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탁스 MX

오늘 남대문 하이카메라라는 매장에서 중고 필름 카메라를 하나 샀다. 사장님이 너무 친절하게 잘 응대해 주시고 덤으로 케이스 및 줌렌즈까지 주셔서 황송하기 이를데 없었다. 시험 삼아 롤 하나를 찍어 봤는데 역시 펜탁스 특유의 색감을 느낄 수 있었다. 물론 DSLR 라인과는 많이 다르다. 리밋 렌즈의 쨍한 느낌도, 펜탁스 디지털 사진 특유의 뽀얗고 몽실거리는 느낌도 없다. MX 는 대신 뭐랄까, 아련한 색감을 선사한다. 여자친구가 유럽에서 찍어온 52롤의 사진을 일일이 넘겨 보면서 공통적으로 발견할 수 있었던 그 느낌. 굳이 표현하자면 사진으로 남은 과거를 정말 과거라고 인정하는 듯한 태도? 사진을 찍는 순간과 찍힌 사진이 현상되어 나오는 때까지의 시간적인 차이를 충분히 감안한 듯한 사려깊은 색감이 느껴진다.

필름 카메라를 말그대로 ‘지른’ 이유는 홍대의 한 카페에서 우연히 눌렀던 여자친구의 필름 카메라 셔터때문이다. 찰칵 거리며 손 끝으로 전해지는 그 미약한 자극에 그만 십년도 더 된 과거의 추억이 살아나 버렸다. 사진을 무척 잘 찍던 친구들 사이에 있었던 나는 아버지의 카메라인 FM2 를 들고 무작정 따라 나가 카메라 찍는 법을 배웠다. 당시 대학교 새내기들에게 필름값과 현상, 인화값은 만만치 않은 비용이었는데 우리는 학교 식당에서 가장 싼 밥을 먹을지언정 사진 찍는 것을 멈추지는 않았던 것 같다. 어떤 친구는 여자친구 얼굴만으로 가득찬 필름을 가져왔고, 나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사진들에 비싼 흑백 필름을 낭비했다. 오늘 필름 두롤을 새로 샀는데 그 당시 필름값과 그리 큰 차이가 없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같은 상품의 가격이 인플레이션의 영향을 받지 않았다는 것은 그 산업이 쇠퇴하고 있다는 좋은 증거다. 당구장, 신문, 탁구장등이 그러하다. 필름 사진도 사양 산업이다. 디지털 카메라는 사진을 찍는 기본 철학 자체를 바꾸어 놓았다.

십년전 사진을 가르쳐주던 친구가 그랬다. 백장을 찍어서 한장을 건지면 대박이라고. 그 한장을 위해 사진을 찍으라고. 디지털 카메라는 너무 쉽게 백장을 찍게 만드는 것 같다. 아무렇지도 않게 툭, 툭 눌러 버려도 금방 좋은 사진이 나온다. 요즘에는 아이폰과 인스타그램이면 왠만큼 만족스러운 사진을 건질 수 있다. 이러한 속도전이 나로 하여금 필름 카메라의 느린 호흡을 그리워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한장을 위해 골똘히 생각하고, 순간을 기다리고, 호흡을 잠시 멈추고 떨리는 손으로 살짝 누르는 그 기분을 느끼고 싶었던 것 같다. 기다리던 순간이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사진을 찍는 사람을 조금 더 겸손하게 만든다. 나는 결코 좋은 사진을 찍는 사람은 되지 못하겠지만, 사진을 통해 무언가를 배울 수 있는 사람 정도는 될 수 있을 것도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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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thoughts on “펜탁스 MX

    • 역시 거기 가 있었군! 고모부께서 펜탁스를 쓰신 건 처음 알았네.

  1. 흡사 외국인의 눈으로 본 서울 같습니다. 약간 낯설고, 뭔가 새롭네요. 세 번째 사진 특히 좋습니다. 여유로움이 한껏 묻어 나네요.

    • ㅎㅎ 아무래도 한국 밖에서 오래 생활하다 보니 한국을 조금은 더 관찰자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되더라구요.

  2. 아.. 그리고 나중에 메일 통해서 유학 앞두고 영어 준비 어떻게 하셨는지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요? 바쁘실 것 같아서 매우 조심스럽습니다마는..

    • 감사합니다. 사진 색감이 독특해서 재미있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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