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g Lee: Life of Pi

나는 이 영화를 두가지 다른 이야기로 받아 들였다. 마치 해변가에서 구조된 파이가 자신으 이야기를 믿지 않는 일본인 조사원들에게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들려주는 것처럼, 나 역시 파이와 리처드 파커 (인도 원어민 발음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어떤 이에 따르면 “리차ㄷ 빠ㄹ꺼” ) 가 바다 위 구명 보트 위에서 공생하는 이야기가 주는 상징성을 두가지 다른 버전으로 이해한 셈이다. 원작을 읽지 않아서 영화와 원작이 얼마나 차이가 나는지 모르지만 사실 원작의 기본적인 세팅 – 소년이 호랑이와 함께 구명보트 하나에 의지해서 망망대해를 표류해 나간다는 – 에서 이미 원작과 영화가 품고 있는 주제의식은 단단하게 고정되어 있는 셈이다.

첫째는 이 영화를 인간이 타인과, 혹은 자신을 제외한 세상 모든 것들과 어떻게 교류해야 하는 지에 대한 교훈을 담은 우화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파이는 구명 보트 위에서 얼룩말 (선장) 과 오랑우탄 (엄마) 을 하이에나 (요리사) 에게 잃는다. 그 하이에나는 파커라는 이름의 호랑이에게 죽고, 자신보다 월등히 힘이 센 호랑이를 피해 파이는 배를 내어주고 만다. 이후 지난하게 반복되는 파이와 파커가 함께 생존해 나가는 이야기는 그 자체로 기적이 되고 경이롭게 받아들여 진다.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삶이 그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파이는 자신을 잡아 먹으려는 파커를 눈 앞에 두고 처음부터 끝까지 리처드 파커라는 이름으로 그를 부른다. 헤어지는 마지막 순간까지 그와의 대화를 포기하지 않고, 그에게 먹이를 줄때나 영역 싸움을 할 때에도 눈을 마주치는 일을 피하지 않는다. 파커가 파이를 떠나 정글로 들어갈 때 그를 끝까지 뒤돌아 보지 않은 것에 대해 파이가 상심해하는 장면은 그가 얼마나 파커와의 교류에 힘을 쏟았고 그 교류가 파이를 어려운 환경에서 살아 남게 해주는 주된 기제였는지를 여실히 드러내주는 대목이다. 우리는 과연 타인에게 이 정도의 정성을 쏟아 대화를 하려고 하고 있는가를 생각하게 된다. 우리 주변에 있는 모든 것들은 우리를 잡아 먹으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인다. 상처를 주는 말들을 골라서 하고, 때로는 무시하며, 자신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희생시키려 든다. 이러한 현 시대의 위기를 극복하는 유일한 방법은 끈기와 인내를 가진 대화뿐이라고 이안 감독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아카데미 감독상이 돌아갈 수 밖에 없는 이유를 굳이 꼽자면 아마도 이러한 시대정신을 정확하게 꿰뚫어보고 이에 대한 적절한 해법을 제시한 현자로서의 이안을 아카데미가 알아본 것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영화를 읽는 두번째 방법은 파이가 일본인 조사원들에게 했던 두번째 이야기처럼, 호랑이 파커를 파이 그 자체로 해석하는 것이다. 그러면 이 영화는 완전히 다른 상징성을 담은 이야기로 바뀌게 된다. 즉 자기 자신을 어떻게 다스릴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파이는 파커를 결코 포기하지 않지만 그를 진심으로 따뜻하게 안아주기 까지 많은 노력과 시간을 소비해야 했다. 굶어 죽어가는 파커를 자신의 무릎에 올려 쓰다듬어 줄때 비로소 파이와 파커는 완전한 상태의 정신적 교류를 하게 되는데, 이는 파커가 가장 약해진 순간, 혹은 그런 파커를 지켜보는 파이 역시 매우 약해져 있는 순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가장 약해져 있을 때 누가 나를 구원해 줄 수 있을 것인가. 자시 자신밖에 없다. 스스로 극복하고 이겨내는 수밖에 없다. 따지고 보면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문제는 결국 나에게서 비롯된다. 내가 존재함으로써, 내가 자신을 잘 다스리지 못함으로써 대부분의 문제가 발생하는 것이다. 나는 과연 내 자신과 하루에 얼마나 시간을 내어 대화하려고 하는가. 별로 되지 않는다. 부끄럽다. 내 자신의 갈등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면서 어찌 타인에게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있단 말인가. 자신의 몸부터 먼저 닦아 내고 그 다음에 타인을, 더 나아가 사회를 돌보는 것이 마땅한 도리일 것이다. 결국 이 영화는 파이와 파커를 하나의 몸 안에 깃든 두개의 상이한 인격체로 이해함으로써 한 개인의 내부에서 발생한 갈등을 어떻게 스스로 치유해 나가는지를 시각적으로 형상화해 내고 있는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안 감독은 이 영화에서 대단히 높은 수준의 철학적 성취를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다. 즉 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인식론과 프랑스 현대 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실존주의를 두개의 각기 다른 프레임 안에서 완전한 형태로 융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사회 문제로 확대시켜 관계와 공존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나를 다듬고, 타인을 보듬고, 그렇게 공생하면 결국 구원이 길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가톨릭적 교리까지 얼핏 드러나는 것도 흥미롭다. 그리고 이모든 이야기를 “나마스떼” 라고 말하는 인도인들의 모습을 통해 형상화시키는 것도 이안 감독이 가진 거대한 세계를 이해하는 또다른 통로라고 생각한다. 그만큼 대단한 영화이고, 압도적으로 훌륭한 영상미와 그보다 더 뛰어난 감독의 장악 능력을 맛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아름다운 사운드트랙은 황홀한 덤이다.

Ben Affleck: Argo

영화는 직선적으로 흘러간다. 상황 설명은 최대한 간단히. 사실 길게 설명할 것도 없다. 이란에서 소요가 발생하고, 미국 대사관 직원 여섯명이 캐나다 대사관에 갇히게 된다. 이들을 본국으로 데려오는 것이 임무다. 영화는 이후 ‘아르고 작전’ 이 어떻게 진행되는지에만 집중한다. 심지어 캐릭터에 대한 설명조차 왠만한 부분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넘어간다. 관객은 주인공 토니 멘데즈가 갖는 정보 이상의 것을 거의 보지 못한다. 캐릭터가 멘데즈에게 대들면 우리는 그가 성질 급한 사람이구나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캐릭터간의 갈등 조차 무시할 수 있는 수준에 머무는 이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아르고 작전’ 이 어떻게 마무리지어 지는지에 대한 묘사로 일관한다. 이 묵직한 직구 근성이 이 영화의 가장 큰 미덕이다. 실화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는 기본적인 정보 위에 서스펜스와 스릴러의 각종 장치들을 현명하게 덧붙이고 극의 종반부로 치달으면서 리듬을 서서히 빨리 가져가는 호흡도 일품이다. 이 영화는 시놉시스상으로는 아이디어 그 이상의 새로움이 전혀 없어 보이지만 감독의 노련하고도 세련된 연출로 인해 좋은 영화로 탄생할 수 있게 된 듯 보인다. 벤 에플렉은 감독과 각본 이외에 영화의 주연으로 출연해 아주 훌륭한 연기를 선보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무표정한 구출 전문 요원으로 분해 극의 긴장감을 두 어깨에 홀로 짊어지고 뚜벅뚜벅 걸어간다. 영화의 마무리가 약간 상투적이긴 하지만 할리우드 시스템 내에서 이정도 수준으로 상투성을 잘 컨트롤하는 영화도 찾기 드문 것이 현실이다. 영화의 직선적 성격이 가지는 단점은 그만큼 많은 것들을 포기하면서 간다는 것이다. 예컨데 이란 사람들의 모습은 대단히 단편적으로 묘사된다. 감독 나름대로는 신경을 쓴다고 쓴 것이겠지만 미국인이 중동의 시민 세력에게 가지는 단순화되고 파편화된 이미지 이상을 전달하지는 못한다. 캐릭터의 실종, 민감한 국제 정세 문제를 완전히 무시하고 미시적인 작전 하나에만 집중하는 포기와 선택, 서스펜스적인 구조를 적극 차용해 관객들의 몰입도를 극대화시키는 전략. 똑똑한 감독이 똑똑하게 잘 만든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이런 나이스하게 잘 빠진 영화가 요즘 세상에는 가장 잘 만든 영화라는 평가를 받기도 하는 것 같다.

바위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해 대학에 들어가 군대를 가기 전까지 줄곧 한 동네에서 계속 살았다. 그 동네는 지금 꽤나 유명한 데이트코스가 되어 버렸는데, 내가 살던 골목도 꽤나 많은 시멘트 더미들이 과거의 기억을 이미 뒤엎어 버렸을 것이다. 그 골목은 인왕산으로 가는 어귀에 위치해 있다. 부암동 동사무소 바로 옆 골목을 따라 열세살 정도 되는 아이의 걸음으로 15분 정도, 가로등도 몇개 없고 인적도 드문 꽤나 가파른 길을 따라 올라가다 보면 최종적으로 대여섯 가구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인왕산 중턱 부근에 다다르게 된다. 그곳에 내가 살던 집이 있다. 아직 있을 것이다. 우리는 IMF 의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그 집을 팔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일산 부근의 아파트에서 전세를 살다가 홍은동으로 다시 이사를 왔다. 그 홍은동집을 한 유명한 영화감독이 좋은 값으로 사준 덕분에 현재 살고 있는 신촌 아파트를 살 수 있었고, 나도 유학을 나올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골목은 무척 특이했다. 당시에는 물론 몰랐다. 꽤 돈이 많은 사람만이 지을 수 있었던 현대적인 건축물도 있었고, 넓은 부지에 전통 한옥이 자리잡고 있는 서원도 있었다. 친구중 한명은 무너져가는 쪽방에 살고 있었고, 다른 친구는 대기업에서 잘나가는 아버지를 두어서 넓은 집과 마당에서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이 그 하나의 골목안에 있었고, 우리는 그저 친구였다. 우리 가족은 그 골목의 가장 끝자락에 있던 대여섯 가구들과 화목하게 잘 지냈다. 소득 수준도, 집안 환경도 모두 그럭저럭 비슷했다. 오늘은 우리집에서, 그 다음날은 어떤 형아의 집에서, 그리고 그 다음날은 다른 누나의 집에서 모여 함께 흙을 가지고 놀다가 인형을 가지고 놀다가 하며 지냈다. 대문을 놔두고 서로의 담을 넘어 왕래했고, 부모님들 사이에서는 그냥 담을 허물고 빌라처럼 다 함께 집을 지어 살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한겨울 눈이 꽝꽝 얼어 가파른 오르막길을 걸어 올라가지 못하게 되자 위에 계시던 할머니께서 소금을 뿌리며 길을 터준 기억도 나고, 옆집 형아를 따라 YMCA 를 다니다가 농구를 배운 기억도 난다. 그렇게 함께 살았다. 우리 가족이 그곳을 떠나야 하기 전까지는 그랬다.

나의 고향은 그래서 부암동이다. 그곳에서 유년 시절의 대부분을 보냈다. 서울로 이사오기 전 살던 안산 부근의 화정리라는 시골 마을도 물론 기억에 많이 남는다. 그 전에 살던 아파트에서 폐렴에 걸리는 바람에 요양차 1,2년 정도 잠시 머물렀던 그 동네에서 나는 말그대로 도랑에서 가재잡고 산속을 뛰어 다니며 흙냄새를 온몸으로 맡는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그 시절은 내게 너무 어렸을 때의 기억이라 지금은 희미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나는 부암동에서 사는 15년동안 아이에서 소년이 되었고, 다시 소년에서 청년이 되었다. 지금도 잠자리에 누웠을 때 천장에 아로새겨져 있던 벽지의 무늬까지 생생히 기억나는 그 부암동의 집, 나른한 오후 빈 교실을 내리쬐던 아스라한 햇빛까지 온몸으로 떠올릴 수 있는 세검정 초등학교의 구석구석, 그 집과 학교 사이를 가로지르던 길, 그리고 청운 중학교, 효자동, 광화문…그 시간을 흘려 보내면서 듣던 음악들, 영화들. 그런 기억들이 성인이 되기 전 나를 형성했다. 불행히도 고등학교에 들어간 뒤부터는 그 동네에 대한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매일 새벽 여섯시 반에 집을 떠나 열두시가 다 되어서야 들어왔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렇게까지 학교에 붙잡혀 있었아먄 했던 걸까 싶기도 한데, 아무튼 고등학교 3년동안 부암동에 대한 기억은 그저 잠을 잤던 곳이라는 것뿐이다. 당시 나는 고대앞에서, 성신여대앞에서, 돈암동에서 게임방을 가거나 당구장을 갔다. 이쁜 여자 아이들과 스티커 사진을 찍거나 노래방에 가기도 했다. 가끔은 술도 먹었고, 학교 근처 공원에서 담배를 친구들과 나누어 피며 허세를 부리기도 했다. 부암동에서는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내가 살던 그 골목 근처에는 약수터가 하나 있었다. 약수터로 가는 길을 따라 계속 올라가다 보면 꽤 커다란 공터가 하나 나왔고, 그 공터에는 아이들이 올라가 장난을 칠 수 있을 정도로 큰 바위가 하나 있었다. 그 바위를 낑낑거리고 올라가면 조금은 더 좋은 전망이 펼쳐졌는데, 단지 3,4미터 더 위에 있을 뿐인 그 높이에서 아찔한 쾌감같은 것을 느꼈다. 지금도 그 바위가 있는지 모르겠다. 올 여름에 한국에 들어가면 아마 한번은 꼭 들려보고 싶다. 내 인생에서 다시 그 동네로 돌아갈 수 있는 기회가 있을지 모르겠다. 만약 돌아갈 수 있다고 해도 이미 내 기억과는 많이 달라진 환경에 새롭게 적응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좋다. 다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아니 그곳에 살지는 못하더라도 한번쯤 그 동네를 다시 밟아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참 좋을 것 같다. 유년의 나는 현재의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고, 나는 점점 희미해져가는 과거의 기억들을 어떻게든 부둥켜 잡고 놓고 싶지 않은 것이다.

오늘 책상앞에 앉았을때 갑자기 그 바위가 생각났다. 이유는 모르겠다. 그냥 생각났다. 그 바위는 나의 기억보다 아마도 훨씬 더 초라하고 왜소하겠지만, 다시 그 바위 위에 올라갈 수 있다면, 그래서 기억보다 훨씬 좋지 않을 전망을 다시 경험할 수 있다면, 그 위에서 나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 그 바위 위에서 보이는 것들을, 다음 20년 뒤에도 똑같이 기억할 수 있을까.

김영민: 당신들의 기독교


책의 처음 두 장은 흥미롭다. 개신교가 어떻게 자본주의와 결탁해 부의 축적을 정당화시켰는지를 쉽게 풀어 쓴 첫번째 장과 한국에서 한 평범한 중년 여인이 어떻게 개신교에 빠져들게 되는지를 독파한 두번째 장은 한국 사회에서 개신교가 갖는 사회학적 의미를 거시적, 미시적으로 잘 드러내고 있다. 잘 짜여진 문장들을 읽어 내려가는 재미도 쏠쏠하다. 평소에 접하지 못하는 단어들이 열거되는 와중에 한국어에 대한 매력도 새삼스럽게 재확인하게 된다. 문제는 책의 중간부터 더이상의 컨텐츠를 채우지 못하고 매끄러운 형식과 지은이 본인이 애초에 견지하고 있던 철학만을 억지로 밀어 붙이면서부터 발생한다. 책을 말미를 장식하는 몇개의 장은 개신교에 대한 책인지 개신교를 이용해 지은이의 철학을 설파하려는 책인지 헷갈릴 정도다. 지은이가 견지하고 있는 입장은 확고하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예수는 좋은 스승이다. 그가 가지고 있던 탈공동체적 문화는 현대 한국 사회에서 완전히 거세되어 있다. 확신할 수 없는 것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은 올바른 탐구 자체를 훼손하게 된다. 예수를 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제자’ 가 되는 것이지만, 현대 한국의 개신교 사회는 ‘종’ 으로서 굴종하는 것에 사력을 다하고 있다. 만약 지은이가 한국 사회와 개신교에 대한 단편적인 모습들을 일괄되게 열거하는 선에서 그치지 않고 조금 더 통시적인 관점에서 깊게 파고들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일반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 서적들이 갖는 공통적인 한계를 새삼스럽게 지적하는걸까.

Hirokazu Kore-eda: Still Walking


한 가족이 있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살고 있는 곳으로 간다. 고향이다. 그곳에는 죽은 형의 무덤과 아직 살아 있는 가족들과, 형때문에 목숨을 건진 타인이 공존하고 있다. 떨어져 오랜 시간을 지낸 가족은 서로에게 불편함을 느낀다. 하지만 여전히 가족이다. 누군가는 계속 삶을 살아가고, 다른 누군가는 퇴장을 준비한다. 예고없이 찾아온 죽음도, 그 죽음으로 인해 기대에 못미치는 삶을 살아가는 다른 누구도, 그를 바라보는 각자의 시선도 모두 나름의 사연을 담고 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는 눈에 보이지 않는 것, 하지만 마음 속에 담겨져 있는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즐긴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는 진실되다. 조용하지만 꽉 차 있고, 무겁지 않지만 흩날리지도 않는 주제 의식이 명료하게 살아 있다.

영화를 보다가 이 한 컷이 무척 인상깊게 다가 왔다. 아무래도 요즘 결혼이나 가족같은 것들을 많이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모습을 자연스럽게 연출할 수 있는 가족의 일원이 되는 것, 그게 요즘 내 가장 큰 꿈이다.

still walking

Wim Wenders: Pina

 

Dance 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더군다나 Pina Bausch 에 대해서는 아는 것이 전혀 없다.  영화를 보고 나서야 구글링을 통해 몇가지 정보를 접할 수 있었지만, 그것을 여기에 적어 놓는 것은 거의 아무런 의미를 가지지 못할 것 같다. 그녀의 춤에 대해 내가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언어 – 영어나 한국어 따위의 말과 글 – 로 표현이 불가능한 것들을 새로운 언어를 창조해 냄으로써 가능케 하는 사람들을 존경한다. 피카소가 그랬고,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이 그랬으며, 앤디 워홀이 그랬고, 베토벤이 그랬던 그런 것들. 나같은 사람들은 그저 우러러 볼 수 밖에 없는 그런 창조적인 행위들. 피나 바우쉬는 아예 장르라는 개념조차 허물어 버린다. 새로운 언어가 아니라 새로운 세상을 하나 창조해 내는 느낌인데, 이건 인간의 영역이 아닌 것도 같고,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영역으로의 접근인 것도 같다. 아무튼 말로는 설명이 안된다. 말로 설명이 안되는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압도적이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 강렬하게 다가왔을 수도 있다. 예술적인 감각이 있는 사람들은 정말 어떤 기분일까. 너무 부럽다.

David O. Russell: Silverlinings Playbook

8개월간의 정신병원 생활을 마치고 퇴원한 팻의 인생에 큰 사고라고 할만한 것은 딱 한번뿐이었다. 자신이 정성들여 선곡한 웨딩송이 울려퍼지는 집안에서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그 한번의 사건 이후 그의 인생을 송두리재 뒤바뀌어 버렸다. 집, 직장, 아내, 그리고 정신까지 잃어버린 팻은 퇴원 후에도 불안정한 생활을 계속해 나간다. 그가 친구 내외와의 저녁식사에서 만난 티파니는 남편이 죽은 뒤 회사내 모든 사람들과 (남녀 가리지 않고) 섹스를 한 여자다. 팻을 처음 만난 날 함께 자자고 말하는 그녀는 팻의 정신 상태를 더 악화시킨다. 그런 팻과 티파니가 만나 딜을 한다.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진 아내에게 티파니가 대신 편지를 전해주는 대신 팻은 티파니의 댄스 경연대회 파트너로 참가한다는 것. 가족과 풋볼로 상징되는 세상과의 사투는 계속되고, 티파니와의 댄스 연습도 계속된다.

티파니는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여자다. 그래서 지나치게 솔직하다. 세상에 대한 표현도 그렇고 자신의 욕망에도 그렇다. 그 욕망은 뒤틀려져 있고 그녀가 내뱉는 말들도 잔뜩 꼬여 있지만 그렇다고 그녀가 세상과 격리되어야 한다거나 (실제로 그의 부모는 그를 격리시키려고 한다) 세상의 ‘평균치’ 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는 뜻은 아니다. 팻은 너무 모른다. 자신을 표현하는 것에 서툴고 아내에게서 받은 상처를 치유하지 못해 어쩔줄 몰라 하며 그 상처를 아내를 통해서만 풀어내려고 한다. 영화는 너무 큰 여자와 너무 작은 남자가 만나 서로를 치유해 가는 이야기다. 역시 여자는 더 현명하고 속 깊고 성숙한 존재, 하지만 남자는 대신 직선적인 매력으로 사태를 조금 더 빠르게 진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기본적으로 로맨스라는 장르적 한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결말을 예측하는 것이 어렵지는 않지만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다양한 층위의 매력이 있다.

먼저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꽤 진지한 질문을 던진다. 팻과 티파니의 주변에 있는 가족들은 지극히 정상적인 모습으로 설정이 되어 있지만, 영화가 진행될수록 팻과 티파니가 사실은 더 정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상과 비정상에 대한 경계가 모호해짐을 느낀다. 경찰과 필라델피아 이글스로 상징되는 필라델피아라는 배경은 팻으로 하여금 세상에 대한 인위적인 적응을 강요하는 기제로 활용되는데 (이글스팬들의 ‘광’적인 응원문화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여기서 팻이 궁극적으로 자신의 정신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것은 역설적으로 자신과 같은 처지에 놓여 있다고 말할 수 있는 티파니를 통해서 가능해진다. 푸코가 말한 ‘감시와 처벌’ 이 과연 사회적으로 가장 올바른 규범으로 적용될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꽤나 직접적인 문제제기인 셈이다.

이 영화가 속한 또다른 차원은 부모와 자신의 관계를 통해 바라본 성장이라는 개념이다. 아직 생각이 정리되지 않아서 길게 말하지는 못하겠지만 이 영화는 팻의 정신적 갈등을 소재로 팻과 부모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무너지고 재설정되는지 그 과정을 상당한 시간을 할애해 보여준다. 팻은 특히 아버지와 사사건건 충돌하는데 아들과 함께 풋볼 게임을 시청해야 승리한다는 일종의 미신을 아들이 거부함으로써 발생하는 이 갈등이 봉합되는 과정이 상당히 흥미로운 것이 사실이다. 마지막 장면에서까지 팻은 드션 잭슨의 저지를 입고 있긴 하지만 결코 풋볼을 보지 않는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팻은 이글스의 저지를 입고 있지만 이글스의 게임을 거의 보지 않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아버지가 그렇게 함께 공유하기를 바라는 이글스의 게임은 팻에게 ‘옷을 입는 행위’ 로 변환되고, 그 안에서 팻이 택한 길은 댄스와 티파니라는 마이너한 것들에 대한 애착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카메라가 천천히 돌아가며 가족과 친구들의 모습 하나 하나를 비추는 모습에서 영화의 또다른 주제가 압축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강요하고 억압하는 것에 대한 감독의 거부감이 상당히 잘 드러나고 있다고 느꼈다.

좋게 봤다. 아카데미에서 응원할 것 같다. 최소한 여우주연상은 ‘당연히’ 제니퍼 로렌스에게 돌아가는 것이 맞지 않나 싶을 정도로 대단히 뛰어난 연기를 보여준다.

Night Beds: Country Sleep

Winston Yellen 이라는 23살의 젊은이가 있다. 다니던 학교를 중퇴하고 여자친구와 헤어진뒤 정처없이 미국 여기저기를 떠돌다가 내쉬빌로 들어섰다. 거기서 빈 집을 하나 발견했는데, 알고 보니 조니 캐쉬가 잠시 머물던 집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곳에서 음악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약간의 대출을 받아 간단한 녹음 장비를 구입했다. 그 집에서 스스로 녹음한 노래들은 <Country Sleep> 이라는 앨범 속에 담겨 발매되기에 이른다. Yellen 의 음악들은 real deal 이다. 그는 자신의 이야기들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었고, 제프 버클리를 연상시키는 그의 목소리는 여리고 다치기 쉬운 20대 초반 남성의 감수성을 잘 담아내고 있다. 통기타 하나, 때로는 리버브가 잔뜩 걸린, 싸구려 이펙트 한두개로만 구성된 전자 기타 한개만을 대동한 그의 음악이 풍성해질 수 있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목소리가 가진 맑음의 힘때문이다. 음악 스타일 자체는 새로운 것이 별로 없다. 라이언 아담스가 연상되기도 하는 전통 미국식 포크+컨트리 음악에 Ra Ra Riot 이나 Freelance Whales 가 가지고 있는 미국 동부 인디씬의 고유한 미덕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구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짤막한 데뷔 앨범이 들을만한 가치가 있다고 느껴지는건, 아마도 우리가 작년에 Youth Lagoon 의 음악에서 확인했듯이, 우리 시대의 젊음의 송가는 자신의 치부를 그대로 드러내는 데에서부터 시작된다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조용한 자기 고백, 자기 성찰. 그것이 요즘 20대들의 음악에서 발견되는 미덕이고, 이 앨범은 그 가치를 큰소리 내지 않고 꾸준하게 발현시키고 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며.

‘마음이 가난하다’ 라는 표현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마음이 풍요롭다’ 라는 뜻의 반대말일수도 있고, ‘마음이 청빈하다’ 라는 말의 다른 표현일수도 있다. 전자는 행복하고 충만한 기운이 결여된 상태를 일컫는 말일테고, 후자는 과한 물욕없이 깨끗한 마음을 돌려 표현한 것일테다. 그런데 가만 들여다보면 꼭 상반되는 개념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우리가 흔히 텅 비어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공간도 사실은 공기나 빛, 혹은 어둠이나 침묵같은 것들로 가득차 있는데 우리가 인지하지 못하는 것 뿐이다. 우리가 가득차 있다고 생각하는 어떤 상태 역시 사실은 그 안에서 ‘진짜’ 를 발견하지 못해 공허함을 느낄 수도 있다. 비어있는 것은 사실 가득차 있는 것이며, 가득차 있는 것은 사실 텅 비어 있는 것이다.

결여되어 있는 것에서 채워져 있는 것을 발견하고, 막혀 있는 것에서 해결책을 찾아 내며, 얻지 못한 것에서 이미 가진 것에 대한 감사함을 배운다.

그러다보면 욕심이 나눔으로 바뀌고 욕망이 희생으로 바뀌며 배부름이 배고픔으로 바뀔 수 있을까? 경제학이 나에게 준 교훈중 하나는 내가 배가 부르면 다른 누군가는 배가 고프다는 것이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조그만 적게 먹으면 다른 누군가가 주린 배를 채울 수 있다는 뜻이다. 인간 관계도 마찬가지다. 내가 나누어주면 타인은 그만큼 채워진다. 결국 비우는 것이 채워지는 것이고, 나누는 것이 얻는 것이다. 그렇게 함께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함께 산다는 것은 그런 것이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