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ft Punk: Random Access Memor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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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대프트 펑크가 마냥 신나고 재미있는, 재기 넘치는 장난꾸러기 천재 이미지였다면 이번 신작에서는 유난히 엄숙한 분위기가 많이 느껴질 정도의 큰 변화를 감지할 수 있다. 일종의 선언과도 같은 이번 앨범이 아마 이들의 커리어에서 갖는 의미는 굉장히 클 것이다. 2000년대를 지배한 두 장르, 힙합과 일렉트로닉에 각기 상주하고 있는 두 천재 칸예 웨스트와 대프트 펑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탈장르화를 시도하고 있다. 웨스트가 힙합이라는 알을 깨고 나와 다른 장르로 외연을 확대하는 식이라면 대프트 펑크는 댄스라는 장르 안에 다른 장르들을 끌어 들이는 방식의 통합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웨스트의 신작이 분열적으로 들릴 수 있는 것이고 대프트 펑크의 음악이 댄스이면서도 록인 것도 같고 소울인 것도 같고 컨템프로리 재즈인 것도 같은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대프트 펑크의 신작 [Random Access Memories] 는 대단히 선언적이며 야심차다. 기존의 앨범들이 가지는 스케일을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이번 앨범의 덩치라던가 깊이가 유독 남다르다는 것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은 늘 헬멧을 쓰고 나온다. 이들의 음악 커리어 자체가 하나의 컨셉임을 상징하는 것이다. 로봇이 있고, 이 로봇 안에는 랜덤한 기억에 접근할 수 있는 프로세서가 있다. 그런데 이 로봇이 영혼을 얻었다면? 그 로봇은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접하게 되었을때 어떤 ‘감정’ 을 가지게 될까? 대프트 펑크의 지금까지의 앨범들이 로봇의 외적인 모양새, 혹은 내부에 있는 프로세서가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알려준 테크닉의 진수였다면 신작은 이 로봇이 영혼을 가지게 되었을때 일어날법한 사운드가 담겨져 있다. 이들이 이번 앨범에서 컴퓨터가 아닌 실제하는 악기들에 큰 부분을 의지하고 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따뜻한 사운드가 앨범을 전체적으로 감싸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며, 오래된 툴인 보코더를 앨범 내내 사용하며 과거와 현재를 연결하기 위해 노력하려는 시도도 당연하게 받아들일 수 있으고, 이탈리아의 프로듀서이자 뮤지션, 예술가인 Giorgio Moroder 의 나레이션이 뜬금없이 나오는데 이 스포큰 워즈가 앨범의 주제를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당연히 이해할 법한 현상인 것이다. 재미있는 사운드를 위해 소모적으로 쓰이기도 했던 가사가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것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이들은 가사가 앨범의 전면에 등장해 드럼 비트나 재미있는 루프에만 귀를 기울이지 못하게 한다.

이번 앨범에는 많은 아티스트들이 참여하고 있기도 하다. 대프트 펑크가 이번 앨범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장르의 통합, 즉 “영혼을 가진 로봇” 이라는 컨셉에 맞는 다른 장르의 아티스트들이 도움을 주고 있다. 개중에는 물론 성공도 있고 실패도 있다. 예를 줄리안 카사블랑카부터 판다 비어까지 모조리 보코더를 씌어 버리는데 카사블랑카는 특유의 카랑카랑하고 건들거리는 색깔을 대부분 상실하고 밋밋해져 버리는 반면 판다 비어는 역시 판다 비어만이 가질 수 있는 넓은 공간감을 그대로 살리며 색다른 맛까지 전달해 주는 부가적인 효과를 누리기도 한다. 대프트 펑크 안에서 모두가 평화로울 수는 없다. 이들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프트 펑크는 분명히 진화했고, 이번 앨범은 그들의 역사에서 중요한 분기점으로 남을 것이다. 앨범을 관통하는 컨셉, 그것을 구현하는 능력, 듀오 본연의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는 확고한 기준, 콜라보레이션 아티스트들과 협연에서 발견되는 조화로움, 그리고 음악적인 진화. 이 모든 것을 완전하지는 않지만 인상적인 방식으로 성취해 내고 있다. 단연코 올해 가장 중요한 앨범이 될 것이다. 가장 잘 만든 음반은 아닐지언정.

what a religious family that we gonna make.

개신교 신자와 천주교 신자의 결혼을 통한 결합은 사실 미국에서보다는 한국에서 더 예민하게 받아들여 진다. 미국에 와서 두 커플을 만났다. 모두 나와 비슷한 상황에서 결혼을 했고, 결혼 후에도 이 문제에 대해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며 보다 나은 해결책 – 혹은 합의점 – 을 찾기 위해 애쓰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K 교수님과 L 교수님 내외분은 미국의 대학원에서 만나 결혼을 했다. K 교수님은 독실한 개신교 신자이고 L 교수님은 천주교 가정에서 자라난 천주교 신자다. 결혼은 천주교식으로 했다. 신부인 L 교수님측에서 강하게 요구를 했고, K 교수님이 성당에 가서 형식적인 서원을 하는 것으로 세례 없이 혼인 성사를 할 수 있었다. 결혼 후에도 K 교수님은 교회에 나가고 L 교수님은 아이가 어느 정도 큰 후 개인 시간을 내어 성당에 나간다. L 교수님은 K 교수님을 따라 교회에 가지만 K 교수님은 L 교수님과 함께 성당에 가지는 않는다. 이 두분은 개신교와 천주교가 본질적으로 같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때문에 굳이 종교를 바꿀 이유도 개종할 이유도 없다고 말했다. 나를 위한 현실적으로 조언으로 미국에서는 이 두 종교간의 거리가 한국보다 상대적으로 가까우며 때문에 따로 세례를 받지 않아도 타 종교에서의 신자로 인정을 한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그러니까 천주교를 예로 들면 개신교 신자가 성당에 나오려고 한다면 따로 세례를 받을 필요 없이 견진 성사를 받는 것으로 완전한 천주교 신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K 교수님에 따르면 한국에 개신교가 전해질 당시의 교풍은 천주교를 배격하고 천주교를 부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고, 그것이 발전하지 못하고 아직까지 일종의 강한 문화로 남아 있기 때문에 천주교와의 거리가 먼 것이라고 한다. 미국은 그러한 반 천주교적인 분위기를 극복하고 현재는 천주교와 거의 차이가 없는 문화를 형성하고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이분들은 어디까지나 나와 같은 한국인의 입장에서 두 가족의 결합으로 받아들여 지는 결혼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이해하고 있었다. 나의 부모님이 혼인 성사와 여자친구의 개종을 결혼의 조건으로 걸고 있는 것은 이 부부에게도 상당히 큰 어려움으로 느껴졌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나의 노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충고해 주었다.

며칠전 스캇의 송별회에서 만난 P 와 E 는 2년간의 연애 끝에 결혼한 미국인 부부였다. P 는 신부가 되기 위해 예수회 학교에 들어 갔고 그곳에서 E 를 만나 신부가 되려는 계획을 포기하고 결혼을 선택했다. E 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다. P 의 어머니는 -당신의 아들을 신부로 만들려고 한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 대단히 강경한 가톨릭이었고, 때문에 E 와의 결혼을 탐탁치 않게 생각했다고 한다. P 역시 E 와의 결혼으로 인해 평생 당연하게 생각해 왔던 자신의 종교관을 처음부터 다시 짚어 보게 되었고, 그의 결론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Eucharist, 즉 성찬의 전례를 포기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 부부의 합의점은 Lutherian Church 에 함께 나가는 것이다. 이들은 부부가 각기 다른 종교 활동을 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했고, 이는 나중에 탄생할 2세에게도 좋지 않은 영향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P 에 따르면 루터교회는 그나마 개신교회중 천주교와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는 곳이었고 때문에 이 부부가 함께 일요일마다 갈 수 있는 일종의 중간지대와 같은 곳이었다. 물론 P는 일요일마다 성당에도 나간다. 성가대 활동도 열심히 한다. 나를 보자마자 “이제 네가 돌아 왔으니 함께 성당에 갈 수 있겠군!” 이라고 반가워 할 정도로 독실하다. E 는 성당에 가서 미사를 보면 “depressed” 되는 느낌이 들어서 싫다고 했다. P는 그런 E에게 성당에 같이 갈 것을 강요하지 않았고, E 가 최대한 편안해 하는 개신교의 범위 내에서 그녀와 함께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합의점을 찾아낸 것으로 만족하기로 했다. 2세는 어떻게 할 것이냐고 하니까 당연히 루터교를 믿게 할 것이라고 답했다. 지금은 P의 어머니와 E도 아주 사이좋게 잘 지낸다고 한다.

이 두 부부는 모두 슬기롭게 종교의 차이에서 오는 갈등을 극복한 경우다. 나에게도 이들과 같은 지혜가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은 걸음마 단계에서 개신교를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만, 내가 과연 P 와 같은 통큰 양보를 하거나 K 교수님과 같은 타종교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가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난 뒤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해 왔다. 여자친구를 위해 종교를 바꿀 수 있는지. 그럴때마다 대답은 한결같다. 나 역시 P 처럼 성찬의 전례가 가지는 의미를 더이상 즐기지 못하게 되는 삶이 두렵고 싫다. 나는 이 부분때문에 천주교와 개신교가 “차이”를 가진다고 생각하며, 이 차이로 인해 크고 작은 갈등이 발생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에 대한 해석은 사실 부차적인 문제다. 현실적인 목적에 의해 얼마든지 변화될 수 있는 것이 성경에 대한 해석 아닌가. 이것은 도구적인 것이고, 현대에서 종교를 산업화시키는 하나의 수단으로 작용할 뿐이다. 천주교와 개신교가 모두 동일하게 믿고 있는 신의 “의미” 를 해석하는 형식에서의 차이가 바로 전례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는데 그것에 대한 인정의 유무에서 차이가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내가 공부해온 바에 따르면 그렇다. 물론 갈길이 아직 너무 멀기 때문에 지금 결론을 내릴 수는 없고. 아무튼, 내가 바뀔 수 없는데 상대방에게 바꾸라고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여자친구도 나만큼 독실하게 자신의 종교를 믿어 왔고, 나만큼 독실한 개신교 가정에서 성장해온 사람이다. 결혼이라는 거대한 관계 안에서 개인의 신념이 함몰당하는 것은 결코 용납할 수 없다. 한국에서의 결혼이 상대방의 가족에 대한 이해에서부터 시작하는 것이 올바른 방향이라면, 그리고 종교가 양가 집안을 이해하기 위한 키워드라면, 그것이 반드시 개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 그것도 여자쪽의 일방적인.. – 생각을 처음부터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 문제는 자신이 믿는 종교를 상대방에게 강요하는지가 아니라 상대방이 믿고 있는 종교에 대한 이해를 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 그 종교로부터 시작된 양 가정의 철학과 분위기를 “받아들이는 것” 이다. 그것이 반드시 개종을 의미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어떻게 나의 사랑하는 어머니 아버지를 설득할 것인가! 골치 아픈 문제다. 세상에 쉬운 일이 하나도 없다.

과거에 연애를 하면서 천주교 신자를 딱 한번 만나본 적이 있다.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이 사실 연애 관계에 크게 영향을 주지는 않았다. 약간의 안도감이 보너스처럼 주어졌을 뿐이다. ‘혹시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집안의 반대는 크게 없겠군.’ 하는 정도의 허황된 안도감. 천주교 신자와의 연애의 끝은 지금까지 한 연애들중 가장 좋지 않았다. 가장 많이 싸웠고, 가장 심하게 상처를 받았다. 종교와 연애는 사실 아무런 상관이 없는 셈이다. 나는 천주교가 다른 종교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하지도 않으며 천주교 신자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착하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히틀러의 어머니도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그 연애가 끝난 후 더이상 ‘천주교 신자와 사귀었으면 좋겠다’ 라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되었다. 연애는 조건을 따져 가며 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도 깨달았다. 결혼도 마찬가지다. 연애보다 조금 더 까다로운 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본질적으로는 사랑하는 두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점에서 크게 다르지 않다. 나는 지금의 여자친구에게서 전에 없던 마음의 평안함을 느낀다. 물론 여자친구도 완벽하지 않고 나도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싸우기도 하고 감정이 상할 때도 있다. 하지만 나는 여자친구와의 관계에서 단 한번도 끝을 생각하지 않았다. 단 한번도 ‘아 이래서 헤어져야 겠구나’ 라는,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생기지 않았다. 지속 가능한 관계라고 믿었고, 또 이 관계 안에서 모든 것이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러했다. 걱정했던 부분들은 거짓말처럼 말끔히 해결됐다. 심지어 불가능에 가깝다는 ‘여자친구 아버지에게 구박 안받기’ 미션까지 달성했다. 이 관계 안에서는 절망보다는 희망을 본다. 종교 문제에 대한 답이 지금은 없는 상황이지만 곧 찾게 되리라는 희망도 그래서 갖게 되는 것이다. 내가 종종 친구들에게 말하고 바로 따가운 놀림을 받는 일종의 루틴이 있다. “챌린징한 상황을 즐긴다”는 말이다. 어려운 레벨의 문제일 수록 답을 맞추었을 때의 희열은 더 크다. 어려운 난이도의 게임을 클리어했을때의 감격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물론 지금 나에게 닥친 이 상황은 그런 것들과는 차원이 다른 무게감으로 다가오지만 어쨌든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렇게 될 것이다. 나와 여자친구가 찾게 될 답이 무엇일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다.

Baths: Obsidian

로스 엔젤레스 출신의 일렉트릭 뮤지션  Will Wiesenfeld 의 스테이지 네임인 Baths 의 세번째 앨범으로 Anticon 에서 발매되었다. 사실 이 뮤지션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앨범 리뷰와 피치포크와 가진 인터뷰등을 참고했다. 이 앨범이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어두운 분위기라고 하는데, 그 이유로 앨범을 제작할 당시 이 친구가 대장균에 감염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루종일 아무 것도 못하고 폴아웃 (플레이스테이션 게임..) 만 하루에 열시간씩 했다고. 이게 자랑은 아니겠지만 아무튼 병에 걸려 아무것도 못하던 당시의 심정이 앨범에 반영되었다고 한다.

앨범은 다른 매체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포스탈 서비스가 자살하고 싶을때” 나올 법한 음악들로 채워져 있다. 섬세하고 신경질적이며 작은 것을 놓치지 않지만 겁도 많고 찌질하기도 한 어메리칸 너드가 생산해 낼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색채의 음악이기도 하다. 적당한 훅과 적당한 멜로디 라인이 귀를 괴롭히지 않으며 쉽게 전달될 수 있도록 돕고 있지만 앨범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결코 밝고 경쾌하지는 않다. 인디 일렉트릭 뮤직의 어떤 틈새 시장을 잘 공략하고 있는 셈인데 이러한 시도는 대체적으로 호평을 받고 있지만 어떤 매체들 사이에서는 격렬한 찬반 논란이 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즉 이 음악이 “진짜냐 가짜냐” 하는 논란 말이다. 가짜라는 말보다는 fluke 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다. 즉 어떤 분위기를 흉내낸 솜씨 좋은 모조품일 수도 있고, (솔직히 포스탈 서비스와 시규어 로스의 색깔이 반반쯤 섞여있는 느낌도 든다) 이 24살짜리 젊은 뮤지션의 천재성을 유감없이 발휘한 수작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걸 무책임하게 듣는 이의 해석에 맡긴다, 라고 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은 아닌 것 같고, 아마 이 뮤지션의 대음 앨범 쯤에서 대충 답을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어떤 뮤지션의 음악이 “fluke” 라면 보통 다음 앨범, 길게 봐도 다다음 앨범 쯤에서 대충 바닥이 드러나기 마련이다. 제임스 블런트같은 경우를 예로 들면 말이다.

Kanye West: Yeezus

칸예 웨스트는 점점 평론가들이 좋아하는 영역으로 진화하고 있다. 싱글이 아닌 앨범 단위로 음악을 ‘설계’할 수 있는 블랙 뮤직 아티스트는 많지 않다. 그리고 그 설계의 규모가 자잘한 주택이 아니라 하나의 거대한 빌딩이라면, 그가 설계한 건물 앞에서 압도당하는 느낌을 갖게 되는 것도 그만큼 쉬울 것이다. 곡의 규모뿐만 아니라 음악이라는 하나의 단위가 가지는 느낌이 점점 축소되어 가고 있는 요즈음에 있어 대중성을 유지한채 대곡을 써내려갈 수 있는 칸예 웨스트의 능력은 분명히 축복받은 재능이다. 게다가 웨스트는 게으른 천재가 아닌, 끊임없이 모험하고 도전하며 새로운 영역을 개척해 나가는 부지런한 천재에 가깝다. 힙합이라는 장르를 깨끗하게 재정의내린 학교 3부작을 끝내고 내놓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도전은 <My Beautiful Dark Twisted Fantasy> 에서 구체적으로 제시된 바 있다. 그는 Bon Iver 와 같은 전혀 다른 장르의 뮤지션들과의 콜라보레이션도 두려워 하지 않을 정도로 앨범의 컨셉과 그 컨셉을 구현하는 방식에 몰두하는 듯 보였다. 물론 “All of the Light” 와 같은 킬링 트랙들도 적절히 배치하면서 싱글 뮤직이 가지는 미덕을 무시하지 않는 현명함도 보여주었다.

2013년에 발표된 여섯번째 앨범 <Yeezus> 역시 컨셉 앨범이다. 앨범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그의 관심은 서구 기독교 사회를 직접적으로 겨냥하고 있다. 흑인과 christianity 는 뗄레야 뗄 수 없는 사회 구조적인 접합점을 지니고 있는데 이 관계는 예술계에서 자의식이 강한 흑인 아티스트의 경우 자신을 예수와 동일시한다던지 예수의 이미지를 비틀어 새로운 흑인 예수 상을 탄생시킨다던지 하는 식으로 발현되어져 왔다. 사실 메시지에서 이 앨범이 가지는 새로운 측면은 매우 제한적이라고 할 수 있다. 각각의 앨범이 가지는 ‘덩치’ 가 매번 커져 왔기 때문에 그 점이 오히려 웨스트의 선택지를 좁게 만들었을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음악적으로 이 앨범은 굉장히 분열적이다. 분명한 컨셉을 가지고 있고 한권의 책을 읽는 듯한 뚜렷한 기승전결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그 컨셉을 구현하는 방식은 각각의 노래들을 잘게 찢어서 으깨서 반죽해 놓은 듯한 느낌이다. 어쩌면 이 역시 당연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웨스트는 더이상 힙합이라는 장르에 묶일 수 없는 뮤지션이고 그런 의미에서 이번 앨범에 동원된 아티스트들 – 대프트 펑크, 본 이베어, 키프 – 의 면면만 봐도 그의 음악이 새로운 영역을 개척할 것이라는 예상을 능히 할 수 있는 바였다. 여러 매체에서 공히 지적하고 있는 바와 같이 이 앨범은 에이펙스 트윈과 같은 엠비언트 뮤직에서 깊은 영향을 받은 듯 보인다. 다분히 명상적이고 분절적이며 기존 음악 형식을 파괴하는 구조를 가진 곡들이 나열되어 있는 것이 앨범이 가지는 컨셉과 맞아 떨어진다고 가정한다면, 곡들의 형식 자체에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하는 웨스트의 노력은 어느 정도 성취를 이루어 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앨범에는 ‘훅’ 이 너무 부족하다. 40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하나의 길고 독립된 흐름을 가져가려는 의도와 각각의 노래들이 가지고 있는 분열적이고 집중할 수 없는 흐름이 상충되며 지루함을 선사한다. 마땅히 싱글 커트할 곡이 없어 보이는 것도 (아마 웨스트가 의도한 것이겠지만) 이 앨범이 가지는 큰 약점중 하나다. 이 앨범을 몇번 반복해서 듣고 나는 피카소가 생각났다. 웨스트가 음악계의 피카소다, 뭐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피카소가 완전히 다른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 어느 순간 갑자기 팍! 하고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는 천재였지만 계속해서 그림을 꾸준히 그렸다. 웨스트 역시 다작을 하는 천재다. 그의 어떤 시도는 완벽한 실패였고, 어떤 시도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앨범 하나 하나가 가지는 중요성보다는 이 아티스트가 나아가는 전체적인 방향을 더 중요하게 관찰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흥미롭게도 올뮤직의 리뷰에는 살바도르 달리가 언급된다. 나만 이 앨범을 “추상과 구상 사이의 어떤 그림” 으로 받아들인건 아닌가보다)

전기 밥솥

한국에서 돌아와 보니 전기 밥솥이 말을 듣지 않았다. 급한대로 홀푸드에서 칼로스 쌀을 싸서 김치도 없이 된장찌개와 함께 먹으려고 했는데 아무리 들여다 보고 이것저것 눌러 봐도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었다. 쌀은 이미 불려 놓았고, 된장찌개 재료들은 완벽하게 손질되어 보글보글 끓여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데 정작 중요한 밥을 지을 수 없으니 여간 답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같은 밥솥을 쓰는 친구에게 물어도 보고 인터넷으로 매뉴얼을 받아 자가진단도 해보았지만 결론은 “수명이 다했다” 로 귀결될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틀 정도 속을 끓인 뒤 오늘 마침내 큰맘을 먹고 아마존에서 새로운 밥솥을 하나 주문했다. 아마존 프라임의 위엄.. 무거운 전기 밥솥도 배송료 공짜, 그것도 이틀만에 배달된다! 한양마트에서 주문한 음식들은 2주가 다 되어 가는 오늘까지도 감감 무소식인데.

그 밥솥은 3년 반 전쯤 뉴욕에서 공부하던 친구가 유학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에 볼더에 들려 쓰던 거라며 툭 던져주고 간 것이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건 쓰던 물건이 아니라 그 친구가 나를 위해 뉴욕에서부터 낑낑거리며 가지고 온 신제품이었다. 영국부터 미국까지 약 5년간의 유학 생활동안 강하게 단련된 그의 살림 실력은 당시 막 2년차에 접어 들고 있던 나에게는 일종의 경외의 대상이었고, 볼더에서 며칠동안 머물며 그는 밥솥과 함께 굴전과 생선전같은 “고급 요리” 들을 만들어주며 신세계를 열어 주었다. 그 이후 지금까지 나는 밥솥으로 참 많은 것을 해 먹었다. 쌀밥뿐만이 아니라 찜통이나 다른 비싼 요리도구들이 없는 가난한 유학생이 밥솥으로 할 수 있는 거의 모든 것을 해 먹었던 것 같다. 그래서 어제 최종 사망 선고를 내린 뒤 그 밥솥을 선물해준 친구에게 카톡을 보냈다. 버리지 못할 것 같다고.. 얼마간은 더 간직해야 할 것 같다고.

전기 밥솥에서 밥이 다 되어 갈 때쯤 나오는 희미한 흰색 연기와 냄새를 좋아한다. 다른 요리들처럼 자극적이지도 않고 사실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느껴지지도 않는 그런 아련한 따뜻함을 주는 것이 바로 뜸을 들이는 전기 밥솥이 가지는 매력이다. 어렸을 때부터 끈적끈적하고 밀도 높은 압력 밥솥 밥을 잘 삼키지 못한 반면 꼬슬꼬슬하고 건조한 전기 밥솥 밥은 몇공기든 거뜬하게 넘길 정도로 좋아했다. 유학생에게 쌀밥과 김치는 단순히 익숙한 음식 이상의 감정적은 무언가로 다가온다. 한국 음식을 대표하는 이 두가지 음식은 사실 한국에서라면 기본 중의 기본인, 식당에서는 음식의 메뉴에도 등장하지 않는 조연중의 조연이다. 하지만 정작 그 두가지가 없으면 뭔가 식사를 해도 한 것 같지 않은 기분이 든다. 팬티를 입지 않고 청바지를 입었을 때 느껴지는 불안한 느낌마저 들 때도 있다. 기름진 미국 음식, 혹은 접시 하나에 자신의 모든 몫이 담겨져 나오는 서양식 음식을 먹을 때 가장 그리워 지는 것도 찌개도 나물도 김밥도 아닌, 먹은 줄도 모르고 먹었던 흰 쌀밥과 김치인 것이다.

오늘따라 쉽게 잠들지 못했던 여자친구를 생각하며 이런 생각을 했다. 우리는 지난 여름 두달동안 거의 매일 만났는데, 그 이후 서로의 부재를 당연시하며 살아 갔던 원래의 삶으로 돌아간 후 느껴지는 공백이 실로 어마어마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각자 해야 할 일이 있고 살아야 할 삶이 있다는 현실의 무게와는 별 상관없이 작동하는 이 상실감은 마치 밥과 김치가 없는 세상에서 찌개만을 억지로 삼켜야 하는 그런 상황과 비슷하다. 전기 밥솥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귀퉁이에서 아무런 기척도 내지 않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밥을 짓고 있는데, 사실 그가 부재하면 나는 한국식 식사 한끼를 제대로 차려 낼 수가 없다. 식탁을 화려하게 밝혀주는 메인 요리가 있다. 그런 요리와 비슷한 사람이 있고 비슷한 관계가 있다. 나는 그런 사람보다는 잠들지 못하는 여자친구와 지치지 않고 수다를 떨 수 있는, 그 수다의 내용은 비록 다음날 아침에는 전혀 기억나지 않겠지만 그것만으로도 묵직한 존재감을 느낄 수 있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다.

Kurt Vile: Wakin On a Pretty Daze

피치포크는 커트 바일의 새 앨범에 담긴 사운드에 대해 “warm, unhurried, and spacious” 하다고 묘사했다. 적절한 표현같다. 지난 앨범에 비해 훨씬 확장된 구조를 취하고 있는 커트 바일의 새 앨범은 널찍한 공간을 조급하게 채우지 않으려는 장인의 기품이 느껴진다. 그리고 따뜻하다. 인간의 온도가 절절하게 느껴지는 앨범을 만나본게 얼마만일까. 청명하게 울려 퍼지는 기타와 결코 서두르지 않는 리듬 파트 위에 나른하게 전달되어지는 바일의 목소리는 음악을 제대로 가지고 노는 아티스트의 어떤 정점을 보는 듯 하다. 하나의 장르로 규정지을 수 없는, 록음악의 기본적인 영역 위에서 마음껏 뻗어나가는 사운드스케이프의 진화, 확장, 변주… 귀가 즐겁다. 마음도 즐겁다. 2013년 겨울 올해의 앨범을 기억해 낼때 반드시 다시 꺼내 들을 음반이다.

Patty Griffin: American Kid

Patty Griffin 란 이름을 전에는 들어보지 못했다. 이 앨범을 접하고 나서야 이 뮤지션이 메인주 출신의 1964년생이고, 1996년부터 활동했으며,  로버트 플랜트와 작업을 하기도 했다는 것, 전작인 <Downtown Church> 는 가스펠 앨범이었다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그래미를 수상한 이미 잘 알려진 아티스트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재미있는 사실은 <Downtown Church>가 내쉬빌에 있는 장로 교회에서 녹음되었는데 앨범의 수록곡중 하나인 “All Creatures of Our God and King” 이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 성인에게 바쳐졌다는 것이다. 최근에서야 미국의 개신교와 천주교 사이의 거리가 한국의 그것보다 훨씬 가깝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미국에서 발표되는 가스펠 앨범 역시 두 종교 사이를 자유롭게 유영하는 듯 하다)

이 앨범은 포크 앨범이다. 하지만 딕시 칙스나 엘리스 폴같은 뮤지션들과의 관계에서 드러나듯 그녀의 음악은 조용한 컨트리 음악이라고 표현하는 편이 더 맞을 것 같다. 부드럽고 낮은 톤의 통기타와 하이톤의 보컬이 어우러져 느긋한 가락을 자연스럽게 만들어낸다. 한곡을 제외한 나머지 열한곡이 자작곡이며, 거의 대부분의 곡들이 통기타 하나와 그리핀의 목소리만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핀은 이 앨범에서 자신과 자신 주변에 있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Irish Boy” 에서는 그녀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며, “Faithful Son” 에서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의 사상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목가적인 시선을 아들과 관련된 고통스러운 일화에 담아낸다. “Wild Old Dog” 에서는 오스틴에서 내쉬빌로 가는 13시간여의 고속도로 여행도중 도로 위에 버려진 한 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녀가 운전하던 차의 뒷좌석에는 그녀의 사랑하는 개가 자고 있었고, 도로에 내버려진 개는 곧 도로를 덮칠 토네이도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 순간 그리핀이 경험했던 고통스러운 순간의 감정이 잘 담겨져 있다. 이 앨범의 타이틀 격인 “Not a Bad Man” 은 그녀가 현재 거주하고 있는 텍사스 오스틴에서 만난 한 이라크 참전 군인에 대한 이야기다. 19살에 입대해 지금 고작 24살에 불과한 이 젊은 군인은 이미 약이 없으면 잠에 들 수 없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며 밖으로는 사람들의 불안한 시선을 감당해 내야 하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녀는 그가 괴물이 아니라 그저 평범한 “American Kid” 라고 이야기하고 있다.

이 앨범은 metacritic 에서 집계한 15개의 매체에서 공히 모두 좋은 평을 이끌어내고 있다. 귀에 거슬리지 않는 멜로디와 계속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진솔한 가사가 높은 흡인력을 만들어 낸다. 하지만 (굳이 텍사스에 살고 있는 컨트리 싱어라는 사실에 대한 편견을 자극하지 않더라도) 그녀의 메시지는 다분히 보수적이고 보호적이며, 또한 종교적이다. 미국의 상식적인 보수주의자가 낼 수 있는 “당연한 것을 좋아하지만 변화를 두려워 하는” 성질의 색깔인 것이다. 때문에 재미가 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으며, 보수적인 그녀의 시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어쨌든 이 앨범은 메시지가 중요하다. 포크의 형식을 빌리고 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 앨범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차지하는 비중이 굉장히 크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냥 흘려 들으면 충분히 아름답지만, 하나 하나 새겨 듣다 보면 오히려 매력이 반감하는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Vampire Weekend: Modern Vampires of the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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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지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전작 <Contra> 가 매우 좋은 앨범이었다는 사실이다. 챔버팝에 아프리칸 리듬을 “끼얹은” 이들의 메이저 소포모어 앨범은 대성공이라고 할 정도의 음악적, 대중적인 성취를 이루었다. 컬럼비아의 평범한 대학생에서 전세계에서 가장 큰 페스티벌의 서브 헤드라이너 정도로 성장한 이들이 당연히 세번째 앨범을 제작함에 있어 꽤 큰 압박을 받았음은 자명하다. 이들은 영특하고, 재기 넘치며, 그와 동시에 음악을 즐길 줄 하는 여유로움과 현명함까지 가지고 있는 젊은이들이다. 때문에 세번째 스튜디오 앨범 역시 크게 망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갖게 했다.

<Modern Vampires of the City> 에서는 몇가지 변화가 눈에 뜨인다. 첫째, 플릿 폭시스와는 다른 방향으로 이들의 음악은 중세로 회귀하고 있다. 플릿 폭시스가 60년대 포크 음악에 중세의 바로크적 느낌을 “끼얹는” 식이었다면 뱀파이어 위켄드의 최신작은 여전히 경쾌한 아프리칸 리듬을 바탕으로 하는 챔버팝에 중세적인 코러스를 덮어 버려서 음악의 층을 두텁게 하는 식이다. 맥북 프로를 이용해 보컬을 중첩시키게끔 하는 이러한 작업 방식은 “Worship You”와 같은 곡에서 도드라진다. 여기에 더해 중세 시대의 화성악을 연상시키는 건반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깊고 신비로운 분위기를 제법 그럴듯하게 연출해 내고 있다. (“Hudson” 에서는 노골적으로 중세 음악식의 코러스를 사용하고 있다) 아마도 이러한 시도는 전작의 “Giving up the gun” 에서 힌트를 얻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을 해본다. 이 곡만 전작에서 유난히 널찍하고 텅 빈듯한 사운드 스케잎을 보여 줬었다. 신작에서는 꽤 많은 곡들의 스케일이 몰라보게 커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둘째, 하지만 모든 곡에서 이러한 변화를 시도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전작들에 비해 상당히 번잡스럽고 정돈되지 않았다는 느낌을 받게 한다. 어떤 곡에서는 여전히 장난끼가 다분한 이들의 데뷔 앨범이 연상되기도 하는데 그 다음 곡에서는 웅장한 건반과 (아프리칸 리듬이 아닌 중세의 행진곡을 연상시키는) 빠른 템포의 리듬 파트가 등장하며 스케일을 갑자기 키워 버린다. 청자 입장에서는 어느 장단에 맞추어 주어야 할지 가끔 혼란스러울 것 같기도 하다.

여전히 달콤한 훅으로 넘치며 가사 역시 익살 맞다. 쉽게 무시할 수준의 앨범은 아니라는 뜻이다. 이 앨범이 이들의 커리어에서 최고라고 기록될 수 있을런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앞으로 전개될 필모그래피에서 꽤 중요한 변곡점으로 평가받을 여지는 다분히 가지고 있다. 앞으로 이들이 얼마나 더 치열하게 고민을 하는지에 따라서 달라지겠지만, 현재까지 이들은 미국 동부의 인디 무비만이 가질 수 있는 회색빛 유머 감각을 뻥하고 키워서 헐리우드의 팝콘 무비를 만들 수도 있음을 증명해 내고 있다.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지만, 깊이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들이 가볍고 부담스럽지 않은 이지 리스닝 아티스트로 남고 싶다면 지금도 충분하다. 나에게 있어 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은 아무래도 그 다음 레벨 쯤에서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아프리칸 리듬을 포기하면서 까지 이렇게 스케일을 키울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조금 아쉬움이 남는다. 그래도 여전히 좋은 앨범이다.

 

The National: Trouble Will Find Me

The National 정도 되는 밴드라면 이제 한번쯤은 쉬어가도 괜찮을 정도의 필모그래피를 쌓았다고 할 수 있다. 한번쯤 삐끗해도, 한번쯤 범작을 내놓아도 그들의 명성에 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지난 세장의 메이저 앨범은 굉장했다. 가지런한 호흡과 빠른 보폭이 한치의 흐트러짐도 허용하지 않는 듯한 폼새를 지니게 만들었던 지난 세장의 앨범에서 The National 은 그들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채, 혹은 정체성을 완성했고, 그 음악으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뮤지션중 하나로 떠올랐다.

전작 <High Violet> 투어 기간중 완성된 두명의 기타리스트의 데모를 바탕으로 제작된 이 앨범은, 지난 투어 기간이 “밴드 역사 10년에 있어서 가장 만족할 만한 정신적 상태” 를 제공했다고 밝힌 만큼 굉장히 편안하고 안정적인 상태에서 시작하고, 또 끝을 맺는다. 전작 <High Violet> 이 꿈틀거리는 밴드의 생명력을 극대화시킨, 어쩌면 약간 멈칫거리게 만들 정도의 공격성을 띤 앨범이었다면 이번 앨범은 마치 이들의 음악이 슬로 코어로 선회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단히 느리고 감미롭게 진행된다. 건반과 어쿠스틱 기타를 적극 사용했기 때문이 아니다. 단순히 리듬 파트의 적극적 사용을 자제하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이들의 음악은 항상 테크닉한 부분보다는 감성과 이미지로 먼저 이야기되었다. 이번 앨범 역시 이들이 전체적으로 잡고 있는 테마와 이미지에서 따뜻한 파스텔 톤이 느껴지기 때문에 청자들이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이들의 가사는 여전히 서늘하고 한번쯤 더 생각하게끔 하는 묵직한 맛이 있지만, 최소한 이들의 음악은 잔뜩 힘을 뺀, 하지만 훅만큼은 놓치지 않는 장인의 어떤 가지런한 기품을 느끼게 한다. 이는 단순히 밴드의 핵심 멤버인 기타리스트 (이자 키보디스트이고 프로듀서이기도 한) Aaron Dessner 의 딸이 태어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이제 이들은 서늘한 기품에 더해 따뜻한 감성까지 적극적으로 획득하러 나서기 시작했다. 거의 완성 단계에 다다른 이들의 음악 세계를 느낄 수 있는 수작이라고 생각한다.

참고로 앨범의 커버 디자인은 미국에서 활동중인 한국인 디자이너 윤보현의 설치 작품이다.

http://nothingmajor.com/journal/370-the-installation-behind-the-new-national-album-co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