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카프카: 소송

<소송> 은 카프카 특유의 논리 정연한 문체와 부조리한 상황이 충돌을 일으키며 발생하는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차있다. 잘나가는 젊은 은행가 K 는 영문도 모른채 체포되고 법적 절차를 밟게 된다. K 의 목적은 오로지 이 억울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것. 그는 자신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고 그 잘못을 어떤 절차를 통해 무죄로 입증해야 하는지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어떤 수단과 방법을 다해서라도 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이다. 때문에 그는 변호사의 도움을 받으러 가서 그의 정부를 탐하고 화가를 매수해 정보를 빼내려 한다. 그의 행동들은 상황을 해결하는 데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듯 보이며, 그가 내뱉는 말들은 늘 불안에 사로잡힌 듯 느껴진다. 소설은 카프카의 실제 법조인으로서의 경험을 십분 살려 그가 바라보는 법이라는 형이상학적 체계가 한 인간의 실존을 어떻게 갉아 먹을 수 있는지 효과적으로 보여준다. 실존하는 자아를 법이라는 권위와 대비시켜 실존 자체가 위협받을 수 있는 상황을 묘사하는 능력이 정말 탁월하다. 점점 벌레로 변해가다가 결국 하찮은 종말을 맞이하고야 마는 <변신> 의 주인공처럼 K 역시 주변 상황들과 자신의 어리석음으로 인해 비극으로 치닫게 되는데, 소설 말미에는 과연 K 가 실존하는 것인지, 아니면 K 를 하나의 범죄자, 혹은 벌레로 만들어 가는 법이라는 테두리가 그의 실존을 결정하는 것인지 생각해보게끔 만든다.

요즘은 그런 생각이 자주 든다. 법이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를 결정짓는 주요 요인들중 하나가 법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딸을 성폭행한 아버지가 술에 취해 있었다는 이유로 감형이 되고 여중생을 집단 성폭행한 청소년들이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일찍 풀려난다. 나는 처벌이 능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가끔 법이라는 권위가 지나치게 온정주의로 흐르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을 떨치기 어렵다. 그런 한편에서는 생존을 위해 빌딩 옥상으로 올라간 노동자, 혹은 크레인에서 내려오지 못하는 노동자의 삶을 아예 거두어 버리는 매서운 형벌로서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 법이다. 이 법이란 것이 누군가 혹은 어떤 집단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면 온정주의 자체를 비난할 이유는 없을 것이나, 그 기준 자체가 어떤 권위자 혹은 특정 집단의 기준으로 인해 자의적으로 결정되어진다면 법은 다른 어떤 집단에게는 삶을 위협하는 하나의 무기로서 받아들여 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K가 저지른 죄가 무엇인지 독자는 끝까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이 미완성 소설의 말미, 대성당에서 K와 신부가 나누는 대화속에 등장하는 우화에서 카프카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단초를 발견할 수 있다. 법을 지키는 문지기는 말한다. 이 문은 오로지 당신만을 위해 만들어졌다고. 하지만 이제 이 문을 닫아야 겠다고. 법이 가지는 자의성과 그 혼란 속에서 완전히 다른 객체로 이해될 수 있는 실존적 자아의 허약함. 카프카가 법을 공부하고 실제 법을 집행하며 깨달은 현대 사회의 구조적 병폐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열린책들, 김재혁 옮김.

옥상달빛 at K-Art Hall, Seoul

여자친구의 친구의 남자친구의 도움으로 이 공연을 공짜로 볼 수 있었다. 전혀 계획에 없던 공연을 공짜로 감상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당연히 좋은 공연이라고 생각했다. 0원보다 더 큰 가치를 나에게 주었기 때문이다. 그게 비록 epsilon 만큼일지라도 플러스는 플러스니까. 문제는 이 공연의 티켓 가격을 온전히 다 치루고 온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겠느냐는 것이다.

5만 5천원. 이 공연을 인터파크에서 예매했을 때의 티켓 가격이다. 실제로 가본 케이 아트홀은 아주 좋은 공연 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크지 않은 규모에 적절한 수준의 음향 시설과 편안한 좌석을 가지고 있는 공연장을 대관하려면 그정도 가격을 책정해야 수지타산이 맞을 수도 있다. 옥상달빛 정도 되는 위치를 가지고 있는 뮤지션은 물론 나흘 연속 서울 공연에서 몇백석 규모의 공연장 좌석을 솔드아웃시킬 수 있을 정도의 티켓 파워를 가지고 있겠지만, 그 공연을 5만원 넘는 가격을 지불하고 오는 사람들이 대부분 대학생들, 혹은 옥상달빛이 데뷔 초반 타겟으로 삼았던 88만원 세대라면, 이거 뭔가 심하게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옥상달빛은 유희열의 전폭적인 서포트로 ‘뜬’ 뮤지션이다. 이들이 현재 음악계에서 가지고 있는 ‘위상’같은건 솔직히 잘 모르겠다. 언더그라운드에서 시작해 아직도 언더에 적을 두고 있지만 간간히 공중파 방송에도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밴드라는 정보 정도뿐. 만약 유희열의 라디오방송에 출연해서 입담을 뽐내지 않았다면, 노골적으로 88만원 세대를 노리고 ‘우리는 가진 것도 없고 빽도 없지만 그나마 그렇게 없는게 장점이다!’ 라는 대책없이 보수적인 힐링 노래를 타이틀곡으로 내세우며 사회적 현상과 맞물려 이슈화되지 않았다면 과연 현재 케이아트홀 수준의 공연장을 대관할 수 있었을런지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이들의 140분 남짓한 공연에 5만 5천원의 비용을 지불하고 오는 사람들이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용돈 쪼개가며 부산에서 상경해 당일치기로 보고 돌아가는 대학생이라면 이게 과연 이성적으로 합리적인 판단인가 생각해보게 된다.

공연은 예상대로 아주 적은 수의 노래와 아주 많은 양의 대화로 이루어졌다. 이들은 곡과 곡 사이에 상당히 많은 코멘트를 했는데 공연을 보다보면 과연 이게 노래를 주제로 한 공연인지 토크를 주제로 한 코트 콘서트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중간에 게스트로 나온 ‘인디’ 뮤지션들 역시 대부분의 시간을 수다로 때웠고, 1부와 2부로 나뉜 공연의 2부는 우습게도 네곡 정도만을 부르고 끝나버렸다. 이쯤되면 과연 5만 5천원을 낸 사람들이 이 공연에서 기대하는 바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옥상달빛의 공연에서 이들이 기대하는 것은 즐겁게 웃을 수 있는 개그가 아니었을까. 유쾌한 대화 사이 사이에 간간히 들려주는 듣기 편한 -그래서 그들이 부른 노래들이 구분조차 잘 되지 않을 정도로 평이한 – 노래들에서 위안을 찾고 그렇게 ‘힐링’ 하다가 집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을까. 그게 5만 5천원 이상의 가치를 할까?

여자친구는 “그조차도 고파서” 라고 설명해주었다. 그정도 수준의 공연조차 한국에선 쉽게 찾기 어렵기 때문에 –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의해 – 자연스럽게 티켓 가격이 오르게 된다는 것이다. 일리 있는 말이다. 한국에서 각종 음악 페스티벌이 장사가 잘 되어서 대기업들의 자본이 흘러들어오는 이유도 다 한국 음악팬들의 갈증때문이다.

난 그래서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리고 분하다. 그토록 음악을 좋아하고 공연에 목말라 있는 사람들이 어째서 씨디 한장, 음원 하나 제대로 구입하지 않는단 말인가. 아니 진정으로 공연을 좋아한다면 최소한 뮤지션들이 공연으로 먹고 사는 시스템을 만들어줄 정도의 수요를 보여주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들은 연인과 함께 데이트하기 좋거나 쿨해 보이기 좋은 –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찍어서 올리기 좋은 – 페스티벌은 마치 반드시 가야 하는 것처럼 트위터에 적어대면서 전국 모든 레코트샵들의 씨를 말리고 있고 다운로드를 돈내고 하면 멍청한 사람이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 이건 시장 논리로 설명할 수 없는, 기본적인 시민 의식중 한 부분이 심하게 뒤틀려져 있음을 뜻한다. DVD 시장이 한국에서 궤멸당한 것도 궤를 같이 한다. 즉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거나 페스티벌에 가서 방방 뛰는건 하나의 실체적 경험으로써 삶에 유의미한 혜택을 줄 수 있지만, 무형의 음악을 듣거나 다운받아 봐도 화질에 큰 차이가 없는 영화를 몇만원씩 돈주고 사서 보는 것은 아무런 가치를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다르게 말하면 연인과 혹은 친구와 함께 외부에서 즐길 수 있는, 그래서 페이스북이나 인스타그램에 사진을 찍어 올리면 좋아요가 막 찍히는 그런 경험은 돈을 지불할 용의가 있지만 방에 틀어 박혀 혼자 즐기는 경험에는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걸 천박함이라는 단어 외에 다른 어떤 것으로 치환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돌아오는 길에 “청춘콘서트2” 포스터를 보았다. 현징영이나 룰라같은 왕년의 뮤지션들이 다함께 모여 공연을 여는 모양이다. 수요를 확인했기 때문에 가능한 기획이었을 것이다. 유희열이 스케치북에서 이 컨셉으로 방송을 내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기획이다. <나는 가수다> 에서 왕년의 가수들이 모여 90년대 히트곡들을 다시 부르지 않았다면 이 수요는 모이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방식도 좋다. 어떻게 해서든지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수요를 기획자들에게 보여주어야 한다. 가장 좋은 방식은 음악을 구입하는 것이다. 유의미한 비용을 지불하고 음악을 듣는 사람들이 한국에도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야만 한다. 그리고 이들이 힘겨운 발 한걸음을 움직여 공연장을 찾을 수도 있다는 것을 확인해야 한다.

음악계도 답답하다. 뮤지션은 공연으로 먹고 살아야 한다. 음반을 내면 당연히 투어를 돌아야 하고 투어를 돌며 실력을 검증받고 인지도를 쌓아 다음 음반을 녹음할 돈을 마련한다. 그 와중에 뭐 기회가 닿으면 공중파에도 출연하고 행사도 뛸 수 있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건 공연을 준비한답시고 몇달 전부터 얼마나 노력하는지 생색은 있는대로 다 내고 공연은 달랑 사나흘 해버리고 마는 뮤지션들이 진짜 뮤지션들인지 의심스럽다. 투어를 돌 만큼 전국적으로 뮤지션들을 환영해주는 수요도 없고 공연장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며 공연으로는 수익을 낼 수 없다는 변명도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반대로 공연으로 먹고 살 정도의 능력을 가진 뮤지션들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생각하면 그 또한 걱정스러운 수준이다. 막말로 미국에서 전국 투어를 도는 몇몇 괜찮은 인디 밴드들의 오프닝 밴드들을 아무나 하나 골라서 한국에 툭 떨어뜨려 놓으면 그들보다 더 죽이는 음악을 만들어낼 수 있는 수준의 뮤지션들이 한국에 몇이나 있을까. 별로 없을 것 같다. 아마추어리즘과 인디정신은 분명히 구분되어야 한다. 치기어린 도전과 거대 자본을 거부하는 독립적 소자본의 운영 정신은 반드시 구분되어 생각되어야 한다. 가끔 이 둘을 헷갈리는 뮤지션들이 보인다. 그리고 그들이 떡하니 그 적은 자본을 빨아먹으며 음반을 내는 모습도 목격하게 된다.

난 옥상달빛이 잘못된 공연 기획을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만 옥상달빛으로 상징되는 인디-오버 사이 경계에 위치한 뮤지션들의 ‘가치’ 에 거품이 들어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고, 이들이 이런 거품을 껴안으면서까지 공연을 그렇게 지나치게 좋은 곳에서 해야만 하는 척박한 환경이 못마땅한 것이다. 사운드가 조금 구려도, 좌석이 하나도 없어서 두시간동안 서서 봐야 하는 공연장이어도 기꺼이 보러 가고 싶은 뮤지션들이 한국에도 많다. 2,3만원 정도면 하루 저녁 가볍게 스트레스를 풀 수 있을 정도의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리고 그 정도 수준의 공연을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도 분명히 많다. 많을 것이다. 문제는 그런 수요자와 공급자가 만날 수 있는 시장이 형성되어 있지 않고, 시장 형성을 위한 초석인 문화가 형성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뭐가 진짜 잇하고 쿨하고 핫한지 헷갈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아마 결혼식장에 가면 줄서서 돈내고 식권받은 다음 결혼식은 보지도 않고 밥만 먹으러 가는 문화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일 것 같다. 진짜 멋진 사람은 자신을 돌보는 사람이다. 남에게 보여주려고 셀카 포즈 고민하는 사람이 아니라.

버블, 버스트, 실질, 명목 가치.

조금 나이브하게 이야기를 시작해야 할 것 같다. 나는 여전히 전세계 경제의 가장 큰 문제가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일치하지 않는 가격 왜곡 현상이라는 의구심을 떨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맑스는 여전히 옳다. 이러한 왜곡 현상의 기저에는 가장 밑바닥에서 신음하고 있는 저평가된 노동가치가 있다.

http://bit.ly/12ex9fO

예가체프 커피 한잔이 미국이나 한국의 카페 테이블에 도착하는 동안 이 커피를 실질적으로 재배하고 수확해서 다음 유통업자에게 건네는 1차 생산자는 굶어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놓여있다.

http://bit.ly/18nuamF

박근혜 대통령은 “시간제 일자리도 좋은 일자리” 라며 사회적 편견을 거두어내기 위해 이름을 바꾸어야 한다고 말했다.

유니클로나 자라같은 브랜드들의 옷을 싸게 구입할 수 있는 것, 현대 IT 기술이 집약된 아이패드나 아이폰을 단 몇백불에 구입할 수 있는 것은 혁신적인 기술의 발전으로 인한 원자재 생산비 절감때문이 아니다. 원단이나 원자재를 생산하는 공장에서 근무하는 노동자들의 임금히 형편없이 낮기 때문이다. 생산 원가를 낮추는 일등공신은 턱없이 낮은 노동 가치 지불에 있다. <Poor Economics> 에서 케이스 스터디를 통해 잘 밝혀내고 있는 것처럼 제3세계 국가에서 하루 $10 를 벌지 못해 굶어 죽어가는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이들의 노동가치는 정말 이토록 낮은 것일까? 이들에게 하루 세끼 먹고 살 수 있는 돈을 쥐어주지도 못하는 다국적 기업들이 그들의 임원들에게는 몇백만달러의 보너스를 쥐어주는 것을 보면 이들의 재정상태가 썩 나빠보이는 것 같지도 않다.

대기업들은 다수의 소비자들을 상대로 인질극을 벌이고 있다. 너희들과 아무 상관없는 중국이나 방글라데시의 노동자가 굶어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지금 당장 너희들이 먹고 써야 하는 이 상품에 대한 가격을 두배 더 지불해야 해, 라고 사람이 가지고 있는 본능적 이기심을 극단적으로 이용해 윽박지르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이라면 그냥 눈 딱 감고 자신의 안녕을 위해 이기적인 선택을 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한달에 이, 삼만원씩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채 꽤 쿨해 보이는 자선단체에 기부하고서는 자신의 할일을 다 했다는 식의 표정을 짓곤 할 것이다. (그리고 조금 더 쿨해 보이고 싶은 사람들은 교보문고에 가서 <왜 세계의 절반은 굶주리는가> 따위의 쓸데없는 책을 읽고는 비분강개해 하는 척을 하겠지. 책 제목이 살짝 보이게 찍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는 것은 덤.)

경제 활동의 원칙이 무시당하는 상황이다. 지구상의 모든 것들은 태양 에너지에서부터 시작되듯, 현대 사회에서 생산되는 모든 상품들은 인간의 노동력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러니까 모든 가격 결정의 첫번째 원칙은 한 상품이 판매 완료되는 시점까지 모든 과정에 개입한 모든 노동력에 대한 올바른 가치를 측정하는 데에 있다. 이것이 왜곡되기 시작하면 명목 가치와 실질 가치가 달라지게 되고 부의 올바른 재분배가 실현되지 못하게 된다. 권력 관계 (요즘은 갑질이라고들 표현하던데..) 가 이 가격 결정 과정에서 작용한다. 갑중 갑인 다국적 기업은 치열한 시장에서의 가격 경쟁에서 살아 남기 위해 원가를 어떻게든 낮추어야 한다. 손해를 보고 팔 수는 없는데 (아마존같은 경우 컨텐츠 판매를 촉진시키기 위해 킨들을 원가보다 더 낮은 가격에 판매하기도 했다) 원가를 획기적으로 낮추는 기술 혁신은 좀처럼 일어나지 않는다. 거기에 더해 대부분의 최종 판매 시장은 과점 이상의 경쟁성이 있으므로 한 기업이 시장 가격을 마음대로 결정할 수도 없다. 그러니까 결국 힘없는 공장 노동자들만 쥐어짜게 되는 것이다. 이들 가난한 노동자들은 그들의 입장을 대표할 수 있는 힘있는 단체도 없고 언론의 파워도 없으며 지금 다니고 있는 직장을 관뒀을때 쉽게 그 수입을 대체할 수 있는 대안도 딱히 없다. 입에 풀칠이나 할 수 있으면 다행인 그런 상황의 노동자들을 요리조리 구워 삶으며 임금 상승을 최대한 억제하는 것이 다국적 기업들의 흔한 갑질이다. (이건 한국 내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노동자들은 더 적은 수입을 가져가게 되고, 다국적 기업은 결국 그토록 원하던 가격 경쟁력을 확보해 더 많은 수입을 가져가며, 이들이 만들어내는 상품을 구매하는 다수의 소비자들도 치열한 가격 경쟁이 혜택을 보는 수혜자가 된다. 즉 다수의 소비자들만 그들이 소비하는 상품을 만들어내는 노동자들의 상황을 무시해 버리기만 한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이는 상황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단기적으로는 소비자들도 혜택을 받는 것처럼 보이는 이 상황이 장기적으로는 부메랑처럼 돌아와 그들의 가슴에 비수를 던질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아이폰을 구입하는 대다수의 소비자들, 예가체프 커피를 먹는 다수의 소비자들 역시 한낱 임금 노동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받는 임금 역시 그들이 제공하는 노동 가치에 비해 현격하게 낮게 평가되고 있다. 결국 자신들도 누군가에게 피를 빨아 먹히는 것을 모른채 다른 사람의 피를 빨아 먹음으로써 생산해낸 상품을 맛있게 소비하고 있는 셈이다. 그 위에 군림하고 있는 다국적 기업들과 일부 수퍼갑들에게 돌아가는 부의 불공평한 재분배의 최종 희생양이 자신인줄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박근혜가 이야기하는 시간제 일자리의 장점은 유연한 노동시장이 기업들에게 주는 리스크 감소에 근거하고 있다. 쉽게 말해 임금 계약이 초단기적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뉴 케인지안쪽에서 말하는 임금의 경직성이 발생하지 않는 것이고, 조금 더 완전한 노동 시장에 가까워지다 보면 기업쪽에서는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비하기 쉬워진다는 얘기다. 한마디로 “짜르기 쉬운” 노동 시장 구조가 기업들에게는 조금 더 구미가 당기는 쪽인 셈이다. 여기에 더해 한국은 시간당 임금이 턱없이 낮게 책정되어 있다. 한시간에 오천원씩 벌어서는 서울에서 생존하기 어렵다. 음식이나 기름값, 의류 따위의 생활 물가는 몇년 사이 엄청나게 치솟았는데 그에 반해 시간당 최저 임금은 더딘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박근혜의 주장대로 시간제 일자리가 “좋은” 일자리이냐, 하면 그건 전적으로 기업의 입장만을 대변하는 나이브한 의견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을 것이다. 일단 최저 임금을 현재의 두배 이상으로 책정해야 뭔가 나댈수 있는 껀덕지가 생길 수도 있을 것이다.

부동산도 그렇고 물가가 상승하는 모양새도 그렇고 한국의 경제 상황은 버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실제 그 땅과 집이 가지는 가치보다 부동산 유리 벽면에 붙은 가격표는 턱없이 높은 액수를 제시하고 있다. 간장 게장 세마리에 6만원을 넘는 장바구니 물가는 사실상 한국 은행이나 정부가 물가 조절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이런 상황에서 임금은 물가 상승률을 따라가지 못하고 실질적인 부동산 거래는 거의 일어나지 않고 있으며 주식 시장은 개미들의 무덤일 뿐이다. 이 모든 것이 외부 충격에 취약한 경제 구조속에서 암덩어리처럼 점점 제 살집을 키워 나가고 있는데 만약 한국의 경제 건전성이 외부 충격을 더이상 견뎌낼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면? 그때에는 일본처럼 20년짜리 장기 불황속으로 들어간다고 해도 할말이 없을 것이다. 이른바 버스트다. 청년 실업은 50% 를 넘나들게 될 것이고 대기업들은 연쇄 부도속에서 외국의 기업들에게 팔려 나갈 것이다. 환율은 치솟을 것이고 하루 두끼만 먹자는 캠페인이 벌어질 수도 있다. 당장 돈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은행 앞에 장사진을 칠 것이고 은행들은 소위 요구되는 인출 금액을 마련하지 못하는 뱅크런 상황에 놓여 붕괴될 것이다. 극우파들은 활개를 칠 것이고, 외국인 노동자들은 매일 폭력에 시달려야 할 것이다. 범죄율은 치솟고 자살율은 압도적으로 세계 최고치를 경신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올때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사실상 아무 것도 없다.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세계 경제는 이미 노동 가치를 지난 수십년동안 무시해 오며 끊임없이 가격을 교란해 왔기 때문이다. 한국도 그중 하나이 톱니바퀴로 들어간지 오래이고, 때문에 지금 현재 한국이 할 수 있는 것은 조금 더 최선을 다해 외부 충격에 버티어낼 수 있는 경제 구조를 만드는 것 밖에는 없다.

서울, 서울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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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에 온지 대충 일주일쯤 됐다. 가족들과 반갑게 해후했다. 배가 부른 누이와 그런 누이가 외롭지 않게 옆에서 잘 보살펴 주는 자형, 조금씩 노인이 되어 가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만났다. 한국 음식도 많이 먹었다. 여자 친구와 매일 만나고 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들을 겪고 있다.

예상할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서울이라는 거대한 도시의 풍경이다. 사람들은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어 가고 있고 공기는 점점 더 나빠지는 것 같다. 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다른 대도시들에 사는 사람들에 비해 여전히 매우 착하고 순박하다. 순수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몹시 화가 나 있는 듯 보인다. 양보는 완전히 사라졌고, 타인의 공간을 침범하고도 사과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기본적인 에티켓의 문제라기 보다는, 도시 전체가 잔뜩 날이 곤두서 있는 듯한 느낌이다.

이들을 어떻게 달래야 할지 잘 모르겠다. 밤 늦게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그래서 늘 생각이 많다. 며칠전 집 근처에 있는 어린이집에서 밤 열한시쯤 퇴근하는 아주머니 서너명이 “몇시간 뒤에 또 봐요” 하고 인사하는 소리를 엿듣게 되었다. 아마 야근을 마치고 다음날 아침 일찍 또 출근해야 하는 상황이었나 보다. 순간 마음이 쓰렸는데, 이내 그 무리중 한명이 “아카시아 꽃 향기가 너무 좋다” 며 활짝 웃었고, 그들은 잠시 가던 발걸음을 멈추고 아카시아 꽃 향기를 맡으며 짧은 꽃놀이를 즐기기 시작했다.

이런 사람들이 왜 이토록 힘들게 살아야 하는지, 이 무너진 시스템을 어떻게 회복하면 좋은지에 대해서 생각하고 있다. 참 착한 사람들이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보며 고통을 받는 시대와 공간은 무언가가 잔뜩 이그러져 있음이 분명하다. 문제는 이러한 상황이 필요 이상으로 지속되다 보면 많은 이들이 이 상황에 굴복하고 마치 이것을 당연하게 받아 들이게 된다는 것이다. 희망을 상실하는 것이 내가 가장 두려워 하는 상황이고, 서울은 점점 그러한 결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나는 스스로를 소개할때 ‘서울 사람’ 이라고 할 정도로 서울이라는 공간에 정체성을 투영해 오곤 했다. 그런데 요즘은 이 서울이라는 곳이 점점 괴물처럼 변하가는 건지, 아니면 내가 서울의 빠른 변화의 속도에 따라가지 못하고 비틀거리고 있는건지 잘 모르겠다. 분명한건 우리가 서로 점점 멀어져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바즈 루어만: 위대한 개츠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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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기 전 광화문 교보문고에 들렸다. 그곳에서 이리 저리 둘러보던 중 요즘 한국인들이 즐겨 읽는 책이 무엇일까 궁금해져서 베스트셀러 코너로 갔다. 놀랍게도 문학쪽은 각종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위대한 개츠비> 로 도배되어 있었다. ‘아마도 확실히’ 영화의 영향이겠지 싶었다. 개봉하는 영화의 화제성에 의해 읽을 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의 문화적 기호보다 그러한 ‘일부’ 독자들에 의해 휘청휘청 움직이는 얄팍한 출판 시장의 두께에 더 마음이 시렸다.

바즈 루어만의 작품을 많이 보지는 않았다. <로미오 + 줄리엣> 이나 <물랑 루즈> 정도? 남들이 보는 만큼만 봤다. 영상이 극도로 화려하고 과장되어 있으며 그 안에서 자신이 구현하고자 하는 세계를 충실히 표현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감독, 그리고 대중 음악을 창의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것 정도 (사실 라디오헤드의 음악도 <로미오 + 줄리엣> 을 통해 알려진 바가 크지 않나). 이 <위대한 개츠비> 에서도 루어만의 이러한 특징, 혹은 장기들은 여전히 빛을 발하는 것 같다. 영상은 무척 화려하고, 시대적 고증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 자신이 생각했던 이미지를 극단적이고 자극적으로 표현하는 데에 온 신경을 집중하는 듯 하다. 개츠비의 저택에서 벌어지는 파티 장면이 사실상 이 영화의 하일라잇을 장식한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쓰이는 감각적인 음악이나 디테일등은 충분히 흥미를 불러 일으킬만 하다.

줄거리를 이야기하기 전에 시각 효과를 먼저 이야기하는 이유는 사실 이 영화에서 서사 구조가 차지하는 비중이 극히 미미하기 때문이다.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가 아니었다면 이 영화는 화려한 영상만으로 가득찬 빛좋은 개살구에 지나지 않을 뻔 했다. 원작 소설이 가지는 힘을 최대한 이용하며 영화적 구성에 필요한 부분만을 영리하게 추출해 내어 아주 심플한 한편의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반전도 없고 극적인 전개도 없다. 원작 소설이 워낙 유명하다 보니 사람들의 관심사는 원작의 서사 구조를 어떻게 비틀까가 아닌, 원작에서 글로 표현된 부분들을 루어만이 어떻게 시각적으로 형상화 시킬까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던 듯 하고, 루어만은 관객들의 기대를 그만의 방식으로 충실하게 충족시키는 듯 보인다. 개츠비와 톰의 저택은 화려하고, 그들이 여는 파티 장면은 빈틈이 없으며, 그가 ‘창조’ 한 1920년대 뉴욕의 풍경은 무척 흥미롭다. 시각적으로만 말이다. 다른 루어만의 작품들처럼 그 안에서 어떤 시대적 함의를 찾아내려고 하면 헛수고일테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이들이 입고 나오는 의상들, 화면에서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 수많은 디테일들, 그리고 끊임없이 변주되어 나오는 현대 대중 음악들을 확인하는 재미만으로도 극장에서 이 영화를 볼만한 이유는 충분한 것 같다.

디카프리오는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안정적인 연기를 펼친다. 그는 자신이 쌓아올린 필모그래피를 이용해 개츠비에 최적화된 인물이라는 공감을 충분히 이끌어낸다. 그러니까 꽃미남 아이돌 스타로 시작해 오랜 시간 차근차근 부와 명성을 획득한 그가 속절없이 무너지는 개츠비의 이미지를 형상화하는 것이 얼마나 환상적인지 오랜 커리어를 거치며 아로 새긴 주름살과 후덕한 살 그 자체로 증명하고 있는 듯 하다. 여전히 나는 디카프리오의 연기톤에 열광하지는 않는다. 그는 연기를 무척 잘 하는 배우지만, 연기를 무척 잘 할뿐 극중 인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지는 않는다. 굳이 비교를 하자면 다니엘 데이 루이스나 로버트 드 니로와 같은 매소드 배우들의 급은 절대 아니며 제니퍼 로렌스나 앤 해서웨이같은 신진급 스타들과 비교해서도 밀리는 감이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카프리오는 단순히 아이돌 스타덤에 갇혀 버릴뻔한 그의 커리어를 순전히 노력과 열정만으로 극복해낸 희귀한 케이스다. 마틴 스코세지와 같은 작가들과 어울리며 작품을 읽는 눈을 확보하고 다니엘 데이 루이스등과 협연하며 연기가 무엇인지 배워나간 그는 어느새 이 시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중견 남자 배우들중 하나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마치 이상순등과 어울리는 이효리같달까. 난 이효리가 5년, 10년뒤 엄청 뛰어난 음악적 성과를 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엄정화가 일렉트로닉 음악의 여왕이 될줄 누가 알았겠는가) 작품을 고르는 역량이나 작품 속에서 보여주는 연기의 질이 항상 관객의 일정 기대 수준 이상을 채워줄 수 있을 정도로 물이 오른 것 같다.

Woody Allen: To Rome with Love

평생 뉴욕을 벗어나 영화를 찍어본 적이 없는 우디 앨런은 영화제작이 가능한 수준의 펀딩을 더이상 구할 수 없게 되자 유럽으로 건너가 영화를 찍기 시작한다. 우선 뉴욕과 가장 비슷한 환경의 런던에서 <매치 포인트> 와 <스쿠프> 를 찍었고, 바르셀로나로 건너가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를, 파리에서 <미드나잇 인 파리> 를 찍었다. 그리고 이제 로마까지 건너가 <로마 위드 러브> 를 내놓았다. 이 ‘유럽 연작’ 들은 공통적으로 내러티브가 어느 순간 확 비틀어진다는 특징이 있다. 그렇게 비틀어진 서사 구조가 몇번 더 완전히 무너진 후에 엉뚱한 결말로 치닫는 빠른 속도감에서 희열을 느끼고, 기대를 벗어난 결말이 던지는 메시지가 잔뜩 꼬인 서사구조와 조응하면서 발생하는 화학작용에서 입가에 살짝 미소를 머금게 되는 것이 이 유럽 연작들이 가지는 공통적인 장점이었다. 마치 홍상수처럼 우디 앨런도 같은 구조의 이야기를 다른 배경에서 반복적으로 전달하는 것에 흥미가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였다. 우디 앨런은 뉴욕을 벗어난 뉴요커가 유럽의 주요 도시들에서 받음직한 인상 그 이상을 결코 발견하지는 못한다. 하지만 그 통속적인 도시들의 특징들을 자신이 비틀어 버리는 서사 구조와 대구처럼 반응하게 만드는 능력이 워낙 탁월했기에 결코 상투적으로 비추어지지 않았던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로마 위드 러브> 는 우디 앨런이 최근작들에서 가지고 있던 장점들이 모두 거세된, 아주 지루하고 볼품없는 영화가 되어 버렸다. 캐릭터들은 에너지를 상실한채 전형적이고 일차원적인 모습만을 답습하고 있고 로마라는 환상적인 배경은 줄거리와는 아무 상관없이 마치 컴퓨터 그래픽으로 땜질한 배경처럼 인물들과 동화되지 못한채 겉돈다. 그의 영화가 황상적인 시각 효과를 보인 적이 거의 없긴 하지만 (<Everyone Says I Love You> 정도?) 환상적인 도시를 배경으로 영화를 찍는다면 최소한 그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정체성을 서사 구조와 연결시킬 정도의 궁리는 했어야 했다. 그마저도 결여되어 있다. 전작인 <미드나잇 인 파리> 와 비교해서 상당히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이들이 결말에서 하나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즉 각각 자신들의 사건사고가 매듭지어지는 과정에서 왜 이토록 많은 인물들이 등장했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도 제시되지 않는다. 그저 정신없이 피곤할 뿐이다. 전작들과 공유하는 유일한 특징인 무너지는 서사구조는 그냥 무너져 내릴뿐, 그 안에서 어떠한 희열도 느낄 수 없다. 우디 앨런 자신이 분하는 역만 끊임없이 수다를 떨어 대는데 그 모습조차 과거 자신의 뉴욕 시절 영화들의 대본에서 억지로 끄집어 낸 듯한 화석을 보는 느낌이다. 한마디로 생명력을 느낄 수 없는 영화다.

 

Benjamin Lytal: A Map of Tulsa

평범한 삶을 살던 한 소년이 자유분방한 – 그와는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는 – 한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고 이별을 하며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이야기는 너무 식상한 주제다. 남자는 여자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성숙해 간다. 이건 진리다. 그래서 보통 이런 류의 이야기는 어떤 여자를 만나 어떤 방식으로 한 소년이 남자로 변해가는지를 얼마나 디테일하고 현실감있게 그려내는지에 초점이 맞추어진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환희와 아픔을 모두 경험하며 무언가를 “깨닫는” 남자의 성장 결과로 어떤 엔딩을 맞이하게 된다. 그렇게 성장하지 않으면 마치 여자를 만나고 사랑했던 일들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사실은 꼭 그런 것도 아닌데 말이다.

<A Map of Tulsa> 는 평범하게 시작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주 평범한 삶을 살아가는 소년, Jim 이 동부에 있는 대학에서 처음 1년을 보내고 막 부모님이 사시는 툴사로 돌아오는 과정으로 시작한다. 동부에 비해 시간이 참 느리게 가는 심심한 동네 툴사에서 그는 Adrienne 라는 여자를 만나게 된다. 지역 유지인 석유 기업 가문의 딸인 그녀는 그곳에 있는 펜트하우스에 살며 매일밤 파티를 연다. 그 누구와도 사귀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소유되지 않지만 그 누구와도 잘 수 있는 자유분방한 삶을 사는 그녀는 짐에게 관심을 보이고, 결국 하룻밤을 같이 보내게 된다. 짐은 그녀를 “여자친구” 라고 생각하지만, 정말 그녀가 그의 여자친구인지는 작품내에서 명확하게 그려지지 않는다. 이 작품은 짐이라는 남자의 눈으로 에이드리엔을 바라보는 1인칭 시점이며, 때문에 독자들은 짐의 기억이 얼마나 왜곡되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짧은 여름방학동안 이 둘이 보내는 시간을 다루는 이 소설의 1부를 읽어내려가야 한다. 짐은 그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노래를 부르며 자유로운 삶을 사는 그녀를 동경한다. 이와 동시에 지극히 평범하다 못해 지리멸렬한 삶을 사는 자신을 깨기 위해 노력한다. 남자의 이 미성숙한 도전은 종종 치기어린 일탈로 이어진다. 총을 한번 쏴 본다던가, 여자에게 아무런 설명없이 삐진채 도망가버리는 행동 따위 말이다. 그는 에이드리엔을 통해 자신을 발견하려고 애쓴다. 스무살 남짓의 철없는 남자들이 겪게 되는 전형적인 통과의례를 경험하는 셈이다. 그는 자신이 나고 자란 툴사를 부정하고, 그 곳에서 아주 특별한 존재로 살아가는 에이드리엔을 통해 스스로를 발견하고 발전시키려고 애쓴다.

이 소설의 2부는 5년이라는 시간이 흐른뒤, 뉴욕의 한 잡지사에서 일하고 있는 짐의 – 변하지 않는 – 지리멸렬한 삶으로 시작한다. 그는 월세를 내면 남는게 거의 없는 쥐꼬리만한 월급을 받아가며 근근히 버티고 있는데, 고향 툴사를 떠나 굳이 자신을 잘 받아들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 대도시 뉴욕에서 고생하는 짐의 모습은 여전히 그가 자신을 발견하고 발전시키지 못했음을 느끼게 해준다. 그는 여전히 툴사를 벗어나기 위해 애쓰고 있다. 에이드리엔과는 흐지부지 헤어졌 – 다고 짐 스스로는 생각하고 있 – 고, 굳이 에이드리엔을 추억하며 떠올리지 않는 것도 툴사라는 곳에 얽메이기 싫어하는 짐의 노력을 드러내주는 상징일 것이다. 아무튼 그렇게 살아가던 그에게 덜컹 도착한 이메일 한통은 이 소설의 2부가 통속적인 한 남자의 성장담으로 끝나지 않게 되리라는 느낌을 전해준다. 에이드리엔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치명적인 부상을 당한다. 이메일을 받고 통장을 탈탈 털어 툴사로 돌아온 짐은 의식을 찾지 못하는 그녀 주변에서 5년동안 만나지 못했던 그녀와 자기 주변 친구들을 만나게 되고,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면서 자신이 그토록 거부했던 툴사를 서서히 다시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결국 에이드리엔은 죽게 된다. 그 과정에서 이 짐이라는 사내가 직접적으로 관여했는지는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 아마 사실 관계없는 일을 본인 스스로 죄책감에 시달리며 괴로워하는 것일게다 – 아무튼 역설적으로 짐에게 툴사를 상징했던 그녀는 죽어 버리고, 그 과정에서 짐은 툴사를 온전히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장소, 그것도 살아가는 터전이 되는 장소에 대한 애착이 남다른 편이다. 그래서 한평생 살아온 서울을 마음속에서 결코 떠나 보내지 못하는 것이고, 군대가 있었던 강원도 화천군은 쳐다보지도 않게 된다. 서울을 제외하면 가장 오랜 기간 살아온 볼더를 두번째 고향으로 생각하는 것도 그때문이다. (어제 서울로 왔는데 벌써부터 볼더가 그립다..!) 서울이나 뉴욕처럼 익명성으로 대변되는 대도시들과는 달리 툴사나 볼더는 몇년만 살다 보면 어느 카페의 몇시 타임 알바와 서로 얼굴을 익히게 될 정도로 좁은 공간이다. 자아를 형성하지 못한 젊은 남성에게 이런 공간은 좁게 느껴지고, 자신을 속박하는 우리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곳을 벗어나 넓은 곳에서 조금 허세를 부려보고 싶기도 할 것이다. 짐은 그렇게 뉴욕으로 떠나 그곳에서 비루한 삶을 살아간다. 그가 소설이 끝나고 난뒤 다시 툴사로 돌아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여전히 뉴욕의 한 작은 잡지사에서 렌트를 내면 남는 것이 없는, 통장의 잔고는 늘 몇백 달러가 고작인 삶을 살아갈 수도 있다. 현실을 쉽게 바뀌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5년전 여름 한때를 함께 보낸 한 여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그의 내면을 적지 않게 바뀌어 있었을 것이다. 그녀를 어떻게 받아들이고 그녀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조작하며 그녀를 바라보는 시선을 어떻게 고정시켜야 할지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는작중 화자의 흔들리는 내면은 그 시절을 살아낸 모든 남성들의 어리고 여린 한때를 잘 드러내고 있다. 그 와중에서 성장을 반드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삶의 다음 단계로 나아갈때 조금만 더 앞선에서 출발할 수 있기만 하면 된다. 혹은 같은 실수를 반복해도 된다. 그것이 굳이 나쁜 것은 아니니까.

이사

어제 밤 늦게 볼더로 돌아와서 오늘 하루종일 이사를 하고 있다. 교수님께 공짜로 빌려쓴 아파트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원래 내가 살던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한국으로 가는 표를 여유도 없이 끊어 버리는 바람에 정리할 시간이 며칠 주어지지 않았고, 그중 내일과 모레는 각종 서류들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바쁠 것 같아 오늘 대부분의 청소와 이사를 끝내야 한다. 내가 그동안 얼마나 무거운 삶을 살았는지 이사를 할때마다 반성하곤 한다. 버리는 것을 잘하는 사람이 되어야 겠다고 다짐하곤 하는데 그게 말처럼 쉽지는 않은 것 같다.

주차장에서 아파트로 책을 한뭉치씩 옮기고 있는데, 내가 사는 아파트 현관 위 구석에 조그맣게 집을 낸 참새 한마리가 부지런히 가지를 물어 나르고 있었다. 나는 책 뭉치들을 옮기느라 주차장과 아파트를 왕복하고 있었고, 그 참새는 그런 내 머리 위를 스치듯 날아 다니며 아파트 주변에서 가지들을 끌어다 모아 홈 데코레이션에 열중하고 있었다. 우리는 대충 셈을 해도 열번은 서로 마주치며 하이파이브를 했던 것 같다.

나는 아직도 내 스스로를 위해 책과 지식이라는 먹이를 가져다 나르고 있는데, 나보다 훨씬 적은 생을 살아낸 그 참새는 어느새 자신의 보금자리를 만들어 배우자와 자식들을 위한 삶을 준비하고 있었다. 부끄러워지는 시간이었다. 나는 여전히 참 이기적이고 얄팍한 삶을 사는 것 같다. 참새 한마리에게도 배울 점이 가득한 이 세상을 한치도 허투루 살아서는 안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겸손해야 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겸손치 못한 생각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

노을이 아름다워지는 볼더의 여름이 성큼 다가왔다. 친구들은 졸업을 했고, 나는 이제 이틀 뒤 볼더를 떠나 한국으로 간다

박훈정: 신세계

우선 나는 <대부> 시리즈도 보지 않았고 <흑사회> 시리즈도 보지 않았으며 <무간도> 시리즈도 보지 않았다. <도니 브래스코> 나 <스카페이스> 같은 비슷한 설정의 마피아 영화들도 물론 보지 않았다. 그쪽 장르와 별로 친하지 않았던 것 같다. 폭력을 그냥 싫어해서 그런가. 아무튼 그래서 이 작품의 오리지널리티 이슈에 대해서는 별로 할 말이 없다. 다만 갱스터 집단에 잡입한 언더커버 경찰이라는 설정과 그 경찰이 겪는 정체성의 문제는 이쪽 장르에서 흔히들 차용하는 장치라는 것 정도만 알고 있을 뿐이다.

이 영화는 영화적인 쾌감을 극대화시키는 과정에서 일정 부분 성공을 거두고 있다. 자신의 진짜 신분을 알고 있는 경찰 내부 조직은 지속적으로 주인공을 실망시키는 반면 자신이 오랜 기간 옆에 두고 속여 왔던 보스는 작전이 들통나 자신의 신분이 노출되는 순간까지도 끝까지 자신에게 믿음을 준다. 불교에서 말하는 인식론적 관점에서 극중 이자성이 느끼는 정체성의 혼란은 십분 이해 가능하며, 때문에 그가 결말에서 내리는 판단 또한 실존하는 자아의 원천적인 생명력에 복종한다는 측면에서 가히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신을 존재케 하는 두가지 다른 방식중 실재하지 않는 서류상의 자신을 지워버리고 “짜가” 라고 생각해 왔던 실존적 자아를 택함으로써 스스로의 생명을 유지해 나가려고 하는 것이다. 영화가 현실을 교묘하게 뒤트는 비현실의 공간에서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는 프리즘과 같다면 이 영화는 모두가 인정하는 비현실적인 공간 안에 현실의 인간 개개인이 고민하는 실존적인 문제를 직접적으로 건드리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만든다. 즉 비루한 현실을 살아 가는 우리 개개인은 여러가지 속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회사에서는 넥타이와 정장에 묶여 상사의 말 한마디에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며 톱니바퀴의 일부로 살아갈 뿐이며 이러한 정해진 역할에의 강요는 가정에서나 대인 관계에서나 겉모습만을 달리 할뿐 사실 본질적으로 크게 변하지 않고 우리 삶에 깊숙히 개입해 있다. 이 영화는 윤리학적 고민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질 때 과연 우리를 우리답게 만들 수 있는 참다운 가치가 무엇인가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굳이 억지로 영화의 주제를 심각하게 끌고 들어가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장르적 쾌감을 유려한 방식으로 재활용하고 있다. 명품 시계와 담배에 들어가 있는 메타포라던가 황정민이라는 명배우가 만들어내는 디테일에서 풍겨 나오는 잔재미들, 특히 엘리베이터씬에서 황정민이 보여주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하나의 ‘클래식’으로 기억될 것 같다. 이정재라는 배우를 재발견하게끔 하는 영화이자, 시나리오의 무난함과 비특이성을 배우들의 연기력으로 극복하며 우직하게 내러티브를 끌고 나가는 솔직한 영화이기도 하다. 각종 클리셰와 오마주로 뒤덮여 있지만 (이걸 표절이라고 할 수 있을지는 앞에서 말했듯이 잘 모르겠다. 하지만 어디선가 본 듯한 기시감은 이 영화와 함께 언급되는 다른 영화들을 보지 않은 나도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이 영화만이 가지는 독특한 오리지널리티를 제공해주는 것도 배우들이며, 비한국적인 배경에 대한 실망감을 극복하게끔 해주는 것도 이 배우들이 내뱉는 구수한 한국어 대사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