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en Lewin: The Sessions

사지를 전혀 움직일 수 없는 남자가 있다. 그의 근육은 그를 지탱할 힘이 남아 있지 않다. 집에 있는 iron lung 에서 빠져나와 숨을 쉴 수 있는 시간은 (보통 “호흡” 이라는 보다 의학적인 용어를 사용해 이 남자의 각박한 인생을 표현함이 더 적절할 수도 있겠으나 “숨을 쉰다” 라는 행위가 이 영화에서 갖는 의미가 상당히 크기 때문에 보다 비이성적인 언어로 표현하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세시간으로 한정되어 있으며, 씻는 것부터 먹는 것, 입는 것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행위를 도우미의 도움을 받아 해결해야 한다. 단 하나 그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입에 막대기를 문채 한자 한자 타자기에 천천히 써내려가는 집필 활동. 그는 시인이다.

그는 가톨릭 집안의 넷째로 태어났으며, 자신때문에 누이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죄책감에서 평생 벗어나지 못한다. 그런 그가 가진 최대의 고민은 역시 섹스. 사지를 전혀 움직일 수 없지만 때때로 도우미 앞에서 사정을 할 수 밖에 없는 생리현상을 조절하지 못하는 자신이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그는 섹스가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갖는 존엄성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버클리를 졸업할 정도의 사고 능력과 시를 써 내려갈 정도의 감성까지 가지고 있던 그가 생의 막바지에 혼신의 힘을 다해 매달렸던 것은 사랑과 섹스였다. 영화에서 그는 너무 쉽게 고백한다. 함께 옷을 쇼핑하러 간 도우미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해서 그녀를 떠나게 만들었고, 병원의 의사에게 연정을 품었으며, 이제 그의 육체적 고민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섹스 테라피스트 (“sex surrogate”) 에게 점차 마음을 열어가기 시작한다.

영화의 제목인 “세션스” 는 이 남자와 여자가 갖는 여성번의 섹스 테라피의 세션 하나 하나를 의미한다. 영화는 이 두 사람이 만나서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다루고 있다. 일반적인 연인 사이는 아니다. 여자는 가정이 있으며, 섹스를 통한 치료를 프로페션으로 가진 직업적인 테라피스트다. 남자에게는 여섯번의 세션이 허락되어 있으며, 각각의 세션을 거치는 동안 이 둘은 더 높은 단계의 섹스를 소화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 과정을 통과함으로써 남자가 진짜 자신의 파트너를 만났을 때 섹스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되는 것을 이 치료의 목표로 삼고 있는 여자는 처음에 철저히 직업적으로 이 남자를 대한다. 아주 특수한 상황이긴 하지만, 테라피스트인 그녀에게는 꽤나 흥미로운 “대상” 이나 “고객” 이었을 것이다. 남자는 입장이 약간 다르다. 이 모든 과정이 프로페셔널하게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고 여자가 자신의 녹음기에 대고 말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발생하는 심리저인 현상” 이었음에도) 세션을 통과하면서 그녀에게 마음을 열게 된다. 여자의 반응도 예상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표현된다. 사랑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매몰차게 무시할 수도 없는, 장애인에 대한 연민을 넘어서서 한 인간에 대한 애정으로 확대되는, 하지만 현실을 깨부술 정도는 아닌, 그런 애매한 감정이 여자의 마음을 한차례 뒤흔들어 놓지만, 남자에게는 일생에 단 한번뿐인 경험을 여자는 차 안에서 울어 버림으로써 정리해 버린다.

남자는 죽는다. 일찍 죽는다. 아프니까. 그리고 그가 사랑했던 여자들이 그의 장례식장에 모여 그가 이 고민을 털어 놓았던 가톨릭 사제와 함께 장례 미사에서 그를 기억한다. 그는 자신이 축복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며 떠났을 것이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는 자신이 너무 많은 애정을 받고 간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녀들은 기꺼이 그의 장례식에 와 주었으며, 진심으로 그를 기리고 기억하며 떠나보낸다.

so what. it’s bullshit. what the hell is going on their life? simply nothing changed.

장애인을 대하는 비장애인의 시선은 한결같다. 상식을 가진 사람이라면 모두 비슷한 생각을 할 것이다. 기꺼이 도와 줘야지. 그들도 존엄한 인간인데 누릴거 다 누리면서 살아야지. 섹스? 할수만 있다면 해야지. 누군가 도와줘서 하는 섹스라면? 창녀와 다른건 돈을 안받는다는 정도 아닐까? 그래도 뭐 이해는 할 수 있어. 그들도 인간이니까!

하지만 난 장애인이 아니야. 다행이다. 난 그들과 달라. 난 “정상적인” 섹스를 할 수 있어!

결국 진심으로 그들을 위하고 그들을 위해 살아가는 비장애인은 존재할 수가 없다. 그게 인간의 나약함이고 한계다. 이 영화는 꽤 큰 용기를 내어 중요한 주제를 던져 놓는다. 이 문제를 슬기롭게 풀 지혜가 감독에게 있어 보이진 않지만, 헬렌 헌트와 존 홐스의 눈부신 연기에 힘입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엄청나게 심각한 주제를 놀랍도록 시시한 방식으로 풀어내는 그런 영화 카데고리에 포함되지 않는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많은 아쉬운 점들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관객들로 하여금 한번쯤 생각해 보게 한다는 점에서 분명한 미덕을 갖는다. 그 생각이 너무 짧아서 영화를 보고 난 한시간 뒤쯤 “오늘 저녁에는 뭘 먹지?” 라는 질문보다 한없이 보잘것 없어질 지라도 말이다. 내가 과연 어디까지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을까. 생의 마지막까지 가지고 가야할 질문중 하나다. 여기서 “그들” 은 나를 제외한 모든 타인을 지칭한다. 그렇게 확대될 수 있다고 믿고 또 그렇게 확대되어야 한다고 믿기에 나는 마크 오브라이언과 쉐릴이라는 실존 인물들의 이름대신 남자와 여자라는 꽤 큰 범위의 대명사를 사용하고 있다. 남자는 사랑을 갈구했고, 결국 실팼지만, 사랑이 뭔지 깨달았다. 남아 있는 여자들은 여전히 그들의 삶을 큰 무리없이 살고 있다. 이게 장애인에 대한 시선을 어떻게 바꿀 수 있는 결말인지는 잘 모르겠다.

2 thoughts on “Ben Lewin: The Sessions

    • 전 미국 구글 플레이 계정에서 돈주고 렌트해서 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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