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rlie Haden: Land of the Sun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나에게도 군대는 하나의 challenge 였다. 꽤나 무거운 세금과도 같았던 그 2년동안의 시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조직생활의 부조리함을 몸으로 익히는 대가로 2년동안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것이나 아무런 이유없이 두들겨 맞아야 하는 것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그다지 fair 한 deal 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은 군생활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는 소소한 고충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취침음악’ 이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취침소등을 한 뒤 아주 작게 음악을 틀어 놓고 취침하는 것을 관례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내무반의 ‘왕고’ (왕고참의 줄임말) 는 그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일과시간이 끝난 뒤 볼 수 있는 텔레비젼의 리모콘 컨트롤 권한도 왕고가 가지고 있었다. 대단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었으니.. 나는 재수없게도 이등병 시절부터 상병때까지 군대에서 이별을 경험한 왕고만을 만났다. 이등병 시절의 왕고는 임창정의 “소주 한잔” 을 6개월동안 틀었다. 일병 시절의 왕고는 그 전통(?)을 물려 받아 “소주 한잔” 을 6개월 더 틀었다. 상병시절의 왕고는 조금 나아졌나 했는데 그게 바이브의 “사진을 보다가” 였다. 그 곡만 자기 전에 6개월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임창정의 “소주 한잔” 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병장이 되고 내가 왕고가 됐다. 우습지만 그렇게 되기 한참 전부터 취침 음악을 어떤 것으로 틀까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온 휴가에서 나는 씨디 두장을 사가지고 복귀했다. 한장은 Eddie Higgins Trio 의 <If Dreams Come True> 였고 다른 한장은 Charlie Haden 의 <Land of the Sun> 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취침 음악을 후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인스트루멘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재즈를 틀고 싶었다. 클래식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가요나 팝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 군대는 일상이 피곤함으로 넘쳐나는 곳이고 특히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한의 피로감을 만성적으로 느끼는 일,이등병들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코를 골며 잠들기 쉽상이다. 그래서 첫번째 곡의 선택이 중요했다. 항상 같은 곡만을 들려줄 수는 없으니까. 그건 아마 내가 이등병 시절 느꼈던 고문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디오 바로 옆에 누워 하루에 한곡씩 각기 다른 곡들을 들려 주었고, 그렇게 몇주가 지나 두 앨범의 모든 곡들을 한두번씩 듣게 된 후부터는 막내 이등병들에게 신청곡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곡이 좋았니,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어물어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신들 나름의 취향을 고백했다. 그렇게 우리는 꽤나 만족스러운 취침 음악으로 몇달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휴가나 외박을 나가는 후임들에게 부탁해 다른 음반들을 추가적으로 받아와서 틀어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처음에 함께 들었던 이 두장의 음반만큼의 기억이나 애착은 없었던 것 같다.

찰리 헤이든의 <Land of the Sun> 은 아름다운 앨범이다. 앨범의 첫곡의 첫번째 구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이미 듣는이의 마음은 따뜻하게 녹아서 말랑말랑하게 변해있다. 각종 관악기들은 너무 튀지 않게 섬세한 감각으로 음악을 주도하고, 베이스와 드럼은 살짝 살짝 듣는이의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뜨거움보다는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이 음반은, 앨범 커버처럼 해가 질 무렵 남미의 어딘가에서 해먹위에 몸을 누이고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소설 한권을 반쯤 읽었을 때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을 감은채 들으면 딱 좋은 노래들로 가득차 있다. 항상 들어도 좋고, 언제 들어도 좋다.

나중에 전역할 때가 되어 위병소 밖을 통과하기 직전, 군에 남아 있는 후임들 한명 한명과 돌아가며 포옹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군대는 생각보다 별거 다합니다. 그쵸?) 내가 전역할 당시 일병이었던 한 후임이 갑자기 펑펑 울면서 그때 틀어준 음악으로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며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많이 고마웠다. 나에게는 그저 아주 약간의 작은 배려였지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그 친구에게는 꽤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듯 싶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등병 시절 경계 근무에서 작은 실수를 하나 했다는 이유로 당시 사수였던 어떤 병장에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여러차례 찍힌 일이 있었다. 근무가 끝나고 돌아와 그 고참의 속옷을 대신 빨면서 갑자기 서러운 느낌이 복받쳐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역을 코앞에 둔 ‘개구리’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한명이 들어와서 그런 나를 발견했고, 내가 해야 했던 빨래를 대신 해주며 이런 저런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말들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 고참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참의 그 행동 하나가 나의 군생활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후임들에게 폭력을 사용한 적도, 욕설을 해본적도 없다. 그런 행위들 없이도 충분히 잘 굴러갈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고참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일 수록 질책과 짜증이 아닌 격려와 위로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이건 군대를 나와서도 유효한 진리같다. 우리가 서로 감정적으로 지쳐있을때, 우리가 서로에게 피로감을 느낄때, 우리가 서로의 잘못만을 발견하려고 애쓸때가 있다. 사람인데 어찌 그런 일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럴때 한번만 마음을 다잡고 아주 사소한 배려라도 하나 먼저 베풀고자 노력한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 먼저 건넨다면, 아마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고참의 말 한마디와, 찰리 헤이든의 음악에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8 thoughts on “Charlie Haden: Land of the Sun

  1. 앨범 그림이 정말 예뻐요.

    최근 배경이 군대인 소설과 영화 몇 편을 보고 관심이 많아지던 차에 마침 이 포스트를 보게 되어 여러가지 생각을 하게 되네요. 어쩌면 생각하던 그대로인 곳이겠구나 싶다가도, 어쩌면 생각과는 다른 곳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앨범 표지에 반해 바로 들어봐야겠어요.
    제일 궁금했던게 취침시의 풍경이었는데, 자기전에 누군가가 음악을 골라서 들려준다니 가장 예상밖의 그림이에요. 상상만으로만 존재하던 판타지와 가장 예상을 뛰어넘는 공간의 조합이네요. 생각보다 별거 다한다는 말씀이 이상하게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요..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군대는.. 용서받지 못한자 와 허트 로커가 실제와 가장 흡사한 정서를 표현하고 있지 않나 싶네요.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요 ㅋ 그곳에서 억눌리고 억압받는 자아가 스스로의 정체성을 발현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다른 형태의 폭력뿐이예요. 함께 음악을 들으면 잔다는 행위는 그래서 특별했죠. 정서적 유대감은 군대에서 또다른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거든요.

    • 아 그리고 제가 군대에 있을때에는 만약 이등병이 자다가 코를 골면 방독면을 쓰거나 싸대기를 맞아야 했습니다. 현실은 그랬죠 ㅋ

    • 글 정말 잘쓰시네요. 잘봤습니다. 화려하진않지만 담담한 문체가 매력적이에요

  2. 이 음반 참 좋지요! 저도 한때 자기전에 많이 들었던 앨범입니다. 찰리 헤이든 음반 몇 장 안 가지고 있지만 그 중에 가장 좋아하는 것이기도 하구요. 군대 에피소드는 참…찡하군요. ^^; 저는 군생활을 남들과 조금 다르게 해서 훈련소에서만 넉달 있었는데 무엇보다 음악이 너무 고팠더랬지요. 훈련 두달차쯤 되었을 때 강당에서 어느 학과시간에 교관이 앙드레 가뇽을 한 곡 들려주었는데 그게 얼마나 눈물나게 좋던지… 군대에서 들은 음악은 잊혀지지 않지요. 아주 좋아서 기억에 남거나, 다시는 듣고 싶지 않거나. ㅋㅋ

    • 와 훈련을 넉달이나 받아야 하는 보직은 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궁금하네요 ㅋ 맞아요. 말씀하신 것처럼 군대에서 들은 음악은 쉽게 잊혀지지 않네요.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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