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최근 태어나서 처음으로 선이라는 것을 봤다. 아버지와 같은 학교에 재직중이신 한 교수님의 따님이 나와 같은 학교에 재학중이었고, 우연히 나온 대화중에 한번 만나게 해보자는 말이 나왔던 것 같다. 중간에서 동료 교수님 한분이 열심히 주선을 하신 것으로 알고 있고, 아버지는 표면상으로는 당신의 체면을 내세우셨지만 내심 어떻게 일이 진행될지 흥미도 있으셨던 듯 하다. 나는 부모님의 뜻을 절대 거스르지 않는 착한 아들이니까 “why not?” 의 심정으로 나갔다. 운이 좋으면 적적한 유학 생활에 좋은 친구를 얻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관계가 진행중이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떠들기가 조심스럽다. 아무리 대학원생 사이에 캐쥬얼하게 만난다고 해도 본질은 선이니까. 본질은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사이고, 결국 의식/무의식중에 이 관계의 종착역중 하나로 결혼을 계속해서 염두에 두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래서 평소보다 조금 더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간단하게 말하면 나는 이 관계가 매우 흥미롭다. 출발은 비록 부모님의 소개로 만난 ‘선’ 이었지만 대화중에 나는 이 사람 자체에 대해 큰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다. 이 흥미가 과연 관계의 종착지점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다. 정말 좋은 친구로 남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최소한 대화를 지속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점에서 최근 몇년동안 느끼지 못한 일종의 희열을 느끼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최근 몇년동안 대화가 썩 잘 통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이곳 볼더에서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 에피소드를 통해 몇가지 깨달은 바가 있다. 새롭게 알게 된 것도 있고, 뒤늦게 중요성을 실감한, 잊고 있었던 경험도 있다. 첫째, 롱디는 결코 하지 말아야 겠다는 것. 트위터나 문자로 백날 떠들어봤자 실제로 얼굴 한번 보고 한시간 대화하는 것만 못하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다. 나는 얼굴을 마주 대하고 그 사람의 떨리는 눈썹이나 이마에 난 솜털을 보면서 대화하는 것이 훨씬, 훨씬 더 진짜 대화라고 느끼고, 또 그렇게 생각한다. 내 앞에서 숨을 쉬고 있는 실체를 느껴야만 비로소 내가 직시하고 있는 대상을 실감하는 것이다. 내 세례명이 토마스인데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시는 분들은 여기서 피식하고 웃으실 것이다. 둘째, 나는 점점 더 미국이라는 나라에 가까워지고 있다. 느리지도 그렇다고 빠르지도 않은 속도로 나는 한국에서 멀어지고 있으며 미국이라는 나라에 조금씩 나를 맞춰가고 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한국에 살고 있는 한국인 여자들에 대한 미련이라던가 그리움같은 것들이 점점 옅어지고 있는 것이다. 팬시한 옷, 잘 꾸민 얼굴, 깡마른 몸, 트렌디한 말투와 몸짓, 섬세하고 아름다운 감수성, 한국인들 특유의 사고 방식 혹은 그것을 비웃는 사고방식. 그런 것들에 점점 덜 관심을 갖게 된다. 셋째, 나는 내가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을 찾고 있었던 것 같다. 이쁜 사람, 섹시한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고 싶다’ 라는 욕망을 실현할 대상으로서 존재한다. 이 매력은 대단히 본질적이고 또 그래서 거대하다. 사랑이나 연애에서 이것이 빠지면 안될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그보다 약간 더 깊은 곳에서 내가 무의식중에 찾고 있던 사람은 나보다 더 지혜롭고 예의바르며 성실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진, 내가 진심으로 존경하고 따를 수 있는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것이 충족되면 외모는 눈에 들어오지 않기 시작한다.

우야든동, 나는 선이라는 것을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경험하고 있다. 많은 지인들이 의아해 하고 있다. 왜 굳이 선이냐며. why not? 결코 나쁘지 않은걸. 나는 또 하나를 배워가고 있지 않나.

Sarah Polley: Take This Waltz

이 영화는 한 여자의 이야기다. 어린 나이에 결혼해 5년째 함께 살고 있는 남편은 친구처럼 다정하고 아빠처럼 듬직하다. 하지만 요리 전문가인 그는 여자가 큰 용기를 내어 유혹하려 해도 오븐 위에 있는 치킨을 쳐다볼 뿐 절대 그녀를 향해 돌아보지 않는다. 그들이 함께 자는 침대는 빈틈이 없을 정도로 작고 그래서 둘이 꼭 껴안고 자야 할 정도로 따스해 보이지만, 이들이 아침에 눈을 떴을 때에는 항상 서로 등을 돌린 상태이기 일쑤다.

다른 비행기로 갈아 타는 과정이 몹시도 두렵고 시종 일관 안절부절하지 못할 정도의 극도의 섬세함을 가지고 있는 이 여자에게 한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난다. 예술가이고, 낭만적이며, 무엇보다 그녀와 말이 통한다. 대화가 가능하다. 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육체적 관계도 존재하지 않지만 이미 그들은 대화를 통해 동침을 시작한다.

남편은 그녀를 보내 주었고, 그녀는 울면서 떠나갔다. 그리고 그녀는 예술가와 뜨겁게 사랑하기 시작하고, 아주 빠른 속도로 식어 갔다. 그렇게나 싫었던 전 남편과의 진부한 관계가 반복되는 순간이다. 그녀는 이미 지극히 편안했던 남편을 스스로 떠나 왔고, 그렇게 많은 것을 포기하며 찾아 떠난 새로운 사랑과의 관계는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녀가 돌아가야 할 곳은 남편과의 기념일마다 갔던 극장일까 아니면 새로운 사랑과 두근거리는 데이트를 했던 놀이공원일까.

이 영화는 충격적이다. 아름답다. 서늘하다. 먹먹하다. 그리고 무척 슬프다. 단순한 불륜 영화도 아니고, 로맨스 영화도 아니며, 그렇다고 냉소적인 시선으로 엇나간 사랑에 대해 성토하는 교과서같은 영화도 아니다. 한 여자가 있고, 그 여자는 사랑을 갈구했으며, 사랑을 향해 떠났고, 그 사랑이 식어 버린 것 뿐이다. 그 여자의 이야기다. 그 과정에서 여자는 많이도 울었으며, 또 많이도 웃었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혼자 놀이 기구를 타며 그녀가 짓는 표정은 이 영화의 모든 것을 압축하고 있다.

미쉘 윌리엄스의 소름끼칠 정도로 완벽한 연기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감독인 사라 폴리의 섬세한 연출을 먼저 언급해야 할 것 같다. 그녀는 영화의 내용과 형식을 절묘하게 연결시키며 하나의 의미를 만들어 낸다. 좋은 영화가 흔히 갖는 미덕이다. 대사 하나 하나까지 숨겨진 의미를 갖게끔 만들며, 한 장면을 찍는 카메라의 움직임까지 그녀의 시선을 담아낸다.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여러번 반복해서 보며 다양한 층위에서 읽어내려 갈 수 있는 장치를 군데 군데 만들어 놓았다. 결국 이 영화에서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없다는 것은 이 영화가 가지는 위대함을 단적으로 설명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영화는 감정에 기반하고 있는 영화이고, 한 여성의 감정을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 형상화시키고 있다. 그 과정에는 수많은 기계적인 기술들이 들어갔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관객이 받아들이는 것은 한두 문장으로 정리될 수 있는 어떤 형식적인 부분이 아니라 그 여성의 마음 그대로, 그 감정 그대로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데이빗 린치나 허우샤오시엔같은 대가들의 영화에서 받았던 느낌과 상당히 유사한 인상을 받았다.

미쉘 윌리엄스는 왜 그녀가 당대 최고의 여배우인지 이 영화를 통해 당당하게 증명하고 있다. 손가락 끝부터 눈썹의 떨림까지 그녀는 온몸으로 마고라는 여배우의 감정을 그대로 표현해 내고 있다. 그녀 덕분에 마고라는 캐릭터는 넘실넘실 살아 움직이고, 그녀는 자칫 심심해 보일 법한 영화의 출발을 아주 독창적이고 기묘한 감정을 담아내는 결말로 이끄는 원맨쇼를 펼쳐 보인다.

이 영화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단순한 로맨스 영화가 아니다. 그래서 한국어 제목인 <우리도 사랑일까> 가 약간 밋밋해 보이기도 한다. 단적인 예로 수영장 샤워실 씬. 나는 이 씬의 영화의 주제를 함축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발랄하고 상대적으로 젊은 여자 세명이 샤워실의 한쪽 벽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고 있는 사이 반대쪽 벽에는 뚱뚱하고 축 늘어진 살을 가진 늙은 여자들이 묵묵히 몸을 닦고 있다. 젊은 여자들은 다리의 털을 왜 밀어야 할까에 대해 투덜거리지만 늙은 여자들은 조용히 몸을 닦다가 역시 같은 비루한 몸뚱이를 지닌 그들의 친구들이 들어오자 그제서야 반갑게 웃으며 인사를 한다. 나에게는 굉장히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미쉘 윌리엄스가 몸을 사리지 않는 노출 연기를 감행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시나리오상에서 드러난 이 장면이 가지는 의미를 파악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그 외에도 레오나드 코헨의 “Take This Waltz” 를 배경으로 마고와 대니얼의 사랑이 급격하게 달아 올랐다가 식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 장면에서부터 영화는 완전히 다른 색깔을 가지게 되는데, 그전까지 약간은 방심하면서 영화를 보고 있던 내가 바짝 정신을 차리고 긴장하며 집중하게 되었던 전환점이기도 했다.

음악은 덤이다. 감독은 캐나다 온타리오 출신으로 역시 캐나다 출신 뮤지션들의 음악을 고루 사용하고 있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Take This Waltz” 를 부른 레오나드 코헨의 노래부터 파이스트까지, 그리고 “Video Killed the Radio Star” 를 영화사상 가장 슬프게 사용하는 놀이공원 장면까지. 음악은 이 영화를 구성하는 다른 중요한 축이다.

두명의 남자 배우의 연기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세스 로건은 무뚝뚝하지만 속정이 깊은 남편으로 출연해 미쉘 윌리엄스가 ‘마음껏 튕겨져 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는 단단한 벽같은 느낌을 제공해 준다. 대니얼 역의 루크 커비 역시 매력적인 얼굴 뒤에 감추어진 쓸쓸함과 차가움을 잘 표현해 냈다. 이 두명의 남자 배우가 형편없었다면 이 영화는 자칫 미쉘 윌리엄스의 공명없는 호연만으로 가득찬 영화가 되어 버렸을 것이다.

보스턴 여행.

캠브리지에 잠시 방문중인 아버지를 보러 잠시 보스턴/캠브리지로 여행을 다녀올 계획이다. 주중에 수업이 있고 11월 둘째주에 컨퍼런스 발표 일정이 잡혀 있어서 나도 마냥 시간을 낼 수는 없고, 수업 하루 캔슬하고 11월 첫째주 주말을 이용해 4박 5일 정도 다녀올 생각을 하고 있다. js594 님이 가르쳐주신 맛집을 기본으로 근처 도서관이나 박물관을 아버지와 함께 다니고, 틈틈이 보스턴/캠브리지에 있는 지인들을 만나볼 생각이다. 지인이라봐야 몇명 없지만, 그들과의 인연이 꽤 오래 되고 깊은 편이어서 꼭 만나봐야 할 것만 같다. 한명은 고등학교 동창으로 약 15년 정도 알고 지내온 사이고, 다른 한명은 전 여자친구중 한명으로 약 10년전에 만나 내 인생에 상당히 큰 영향을 미친 사람이다. 이 외에도 마침 보스턴에서 열리는 한 미시경제학 학회에 참가하는 대학원 친구들도 시간이 나면 잠깐 얼굴을 볼 수 있을 것 같다. 나의 geeky 하고 nerdy 한 성향은 여행 일정이 정해지자 마자 보스턴 인근 지역에서 열리는 인디 밴드들의 공연 일정을 살피도록 만들었다. 다행히 (?) 아버지와의 단란한 시간을 방해할 정도로 확 땡기는 공연 일정은 확인할 수 없었다. 컨퍼런스 논문 발표와 마무리지어야 하는 다른 논문들이 산적해 있는 상황에서, 그것도 학기중에, 수업 준비도 해야 하는 판에, 다른 곳으로 며칠동안 여행을 간다는 것이 사실 그리 썩 내키지는 않지만, 아버지라는 가족의 일원이 나를 호출하는데 마다할 방법이 없을 뿐더러 “기꺼이” 라는 표현을 쓸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이 쉽게 움직이는 것도 사실이다. 아마 캠브리지 근처의 한 카페에 마주보고 앉아 나란히 논문을 쓰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시간을 보낼 것 같다.

Paul Thomas Anderson: The Master

폴 토마스 앤더슨이 그의 영화들에서 천착해온 주제는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Irrationality, disconnectedness, and craziness of pure products of America. 생각해 보면 정말 그렇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다른 문화로부터의 영향을 받지 않고 만들어낸 모든 창조물들은 하나같이 끔찍한 괴물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거대 포르노 산업, 초기 석유 시추 사업, 그리고 현대 신흥 종교 시장. 앤더슨은 그러한 돌연변이들을 영화의 중심에 놓는다. 그는 한 개인의 연대기를 통해 미국 사회와 역사를 거시적으로 조망한다. 미시적인 관찰로부터 상당히 큰 규모의 뼈대를 완성시키는 것이다. 앤더슨이 집요하게 파고드는 영화속 주인공과 그를 집어 삼키는 사회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그 관계 속에서 앤더슨은 미국이라는 사회가 만들어낸 괴물들의 본질을 치열하게 밝혀 낸다.

<The Master> 역시 그의 필모그래피가 보여주는 일관된 주제 의식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여기 두 상이한 세계가 있다. 주변의 모든 것을 집어 삼키려는 세계와, 그 어떤 것에도 동화되지 않고 먹히지 않으려고 발버둥치는 다른 세계. <The Master> 는 이 두 세계가 만나 접점을 찾기 위해 노력하고 충돌한 뒤 갈라서는 이야기다. 그리고 이 두 세계는 The Cause 라는 신흥 종교를 창시한 뒤 교세를 확장시켜 가는 랭카스터 도드와 알콜중독자 아버지와 정신병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2차 대전에 참가하고 섹스 중독과 충동적인 폭력과 같은 정신병적 트라우마로 가득찬 프레디 퀄이라는 두명의 인물로 상징된다. 도드는 프레디를 “좋아하는 유일한 사람” 이고, 도드에 의해 거두어진 프레디는 도드의 곁을 맴돌며 때로는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치고 때로는 도드의 가장 충실한 주변인으로 남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매체는 도드와 프레디의 관계를 어긋난 부자관계의 상징으로 해석하기도 하더라) 이 영화의 주제는 미국 신흥 종교의 폐단이나 전쟁에 참가했던 군인이 겪는 후유증과 같은 진부한 스토리가 아니다. (때문에 톰 크루즈가 이 영화를 보고 기분이 나빠야 할 이유는 전혀 없다) 또한 이 영화는 개인의 마음 속에 존재하는 근원적인 악에 대한 탐구나 사회적 환경에 의해 한 개인이 어떻게 망가져가는지에 대한 관찰같은 심리학적인 영화도 아니다. <The Master> 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가지는 ‘선천적인 한계’, 즉 비논리성과 폭력성, 억압적 기제, 군중 심리, 광기에 대한 병적인 거부 현상, 획일적인 기독교 사상처럼 ‘치유될 수 없는’ 미국의 아픔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영화다. 그러한 사회적 질병을 두 개인에게 투영함으로써 그들의 표정에서 앞서 언급한 모든 것들을 읽어 내려갈 수 있게 만든 영화다.

이러한 시도가 가능하게끔 하는 가장 큰 원동력은 바로 배우들의 압도적인 퍼포먼스다. ‘연기’ 라는 단어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호아퀸 피닉스는 거의 완벽하게 프레디 퀄이라는 인물에 몰입되어 있다. 그는 프레디 그 자체가 되어 숨 쉬고 웃고 울다가 찡그린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프레디가 뒤틀린 표정으로 웃을 때 엇나가는 입술 모습과 탈골된 듯한 구부정한 어깨를 기억할 것이다. 피닉스는 몸을 일부러 뒤틀리게 바꿔 버림으로써 육체 그 자체를 통해 앤더슨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를 전달하고 있다. 그가 내뱉는 대사들이나 하는 행동들에 앞서 관객이 직관적으로 받아 들이게 되는 이러한 부분들이 앤더슨의 argument 를 보다 완벽하게 지탱하고 있는 것이다. 필립 세이무어 호프만은 그의 이름에 걸맞는 연기력으로 영화를 장악한다. 모든 것을 집어 삼키는 신흥 종교의 교주 역할을 그보다 더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연기자는 지구상에 몇 없을 것이다. “hidden master of the master”, 즉 교주의 아내이자 교주의 병적인 집착과 성적인 욕구를 다스리며 그를 잘 ‘포장’하는 숨은 실세로 등장하는 애이미 아담스 역시 인상적인 연기를 보여준다.

<데어 윌 비 블러드> 에 이어 <The Master> 의 영화 음악도 라디오헤드의 멤버인 조니 그린우드가 맡았다. 앤더슨은 전작에서 조니 그린우드의 음악을 영화의 중요한 요소로 사용했다. 즉 영화를 만들기 전부터 그린우드와 영화의 내용에 대해 상의했고, 어떤 장면에서는 영화보다 음악이 먼저 만들어져서 영화의 장면으 구성하는 데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이 영화에서도 음악은 중요하게 사용된다. 하지만 <데어 윌 비 블러드> 와 같은 압도적인 느낌을 주는 트랙은 거의 없으며, 대부분 프레디와 도드의 내면 심리를 나타내는 표현 도구로 적절하게 사용된다는 느낌을 받는다.

무엇보다 강조하고 싶은 것은 앤더슨이 완벽에 가깝게 창조해낸 1950년대 미국의 풍경이다. 이 영화는 65mm 필름으로 촬영됐다. 1996년 <햄릿> 이후 처음으로 사용되었다고 하고, 아마도 마지막으로 65mm 필름이 사용된 영화로 남을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앤더슨은 아주 선명한 장면을 인상적으로 담아낸다. 프레디가 잠시 촬영기사로 일하는 모습을 담은 백화점씬은 마술과도 같은 환상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앤더슨은 이 영화를 통해 조금 더 자신의 천재성에 의존하는 듯 보인다. 즉 이 영화는 종종 영화의 전통적인 서사기법이나 관습을 의도적으로 무시한다. 내러티브는 종종 단절되며, 씬과 씬은 논리적으로 잘 이어지지 않는다. 그는 직관적으로 편집을 한 듯 보이며, 이는 그를 데이빗 린치와 비교하게 만든다. 그는 자신의 ‘감’ 이 전통적인 영화의 서사 기법보다 효율적으로 자신이 말하는 바를 전달할 수 있다고 믿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이 이유때문에 이 영화는 <데어 윌 비 블러드> 처럼 영화가 끝나자마자 전원이 벌떡 일어나 기립박수를 10분동안 쳐야 하는 그런 영화가 되지 못했다. 조금 더 많이 생각해야 하며, 조금 더 많이 앤더슨의 머릿속을 탐구해야 이해가 가능한 영화다. 그래서 프레디가 어떤 사람인지 설명하는 처음 30분이 압도적으로 황홀한 영화의 완벽함을 보여주었다면 그 이후 프레디가 도드를 만나 그와 얽히고 섥히는 나머지 한시간 30분은 때로 지루하기도 하며 (실제로 오늘 극장에서 나와 이 영화를 본 사람은 여섯명이었는데 그중 한명이 중간에 나갔다) 논리적인 인과관계로 잘 이어지지 않는 부분도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극장에서 볼만한 가치가 충분한 작품이다. 아무런 이유없이 폴 토마스 앤더슨의 이름만으로 영화를 선택해도 그렇고, 호아퀸 피닉스의, 아마도 그의 일생에서 가장 뛰어난 연기로 기록될, 잊지 못할 표정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잡는다는 의미에서도 그렇다.

Tame Impala: Lonerism

여기 또 한명의 음악 천재가 있다. 발칸 집시 음악에 미쳐 진짜 집시들보다 더 집시같은 감성으로 현대 영미 팝음악에 새로운 장르를 개척한 베이루트의 Zach Condon 이 한 장르에 미친 음악팬이 어떻게 진짜보다 더 진짜같은 (혹은 같아 보이는) 감성을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한 흥미로운 케이스를 제공하고 있다면, 오스트레일리아 서쪽 끝에 위치한 Perth 출신의 Kevin Parker 는 콘돈보다 훨씬 더 큰 그림을, 훨씬 더 어린 나이에, 훨씬 더 높은 완성도로 완성시켜 나가고 있다.

파커가 이끄는 삼인조 밴드 Tame Impala 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진부한 코멘트로 묘사될 수 있는 음악을 한다. 6,70년대 영국 음악에 뿌리를 둔 사이키델릭 록밴드. 13세였던 1999년에 이미 자작곡을 가지고 있었고 2000년에 데모 음반을 만들어 회사들에 뿌렸으며 마이스페이스를 통해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케빈 파커와 테임 임팔라는 지미 헨드릭스와 비틀즈라는,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에는 꽤 버거워 보이는 거대한 이름들을 자신들의 음악 레퍼런스 속에 집어 넣어 버린다. 여기에 핑크 플로이드와 킹 크림슨, 블랙 사바스와 같은 전설들의 이름이 이들의 음악을 거론하기 위해 등장해야 한다. 케빈 파커의 목소리와 작곡법은 존 레넌의 그것과 자주 비교되며, 올뮤직가이드는 이들의 소포모어 앨범 <Lonerism> 을 비틀즈의 <Revolver> 에 비유하며 별점 네개반을, 피치포크는 라디오헤드의 <Kid A> 에 비교하며 9.0/10 을 주었다. 아마도 전세계에 수천개 이상의 밴드들이 이들과 같은 카테고리 안에 포함될텐데, 그들 사이에서 이들이 낭중지추처럼 평론가들을 경악시키며 화려하게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한가지, originality 때문일 것이다. 파커는 테임 임팔라의 음악을 테임 임팔라만이 할 수 있게끔 만들고 있으며, 청자들로 하여금 “이것은 테임 임팔라의 음악이다” 라고 인식할 수 밖에 없게끔 만든다. 하지만 이들이 두장의 앨범에서 쌓아 올리고 있는 큰 그림은 마치 비틀즈나 지미 핸드릭스가 가지고 있었던 바로 그 감성의 어떤 부분을 절묘하게 건드리고 있으며, 이들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완성도를 가지는 송라이팅과 악기 연주를 해내고 있는 것이다.

수많은 음악 천재들중 극히 일부만이 그 재능에 합당한 결과물을 세상에 내놓으며 화려한 삶을 살았다. 대부분은 그 기대에 훨씬 못미치는 커리어를 보내야만 했다. 일부는 mediocre 한 수준으로 전락하기도 했다. 케빈 파커의 음악 커리어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이들이 세상에 발표한 두장의 앨범은 음악을 듣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고, 이것만으로도 이들은 과거와 현재를 창조적으로 연결한다는 진부한 칭찬을 권위있게 움켜쥘 수 있는 위치에 도달해 있다는 것이다.

Passion Pit: Gossamer

Passion Pit – Gossamer

Passion Pit 의 경우 따로 음악을 들어보지 않고 그냥 음반 표지 디자인이 이뻐서 대충 메타크리틱 평균 점수만 훑어보고 구입했다. 그래서 사실 별 기대하지 않고 “적당히 들을만한 댄스 음악이면 좋겠다” 라고만 생각했더랬다. 그런데 첫곡 “Take a Walk” 부터 깜짝 놀랐다. 이 곡은 미국의 광고음악으로 널리 쓰이고 있는데 그게 이 팀의 음악인지는 몰랐다. 문제는 귀에 익숙하게 감기는 느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첫곡부터 마지막 곡까지 같은 감성과 다른 자극으로 지루하지 않게 주욱 달리는 청량한 느낌이 매우 좋았다. 이 느낌은 앨범은 두번, 세번 반복해서 들어도 쉽게 사그러들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단순히 클럽용 댄스 음악이 아닌 감상용 인디 댄스 음악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 본다.

Passion Pit 은 Michael Angelakos 의 1인 프로젝트다. 2010년 인디씬에서 데뷔 음반을 내놓고 대박을 친 뒤 컬럼비아로 옮겨서 올해 이 메이저 데뷔 앨범을 발매했다. 역시 대박을 치고 있는 중이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트랙은 “Hideaway” (업로드해놓았으니 들어보시라). 처음부터 끝까지 시속 120km 로 달리면서 왠만한 스타디움 밴드들의 음악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의 웅장한 느낌까지 무리없이 담아낸다. 이 외에도 몸을 움직이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I’ll Be Alright”, 80년대 감성을 현대에 성공적으로 이식시킨 “Carried Away”, 요즘 유행하는 칠아웃의 느낌이 물씬 나는 “Constant Conversations” 같은 곡들도 무척 좋다. 아마도 연말 결산에서 반드시 다시 언급할 것만 같은 앨범이다.

Krys Lee: Drifting House

Krys Lee 는 서울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와 워싱턴에서 성장했고 미국과 영국에서 교육을 받은 픽션 작가다. 그녀의 데뷔작인 <Drifting House> 는 한국인에 대한 아홉편의 단편 모음집이다. 캘리포니아에 정착한 북한 탈북자 가족이나 미국 이민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방황하는 중년의 (남한) 여자의 이야기는 미국에서 살아가는 북한과 남한 출신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다. 미국과 두개의 한국 사이 어딘가에서 방황하는 1.5세, 혹은 1.25세들에 대한 관찰이기도 하다. 크리스 리는 미국과 전혀 상관없는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도 담아낸다. 1997년 IMF 위기 속에 해직된 한 평범한 가장이 위장 이혼을 하고 노숙자로 변해가는 과정을 담은 “The Salaryman” 은 그녀가 바라본 남한 사회의 모습을 다루고 있고, 먼저 죽은 누이의 환영에 시달리며 탈북을 감행하는 어린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 표제작 “Drifting House” 는 그녀가 직접 발로 뛰며 조사한 내용에 근거한 북한 탈북자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녀는 단순히 이민 2세대 작가가 바라본 두개의 한국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한국인들의 세계 속에 존재하는 극한의 외로움을 섬세하게 드러내고 있다. 어쩌면 이 단편집의 주제는 한국에 대한, 한국인들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어쩌면 그건 그저 맥거핀일 수도 있다) 관계 속에 존재하는 고독을 어떻게 극복해 가는가, 하는 것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크리스 리를 비롯한) 외국인들의 시선 속에서 한국은 이토록 처절하게 외롭고 안타까운 나라였는가,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예를 들자면, 아마도 많은 이들에게 가장 충격적인 작품으로 받아 들여질 “Believer” 에서 그녀가 묘사하는 아버지와 딸의 극단적인 선택은 인터뷰에서 그녀가 밝힌 바에 따르면 딸이 아버지에게 베푸는 극한의 자비로 이해될 수 있다. 사람은 항상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지 않는다. 외로움이라는 격한 감정의 파고 속에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으며 멍청한 행동을 할 수도 있다. 결국 이것을 어떻게 보듬느냐의 문제로 넘어간다. 크리스 리의 소설속 인물들은 대부분 결국 파국으로 치닫거나 최소한의 희망만을 발견하며 조금 더 어두운 상태로 내몰리는데, 이것은 그녀가 겪은 불우한 과거 (그의 가족은 의료 보험에 가입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했고 그녀의 어머니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한채 암으로 사망했다) 가 일종의 트라우마로 기능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녀의 문장은 실로 정갈하고 아름다우며,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한 단편당 20페이지가 넘어가지 않을 정도로 뼈대만 앙상하게 남긴 구조 속에서 하고자 하는 말을 촘촘하고 담담하게 담아내는 솜씨가 대단하다.

그녀는 현재 남한 서울에 살고 있다. 샌프란시스코에서도 많은 시간을 보낸다고 한다. 그녀의 데뷔작은 많은 매체들로부터 상찬을 받고 있으며, 실제로 2012년 최고의 단편집을 뽑는 각종 문학상 후보에 올라 있다. 그녀는 이코노미스트,  CBS, 가디언, 파이낸셜 타임즈등 유수의 언론들과 인터뷰를 했을 뿐만 아니라 가디언과 워싱턴 포스트등의 매체에 직접 글을 기고하는 등 영향력 있는 작가로서의 모습도 보여주고 있다. 모순적이게도 정작 한국에서는 그녀에 대한 관심이 상대적으로 적어 보인다. 바로 자신들에 대한 이야기인데도 불구하고 정식으로 번역이 된다는 이야기조차 들어본 적이 없다. 어쩌면 한국계 작가로는 영미문학계에서 가장 크게 성공한 (단 하나의 단편집만으로!) 작가일텐데도 관심조차 없어 보인다. 하인즈 워드나 미쉘 위까지 한국인으로 만들고 싶어하는 극성스러운 언론의 성향을 생각하면 의아한 반응이다. 그녀의 소설은 정작 한국인들에게는 큰 아픔으로 다가오지 않을 지도 모른다. 한국어 고유의 표기방식 그대로 표현되는 많은 단어들이 영어 문장속에 어우러지는 모습에서 실소를 금할 수 없을 지도 모르고, 어쩌면 그녀가 묘사하는 남한의 모습이 너무 단편적이고 일차원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든, 분명한 것은 한국인으로 살아간다면 한번쯤 읽어볼 만한 가치가 있는 작품이라는 사실이다. 한국이라는 뿌리에서 자유로울 수 없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읽고 느끼는 것이 있을 것이다.

Beach House at Boulder Theater


I have usually went to any concerts with one, unique friend, Scott. He has been my concert trip fellow in any case, and I have been quite happy with it. Sometimes KS or the other special guest joined the group, but it did matter marginally. I have felt that I was always with him most closely at the concert venues even when we are among the other guys, not because of the time we spent together, but because of the emotional band of sympathy between us in our musical tastes. We both love Arcade Fire, the National, and Wilco. I hardly found the guy like him in this musical taste context.

Last night, we were not two anymore. Rather, we got another bunch of guys hanging around us, and interestingly they were very close friends of ours. We were six, the maximum number of the concert fellows in my lifetime. The weather was quite cold, as usual Boulder autumn. Scott, Steve and I watched Sunday night football game at Lazydog before the Theater started opening door. We were supposed to enter the venue by about nine, because we had been getting less interested in opening bands as we got older and more pains on our backs while standing up for more than three hours. However, Scott told me that the opening band at that night would be quite interesting because two of them were from Fleet Foxes. So we got a little early to the venue, although the game between Saints and Chargers was quite exciting and close.

It was the first time that I have been at the Boulder Theater. It would be a little pathetic because I’ve been here for more than four years and the city has only two venues for small or medium size concert, Fox and Boulder theater. The Boulder Theater was as good as the other popular venues around the town such as Bluebird, Ogden, or Fillmore in Denver. The venue was very crowded by people when we got in, even though the main show was not started. We met the other three members there, and I was introduced P’s boyfriend. He was gentle and quietly speaking, a type that I like.

The show was great. I have been thinking about Beach House’s music as a studio-based, or listening preferred one. I didn’t think them as  a good fit for the floor. I was wrong. Their performance was magnificent. The members are only three, two regular members plus one drummer, but the sound they created was enough to fill the space dominantly. French born singer and keyboardist Victoria Legrand was the most beautiful woman among who had-banging perfectly. Her voice was really unique, and it was just the same with the one in their albums. This fact impressed me quite a lot, and her voice captivated everyone in the venue and made them screamed. Alex Scally, the band’s brain and guitarist (and he also played base and the other instruments with his foot while playing guitar with his hands) made the unique sound of Beach House that made all the people dance with their music. I was pretty surprised with that their music was really good for dancing. Slow, keyboard-centric sound may not be good for floor, but they made an exception with mysteriously creative performance. After the show, I listened to their albums with my earphone, and they started to be different since then. It was interesting experience.

All in all, the concert was great, and I had great time with my close friends. This is a beauty of life. I hope this lasts long enough. Even if I have to leave this beautiful town, I really hope to have another chance to get this kind of stuff in my lifetime. Even if I have to take apart with these guys, I hope to meet another guys or two to enjoy concert together, talk about indie pop music for hours, drink together with shitty jokes, or do some other fun things. Really hope.

Glen Hansard: Rhythm and Repose

나도 어느새 Glen Hansard 의 목소리가 들어간 음반을 서너장씩 가지고 있게 되었다. 영화 <원스> 이전에는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의 이름조차 들어본 기억이 없었을 것이다.  바꿔 말하면 <원스> 가 없이는 현재 한사드의 대중적 위치또한 존재할 수 없었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들이 여전히 그를 영화에 나오는 사슴처럼 맑은 눈동자로 기억하고 있을 것이고, “Falling Slowly” 와 같은 감미로운 하모니를 들려줄 것으로 기대할 것이다. 하지만 그는 The Frames 라는 밴드를 이미 훨씬 오래전부터 이끌고 있었고, 이 밴드는 영화 <원스> 와 상관없이 확고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하고 있었으며, 한사드는 <원스> 이후 The Swell Season 을 통한 짧은 외도를 마감하고 다시 본연의 자리로 돌아 왔다. 그의 솔로 앨범 <Rhythm and Repose> 는 한사드 특유의 송라이팅 능력과 사운스스케이프 창조 능력을 마음껏 보여주는 수작이다. 혹자는 그의 음악을 가리켜 “너무 단순하고 심심하다” 라고 비판할 수도 있겠지만, 그 우직한 단순함이 한사드의 음악이 가진 필살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대미안 라이스와 리사 해니건의 음악에서도 비슷하게 감지되는 이 굵은 직선이 가지는 매력은 한사드가 가진 무지막지하게 정직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다. 그는 결코 속임수를 쓰지 않으며,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가장 솔직하게 보여주는 뮤지션들중 하나이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음악으로 우리 하나가 될 수 있다” 는, 어찌 보면 시대착오적이고 나이브한 발언을 아주 당당하게 한 그다. 그는 실제로 음악을 통해 삶이 지속될 수 있다고 믿는 듯 보인다. 그리고 그의 음악은 결코 소란스럽지 않지만 그렇다고 진부하지도 않게 조용히 그의 믿음을 실천하고 있다. 날씨가 추워질수록 더 많이 찾아 듣게 될 것만 같은 음반이다.

Ariel Pink’s Haunted Graffiti: Mature Themes

Ariel Pink’s Haunted Graffiti 의 메이저 데뷔 앨범 <Before Today> 는 4AD 레이블을 통해 2010년 발매되었다. 발매 당시 많은 매체들을 통해 꽤나 후한 평가를 받았다. 이들의 음악은 기본적으로 7,80년대 팝/락의 충실한 리바이벌을 그 근간으로 하고 있다. 데이빗 보위부터 록시 뮤직까지, 비지스부터 프랭크 자파까지. 사이키델릭한 연주를 바탕으로 달콤한 멜로디를 끼얹는 이들의 방식은 이미 네오 포크 리바이벌로 단련된 미디어들에게 있어서 새로운 방식의 과거로의 회귀이자 조금 더 참신한 색깔을 입힌 신종 변형 장르의 개척으로 받아 들여졌다. 나는 그 점이 참으로 못미더웠다. 이들의 데뷔 앨범을 듣고 또 들었지만, 결코 마음에 와닿는 어떤 ‘한 순간’ 을 발견할 수 없었다. 좋은 멜로디, 탄탄한 연주, 7,80년대 정서를 완벽하게 이해하고 있는 송라이팅.. 뭐 하나 빼놓을 점이 없는 노래들의 연속이었지만 그 안에서 Ariel Pink 만의 확고한 색깔이랄까.. 그런 것을 전혀 찾아낼 수 없었다.

그리고 두번째 앨범. 이번에도 상찬의 연속이다. 노래들이 좋은 것은 당연하다. LA 의 부유한 동네에서 자란 Pink 는 십대 시절부터 혼자 모든 악기를 연주하며 개러지에서 꿈을 키웠다. 그는 음악에 대한 이해도가 상당히 높으며, 이에 더해 70년대부터 시작해 헤비메탈이 시작되기 직전까지 유행했던 음악들에 대한 무한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 이 점이 그로 하여금 이토록 달콤한 음악들을 만들게 하는 원동력인 것 같다. 역시 4AD 에서 발매된 메이저 소포모어 앨범은 데뷔 앨범보다 ‘cut’ 이 명확하다. 조금 더 선명한 자기 색깔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곡마다의 차별성도 쉽게 발견되고, 각 노래에서 Pink 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도 분명하다. 데뷔 앨범보다 흐리멍텅한 구석은 확실히 많이 줄어 들었다. 하지만 이들의 뮤직 비디오를 보면 알겠지만, 이들은 기본적으로 7,80년대 문화를 B급 서브컬쳐의 변종으로 이해하고 있다. 음악 역시 마찬가지다. 이들에게 있서 7,80년대는, 반드시 돌아가야 할 마음의 고향같은 느낌이 아니라 이 험한 음악판에서 살아남기 위해 갖추어야 할 장식품의 일종으로 느껴진다. 최소한 나에게는 그렇게 받아들여 진다. 이들은 이러한 포지션을 취함으로써 매체들에게 확실하게 어필할 수 있다. 소위 말해 ‘contribution’ 을 가지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좋은 음악’ 을 듣는 사람들에게 얼마나 진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아직까지도 확신이 없다. 세번째 음반은 돈을 주고 구입해 들어 보지는 않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