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최근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이라는 것을 봤다.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재직중이신 한 교수님의 따님이 나와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었고, 우연히 나온 대화중에 한번 만나게 해보자는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중간에서 동료 교수님 한분이 열심히 주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아버지는 표면상으로는 당신의 체면을 내세우셨지만 내심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흥미도 있으셨던 듯 하다. 나는 부모님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않는 착한 아들이니까 “why not?” 의 심정으로 나갔다. 운이 좋으면 적적한 유학 생활에 좋은 친구를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계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떠들기가 조심스럽다. 아무리 대학원생 사이에 캐쥬얼하게 만난다고 해도 본질은 선이니까. 본질은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사이고, 결국 의식/무의식중에 이 관계의 종착역중 하나로 결혼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이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출발은 비록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선’ 이었지만 대화중에 나는 이 사람 자체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흥미가 과연 관계의 종착지점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정말 좋은 친구로 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대화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최근 몇년동안 느끼지 못한 일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몇년동안 대화가 썩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곳 볼더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에피소드를 통해 몇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고, 뒤늦게 중요성을 실감한, 잊고 있었던 경험도 있다. 첫째, 롱디는 결코 하지 말아야 겠다는 것. 트위터나 문자로 백날 떠들어봤자 실제로 얼굴 한번 보고 한시간 대화하는 것만 못하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 사람의 떨리는 눈썹이나 이마에 난 솜털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훨씬, 훨씬 더 진짜 대화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내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실체를 느껴야만 비로소 내가 직시하고 있는 대상을 실감하는 것이다. 내 세례명이 토마스인데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여기서 피식하고 웃으실 것이다. 둘째, 나는 점점 더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까워지고 있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나는 한국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에 조금씩 나를 맞춰가고 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여자들에 대한 미련이라던가 그리움같은 것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팬시한 옷, 잘 꾸민 얼굴, 깡마른 몸, 트렌디한 말투와 몸짓,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수성, 한국인들 특유의 사고 방식 혹은 그것을 비웃는 사고방식. 그런 것들에 점점 덜 관심을 갖게 된다. 셋째, 나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쁜 사람, 섹시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고 싶다’ 라는 욕망을 실현할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이 매력은 대단히 본질적이고 또 그래서 거대하다. 사랑이나 연애에서 이것이 빠지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보다 약간 더 깊은 곳에서 내가 무의식중에 찾고 있던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고 예의바르며 성실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충족되면 외모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한다.

우야든동, 나는 선이라는 것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많은 지인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왜 굳이 선이냐며. why not? 결코 나쁘지 않은걸. 나는 또 하나를 배워가고 있지 않나.

6 thoughts on “선.

    • 앗 선 경험도 있으신 거예요? 어쨌든 Sue 님은 제 ideal model 이기도 합니다.. ㅎㅎ 결혼생활에 있어서는. (잘 모르지만요.)

  1. 선 좋대요 (..학교 동기님들이 그러는데..)
    나이를 먹어가면서 attraction보다 compatibility가 더 중요해서 그런걸까요?
    뭔가 간질간질한 느낌으로 잘 읽고가요!

    • 으 완전 동감합니다. 개인이 가진 매력보다는 나와 얼마나 잘 어울리는 지를 훨씬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같아요. 근데 저같은 경우에는 흔히 제가 들어온 선이라는 개념에서 중요한 배경이라던가 능력, 집안 문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오로지 저와 잘 맞는지만 보는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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