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동: 시

영화가 끝나기 약 10분 전부터 눈시울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참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미자의 모습이 안쓰러워서가 아니라, 그녀를 향해 차마 웃어보이지조차 못하며 억지로 그녀의 결리는 어깨를 위한 배드민턴 운동의 파트너가 되어주는 박형사의 표정에서 일말의 고마움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 고마움은, 미자가 속한 “학부모와 학교, 경찰과 언론” 이라는 한 집단의 도덕성이 갖는 견고함과 박형사가 속한 “시낭송회” 가 갖는 그 도덕성에 대한 미약한 저항이 만들어내는 작은 균열과도 같은 것이었다. 미자는 이 갈등 사이에서 스스로 고난을 감수하는 유일한 인물이고, 박형사는 <밀양> 에서 송강호가 맡았던 딱 그 정도의 역할에서 미자의 발걸음을 멈추지 않게 도와준다. 십자가를 잠깐 대신 들어주는 시몬과도 같은. 이후 영화는 오프닝 시퀀스와 대응 구조를 이루며 하나의 기적을 연출한다. 오프닝 시퀀스에서 poem 이 아닌 poetry 로서 존재하는 시는 (즉 구체화된 예술 작품이 아닌 literature 자체로 존재하는 규범으로서의 시는) 한 여학생의 죽음을 구원하지 못하지만, poetry 가 아닌 하나의 poem 그 자체가 되어버린 미자는 그 여학생이 육체로서 현현할 수 있는 기회를 부여한다. 영화적 기적이다. 영화적 마술이다. 허우샤오시엔의 <빨간 풍선> 을 본 이후 이토록 황홀한 기적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다. 미자의 모습이 보이지 않는 동네의 모습은 여전히 그 사회의 도덕성이 현존하고 있음을 상징하고 있고, 그 곳에서 완전히 사라진 미자는 하나의 시가 되어 여학생에게 원죄를 구원해 달라고 부탁한다. 미자의 ‘희생’ 은 소녀의 육체적 부활을 영화속에서 가능케 함으로써 시가 상징하는 근원적 아름다움이 현실 집단의 도덕성이라는 견고한 벽 앞에서 완전히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것이라는 감독의 희망적인 메시지를 구체화시키고 있다.

이 기적을 바라보며 나는 이창동이 우선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생각했고, 그 다음으로 윤정희가 천주교 신자가 아닌가 생각했다. 이 영화는 가톨릭 성서적 세계관을 현실의 도덕 윤리속에 투영한 한 예술가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작품이다. 이 영화는 구원과 부활에 대한 이야기다. 원죄와 속죄에 대한 이야기이며, 고난과 희생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희생을 통한 아름다움이 영혼의 부활과 어떻게 연결되는지에 대한 고독한 탐구이기도 하다. 이창동의 영화들중 가장 개인적인 작품이기도 하면서, 그 자신이 무언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음을 꽤나 완강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그래서 꽤나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의 죽음과 이 영화를 연결시키고 싶어했나보다. <밀양> 이 그에게 ‘시작도 없었고 끝도 없는 한 사람의 삶의 한 부분’ 을 영화적 언어로 형상화시키는 과정이었다면 <시> 는 이창동이 하나의 문법 카테고리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거장으로서 첫발을 내딛는 계기가 되는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이 영화에서 다르덴 형제와 테오 앙겔로폴로스, 고레에다 히로카즈와 오즈 야스지로를 모두 한꺼번에 품어낸다. 그리고 이들을 뛰어 넘어 새로운 경지에 다다른다. 그것은 이창동의 언어고, 이창동의 세계다. 더이상 그에게 어떤 레퍼런스가 더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한다. 그는 이제 그의 이름만으로 존재할 수 있는 어떤 ‘위치’ 가 되어버린 것 같다. 그는 여전히 절망을 다루지만, 그 안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기적을 무리없이 ‘영화적으로’ 보여준다. 그는 영화만이 가능한 세계가 무엇인지 너무나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의 영화에서 우리는 항상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너무 좋은 영화, 너무 아름다운 영화다. 이 영화에 대해 어떻게 더 설명을 할 수 있을런지.. 내 인생 최고의 한국 영화라고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오늘 참 힘들었는데 꽤나 큰 위로를 해주기도 했다. 고맙다.

김광석: 네번째

커트 코베인이 죽은 뒤 그를 알기 시작했듯이, 나는 김광석이 죽은 뒤부터 그의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누구나 그의 생이 어떠했는지 대충은 알고 있고, 음악을 좀 듣는다 싶은 사람이면 누구나 그의 노래 하나씩은 노래방에서 능히 부를 수 있을 정도였듯이, 나 역시 그의 음악을 그렇게 피상적으로 좋아했다. 10대 시절에는 그랬다. 그러다가 20대가 되고, 20대의 절반을 지나고, 서른의 고비를 넘어서면서 조금씩 다르게 들리기 시작했다. 그의 음악이 나이가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몸이 지치고 마음이 늙기 시작하면서 더 깊게 와닿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음악은 생각보다 아름답지 않다. 때론 염세적이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희망의 빛을 놓지 않는다. 그 끈질긴 생명에의 갈망속에서 처절한 사랑의 아픔이나 상식이 통하지 않는 세상에 대한 일갈을 풀어 놓는다. 그가 죽기 직전 내놓은 이 유작 앨범은 그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목소리를 가장 절절하고 아릅다고 처연하고 불안하게 전달하고 있다.

sb 와 함께 전역 후 처음으로 부대를 다시 찾았다. 처음이자 마지막이기도 했다. 몇시간을 그들과 함께 보냈다. 함께 농구도 하고, 내무반에 나란히 누워 추억을 되새김질하기도 하고, 당시 왕고의 허락을 얻어 훈련병들에게 짤막한 위로와 충고의 인사를 전하기도 했다. 위병소를 나설 때 더이상 설레이거나 기쁘지 않았다. 등 뒤에는 여전히 군복을 입은채 오늘과 내일을 버텨 내야 하는 군인들이 있었고, 그들이 세상으로 돌아올 때쯤이면 또다른 젊은이들이 같은 곳에서 같은 일을 하며 같은 방식으로 시간을 낭비해야 할 터였다. 버스를 타고 돌아오며 김광석의 이 앨범을 들었다. 이 앨범에는 좋은 곡들이 참 많다. jh 선배와 후배 hg 등과 함께 홍대 근처의 아주 작은 일본식 선술집에서 이 앨범을 함께 들으며 나누었던 대화처럼, 이 앨범은 가슴으로 들어야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언가가 있다. 예컨데 “너무 깊게 생각하지마” 에서 나오는 벌거벗은 여인네의 모습이 위로해주는 그런 나른한 오후의 느낌같은 것. 동서울 버스 터미널로 돌아오는 그 버스 안에서 무심히 이 앨범을 듣다가 “끊어진 길” 에서 갑자기 울컥하는 감정이 솟구쳤다. 다행히 sb 은 곤히 잠들어 있었고, 나는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어서 그냥 흐르는대로 내버려 두었다.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그저 아주 단순하고 솔직한 통일 노래였던 이 노래가 왜 그렇게 가슴을 후벼팠는지 지금도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다. 그땐 그냥 그랬다. 그러고 싶었나보다. 헤럴드 동문 체육대회때 선배들을 위해 “바람이 불어오는 곳” 을 함께 연습했고, 큰아버지가 살아 계실 때에는 큰아버지댁에 마련된 간이 노래방에서 “서른 즈음에” 를 불러 연로한 친척분들께 “우리 아기가 벌써 서른이냐” 는 핀잔을 들어야 했다. 여자친구와 헤어진 친구를 위해 소주를 함께 퍼마신뒤 노래방에서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을 목이 쉬도록 부른 적도 있다. 그런데 지금까지 내가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여전히 “끊어진 길” 이다. 그때 그 눈물이 너무 순수했음을 아직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눈물은 아주 깨끗했다. 그 눈물이 깨끗했던 이유가 여전히 힘든 하루 하루를 보내고 있을, 한때는 함께 어깨를 맞대고 누워 잠들었던 그 친구들을 뒤로 하고 서울로 돌아오는 사람으로서의 자책감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전역한 뒤에도 여전히 갈팡질팡 어디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서 절망적인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던 한 늙은 복학생의 서러움때문이었는지, 그도 아니라면 그냥 단순히 김광석의 맑은 목소리가 그동안 쌓여왔던 마음속의 찌꺼기를 말끔하게 제거해주면서 발생한 일종의 씻김굿이어서였는지, 잘 모르겠다. 아직도.

가난과 미래

나는 가난하다. 대학교 졸업때까지는 평생 부모님댁에서 신세를 졌다. 대학교에 들어가자마자 과외를 시작했지만 항상 일거리가 있는 편은 아니었기 때문에 가끔 용돈을 타 쓰기도 했다. 당연히 집세는 내지 않았고, 어머니가 차려주시는 밥은 당연히 내가 매일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했다. 다행히 대학을 장학금으로 다녔기 때문에 학비에 대한 신세는 지지 않았다. 문제는 유학을 결정하면서 부터 시작됐다. 대학 졸업과 거의 동시에 유학을 나왔는데 대학을 졸업할 당시 내 수중에는 정말 땡전 한푼이 없었다. 부모님과 일종의 계약을 체결했다. 패밀리론이라고 이름붙혔다. 공부에는 때가 있는 것이라며 돈걱정은 전혀 하지 말라는 말을 수도 없이 하셨지만 자식된 입장에서, 그것도 다른 친구들이 모두 취직해 돈을 벌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다시 돈을 쓰는 사이클을 한바퀴 더 돌겠다는 결정을 내린 사람 입장에서 여간 죄송스러운 것이 아니다. 미국에 도착하자마자 지불해야 했던 여러가지 정착 비용과 학교에서 부분적인 장학금과 월급만을 받아서 혼자 힘으로 도저히 생활이 불가능할때 추가적으로 들어가는 비용을 부모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했다. 월급이 나오지 않는 여름 방학 4개월동안의 생활비는 오롯이 부모님의 몫이었다. 지금까지 대충 몇천만원은 깨졌을 것이다. 지금은 겨우 내 힘으로 먹고 살고 있지만, 내년에 6년차가 되어 펀딩이 완전히 끊기면 어떻게 살아갈지 암담하다.

유학은 돈 있는 사람들의 것이다. 확실히 그렇다. 돈이 없다면 아무리 공부를 잘해도 나오기 힘든 것이 유학이다. 학교를 조금 낮춰서 전액 장학금을 주는 곳으로 가던가 유학을 포기하고 국내에서 공부를 하던가 해야 한다. 아니면 회사를 다니면서 돈을 악착같이 모아 그 돈으로 유학을 나와야 한다. 물론 그렇게 모든 돈도 1,2년 내에 금방 바닥이 나겠지만. 미국의 학비는 악명높고, 생활비는 한국보다 결코 싸지 않다. 조금만 외식을 자주 하거나 마음에 드는 옷을 한두벌만 사도 통장의 잔고는 큰폭으로 줄어든다. 그렇다고 매일 라면만 먹을 수는 없으니 과일도 사고 신선한 채소도 사서 요리를 해먹으려고 하면 올가닉 제품들은 또 왜이리 비싼지, 이 역시 만만찮다. 친구들과 회포를 풀기 위해 마시는 한잔의 술도 통장의 잔고를 스마트폰으로 체크해 본 뒤에야 살 수 있고, 아침에 피곤을 쫓기 위해 마시는 핫초콜렛도 얼마인지 치밀하게 계산해야 한다. 기름값이 아까워 차는 정말 필요할 때만 끌고 다녀야 하고 항상 구입해야 하는 책과 음반은 가끔 정말 필요할 때 돈이 없어 사지 못할 때도 많다.

비단 유학생뿐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대부분의 젊은이들이 나와 같은 생활을 하고 있을 것이다. 때문에 굳이 생색낼 필요는 없다. 그리고 내 뒤에는 항상 부모님이 있다. 내가 정말 어려운 순간이 되면 ‘치트키’ 를 쓰듯 부모님께 부탁을 드릴 수 있다. 때문에 목숨을 위협할 정도의 절박한 가난함은 아니다. 정말 힘든건 심리적인 부분이다. 마음속의 가난함이다. 아플때 아프다는 말을 차마 할 수 없고, 돈이 필요할때 돈을 부쳐달라고 말할 수도 없다. 죄송하기 때문이다. 항상 마음의 빚을 지고 살아가는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부모님의 걱정을 덜수만 있다면 차라리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지내는 편이 더 낫다고 생각할 정도다. 이곳에서 5년동안 살면서 수도 없이 많은 위기를 겪었다. 그 위기를 다 슬기롭게 이겨낸 것은 아니다. 때로는 우악스럽게, 때로는 거의 반쯤 포기해가면서 “버텨냈다” 라고 표현하는 쪽이 더 맞을 것이다. 그렇게 가까스로 쓰러지지 않고 버텨온 5년의 시간이 내게 남긴건 상처받은 자존심과 여전히 텅빈 통장 잔고, 잔뜩 늙어버린 육체, 그리고 쓰다 만 논문 쪼가리 몇장이 전부다.

물론 좋게 포장할 수도 있다. 나는 이곳에서 겸손을 배웠고, 참된 지식을 맛볼 수 있었으며, 청빈한 생활을 통해 가난한 마음이 주는 깨끗하고 맑은 정신 상태를 획득할 수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멋있고 쿨해 보이겠지. 근데 사실은 제발 이 지긋지긋한 가난에서 어서 빨리 탈출했으면 마음뿐이다. 지식이라는 건 대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것이어서 내가 책상 앞에 앉아 있는 것이 당장 밖으로 뛰쳐 나가 노가다를 해서 돈을 손에 넣는 것보다 뭐가 더 가치있는지 잘 모를 때가 많다. 한국의 친구들은 부모님 여행도 보내드리고 여자친구에게 좋은 것도 선물해 주고 그런다던데, 나는 당장 오늘 아침 핫초콜렛 한잔 살 돈이 없어서 건조한 날씨에 바싹 마르는 목을 그대로 가지고 강의를 해야 했다. 나도 부모님께 용돈 드리고 싶고, 여자친구에게 좋은 것 선물해 주고 싶다. 당장 내가 사고 싶은 핑크색 셔츠 한장의 문제가 아니라, 베풀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의 초라함이 싫을 뿐이다. 부끄러울 뿐이다. 그저 죄스러울 뿐이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까. 끝은 있다. 나도 잡마켓에 나갈 것이고, 그렇게 보잘것없는 논문을 가지고 여기 저기를 두드리고 다닐 것이다. 그러다 운이 좋으면 어디에서든지 나에게 돈을 주고 일을 하라고 하는 곳이 있을 것이고, 나는 지금보다 몇배는 많은 월급을 받으며 드디어 저축이라는 것을 한번 해볼 수 있을 것이다. 학자로서의 명예, 심장이 벌떡 벌떡 뛰는 토론을 할 수 있는 학자들이 득시글 거리는 미국이라는 곳에서의 직장, 더 나은 삶의 질.. 이런 것들을 지금 생각할 여유따위가 점점 마음속에서 사라지고 있다. 아무데라도 좋으니까, 아무 일이라도 좋으니까 제발 나에게 일거리를 던져주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입에 풀칠이라도 하고 살고 싶다. 베풀면서 살고 싶다. 현재의 비참함이 미래의 높이마저 깎아먹고 있는 셈이다. 당장 오늘 먹을 끼니도 없으면서 논어 맹자를 외우는 대책없는 선비의 고고한 마음가짐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두운 터널. 한없이 잘게 부수어지는 자존심과 자신감. 손에 잡히지 않는 공부. 내 자신에 대한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속절없이 흘러가는 시간들. 정해진 데드라인. 압박받는 마음. 더 초라해지는 현실. 끝이 가까워질 수록 조급만 마음도 더 빨라져만 간다.

아버지도 이런 과정을 버텨 내신 거겠지. 나를 앞서간 수많은 학자들도 다 비슷한 마음을 가지고 이겨낸 것이겠지. 그런 위로를 애써 억지로 하면서 오늘도 있는 반찬 몇가지로 저녁을 지어 먹으러 간다. 빨래도 해야 하는데..

Edward Zwick: Love and Other Dru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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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가 파는 약은 졸로코프라고 하는, 라이벌 제약 회사가 만드는 프로작과 비슷한 성분의 항우울제다. 여자가 걸린 병은 파킨슨병. 불치병이다. 영화가 소개하듯 이 병은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앗아가 버린다. 아름다운 미소부터 대소변을 가리는 능력까지. 상대방에 대한 기억까지.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바뀌게 되는 이 불치병에 걸린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는 ‘당연히’ 그 여자 곁에 남아 불확실한 미래를 함께 하기로 결심한다. 그래야 로맨스 영화답지. 이 영화가 가지는 미덕은 그런 뻔한 결말에 있지 않다. 그 뻔한 결말로 나아가는 과정은 역시 때때로 중심을 벗어나고 비틀거리긴 하지만, 최소한 결말보다는 조금 더 흥미로운 구석을 많이 가지고 있다. 어떤 한 사람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완전히 바뀌는 일이 가끔 발생한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섹스 파트너에 불과할뻔한 관계는 조금 더 진지한 연애로, 더 나아가 자신의 커리어까지 포기하게 만드는 깊은 사랑으로 발전한다. 그 과정에서 이 둘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의심한다. 상대방을 의심한다. 내가 과연 이 사람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나는 이렇게 부족하고 약한데, 상대방은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날 수 있는 괜찮은 사람인데, 정말 나를 끝까지 떠나지 않고 내 곁에 항상 남아 있을 수 있을까. 나의 못난 부분, 약한 부분까지 감싸 안아줄 수 있을까. 그런 의심들을 통해 관계를 보다 확고한 믿음의 끈으로 단단하게 만드는 과정이 그리 순탄치만은 않다. 현실의 연애는, 현실의 남녀 관계는 영화보다는 조금 더 비관적인 방향으로 발전하기 쉬운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 사람을 좋아하게 되고, 더 나아가 그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 과정은 사실 그다지 아름답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가끔 믿기지 않는 일들이 벌어지기도 한다. 효능만이 부각되고 부작용이 검증되지 않은 비아그라로 성공 가도를 달리게 된 남자가 정작 본인이 그 부작용의 고통을 겪으며 사랑이라는 “a Kind of Drug” 의 리스크를 감수하기로 결심하는 순간, 우리는 남자의 믿음이 여자의 불안함을 달래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된다.

100% 확신은 없다. 100% 효능이 확실한 약도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사랑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것이 그냥 연애인지 진지한 사랑인지 확신을 갖게 되는 순간은 아마 그것이 끝나는 순간까지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중에 그것이 사랑이었구나, 그냥 연애였구나, 하고 짐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거꾸로 생각하면 그 의심 자체에 얽메여 있을 이유가 전혀 없다는 뜻이기도 하다. 지금 좋아하고 있는 상대에게 충실하며 조금씩 “함께” 앞으로 나아가는 것, 차라리 그렇게 일상의 하루 하루에 스스로를 매몰시켜 버리는 편이 더 현명할 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어느새 우리 관계가 몰라볼 정도로 단단해져 있음을. 지금 굳이 깊게 생각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앤 해서웨이는 아름답다. 그래서 그녀가 “나보다 더 섹시하고 이쁜 사람들 많이 만날 수 있잖아요.” 라고 할때 뭥미? 하는 표정을 짓게 된다. 제이크 질렌할도 능숙하게 연기를 해낸다. 두 사람 모두 이것이 연기입니다, 라고 말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고 있지만 그들의 모습속에서 우리의 삶을 끄집어 내어 생각하게 만드는 힘을 가지고 있다. 영화는 평범하고 가끔 너무 뻔하기도 하지만 나쁘지 않다. 전부터 되게 보고 싶은 영화였고, “생각보다 야하다” 라는 평을 많이 들어서 설마 설마 했는데 진짜 야했다. 그런데 그 야한 부분들이 배우들을 과하게 소비시키는 용도로 사용되기 보다는 섹스와 사랑을 대조시키기도 하고 같은 선상에 놓기도 하는등 영화의 플롯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사용된다는 인상이 강하다. 그래서 그렇게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Charlie Haden: Land of the Sun

누구에게나 그러하듯, 나에게도 군대는 하나의 challenge 였다. 꽤나 무거운 세금과도 같았던 그 2년동안의 시기는 얻은 것보다 잃은 것이 더 많은 시기이기도 했다. 한국 사회를 지배하는 조직생활의 부조리함을 몸으로 익히는 대가로 2년동안 만성적인 수면부족에 시달리는 것이나 아무런 이유없이 두들겨 맞아야 하는 것등을 감수해야 한다는 것은 그다지 fair 한 deal 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여러가지 어려움이 많은 군생활이었지만, 그중에서도 지금까지 기억할 수 있는 소소한 고충들이 몇 있었다. 그중 하나는 ‘취침음악’ 이었다. 내가 있던 부대에서는 취침소등을 한 뒤 아주 작게 음악을 틀어 놓고 취침하는 것을 관례적으로 허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한 내무반의 ‘왕고’ (왕고참의 줄임말) 는 그 음악을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물론 일과시간이 끝난 뒤 볼 수 있는 텔레비젼의 리모콘 컨트롤 권한도 왕고가 가지고 있었다. 대단한 권력이었던 셈이다. 각종 미디어를 통제할 수 있었으니.. 나는 재수없게도 이등병 시절부터 상병때까지 군대에서 이별을 경험한 왕고만을 만났다. 이등병 시절의 왕고는 임창정의 “소주 한잔” 을 6개월동안 틀었다. 일병 시절의 왕고는 그 전통(?)을 물려 받아 “소주 한잔” 을 6개월 더 틀었다. 상병시절의 왕고는 조금 나아졌나 했는데 그게 바이브의 “사진을 보다가” 였다. 그 곡만 자기 전에 6개월을 들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임창정의 “소주 한잔” 은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병장이 되고 내가 왕고가 됐다. 우습지만 그렇게 되기 한참 전부터 취침 음악을 어떤 것으로 틀까 고민을 거듭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나온 휴가에서 나는 씨디 두장을 사가지고 복귀했다. 한장은 Eddie Higgins Trio 의 <If Dreams Come True> 였고 다른 한장은 Charlie Haden 의 <Land of the Sun> 이었다. 나는 제대로 된 취침 음악을 후임들에게 들려주고 싶었고, 그러기 위해선 일단 인스트루멘탈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급적이면 재즈를 틀고 싶었다. 클래식은 아이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을 것 같았고, 그렇다고 가요나 팝을 틀고 싶지는 않았다. 군대는 일상이 피곤함으로 넘쳐나는 곳이고 특히 심리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극한의 피로감을 만성적으로 느끼는 일,이등병들은 베개에 머리가 닿자마자 코를 골며 잠들기 쉽상이다. 그래서 첫번째 곡의 선택이 중요했다. 항상 같은 곡만을 들려줄 수는 없으니까. 그건 아마 내가 이등병 시절 느꼈던 고문과 다르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오디오 바로 옆에 누워 하루에 한곡씩 각기 다른 곡들을 들려 주었고, 그렇게 몇주가 지나 두 앨범의 모든 곡들을 한두번씩 듣게 된 후부터는 막내 이등병들에게 신청곡을 받기 시작했다. 어떤 곡이 좋았니, 하고 물으면 대부분은 어물어물거리다가 조심스럽게 자신들 나름의 취향을 고백했다. 그렇게 우리는 꽤나 만족스러운 취침 음악으로 몇달을 보낼 수 있었다. 나중에는 휴가나 외박을 나가는 후임들에게 부탁해 다른 음반들을 추가적으로 받아와서 틀어주기도 했는데, 아무래도 처음에 함께 들었던 이 두장의 음반만큼의 기억이나 애착은 없었던 것 같다.

찰리 헤이든의 <Land of the Sun> 은 아름다운 앨범이다. 앨범의 첫곡의 첫번째 구절이 채 지나가기도 전에 이미 듣는이의 마음은 따뜻하게 녹아서 말랑말랑하게 변해있다. 각종 관악기들은 너무 튀지 않게 섬세한 감각으로 음악을 주도하고, 베이스와 드럼은 살짝 살짝 듣는이의 마음을 톡톡 건드린다. 뜨거움보다는 따뜻함으로 다가오는 이 음반은, 앨범 커버처럼 해가 질 무렵 남미의 어딘가에서 해먹위에 몸을 누이고 지나치게 어렵지 않은 소설 한권을 반쯤 읽었을 때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을 감은채 들으면 딱 좋은 노래들로 가득차 있다. 항상 들어도 좋고, 언제 들어도 좋다.

나중에 전역할 때가 되어 위병소 밖을 통과하기 직전, 군에 남아 있는 후임들 한명 한명과 돌아가며 포옹을 하는 기회가 있었다. (군대는 생각보다 별거 다합니다. 그쵸?) 내가 전역할 당시 일병이었던 한 후임이 갑자기 펑펑 울면서 그때 틀어준 음악으로 정말 큰 위로를 받았다며 잊지 않겠다는 말을 해주었다. 많이 고마웠다. 나에게는 그저 아주 약간의 작은 배려였지만,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던 그 친구에게는 꽤나 큰 감동으로 다가왔던 듯 싶다.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이등병 시절 경계 근무에서 작은 실수를 하나 했다는 이유로 당시 사수였던 어떤 병장에게 개머리판으로 머리를 여러차례 찍힌 일이 있었다. 근무가 끝나고 돌아와 그 고참의 속옷을 대신 빨면서 갑자기 서러운 느낌이 복받쳐서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갑자기 전역을 코앞에 둔 ‘개구리’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그렇게 불렀다) 한명이 들어와서 그런 나를 발견했고, 내가 해야 했던 빨래를 대신 해주며 이런 저런 좋은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고, 지금 생각해보면 그저 그런 상투적인 말들이었다. 그런데 아직도 그 고참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리고 그 고참의 그 행동 하나가 나의 군생활 전체를 바꾸어 놓았다. 나는 후임들에게 폭력을 사용한 적도, 욕설을 해본적도 없다. 그런 행위들 없이도 충분히 잘 굴러갈 수 있는 조직을 만들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그 믿음은 고참의 말 한마디에서부터 시작했다.

모두가 힘들고 어려운 때일 수록 질책과 짜증이 아닌 격려와 위로가 더 나은 상황을 만들 수 있다. 이건 군대를 나와서도 유효한 진리같다. 우리가 서로 감정적으로 지쳐있을때, 우리가 서로에게 피로감을 느낄때, 우리가 서로의 잘못만을 발견하려고 애쓸때가 있다. 사람인데 어찌 그런 일이 없을 수 있을까. 그럴때 한번만 마음을 다잡고 아주 사소한 배려라도 하나 먼저 베풀고자 노력한다면, 따뜻한 말 한마디 먼저 건넨다면, 아마 우리는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 고참의 말 한마디와, 찰리 헤이든의 음악에서 그런 것들을 배웠다.

The Walkmen with Father John Misty at Ogden Theater, Denver

The Walkmen 을 처음 접한건 PAPER 라는 잡지의 음반 리뷰란에서였다. 당시 3000원 정도 하던 그 잡지는 문화 전반을 다루는, 당시 내가 받은 인상은 ‘민들레영토의 자매지’ 정도 되는 성격의 월간지였다. (맞나, 월간지?) 그 리뷰에서 이들을 표현한 “먹먹한 안개같다” 라는 글귀가 인상깊어서 데뷔 앨범을 사서 들었고, “The Rat” 에 흠뻑 빠져 들었다. 그리고 무척 게으른 나의 리스닝 라이프를 생각하면 매우 이례적인, 지금까지 발표한 여섯장의 정규 앨범을 모두 소유한 일종의 ‘팬’ 으로 남게 되었다. 이들의 음악은 아주 전형적인 록음악이다. 정통적이고, 전통적이다. 그 위에 이들만이 드러낼 수 있는 독특한 색깔과 정체성이 있다. 전통과 균형, 익숙함과 새로움 사이에서 절묘한 균형점을 찾아내는 이들은 놀랍게도 계속 발전중이며, 그래서 1집보다는 2집에서, 5집보다는 6집에서 더 단단하고 깊이있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1집과 2집에서 꽤나 많이 등장했던 레퍼런스들도 작업을 거듭할수록 하나씩 이들만의 오리지널리티 안에 포섭되어 갔다.

이들의 공연은 이러한 정체성을 가까이서 관찰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다. sc과 나는 2008년인가 2009년쯤 이들의 공연을 처음으로 접할 수 있었다. 학교 바로 옆에 있는 Fox Theater 에서 – 무려 – Japandroids 를 오프닝 밴드로 내세운 투어를 볼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도 내가 꼽는 one of the favorite performances of all time in america 로 남아 있다. 그런데 이번 2013년 투어는 오프닝 밴드가 무려 Father John Misty, 티켓 가격은 단 $29.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특이하게도 이번 공연 멤버는 영혼의 공연 투탑인 sc뿐만 아니라 그의 룸메이트인 k, 마침 이날 생일을 맞이한 st, 그리고 또다른 k 까지 다섯명으로 sc 의 작은 차 한대를 가득 채울 정도로 gang 의 덩치가 꽤나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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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와 전혀 다른 음악적 취향을 가지고 있는 ch 는 st 의 생일을 축하해주기 위해 잠깐 저녁 식사와 이후 이어진 간단한 술자리에만 동참했다. social living 을 통해 구입한 바우쳐로 싸게 calzone 이라는 음식을 처음으로 먹어봤는데 맛은 그냥 피자였다.

공연은 역시나 조금 늦게 시작했고, Father John Misty 가 한시간을 꽉 채운 오프닝 무대를 선보였다. 뒤이은 The Walkmen 의 공연이 한시간 반이 조금 안되는 시간동안 진행되었으니 이정도면 오프닝 밴드라기 보다는 그냥 합동 공연 수준이었다. 오프닝 공연답지 않게 조명도 이쁘게 잘 쏴주고 사운드도 잘 잡아 주더라. 특히 리드싱어이자 이 프로젝트의 알파요 오메가인 Joshua Tillman 은 쇼맨십이 장난 아니었다. 딱 붙는 상하의를 이쁘게 차려 입은 키크고 깡마른 남자가 별의별 코믹한 댄스를 추며 심각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 가히 미국의 장기하를 보는 듯 했다. 아니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인가.. 암튼 멋있었다. 최소한 공연을 보러온 사람들을 어떻게 하면 즐겁게 해주는지는 정확하게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몇몇 곡들은 스튜디오 버전보다 훨씬 좋았다. 특히 마지막으로 연주한 간판 싱글 “Hollywood Forever Cemetery Sings” 는 라이브로 반드시 들어야만 하는 이유가 존재하는 압도적인 퍼포먼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st 와 잠깐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지만 이 조슈아 틸만은 확실히 플릿 폭시스의 드러머 정도로 머무르기에는 너무 많은 끼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로빈 펙놀드가 워낙 압도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송라이팅에서조차 주도적으로 참여하지 못한 것이 이들을 갈라지게 한 주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하는 추측도 해봤다.

photo 2Father John Misty 가 방탕한 사내의 음탕하고도 웃긴 퍼포먼스였다면 The Walkmen 은 이들의 정갈한 양복 차림에서 짐작할 수 있듯 록음악 공연에서 기대할 수 있는 가장 정돈된 형태의 무대를 보여 주었다. 어느 시점에 peak 으로 올라갈 것인지 뻔히 예상이 되는 곡 형태임에도 불구하고 막상 라이브에서 그 순간을 접하면 저릿하게 온몸을 자극시키는 울림이 있는 그런 퍼포먼스. 여섯장의 음반을 발표하면서 워낙 좋은 곡들을 많이 만들어온 밴드라 어떤 셋리스트를 들고 나올지 궁금했는데, 놀랍게도 “The Rat” 을 포함한 초기 곡들을 생각보다 많이 들려주었다. 물론 이들의 최고작이라고 할만한 <Lisbon> 와 <You & Me> 에서 많은 곡들이 나왔다. 신보의 곡들이나 미발표곡도 몇개 들려 주었고.. 지난번보다는 조금 더 얌전하고 부드러운 곡들 위주였다. 물론 “Angela Surf City” 같은 킬링 넘버들은 빠지지 않았다. (이번에 빠졌으면 섭섭할뻔 했음!) 생각보다 공연이 일찍 끝났고 앵콜도 달랑(..) 두곡만 해서 약간 아쉬웠고, 보컬인 Hamilton Leithauser 의 목상태가 약간 좋지 않아 고음에서 달리는 느낌을 주었던 것이 조금 안타까웠다. 그래도 전체적으로는 무난하고 기대를 충실하게 만족시킨 공연이었던 것 같다.

photo 3 공연을 보며 개인적으로 두가지 정도를 생각했다. 첫째, sc 가 공연 중간에 말했지만, 나는 평생 한국에서 본 모든 공연들을 합친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공연을 sc와 함께 했다. sc 도 나와 가장 많은 공연을 봤다고 했다. 이제 sc는 직장을 구해 다른 곳으로 떠날 것이고, 우리는 아마도 지금처럼 같은 도시에서 몇년을 함께 지내는 일은 평생 없을 것이다. 못내 아쉬워졌다. 물론 나중에 서로 여유가 생겼을때 코아첼라나 오스틴 시티 리밋같은 페스티벌에서 따로 만날 수는 있겠지만, 평일 밤 함께 저녁을 먹고 차를 운전해 천명이 채 들어가지 못하는 작은 규모의 공연장에서 함께 어깨를 들썩이며 하루의 피로를 정리할 수 있는 그런 추억, 뻐근해진 등과 어깨를 두고 서로 누가 더 늙었냐 놀려대며 낄낄거리거나 그날 있었던 공연과 기타 음악들에 대해 수다를 떨며 돌아오다가 근처 주유소에 들려 콜라를 사서 나누어 마시는 그런 추억을 더이상 만들지 못한다는 사실에 아주 약간 슬퍼졌다.

다른 하나는 내 평생의 로망, sc 와 내가 가지고 있는 일종의 이룰 수 없는 판타지, 바로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공연을 보러 가는 것에 대한 생각이었다. 이런 공연, The Walkmen 의 음악이 잔잔히 울려 퍼지는 가운데 약간의 대마초 냄새와 꽤 괜찮은 맥주가 함께 하는 너무 격렬하지 않은 이런 분위기의 공연을 그사람과 함께 왔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공연장에 들어가기 전부터 나와서 집에 오는 길까지 내내 생각했다. 지저분한 거리와 백인뿐인 관중들 사이에서 그 이와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며 공연전 저녁을 함께 먹고 공연을 함께 보고 함께 집에 돌아오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근처에서 간단하게 군것질을 하는 그런 생각.. 그건 아마도 그 사람을 하루종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좋은 음악과 포근한 날씨,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모든 것들이 나를 감싸고 있는 그 밤을 그와 함께 하지 못한다는 사실이 매우 안타까웠다. 다음에는, 다음에는 언젠가 꼭 함께 할 수 있겠지 라는 희망도 한번 가져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