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휴일: My Feet Don’t Touch the Gr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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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휴일이라는 뮤지션이 처음 한국에 등장했을 때 약 두가지의 반응이 섞여서 (하지만 모두 격렬하게) 튀어 나왔던 것으로 기억한다. 하나는 “한국에도 이런 음악이 드디어..!” 하는, 현대 주류 영미팝의 감성을 한국 인디씬에 그대로 ‘이식’ 한다는 의미에서 나온 감탄사였고 다른 하나는 “아니 이 친구는 대체..?” 하는, 조휴일이라는 뮤지션 개인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음악적 아우라에 대한 찬사였다. 그가 만들어내는 압도적인 훅과 창의적인 가사는 뮤지션 개인의 이미지, 혹은 입지를 만들어내기에 충분했고, 아이돌 팬덤과 같은 열렬한 지지층을 생성해낼 수 있었다. 이 긴 제목을 가진 앨범은 조휴일이 한국에 “상륙”하기 전 뉴저지에 있는 집에서 만든 데모 테잎에 수록되어 있던 노래들을 편집한 것이다. 3분이 넘지 않는 20개의 곡들이 별다른 순서에 대한 고려가 없어보이는 정렬 방법을 거쳐 가지런히 정리되어 있다. 정규 앨범으로서의 가치는 거의 없지만 조휴일이라는 뮤지션이 과연 어떤 배경을 거쳐 한국에 당도하게 되었는가, 에 대한 좋은 사료라고 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발매한 두장의 정규앨범에서 느껴졌던, 번뜩이는 재치와 재능이 엿보이는 곡들도 있고, 그저 한번 시험삼아 만들어 본 듯한 곡들도 있다. 뮤지션 개인에 대한 관심도가 이처럼 높았던 적도 참 드문 것 같은데, 이 앨범은 그러한 적폭적인 관심과 애정에 대한 흥미로운 해답, 혹은 해설서 정도쯤 되는 것 같다.

정태춘, 박은옥: 바다로 가는 시내버스

사실 난 정태춘과 박은옥을 잘 알지 못한다. 그들의 세대가 아닐 뿐더러, 그들을 선배라고 부를 수 있는 연배도 아니었다. 그들이 이미 무대 뒤편으로 사라진 뒤에서야 비로소 음악을 듣기 시작한 사람이 나다. 그들이 부른 “92년 장마, 종로에서” 가 운동권 선배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나중에 글로 배워야 했던 사람이 나다. 그래서 정태춘과 박은옥이 10년만에 발표한 이 새 음반을 선뜻 구입하기 어려웠다. 내가 들을 자격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 단순히 한번 들어보자, 라는 생각에서 구입한 음반인데 뒷통수를 맞은 것과 같은 충격을 받았다는 사실을 먼저 고백해야 겠다. 정태춘의 음악은 생각보다 훨씬, 훨씬 더 좋았다. 아니 아름다웠다.

음악이 만들어지는 과정이 아름다웠기 때문일 것이다. 앨범 속지에 있는 정태춘의 글을 인용해본다.

지난 30여 년을 함께해 준 아내 박은옥을 위해 다시 노래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새 앨범을 너무나 오랫동안 기다려준 감사한 벗들을 생각하며 녹음 작업을 했다. 

‘강이 그리워’ 는 가을 지리산의 이원규 시인네에 다녀와서 썼고, ‘섬진강 박 시인’ 은 또 그때 거기 이웃의 박남준 시인으로부터 받은 그의 신간 시집을 읽고 거기서 몇 구절을 차용하며 썼다. …… 
……..’서울역 이씨’는 어느 겨울 서울역에서 죽은, 한 노숙자를 생각하며 썼다. ‘바다로 가는 시내 버스’는 온전히 박은옥을 위한 노래이며 ‘눈 먼 사내의 환원은’은…. 
……’날자, 오리배…’는 오늘도 이 지구위를 떠도는 세계의 이주 노동자들을 위해 박민규의 어느 단편소설집 우화를 확장하여 썼다. ……

이러한 선한 의지와 목적을 가지고 만든 음악이 아름답지 않을리가 없다. 때로는 낮게 읇조리며, 때로는 아예 멜로디를 포기하고 시를 낭송하는 느낌으로 메시지를 전달하는 정태춘의 목소리는 화려하지 않지만 굵고 깊다. 블라인드를 걷어 창 밖이 활짝 보이게 하고 씨디를 걸어 음악을 듣다 보면 가슴 한켠이 허 해지면서 동시에 정화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이것은 나와 같은 세대의 그 어떤 젊은 뮤지션들도 흉내내지 못할, 인생에의 깊이에서 오는 아름다움일 것이다. 그래서 감사히 듣게 된다.

9와 숫자들: 유예

9와 숫자들의 최신작인 <유예> 는 8곡, 37분 남짓의 러닝타임으로 아주 간결한 구조를 취하고 있다. 하지만 요즘 트렌드처럼 “러닝타임이 40분밖에 안하는데 벌써 지루하다 싶은” 느낌을 주지는 않는다. 이들은 영리하고, 영리한 만큼 음반의 구성도 충분히 재미있게 꾸며 놓았다. 지루할 틈은 없다. 전작이 가지고 있었던 미덕이기도 하다. 약간의 변화가 눈에 띈다. 전작의 댄서블한 느낌이 많이 옅어진 반면 조금 더 복고적인 한국 록음악 사운드를 적극적으로 차용한 느낌이 든다. 전자나 후자나 모두 과거의 정서를 되살린다는 점에서는 같은 노선이긴 하지만, 리듬이 넘실거리는 흥겨운 팝에서 조금 더 록의 본연의 색깔에 가까운 음악으로 레퍼런스를 변화시킨 것이다. 전작이 벗꽃이 흩날리는 봄의 음악이라면, 신작은 낙엽이 지고 첫눈이 올 때쯤의 쌀쌀함이 느껴지는 초겨울의 음악같다. 결과물은 나쁘지 않다. 처음 들었을 때에는 “읭?” 하면서 생각보다 별로라는 느낌이 든 것이 사실이지만 계속 듣다 보니 결코 나쁘지 않은 음악이라고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다. 자꾸 들어도 질리지 않고, 오래 들을 수록 진한 맛이 우려져 나오는 것이 9와 숫자들 음악의 또다른 미덕이라고 한다면, 이 앨범 역시 같은 맛과 향을 가져다 줄 것이다.

Various Artists: 이야기해주세요

종군위안부 문제는 한국 사람이라면 모두나 알고 있는 이슈다. 모두가 심각성을 인식하고 있고, 또 타인과 공유할 수 있을 정도로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 그런데 아무도 발벗고 나서서 도와주려고 하지 않는다. 모두가 위안부 할머니들을 동정하고 지지하지만, 그 누구도 할머니들과 함께 매주 수요일 일본 대사관 앞에서 피켓을 들려고 하지 않는다. 정치인부터 초등학생까지, 그 누구도 진심을 다해 관심을 가져주지 않는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는 동안 이제 그 할머니들은 몇십분 남짓 생존해 있을 뿐이다. 만약 그들이 전부 세상을 떠났을 때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있을까? 시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제적으로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이득을 보는 집단이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이 할머니들 외에는. 아니 이 할머니들조차 그들이 원하는 “승리” 로 인해 얻을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사실에 대한 책임자의 인정 정도일 뿐. 인생을 송두리째 빼앗긴 소수의 희생자들이 생존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조치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사회는 건강하다고 할 수 없다.

독립 여성 음악인들이 모여서 음반을 만들었다. 부클릿을 보면 대부분 한번쯤 들어본, 혹은 최소한 한장의 음반은 가지고 있을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뮤지션들이다. 이들이 함께 모여 위안부 할머니들을 위한 음반을 만들었다. 음반은 세곡을 제외한 전곡이 이 음반을 위해 새롭게 만들어진 곡들로 채워져 있다. 대다수의 뮤지션들은 기존에 그들이 가지고 있는 스타일을 고수하면서 가사쪽에서 메시지를 확실히 전달하는 쪽을 택한 듯 보인다. 아마도 할머니들은 이들의 음악을 평생 한번도 들어보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즉 이들의 음반은 할머니들보고 들어보세요, 하고 선물해 드리는 의미라기 보다는 침묵하고 있는 다수에게 다시 한번 말을 건다는 의미가 더 커 보인다. 이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이러한 방향에 방점을 찍고 있다. 대부분의 뮤지션들은 사려깊고 시적인 가사를 익숙한 멜로디에 얹어서 어렵지 않게 전달한다. 이 컴필레이션 앨범이 가진 목적성과 의의를 고려하지 않더라도, 이상은과 무키무키만만수의 음악이 동시에 들어 있는 앨범을 접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을 생각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좋은 곡들이 많이 들어 있는 앨범이고 (즉 살만한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기부한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지 않아도 될 정도로.) 몇몇 뮤지션들의 새로운 시도는 두 귀를 번쩍 뜨이게 하기도 한다. 앨범의 여는 한희정의 “이 노래를 부탁해” 는 압도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곡이다. 오지은은 “누가 너를 저 높은 곳에 올라가도록 만들었을까” 에서 자신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것을 최선을 다해서 성취해 내고 있다. 시와는 아마도 이러한 목적성에 가장 적합한 목소리를 가지고 있는 여성 음악인일 것이다. 자신의 곡 “아무도 내게 묻지 않았네” 와 투명과 협연한 “Way to the Light” 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가진 깊이를 확인할 수 있다. 황보령의 “비단” 은 혹시나 여성 뮤지션들만이 모여 있어서 힘에서 달리는게 아닐까 걱정하는 이들에게 그럴 필요 없다고 단언하는 강력한 드라이브를 보여준다. 현재 한국 독립 음악인들중 황보령보다 더 밀도있는 에너지를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있을지? 남상아의 “놀이터” 와 지현의 “나와 소녀들과 할머니들에게” 역시 주의깊게 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

locals vs. multinationals

오늘 산 Zadie Smith 의 <NW> 은 하드커버, 즉 양장본이다. 신간이기 때문에 고급스러운 양장본으로 만들고 대신 가격을 비싸게 받는다. 1년 정도 지난뒤 페이퍼백으로 다시 만들어 판매하기 시작하는데 이 때는 가격이 거의 절반 가격으로 떨어진다. 그러니까 급하게 신간을 읽고 싶으면 비싼 값을 주고 사서 읽으면 되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 느긋하게 기다리면 꽤 affordable 한 가격대로 떨어지는 것이다. 펄스트릿에 있는 로컬 서점인 Boulder Bookstore 에서 이 책을 판매하는 가격은 $26.00, original list price 인 $26.95 불과 비슷하다. 하지만 똑같은 양장본 <NW> 을 아마존에서는 $14.62 에 팔고 있다. Borders 가 망하는 바람에 졸지에 미국 유일의 대형 서점 체인으로 살아 남은 Barnes and Noble 온라인 사이트에서 판매하는 가격도 비슷하다. $14.66. (아마존이 epsilon 만큼 저렴하니까 대부분의 구매자들이 아마존으로 몰리는 것인가! 하하) 대형 도서 리테일러들은 하드커버 도서를 페이퍼백 수준으로 팔고 있는 것이다. 왜그럴까. 유통 마진을 후려치고 있기 때문이다. 대량으로 유통해주는 대신 작가들에게 돌아가는 인세나 출판사에게 돌아가는 이익을 극소화시키기 때문에 말도 안되는 저렴한 가격에 판매가 가능한 것이다. 소비자 입장에서는, 지금 당장 읽고 싶은 유혹이 아주 강하지 않은 다음에야 $3.99 를 더 주고 이틀만에 배송받는 방법을 택하면 로컬 서점에서 구입하는 것보다 훨씬 저렴한 가격에 똑같은 품질의 책을 받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만큼 컨텐츠 생산자 입장에서는 남는게 없다.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싼 값에 책을 아마존이나 반스앤노블에게 넘겨야 한다. 아마존등이 physical book 의 가격을 후려치는 이유는 이들이 주력으로 삼으려고 하는 e-book 과의 가격 격차를 지나치게 벌리고 싶지 않아서다. 아마존과 반스앤노블은 이북 시장에서 소위 말하는 선점 효과를 누리지 못했다. 아이튠즈라는 거대 시장을 끼고 있는 애플이 뒤늦게 이북 시장에 참여하면서 졸지에 이북 시장은 상당히 경쟁적인 시장이 되어 버렸다. 아마존은 거의 모든 이북의 가격을 $9.99 에 맞추고 있고, 이는 애플이나 반스앤노블도 마찬가지다. 유통 마진과 인쇄 비용등을 뺀 절대적인 컨텐츠의 가치를 일반화시켜 버리는 것이다. 이 블루오션에서 살아 남으면서도 이익을 낼 수 있는 적정 가격이 아마 그정도선인가보다. 문제는 이북 가격이 경쟁 논리에 의해 이렇게 고착되다 보니 인쇄되어 나오는 책들의 가격이 이에 같이 묶여 버리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 것이다. 몇년 전부터 미국 출판 시장에서 하드 커버 책들의 매출액이 이북 매출액에 뒤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이상 책 한권에 $20 이상의 돈을 투자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다. 읽기 약간 불편하더라도 타블렛을 통해 이북을 절반 가격에 공급받는 쪽을 택하고 있다. 페이퍼백은 아직 경쟁력이 남아 있는 상태다. 가볍고, 저렴하고, 종이가 주는 질감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하드커버 시장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출판업계와 작가들을 쥐어짜며 자신들의 파이를 늘리려고 하는 아마존이나 반스앤노블같은 거대 리테일러들을 이용하지 말고 정당한 비용을 지불하고 비싸게 파는 로컬 체인을 이용하자는 주장은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선택을 하는 일반 소비자들에게 어필하기가 쉽지 않다. 음반도 마찬가지고, 심지어 음식도 마찬가지다. Whole Foods 나 로컬 Farmer’s market 에서 공급하는 로컬 음식들은 비싸다. 역설적으로 유통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상의 이점이 학문적으로 완전히 검증되지 않은 로컬 올가닉 음식들을 비싼 돈을 주고 사 먹을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한마디로 요즘 시장 경제는 소비자들로 하여금 스스로 소비하는 것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를 강요하고 있는 셈이다. 내가 읽는 책은 $20 만큼의 가치가 없어, 내가 먹는 음식은 비싼 돈을 주고 살만큼 가치가 없어, 내가 듣는 음악도, 내가 보는 영화도 불법 다운로드받을 정도의 가치밖에는 없어, 라고 생각해야 죄책감을 느끼지 않고 “안전하게” 소비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것이다. 현대 경제학은 한 인간은 소비를 통해 효용을 획득한다고 가정하면서 출발한다. 그런데 그 소비 생활의 가치를 스스로 깎아 내리기를 강요하는 현재의 시장 구조가 합리적이고 “바람직”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당신이 소비하는 모든 것들의 가치를 평가절하하기 시작하면, 당신을 소비하는 주체 역시 당신의 가치를 깎아 내릴 것이다. 일을 하는 사람의 가치는 노동력으로 측정되고, 노동력은 다시 임금으로 환산된다. 건강하지 못한 사회에서 임금이 상승하지 않는 본질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소비는 생산을 창출하고, 팽창하는 생산은 다시 소비를 위해 사용된다. 우리 모두는 생산 과정에서 존재하는 부속품이지만 그 생산을 창출해 내는 소비 주체로서 기능하기도 하는 것이다. 불법 다운로드를 하면 할수록, 값싼 대기업의 제품들만 구입하면 할수록 나의 노동자로서의 입지는 더욱 줄어들 것이고, 나는 조금 더 가난한 상태에서 조금 더 싼 제품들만을 소비할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이 조금 더 행복한 삶일까? 아니면 모든 생산자에게 정당한 대가를 지불하고 나 역시 정당한 대가를 지불받는 삶이 더 ‘선’ 한 가치를 지향하는 것일까. 답은 자명하다.

Junot Diaz: This is How You Lose Her

줌파 라히리, 크리스, 그리고 주노 디아즈. 모두 제 3세계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가들이다. 이들의 관심사는 미국이라는 배경으로 한정되어 있거나 최소한 미국과의 연계성을 중요하게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출발한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 다른 피부색을 가진 이들이 미국이라는 백인 중심 사회에 들어 와서 겪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라는 주제는 최근들어 미국 문학계에서 더 큰 관심을 받는 듯 하다. 아마도 이민 2,3세대들이 영어를 가장 높은 수준에서 사용할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하기 까지 그만큼 시간이 걸렸던 것 같다.

주노 디아즈는 MIT 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한편 2007년 첫장편 <The Brief Wondrous Life of Oscar Wao> 로 퓰리쳐상을 거머쥔 각광받는 작가다. <This is How You Lose Her>  가 내가 읽은 그의 첫 작품이었기 때문에 전작들과의 상관 관계는 리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디아즈는 그의 첫 데뷔 단편집이었던 <Drown> 부터 줄기차게 Yunior 라는 도미니카 출신 이민 1.5세대가 미국 뉴저지에서 생활하면서 겪는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즉 그의 모든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Yunior 라는 단일한 인물이며, <This is How You Lose Her> 는 그가 겪는 모든 종류의 womanizing 을 중점적으로 다루고 있다. 헤어진 여자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더듬거나 백혈병으로 사망한 남동생의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 혹은 자신의 어머니, 여성 편력이 심했던 마초적인 아버지에 대한 기억등, Yunior 를 둘러싼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단편집에 따르면 Yunior 는 (내 기준에서) 상당히 선정적인 환경속에서 성장한 인물이다. 그의 아버지는 자신의 여자친구의 집에서 섹스를 하는 동안 어린 Yunior 를 차에서 기다리게 한다. Yunior 의 남동생은 Yunior 가 있는 방에서 여자친구와 섹스를 한다. Yunior 역시 만만치 않다. 고등학교 교사와 섹스를 하거나 피앙세가 있는데도 바람을 피운다. Diaz 의 단편집에서 여성은 폭력과 광기의 희생양이다. 그리고 살기 위해 발버둥치는 연약하고도 강인한 존재로 그려진다. Yunior 의 어머니는 친구나 가족이 하나도 없는 미국으로 건너온 뒤 도미니카에 남아 있는 가족에게 편지를 쓰거나 텔레비젼을 하루종일 보는 것으로 외로움을 달래며 두 아들을 홀로 키운다. Yunior 와 헤어진 여자친구는 혼자 아이를 낳아 키울 결심을 하며 스스로를 다독인다. 암에 걸려 죽어가는 Yunior 의 남동생을 만나 아이를 가진 그의 여자친구는 뻔뻔함을 무릅쓰고 그의 가족들에게 돈을 뜯어내어 아이를 키우기 위해 애쓴다.

어찌 보면 고리타분한 결론으로 흐를 수 있는 이러한 소소한 이야기들은 도미니칸이라는 정체성이 미국 뉴저지라는 좁은 공간속에서 충돌하면서 발생하는 여러가지 갈등들과 합쳐져 다층적인 구조를 이룬다. “백인 여자와 오래 사귈 수는 없잖아. 한번 하는 것은 또 모르지만..” 이나 “푸에르토 리코 여자는 다시는 데려오지 말거라.” 와 같은 대사들은 도미니칸이 겪을 수 밖에 없는 심리적인 한계를 성적인 코드를 통해 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미국에 살고 있는 도미니칸들에게 Santo Domingo 와 같은 곳은 일종의 이상향으로 그려진다. 그리운 고향이자 나중에 꼭 돌아가야 할 곳뿐이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며 부딪힐 수 밖에 없는 여러가지 갈등들이 해소될 수 있는 막연한 기대를 품게 하는 그런 곳으로 말이다. Yunior 는 여자친구와 함께 산토 도밍고에 가면 갈등이 해소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산토 도밍고에 세번이나 가봤다는 백인 여자에게 호감을 느낀다. Yunior 의 어머니는 산토 도밍고에 아직 살고 있는 그녀의 여동생에게 매주 같은 내용의 편지를 쓴다. 제발 미국으로 와서 당신과 함께 살면 안되겠냐고. 이들에게 미국, 뉴저지는 현재를 살아가야 할 터전이자 매일 매일 사투를 벌여야 하는 전쟁터이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이 떠나온 고향을 지나치게 아름답게 만들어 주는 도구로 종종 사용된다. 나에게는 서울이 그런 곳이다. 25년동안 살아온 그 도시는 지금 내가 생각하는 것만큼 아름다운 곳이 아님을 스스로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곳에는 김밥천국이 있고, 가족이 있으며, 지하철이 있다. 내가 떠나 왔고 지금 당장 돌아갈 수 없는 먼 그곳에 대한 기억들이 시간이 흐름에 따라 조금씩 변질되어 가면서 서울이라는 이미지 또한 조금씩 미화되어 가는 것을 느낀다. 이민자, 혹은 고향을 떠나 타국에 살고 있는 자들에게 삶의 터전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생각해 보게 한다.

흥미로운 것은 역시 Diaz 의 변화무쌍하고 화려한 문체일 것이다. 그는 라히리나 크리스 리처럼 자신의 모국어인 스페인어를 번역없이 영어와 함께 사용한다. 스페인어를 전혀 알지 못하는 나같은 독자들은 스페인어 부분을 건너 뛰어도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데 큰 지장이 없겠지만, 스페인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조금 더 디테일한 부분에서 디아즈의 세심한 표현력을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단편집에서 드러나는 디아즈 문체의 특징은 각 단편에 등장하는 작중 화자의 캐릭터에 맞게 표현이 심하게 달라진다는 점이다. Yunior 는 도미니카에서 어렸을 때 이민을 와서 거친 환경에서 성장해 럿거스를 졸업하고 현재는 보디빌딩을 하는, 쉽게 말하면 좀 배웠다는 마초다. 그가 사용하는 표현은 영어 문법의 규칙을 자주 위배하고 욕설도 꽤 자주 사용한다. 디아즈가 이 Yunior 라는 인물을 얼마나 자신의 실제 경험에 기초해서 창조해 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그의 작품 세계에서 Yunior 의 정체성은 문장 구조를 통해서도 확연히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반면 그의 전 여자친구가 화자가 되는 “Otravida, Otravez” 같은 경우에는 욕설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 아주 정갈한 구조의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다. 교육 수준이 낮은 흑인 여성이 화자가 되는 <Precious> 가 의도적으로 문법을 일탈하고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아래 영상은 디아즈가 작품에 대해 설명하는 영상.

Miguel:Kaleidoscope Dream

캘리포니아 출신 싱어송라이터/프로듀서인 미구엘의 두번째 정규 솔로 앨범이라는데 나는 그냥 메타크리틱 평점이 높아서 한번 사서 들어 봤다. 프로듀서도 겸하고 있어서 그런지 각 트랙마다 구성력이 무척 좋고 공간을 잘 활용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랄까, 굉장히 elastic 하다고 해야 하나? 쫄깃쫄깃하게 훅을 밀고 당기는 능력이 상당하다는 그런 느낌. 첫번째 싱글이었던 “adorn” 이나 “don’t look back”, 알리시아 키스가 코러스를 해준 “where’s the fun in forever” 등 몇몇 킬링 트랙들이 있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tell me that the pussy is mine~ wooooooo yehhhhhhh~” 같은 가사들을 들으면 얼굴이 빨개져서 미칠 것 같다. 이게 문화 장벽인가 싶기도 하고. 심정적으로 공감하기 힘든 감성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지 그냥 되게 좋네, 싶고 끝인 앨범.

룩앤리슨: Ready to Go!!

이 앨범은 굉장히 straight 하다. 그리고 straightforward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주욱 달리고 그 와중에 멈칫거리는 느낌은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솔직하다. 이 앨범에서 취하고자 하는 목적 의식은 매우 단순하고, 또 그것을 가장 가까운 직선거리로 달려 쟁취해 버린다. 딱히 증명이 필요하지 않은 정리들만을 사용해 아주 간단하지만 명쾌한 논리로 6페이지 정도의 논문을 써 내려가는 느낌. 그 안에서 흠잡을 구석은 전혀 없다. 음악을 듣는 가장 중요하고도 큰 목적인 즐거움을 달성하고 있는데 무어라 말할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그 ‘즐거움’ 이 문자 그대로의 즐거움이라면, 오감을 만족시키고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락큰롤 본연의 즐거움이라면 더더욱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이 앨범이 가지고 있는 장르에의 종속성에 대해서는 한번쯤 생각해 볼만할 일이다. 이들과 같은 음악을 하는 밴드는 전세계에 오천팀 정도 있을 것이고, 다시 말하면 굳이 룩앤리슨을 들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고민하게 되는 것이다. 이들이 언제 소리소문없이 사라져도 놀랍지 않을 거라는 말이다. 이들은 전형적인 팝펑크 형태의 노래들로 앨범을 채우고 있는데 2012년에 등장한 진정한 펑크인 무키무키만만수와 비교해 보면 더욱 도드라지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리고 또 하나 걱정스러운 부분은 과연 이들이 이 앨범에서 이룬 기분 좋은 성취가 과연 뮤지션의 공로로 오롯이 돌아갈 수 있느냐는 것. 프로듀서인 하세가와 요헤이는 장기하와 얼굴들의 2집에 이어 이번 앨범에서도 역시 프로듀서가 젊은 뮤지션에게 해줄 수 있는 최선을 해내고 있다. 룩앤리슨이 다음 앨범에서도 여전히 생기발랄한, lively 한 음악으로 돌아올 수 있다면 이들은 마이 캐미컬 로맨스처럼 허무하게 사라지지 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Godspeed You! Black Emperor: ALLELUJAH! DON’T BEND! ASCEND!

가만 있자, Godspeed You! Black Emperor 가 언제적 밴드였더라.. 기억도 가물가물하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2002년에 나온 앨범이 이들의 마지막 작업물이었다. 나는 그 사이에 아이팟을 한번 바꾸었고, 나의 새로운 아이팟에는 이들의 노래가 없다. 그러니까 내 기억에서는 거의 완전히 사라진 밴드가 되어버린 것이다. 그들이 어떤 이유에서인지 2012년 새로운 앨범을 발표했다. 새앨범 소식을 처음 들었을때 이들의 재결합 이유는 사실 별로 궁금하지도 않았고, 그저 이들의 새로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약간의 흥분과 설레임만이 존재했다. 내 기억 속에서 이들은 과격한 포스트락을 하는 밴드였고, 90년대 말, 2000년대 초 이들의 이름을 거론하면 약간 거들먹거릴 수 있는, 그 정도의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인디 뮤지션이었다. 그리고 당시에는 내가 앨범들만 사 모으고 음악을 듣는 척만 했지 사실 제대로 음악을 듣는 법도 모르는 풋내기였고. (물론 지금도 잘 모른다)

2012년에 듣는 GYBE 의 새 앨범은 총 네개의 곡, 52분 정도의 러닝타임으로 구성되어 있다. 1번과 3번 트랙은 20분 정도, 2번과 4번 트랙은 6분 정도의 길이다. 이들은 클래식 작곡법을 기반으로 가사와 보컬이 없는 음악을 하는 팀이고, 복수의 기타가 뿜어내는 노이즈 속에 명료한 테마 멜로디를 반복해서 중첩시키며 상승 작용을 불러 일으키는, 어찌 보면 포스트락의 전형적인 문법을 가지고 있다. GYBE 는 Explosions in the Sky 보다 덜 선명하고 Mono 보다 덜 극적이다. 비둘기우유만큼 서정적이지도 않다. 그렇다면 10년만에 돌아온 중년의 GYBE 가 차별성을 갖는 부분은 무엇일까? 무게감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들의 음악은 예전의 그것만큼 속도감이 있지도 않고 무지막지한 파괴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지만 (이들도 변했고 시대도 변했고 리스너들의 귀도 변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때와 다름없는 진중한 느낌, 어두움이라는 색깔만으로는 표현이 쉬이 되지 않는 밀도높은 무게감을 보여주고 있다. 그 안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는 멜로디라인을 통해 어떤이는 카타르시스를 느낄 것이고, 다른이는 그저 노이즈의 바다에 흠뻑 빠져 조금 더 아래로 침잠해 들어가기를 원할 것이다. 음악을 듣는 방법은 수만가지가 있다. GYBE 의 가장 큰 미덕은 열려 있다는 점이다. 20분이 넘는 긴 곡을 듣는 내내 지루함을 전혀 느낄 수 없는건 긴박하게 흘러가는 이들 음악의 곡 구성력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이들이 만들어 내는 “이미지” 에 이미 충분한 감성이 담겨져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Bat for Lashes: The Haunted Man

Bat for Lashes, 혹은 Natasha Khan 의 신작 <The Haunted Man> 은 뜬금없지만 샬롯 갱스브루의 <IRM> 앨범과 비교를 해야 할 것 같다. 갱스브루도 전작인 <5:55> 그녀만의 음악적 색채를 획득했음에도 불구하고 Beck 과의 작업을 통해 한단계 더 나아간 음악적 성취를 이루었다. 갱스브루가 벡과의 작업에서 얻은 성과물은 전작에 비해 “선택과 집중” 을 훨씬 효과적으로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벡은 그녀가 가지고 있었던 여러 재능들을 조금 잘 정리해 줄 수 있었던 좋은 프로듀서였다. (벡이 가지고 있는 키치하고 어쿠스틱한 느낌을 흡수한 건 덤) 뱃 포 래쉬스 역시 두장의 전작들에서 보여준 놀라운 재능들은 Bjork 이나 Kate Bush 의 이름까지 거론하게 만들었는데, 나타샤 칸이 가지고 있던 한계는 그녀가 과연 어디에 rely 할지 잘 모르고 갈팡질팡했다는 것이다. Beck 과의 작업은 그녀에게 이에 대한 해답을 어느 정도 제공해준 것처럼 보인다. 그녀는 자신의 목소리가 상당히 큰 울림을 가지고 있음을 드디어 깨달은 듯 하다. 그녀는 이 앨범에서 조금 덜 다양한 악기를 사용해 조금 더 큰 사운드스케잎을 만들어 내고 그 빈 공간을 오롯이 목소리의 힘으로 채우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래서 “Laura” 같은 꽤 그럴듯한, 아마도 올해의 트랙 후보에 계속 오르내릴 것 같은 노래도 만들어 냈고,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호흡도 길게 가져감으로써 전작들에서 발견되었던, 잘게 쪼개지는 리듬때문에 느꼈던 지루함도 많이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녀는 Bjork 처럼 목소리 하나만으로 온세상을 휘감쌀 수 있는 아우라는 아직 가지고 있지 못하다. 하지만 최소한 그녀가 가장 잘하는 것을 가장 좋은 방식으로 엮어낼 수 있는 지혜는 획득한 것처럼 보인다. 벡이 가지고 있는 인간적이고 아날로그적인 느낌을 더한 것은 (역시 갱스브루와 마찬가지로) 일종의 덤이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