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chard Linklater: Before Midnight

영화를 좋아하는 친구가 카톡으로 이 영화를 봤다는 메시지를 보내 왔다. “비포 시리즈” 중 최고였다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 그 친구는 세편의 영화가 너무 완벽한 하나의 영화인 것 같아서 어느 한편만 봐서는 알 수 없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고, 로맨스 영화의 전설로 남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세월의 흐름과 함께 대화할 수 있는 파트너가 있다는 것이 삶의 큰 위안이 될 수 있음을 깨달았다고 말했다. 나는 대체적으로 동의하면서 나의 의견을 몇개 내놓았다. 첫째, 지난 10년동안 저런 식으로 대화를 계속해온 커플이라면, 나는 최소한 저 커플보다는 더 잘 살 것 같은 자신감을 획득했노라고. 둘째, 이 영화는 나이듦에 대한 영화같다는 인상을 깊게 받았고, 때문에 오히려 주인공 커플이 본격적인 대화(!) 를 시작하기 전 파티 테이블에서의 대화를 마무리한 할머니의 한마디, “passing through” 가 훨씬 크게 다가왔다고.

이 영화는 생각보다 생각할 꺼리가 상당히 많은 것 같다. <비포 선라이즈> 가 대단히 인상적인 청춘 로맨스물이고 <비포 선셋> 이 그 “전설” 이후에 벌어질법한 후일담을 소품 형식으로 담아낸, 감독과 주연 배우들의 장난 혹은 작은 선물같은 작품이었다면 <비포 미드나잇>은 애초에 앞의 두 영화를 삼부작의 처음 두편으로 정체성을 바꾸어 버린 뒤 대단원을 만들어 보려는 야심찬 기획에서 출발한 듯 보인다. 실제로 영화 중간 중간 <비포 선라이즈> 와 <비포 선셋> 에서 일어났던 해프닝과 에피소드들이 “현재” 의 서사를 가능케 하는 중요한 장치로 쓰인다. 즉 이 영화는 처음부터 <비포 선라이즈> 의 꿈같았던 하룻밤을 달콤하게 기억하는 세대가 그 이후 주름살을 가지게 된 주인공들의 지나간 시간들을 대화속에 현명하게 녹여낸 <비포 선셋> 의 어른스러움을 깨닫게 되었을 때 마지막으로 던질 수 있는 단 하나의 질문, “그럼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함께 늙어가야 할까?” 에 대한 링클레이터식의 답변으로 기획되었고, 그 기획 의도를 주연 배우들과 함께 대사 하나 하나로 옮기면서 모두가 기대해 왔던 예의 그 로맨틱한 현명함을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유지할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것이다. 대사는 찰지고, 배우들의 호흡은 속된 말로 죽여준다. 화면은 내내 따뜻함을 잃지 않고 주인공들이 걸어가는 그리스의 한 해변 도시는 훌륭한 배경 그 이상의 역할을 해내며 중요한 조연으로 자리매김한다. 이 삼부작의 앞선 두 작품을 좋아했던, 혹은 좋아해야만 했던 사람이라면 이 영화 역시 매우 좋을 것이다. 여전히 달콤쌉사름한 인생의 그 무엇을 효과적으로 표현해낸다. 반드시 기억해야만 할 것 같은 주옥같은 대사들이 쏟아진다. 그리고 그 속에 작은 깨달음들이 속속들이 발견된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만약 30세 이상이라면 더더욱, 영화를 보는 내내 찌푸린 미간과 올라간 입꼬리를 동시에 짓고 있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둘 사이에서 일어났던 지난 18년간의 사건사고들을 모두 따라잡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주름살 가득한 얼굴을 하고 나타난 이들이 “35세 이상의 여자들에게 좋은 점은 강간 확률이 줄어든다는 것” 이라던가 “난 너와 두 아이에게 내 인생의 모든 것을 다 줬어.” 라던가 하는 말들을 내뱉는 것을 보는 것은 때론 피곤하고, 때론 안타깝고, 때론 고통스럽지만 매 순간 흥미롭고 자주 웃기며 마지막에는 묵직한 미소를 지을 수 있게 한다.

나는 영화를 본 뒤 꽤 한참동안 극중 제시가 해변에서 다른 남자들과 함께 나눈, 그의 새로운 작품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했다. 영화에서 가장 이질적인 부분이자 의외로 영화의 속살을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부분이 아닌가 싶어서였다. 영화는 크게 다섯개의 덩치 큰 시퀀스로 구성되어 있다. 아들을 공항에서 배웅하고 숙소로 돌아오며 제시와  셀린느가 나누는 대화, 숙소로 돌아온 뒤 제시가 남자들과 나누는 대화, 숙소에 머물던 모든 성인들이 함께 테이블에서 나누는 대화, 제시와 셀린느가 호텔로 가는 길에서, 그리고 호텔 안에서 나누는 대화, 마지막으로 셀린느와 제시가 해변의 한 노천카페에서 나누는 대화. 두번째 시퀀스를 제외하면 모든 대화는 제시와 셀린느가 함께 하고 있고, 이들의 대화를 중심으로 전체 이야기가 진행된다. 제시가 남자들에게 자신의 작품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는 오직 그 시퀀스만이 이질적으로 느껴진 이유다. 제시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씩의 장애를 안고 있다. 안면인식 장애가 있어서 자신의 아내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남자, 반대로 모든 사람들을 너무 잘 알아 봐서 대도시조차 조그만 읍내처럼 느껴지는 사람 등등. 그들이 제시의 소설 속에서 엇갈리며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이야기를 창조해 낼 때 제시는 셀린느와 단둘이 오랜만에 함께 한 데이트에서 감정의 엇갈림을 조절하지 못해 극단적인 상황까지 연출해야만 한다. 극단적인 질병을 가진 제시의 소설속 두 주인공, 그리고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위험한 줄타기를 하며 늘 엇갈리는 말들만을 쏟아내는 제시와 셀린느. 소설과는 달리 이 둘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의자를 나란히 하고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하기 위해 애쓴다.

기타를 치는 셀린느의 모습에 반해 콘돔을 끼지 않고 나눈 첫번째 섹스에서 쌍둥이가 태어나고 그 이후 셀린느는 강간의 위협속에서 두 아이를 키워내야 하는 억척스러운 워킹맘으로, 제시는 그런 셀린느와 두 아이에게 인생을 다 바치고 이미 태어난 자신의 아들과 그의 엄마를 우울한 삶으로 몰아낸 뒤 전세계를 떠돌며 책을 파는 소설가로 늙어간다. 이들은 여전히 귀엽게 잠든 두 딸아이를 사랑스럽게 쳐다보고 골빈 미국 백인 여자 흉내에 낄낄거리며 삶을 즐길 줄 알지만, 아이들의 방해 없이 둘만이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기회는 몇년만에 처음 경험할 수 밖에 없는 그냥 보통의 엄마 아빠이기도 하다. 피곤한 일상과 쉽지 않는 삶의 굴곡, 그리고 그 사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가 옹골차게 버티고 서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 이들이 기나긴, 정말 기나긴 대화 끝에 깨닫는 것은 18년전 비엔나의 그 밤에서의 깨달음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그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야 할 것만 같다. 

2 thoughts on “Richard Linklater: Before Midnight

  1. 비포 선라이즈랑 비포 선셋을 참 좋아하는데 정말 기대되요!
    즐겁기보다는 뭔가 센티멘탈해질게 두려워서 선뜻 보러가지도 못하고 그러구 있는데 (비포 선라이즈가 벌써 18년전이구나 아아악..부터 시작해서 현실과 이상의 차이에 대한 괴리감, 뭐 그런거겠죠)..트릴로지의 마지막이니 그 여운을 충분히 느낄만한 날을 잡을려구요 헤헤.
    오래간만이 방학을 즐겁게 보내시는거 같아서 너무 부러워요!

    • 충분히 즐거운 영화예요. 그러니 마음놓고 보러 가셔도 좋을 것 같아요 ㅎ 낮보다는 밤에, 평일보다는 주말이 어울릴 것 같네요. 저도 이 시리즈를 무척 좋아하는데요 이 기나긴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어떤 품격을 지니고 있는 것 같아 인상적이었어요. 생각할 꺼리들도 많구요.

      전 한국에서 무척 잘 보내고 있어요. 그런데 미국이 그립네요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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