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V

Curriculum Vitae, 혹은 Vita 라고 하는 이력서에는 참 많은 이야기가 담겨 있다. 잡마켓을 준비하면서 다른 사람의 CV 를 많이 읽게 되는데, 그 사람이 한명의 학자로서 살아온 길이 단 몇장에 간략하게 정리되어 적혀 있는 것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같은 “바닥” 에 있다 보면 어느 부분에서 이 사람의 ‘굴곡’ 이 발생했고 또 어떤 부분에서 이 사람의 인생이 빛을 발했는지 어렴풋하게나마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박사 과정을 7년만에 졸업한 사람은 마지막 2년동안 논문이 나오지 않아 꽤나 고생했겠구나, 싶고 조교수로 6년쯤 머물다가 다른 학교로 옮겨 다시 조교수직에 있다고 적혀 있다는 것은 이 사람이 테뉴어 심사에서 떨어졌음을 의미한다. 커리어에서 최초로 퍼블리쉬된 논문이 박사 학위를 받은 시점과 큰 차이가 없다면 그 사람의 박사 논문중 한 챕터가 발표되었을 확률이 높다. 박사과정때부터 소위 말해 아주 잘 나간 셈이다.

모든 사람은 완벽하지 않다. CV 상에는 거의 완벽한 경력을 자랑하는 사람도 그 종이에 적혀 있지 않은 어두움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을 극복해 가며 더 나은 사람으로 성장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 어려움에 좌절해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가까스로 살아 남기도 한다. 내 CV 는 작년 겨울때쯤 한번 업데이트한 뒤로 아직 그대로 있다. 아마도 앞으로 다가올 몇주안에 완전히 새로운 모양으로 바뀔 것이다. 그 하얀 종이 위에 나는 무엇을 적을 수 있을까. 고작 서너개의 논문과 한두개의 컨퍼런스 참석, 그리고 4년 정도의 TA 경력과 1년 남짓한 인스트럭터 경력이 전부다. 석사 학위와 박사 학위 예정이라는 것, 한국어와 영어를 할 줄 알고 여러가지 잡다한 컴퓨터 프로그램을 다룰 줄 안다는 것도 적어야 겠지. 은퇴가 가까워온 노교수도 몇개월에 한번은 CV 를 업데이트한다. 그분들의 CV 는 발표된 논문 목록만으로도 두세장이 훌쩍 넘어간다. 나도 30년쯤 뒤에 그정도로 충만한 인생을 살아 왔다고 담담히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할 수 있을까. 아, 공부를 할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축복받은 삶인지.

2 thoughts on “CV

  1. 하하 academic cv는 많이 다르겠지만 cv를 토나올만큼 (흑..) 써보고 남들것도 외울만큼 들여다보던 생각이 나서 참 공감하게 되는 포스팅이에요.

    축복받은 삶을 산다고 느끼시는거..너무 부러워요!

    • 공부를 잘하면 정말 축복받은 삶일텐데 불행히도 그렇게까진 않되는 것 같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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