공간을 많이 잡아 먹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때문에 이탈리안 리그 MVP 이자 아마도 현재 팀에서 가장 샤프한 슈터인 다토메를 데려 왔다. 이건 정말 굿무브였다. 모리스 칙스는 먼로와 드루먼드라는 2 bigs 를 동시에 코트에 올리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고 그들과 동시에 두명의 슈터를 세워 스페이싱을 확보하는 전략을 쓰겠다고 천명했다. 스미스는 3번에서 유기적인 수비 시스템 향상에 도움을 줄 것이다. 제닝스는 자신이 잃는 점수만큼은 스스로 변상해 줄 것이다. 결국 먼로를 이용해 스페이싱이 가능한 스윙맨을 하나 더 확보하던가 (뎅이나 그레인저?) 먼로가 스트레치형 4번으로 발전해야만 현재의 꽉 막힌 듯한 스페이싱과 포제션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

덧붙여 먼로의 수비에 대해 한마디만. 이번 미국 대표팀 캠프에서 먼로의 수비에 대한 칭찬이 많이 나오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미국 대표팀은 두명의 빅맨을 반드시 동시에 코트 위에 세워두는 시스템을 실험중이다. 즉 지난 세계 선수권처럼 이궈달라가 4번을 보거나 보쉬가 5번을 게임 내내 봐야 하는 상황은 만들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다. 유럽 선수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스트레치형 4번, 혹은 versatile 한 타입의 4번이 더 유용한데 그런 의미에서 먼로가 대표팀에 승선하는 일은 아마 없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먼로의 수비는 페이버스나 커즌스와 같은 운동능력을 이용하는 빅 바디 타입의 4번에게 효율적이지만 라이언 앤더슨과 같은 스트레치형 4번을 상대로는 아직도 많이 버거운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지난 쇼케이스에서 앤더슨의 스탯은 상당히 좋았다. 결국 먼로가 풀타임 4번이 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폭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는 조쉬 스미스와 4,5번 듀오를 이루어 많은 시간을 플레이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