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밀 아자르: 솔로몬 왕의 고뇌

원래는 베른하르트 슐링크의 <주말> 을 집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바로 옆에 이 책이 있었고, 깔끔한 책의 디자인에서 눈을 뗄 수 없어 그만 충동적으로 구매해 버렸다. 30년이 넘게 묵은 이 구수한 사랑 이야기를 계획적이지 않은 계획들이 무차별적으로 생활을 폭격하는 서울에서 온전히 읽어내려가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는데, 이 정신없는 생활의 사이사이 틈을 비집고 지하철에서의 이동시간이나 카페에서 여자친구를 기다리는 시간 따위의 여유가 주어지는 덕분에 그나마 글자들을 눈 속에 억지로 집어 넣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자기 앞의 생> 의 모모가 어른이 되어 빠리에서 택시 운전을 한다면 그가 바로 <솔로몬 왕의 고뇌> 의 화자인 장이 될 것이다. 나의 주장이 아니라 평단의 평이 그러하다. <가면의 생> 에 나오는 자노 라팽이 바로 이 소설의 화자 장이기도 하다. 굳이 거칠게 비유를 하자면 에밀 아자르/로맹 가리의 다른 소설들과 이 소설을 엮는 자노라는 인물을 보는 기분은 다르덴 형제의 <프로메제> 에 등장했던 배우 제레미 레니에가 <더 차일드> 에서 완전히 달라진 모습으로 등장할 때 느꼈던 감정과 비슷한 것 같다. 그래, 이렇게 컸구나, 하는 뿌듯함이 아니라 맞아, 너라도 이 세상에서는 별 수 없었겠지, 힘들었겠다, 와 같은 씁슬한 반가움.

이 소설은 늙음과 죽음, 그리고 사랑에 관한 이야기다. 주인공은 한 늙은이를 만나 그의 일을 도와준다. 그 와중에 다른 늙은이를 만난다. 그 늙은이와의 관계가 깊어지면서 주인공 젊은이는 쉽게 풀기 힘든 어려운 상황에 봉착한다. 쉽게 조절할 수 없는 감정의 높낮이, 관계의 복잡성 속에 끼여 운신의 폭이 줄어든 사람이 결정을 내려야 하는 순간 맞닥뜨리는 고뇌, 후회가 가득한 과거와 그 과거를 끌어 안고 다시 마주해야 하는 현재 속에서 재정의되어야만 하는 관계의 어려움같은 것들이 유머와 위트가 가득한 문장 속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나는 사전을 통해 간단한 단어를 다시 정의하는 등장인물들의 태도가 몹시 마음에 들었다. 주인공 장은 이해하기 힘든 상황, 혹은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상황에 도달할 때마다 사전을 꺼내어 중요 개념들을 다시 한번 되짚어본다. 그렇게 정의로 나타나는 단어들은 때로는 소설속 상황과 어울리기도 하고, 가끔은 완전히 엇나가기도 하며 절대성과 상대성 사이에서 자유로이 유영한다. 이를테면 이런거다.

사랑 Amour 자신보다 상대방의 안녕을 원하고, 그에게 헌신하고자 하는 경향

사랑 amour 어떤 가치에 대한 사심 없고 깊은 집착

전자의 정의는 당시 장의 상황과 상당 부분 조응하지만 후자의 경우 “어떤” 가치인지에 대한 설명이 누락되어 있는 정의로 인해 혼란스러움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한다. 재미있다.

이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공통적인 특징은 주변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이다. 이들 중 그 어느 누구도 세상의 중심, 시대의 중심에 서 있지 못하다. 장은 친구들과 택시를 돌려가며 운전하며 전전하고 있는 신세이고 솔로몬은 “기성복의 왕” 이었으나 죽음을 바라보는 여든 다섯의 나이에 이제는 자신과 같은 노인들을 돌보는 봉사 활동을 한다. 마드무아젤 코라는 왕년에 잘나갔던 샹송 가수, 하지만 지금은 늙어 볼품 없는 노인일 뿐이다. 하다 못해 장의 친구들인 통이나 척같은 이들도 캄보디아에서 살아남은 생존자나 미국에서 건너온 유학생으로 그려진다. 이들 중 그 누구도 주류에 속한 이는 없으며, 그 누구도 밝고 활기찬 현재를 살아가는 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밀 아자르는 끊임없이 입술을 히죽거리게 만드는 긍정을 잃지 않으며 생명을 불어 넣는다. 끊임없이 포기하지 말 것을 주문하고, 기어코 소설 속에서 그 희망의 끈을 되살려 내어 독자들로 하여금 작지만 소중한 체험을 경험하게끔 강제한다. 그의 문체에는 힘이 있으며, 그 힘은 허튼 유머 속에 묵직하게 자리잡은 삶에 대한 직관적인 통찰력에 기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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