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환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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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관계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철칙은 항상 진심을 다한다는 것이었다. 진심을 다하지 않을 관계는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다. 그렇게 살다보니 주변에는 가족과, 아주 친한 친구 몇명과, 사랑하는 사람만이 남게 되었다. 이중 문제를 일으키는건 사랑이 끝난,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이었다.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아야 했지만 여리고 무딘 나의 마음과 진심을 다한 사람을 어찌 쉽게 끊을 수 있을까 하는 어리석은 미련, 그리고 내 인생을 큰 폭으로 바꾸어 준 것에 대한 고마움등이 섞여서 하지 말아야 할 연락을 계속 이어가게 되었다. 이 필요치 않은 관계는 새롭게 시작하는 사랑에 해를 입히기 일쑤였다. 더이상 과거의 사람에게 마음을 주지도, 그렇다고 친구도 아닌 이 어색한 관계는 그 다음 애인에게 불필요한 감정의 소모를 강제하는 역할을 했다.

다른 한편으로, 그만큼 나에게 확신이 없었다는 사실을 고백해야만 할 것 같다. 어이없는 방향에서 끝난 연속된 사랑의 실패는 나로 하여금 불안과 의심이라는 질병을 계속 가지고 살게끔 만들었다. 나는 언제든지 나의 사람이 떠나갈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늘 그것을 마음속에 품고 살아야 상처를 덜 받을 수 있다고 믿었다. 나의 이러한 불안한 상태와 어중간한 태도는 전 애인과의 이해할 수 없는 관계와 맞물려 묘한 오해의 여지를 남기게 되었다. 그리고 나의 이 이유없는 불안은 관계를 악화시키는 효소로 작용했고. 그렇게 또다른 사랑도 끝이 났다.

그러다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났다. 전 여자친구중 한명은 몇개월에 한번씩 비정기적으로 연락이 왔다. 가장 최근 만났던 여자친구는 같은 건물에서 하루종일 함께 생활해야 했기에, 나의 친구들이 그녀의 친구들이었기에 얼굴을 마주 대할 수 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 있었다. 물론 나의 비겁한 변명이다. 애초에 확실하게 끊을 마음이 있었다면, 전 여자친구의 문자에 대꾸도 하지 않았을 것이고, 친구들과의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을 각오하면서까지 그녀와의 만남을 최소화시키려고 애썼을 것이다. 좋아하는 마음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걱정이 되는 마음,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 안부를 전해듣고 싶은 마음까지 없었다고는 말하지 못하겠다. 그정도로 나는 무르고 약해 빠진 상태였다. 누군가와의 대화가 필요할 정도로 외로웠고, 그 누군가가 잘 모르는 사람이 아닌, 나를 잘 알고 있던, 한때 손과 손을 맞잡았던 그런 사람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의 여자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나에게 확신이 무엇인지 가르쳐 주었다. 완벽한 인간이라서가 아니다. 부족하고 약해서 부서지기 쉬운 인간이 어떻게 확신이라는 위험하고도 경이로운 상태에 다다를 수 있는지 온몸으로 나에게 가르쳐 주었다. 함께 괴로워 하고 함께 화를 내며, 함께 기뻐하고 함께 웃으며 그것을 나에게 전해 주었다. 그냥 단순히 배운다는 과정이 아닌, 어떻게 하면 현재에 최선을 다하며 최선의 미래, 더 나은 미래 또한 함께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깊게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단순히 생각을 더 하게 만든 것 뿐만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인격 자체를 한단계 더 성숙하게 만들었다고 말해야 하겠다. 내가 감히 성숙이라는 단어를 나 자신에게 사용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나는 그녀를 통해 나의 내면이 조금 더 단단해지고 깊어지고 있음을 강하게 느낄 수 있다. 그런 사람이라면, 나를 그렇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고마움과 존경심을 함께 느낄만 하다고 믿는다.

확신은 위험하다.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하지만 그 확신이 생의 긍정적인 면을 극대화시켜준다면 굳이 피해야 할 이유도 없다. 그리고 그 확신을 주는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그것은 믿음 이상의 굳건한 감정으로 내 안에 자리잡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러한 확신을 조금 더 단단하게 만드는 일은 쓸데없는 감정의 소비를 최소화시키는 일이다. 나는 이제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그녀를 만나면서부터 그렇게 되기 시작했고, 최근 그 마음이 거의 완전한 상태에 다다랐다. 더이상 전 여자친구들이 내 삶, 혹은 내 마음속에서 존재해야 할 일은 없을 것이다. 더이상 외롭지도 않고, 나는 그녀로 인해 충만해질 수 있으니까. 여자친구에 대한 확신은 나에게 부끄러운 과거를 환기시켜 주었으며 무엇을 수정해야 하는지 방향을 설정해 주었다.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이런 이야기를 밖으로 꺼내는 일이 무척 부끄럽다. 부끄러운 일이다. 부끄러운 기억이기 때문이고 부끄러운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만 하는 것은 이 블로그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와 기능때문이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기 위해, 내 자신에게 발가벗겨진 솔직함을 가지기 위해 이 블로그를 만들었다. 누구나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것을 꺼려 한다. 나 또한 그렇다. 나를 감추기 위해 거짓말을 만들어 내고 그 거짓말들이 쌓여 거대한 거품을 만들어 낸다. 그 거품들이 실재하는 나를 감추게 되고 그렇게 나는 내 자신에게서 멀어져 함몰되어 가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두려워서 나의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아주 부끄러운, 가장 숨기고 싶은 부분까지 드러내는 한이 있더라도 원래의 나로 돌아가고 싶었다. 지금 나는 딱 세가지에 모든 것을 집중하고 있다. 가족의 안녕, 논문의 완성, 그리고 여자친구. 그외의 것들때문에 나의 삶이 침해당하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 책임을 다할 것이다. 잘못한 것이 있다면 벌을 달게 받을 것이고, 해야 할 일이 있다면 노력을 다해서 그것을 완수할 것이다.

아마도 이 일기는 내 인생의 전환점이 어떤 식으로 발생했는지에 대한 기록으로 남게 될 것이다. 나는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조용히 책상 앞에 앉아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투닥거리는 삶을 사는 사람이지만, 마음속에서는 꽤나 큰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 그 마음을 소중하게 간직하겠다.

8 thoughts on “전환점

  1. 올… 드디어!
    경축드리나이다~
    전 확신이 위험한거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확신이 왜? 뭐가 어때서? 왜 왜? ㅋ
    나중에 생각했을때 지금의 확신이 틀렸다 하더라도 그것도 하나의 과정이겠지요. 마음 가는데로 하는게 답입니다. 축하드려요~ ^^

    • 누님 오랜만이예요. 잘 계셨죠? 뉴욕에 몇번 들릴 일이 있었는데 너무 바빠서 그때마다 연락을 드리지 못했네요. 5월에 다시 한번 갈 계획인데 그때는 꼭 연락 드릴게요. 건강하시고 늘 행복하세요. 저도 행복할게요.

  2. 우왕 ㅋㅋ 좋은 결론이네요 응원합니다! 정말 훌륭한 연인이라 느껴지는 게, 사실은 반대의 경험을 배우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어찌 되었든 결국에는 확신의 문제라는 통찰에 동의하고, 나약함을 솔직히 인정하는 종혁씨가 (그리고 적어도 제가 보기에는 맞는 길을 가는 듯하면서) 대단하다고 느껴집니다. 고맙습니당..

    • 칭찬해 주셔서 감사해요. 정말 좋은 연인 맞아요. 많은 것을 배우고 있거든요. 그만큼 절 많이 아껴주기도 하구요. 제가 그 친구에게 많이 부족하죠. 그래서 많이 미안하구요.

  3. 글을 참 담백하게 잘 쓰셔서.. 그동안 몰래 팔로우만 하고 있다가 이 글에서 마음이 흔들려 댓글을 남기게 됩니다. 음.. 저 같은 경우 그 반대편의 입장이거든요.. 남자친구와 사랑을 하고 있습니다. 일년 반 남짓이 지난 시간인데도 아직 그에게는 이전 사랑에 대한 미련이 남아있는것 같아요. 그냥 묵묵히 기다려주고 있지만 힘든게 사실입니다.. 이런 마음이 쌓이고 쌓이다 그에게 비추어보이면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온몸으로 부정하고는 있지만. 많이 힘듭니다.. 기다리다보면 그도 미련들을 모두 소진할 수 있겠지 생각하며 기다려오고 있었는데 제가 너무 조급한 것일까요. 지금은 너무 지치네요. 가끔씩은 내가 부족해서 그 사람이 아직도 나에게 확신을 갖지 못한것인가 하는 생각에 놓아버리고 싶은 생각마저도 드니깐요. 하지만 그러면 더 힘들어지는 것은 나 뿐일 것이라는 생각에 용기 없이 그냥 바라보고만 있습니다. 그래도 진심을 다해 사랑한다면 결론이 어느쪽으로 나든 후회는 없겠지요? 그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

    • 어렵게 이야기를 꺼내 주셨기 때문에 그 어떤 위로도 가볍게 느껴질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래서 그냥 직설적으로 솔직하고 냉정하게 말씀드리는 편이 더 도움이 될 것 같네요.

      마음 많이 아프셨겠어요. 1년 반동안이나 그러셨을 거 아니예요. 제가 다 미안해 질 정도예요.. 음, 전적으로 그 남자친구분에게 달린 문제같아요. shallowdreamer 님께서 옆에서 얼마나 잘해주시는지는 사실 그렇게 큰 변화를 이끌어낼 것 같지 않구요, 남자친구분께서 얼마나 확실하게 마음을 정리할 의지가 있는지의 문제죠. 이건 수컷이라는 떠돌이 동물이 정착을 할때 겪는 마음의 갈등같은 것인데요, 여기서 시간을 질질 끌며 여자를 지치고 힘들게 한다면 그 남자는 여자를 행복하게 해줄 수 없을 정도로 덜 성숙했거나 결국은 언젠가 다시 떠나거나 둘중 하나일 것 같아요. 남의 일인데 너무 제가 가볍게 이야기하는 것 같아 죄송해요. 그런데 저도 그랬으니까.. 저도 그런 마음을 가지고 상대방에게 큰 상처를 주었던 경험이 있으니까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 것 같아요.

      shallowdreamer 님께서 참고 인내하며 기다리시는 그 과정이 정말 거짓말처럼 쓸모 없어 질 수도 있다는 걱정이 들기 때문에 이렇게 말씀드리는 것 같아요. 마지막에 말씀하신 것이 (그래서) 맞아요. 진심을 다해 사랑하신다면, 결론이 그 어느쪽으로 나도 후회는 없을거예요. 저는 부디 상처를 덜 받는 쪽으로 결론이 나길 바랄 뿐이구요..

      힘내세요!!

    • 네 사실은. 얼마 전 ‘잠시 쉬자’라고 말하고는 서로를 내려놓고 있는 상태랍니다.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얼마간 꽤 힘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다행인건지 견딜만한(?) 시간을 보내고 있고, 저에게 알찬 시간들로 그 공백들을 차곡차곡 채워나가고 있는것 같아요. 종혁님(맞죠?)께서 남겨주신 답글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흔들리는 마음을 다시금 잡아주셨다고나 할까요. 이 시간이 지나고나서 어떤 쪽으로 결론이 나게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하루 하루를 충실히 보내다보면 그래도 후회할 것들은 줄여나갈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진심어린 답글 감사합니다. 힘낼께요!

    • (네 종혁 맞습니다) 아이고.. 그러셨군요. 짐작했던 것보다 훨씬 더 힘든 시간을 보내셨겠네요. 전 하루만 연락이 닿지 않아도 미칠 것 같던데.. 휴. 정말 잘 이겨내고 계신 것도 같구요. 말씀하신 것처럼 그렇게 사랑하는 사람과 떨어져 있는 시간동안 자신을 위해 차곡차곡 채워나가신다면 결코 후회하지 않으실 것 같아요. 힘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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