뭉뚱그린 근황. 생각들.

1. 아버지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미국을 좋아하지 않으셨다. 아니, 싫어한다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실망을 많이 하셨다. 그 실망의 대부분은 허리케인 샌디의 영향으로 마비 상태에 빠진 뉴욕의 시스템과 불친절한 미국 공무원들의 태도에 기인했던 것 같다. 아버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갈아타는 과정에서 예기치 않은 시스템 마비로 발을 동동 구르셔야 했고 그 과정에서 승객들의 불편은 나몰라라 하는 공항과 항공사 직원의 표정과 태도에 큰 충격을 받으셨다. 또한 허리케인이 불어 닥친 뒤 마비된 뉴욕의 지하철 시스템과 몇마일씩 줄서서 기름을 받기 위해 기다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며 “세계 최고의 도시라는 뉴욕이 허리케인 하나를 어쩌지 못해 이 난리란 말인가!” 며 개탄하셨다. 뉴욕으로 이민을 간 외가쪽 친척들과 나는 만약 같은 상황이 한국에서 벌어졌다면 분명히 누군가의 목이 날아가지 않았겠냐며 침착하게 대응하는 시 당국과 시민들의 태도도 생각해 보십사 나름 방어를 해보려 노력했지만 아버지의 머릿속에서는 도통 이해되지 않는 일들 투성이었나 보다.

2. 뉴욕은 생각했던 것보다 깨끗했고, (친척 누나의 설명에 따르면 허리케인으로 인해 뉴욕에 서식하고 있던 쥐들의 대부분이 몰살당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서울과 비슷한 느낌이었다. 이것은 마치 뉴욕과 서울이라는 location 혹은 regional condition 에서 오는 특성이 아닌, 한 나라에서 가장 큰 메갈로폴리탄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람들은 바빴으며, 이 바쁨이 그들의 표정과 몸짓을 규정하는 것만 같았다. 몇백년동안 쌓인 긴 역사가 만들어낸 그들만의 규칙과 삶의 양식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것은 한없이 너그럽고 여유로운 볼더의 사람들과는 확연히 다른 것이었고, 그것이 딱히 불행하다거나 퍽퍽하다고 느껴지지 않았던 것은 그 다른 공기에서 느껴지는, 펄떡펄떡 살아 숨쉬는 삶의 생동감때문이었을 것이다. 12월 초에 혼자 조용히 투표를 핑계 삼아 한번 더 가볼 생각이다. 미술관들도 한번씩 더 가서 찬찬히 더 살펴 볼 요량이다.

3. 보스턴은 이와 반대로 미국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는 지식인 백인 계층의 정신적 고향을 보는 느낌이었다. 악센트는 강하고 억세었으며, 사람들은 결코 호의적인 이유에서 함부로 웃어주지 않았다. 뉴욕에서 느꼈던 다양성보다는 전통이라는 가치가 조금 더 크게 와닿는 공기가 보스턴 곳곳을 흐르고 있었다. 하버드는 하버드였고, 찰스강은 찰스강이었다. 그것은 그것이 가진 대로, 그것이 알려진 대로 존재해야만 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를 보좌하느라 너무 정신이 없어서 관광은 전혀 하지 못했다. 감기에 걸린 아버지를 위해 Horse 사탕을 사기 위해 동분서주해야 했으며 음식을 심하게 가리시는 아버지를 위해 하버드 근처 한국 식당을 물색해야 했다. 성당 약도를 그려드려야 했고 심지어 카카오톡 이모티콘 보내는 법도 설명해 드려야 했다. 아버지와 헤어지고 공항으로 가기 전까지 얻은 자유시간 세시간은 그래서 완전히 파김치가 된 상태에서 하버드 스퀘어에 있는 파네라에 가서 거의 엎드려있다시피 하며 보냈다. 보스턴도 다음에 꼭 혼자 다시 가봐야 겠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보다 좋은 곳인 듯 했지만, 제대로 보지 못했다.

4. 어제는 내가 있는 학교에서 주최하는 컨퍼런스에서 발표를 했다. 지도교수님이 organizer 였고, 때문에 나는 거의 free pass 상태로 발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이것이 독이었다. 이 컨퍼런스는 수준이 상당히 높았고, 현재 연구를 가장 활발히 하는 미국의 젊은 교수들이 열띤 토론을 하는, 그런 곳이었다. 나같은, 잡마켓에도 나가지 않는 얼치기 대학원생이 어설프게 발표를 할 수 있는 그런 자유로운 분위기가 아니었다. 급기야 지도교수님이 나에게 들어온 날카로운 질문을 대신 방어해 주시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망했다” 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반성을 많이 했고, 와신상담후 내년에 달라진 모습으로 다시 그자리에 서리라 다짐했다. 그 자리에 있었던 그 누구도 나의 이름을 기억하지 않겠지만, 나는 나름 치욕이라고 생각했다.

5. 선을 본 아가씨와는 잘 만나고 있다. 생각했던 것보다 너무 좋은 분이다. 나이는 나보다 훨씬 어리지만 생각의 깊이나 타인을 대하는 태도, 배려심, 예의,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선까지 흠잡을 구석이 전혀 없는 친구다. 나는 보통 이성과 단둘이 만났을 경우 대화를 주도하는 편인데 이 친구와 만나면 하염없이 강의 수준의 설명을 듣고 이해하기 바쁘다. 저번에 만났을 때에는 드디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무엇인지, 그리고 현재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연구가 활발히 진행중인지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나는 일제시대 식민지 수탈론과 근대화론이 어떻게 대립하고 있으며 경제학적 방법론이 그 과정에서 어떻게 기여할 수 있는지에 대해 간략히 이야기했다. 우리가 나누는 대화는 이런 것들이다. 물론 일반적이고 사소한 이야기들도 많이 하지만, 서로가 지적으로 자극받고 흥미를 느끼는 부분은 서로가 평생 모르고 살았던 일종의 blind side 를 발견할 때이다. 과학이 어렵게 느껴지는 어린 친구들을 위해 쉽게 과학의 원리를 교육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 그 친구가 가진 삶의 철학도 의미가 있고, 수업을 세개씩 들으며 지도 교수의 실험과 본인의 실험도 함께 진행하는 괴물스러운 성실함도 본받을 만한 부분이다. 서른살이 넘어가다 보니 이쁘고 섹시하고 매력적인 (그러니까 성적으로 매력적인) 여자보다는 함께 지내며 배울 점이 항상 존재하고 존경할 수 있는 여자가 더 끌린다. 그 전에는 친구같은 여자를, 그보다 조금 더 전에는 그냥 이쁜 여자를 좋아했다. 이제 그냥 이쁘기만 한 여자에게는 아무런 매력을 느끼지 못하겠다. 이쁘면서 지적이고 예의바르며 성실하고 착한 여자가 최고이겠지만, 그런 여자가 세상에 존재하는지부터가 의심스러우며 존재한다고 해도 나와 연이 닿을 가능성은 극히 적기에, 신중한 포기와 선택을 해야만 하는 것 같다.

6. 문제는 이 친구와 연애를 할 것이냐 조금 더 깊은 관계로 나아갈 것이냐 아니면 지금처럼 즐거운 대화를 시간 날때 만나서 나눌 수 있는 좋은 친구로 남아 있을 것이냐의 선택이다. 이 선택은 조금 더 많이 생각을 해 봐야 할 것 같다.

7. 농구 시즌이 시작됐다. 피스톤스는 역대 최악의 출발을 하고 있고, 콜로라도는 예상대로 순조롭게 시즌을 시작했다. 피스톤스는 로터리픽을 획득할 것 같고, 콜로라도는 열심히 하면 다시 한번 토니에 진출할 수도 있을 것 같다. 이 두 팀 외에는 크게 관심이 가는 팀이 없다. 꾸준히 응원하고 있는 조지타운은 올해도 왠지 실망시킬 것만 같고, 덴버 너게츠는 이상하게 큰 정이 가지 않는다. 물론 세컨 페이보릿 팀인 것은 확실하지만.

8. 유학생활 5년차만에 드디어 모든 판타지 리그에서 미국인들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그것도 풋볼로. 대학 풋볼 판타지 리그와 프로 풋볼 판타지 리그 모두 리그 1위를 질주중이다. 물론 판타지 리그에서의 승률과 실제 경기를 읽는 눈은 별로 큰 상관관계가 없다. 그냥 좋은 스탯을 찍어낼법한 선수들을 남들보다 먼저 발견하기만 하는 되는 것이다. 그래도 그게 어디야!

9. 오늘 아침에는 정말 오랜만에 전화를 길게 했다. 어머니가 아닌 사람과 전화를 길게 한 것은 정말 오랜만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관계가 정리됐다. 더이상의 미련도 없고, 더이상의 아쉬움도 없다. 그냥 그 친구가 행복하기만을 바랄 뿐이다. 나도 행복할테니. 이제부터는 너 없이.

4 thoughts on “뭉뚱그린 근황. 생각들.

  1. 뉴욕, 보스턴 둘 다 여유가 있을때 한번 더 가세요. 넘 좋다는 ^^
    겨울이라 the met roof top은 닫아서 아쉽지만 금요일 저녁에 가면 9시 까지 여는데 박물관을 혼자 가진것 처럼 구경할수 있어서 좋아요. 발코니에서 string quartet연주하는것도 좋구요. 보스턴은 제 생각에는 제일 동부다운 도시인거 같은데 그런 전통/보수적임이 엄청난 숫자의 학생들/젊음과 충돌하는게 참 재밌는 곳이에요.

    선을 본 아가씨와는 어떻게 진행중인지 궁금해요 헤헤

    • 네 맞아요. 저도 비슷한 느낌을 보스턴에서 받았어요. 저 MIT 근처도 구경해 보지 못했다는.. ㅠㅠ 그래서 말씀하신 것처럼 뉴욕에는 조만간 한번 더 갈 것 같아요. 투표도 할겸 만나지 못한 친척들도 만날겸 학기중이지만 짧게라도 다녀오려고 해요.

      선본 아가씨와는 가끔 잘 만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아직 너무 어려서 선의 본래 목적에는 충실하지 못할 것 같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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