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성현: 파수꾼

 

이 영화는 다양한 층위에서 읽혀질 수 있고 또 이미 많은 이들에 의해 그렇게 해석되었을 것이다. 따로 찾아 읽어보지는 않았다. 아무튼 그래서 간단하게 내가 어떻게 이 영화를 읽었는지만 간단하게 기록해 두고 싶다.

첫째, 이 영화는 어른들로부터 완전히 방치된, 독립된 세계에 살고 있는 불안한 영혼들에 대한 이야기다. 이 영화에서 부모 및 교사로 대표되는 어른들은 주인공들의 삶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못한다. 하지만 기태의 아버지가 다른 두 친구들로 하여금 잊혀지고 묻어졌던 과거의 정서를 다시 환기하게끔 하는 역할을 맡는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내게는 이 점이 약간 보수적으로 읽혔다.

둘째, 학교 폭력과 관련해 이 영화의 레퍼런스를 굳이 꼽으라면 이와이 슈운지의 장편 영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과 전상국의 단편 소설 <우상의 눈물>  정도가 있을 것 같다. 이중 전자는 친구 사이에서 갑자기 일그러진 관계로 나아가 결국에는 파국을 맞이한다는 서사의 구조가 비슷하고, 후자는 표면적인 육체적 폭력에 의한 권력관계뿐만 아니라 그에 대응하는 합법적인, 혹은 감정적인 방향에서의 폭력에 의한 권력관계까지 함께 조망한다는 점에서 유사성을 찾을 수 있다. 때문에 이 영화는 묵시적인 피해자 혹은 가해자를 정의내릴 수 없으며, 오히려 이들간에 존재하는 폐쇄적인 관계 자체를 하나의 독립적인 유기체, 혹은 주된 관찰 대상으로 상정하고 이 관계 자체의 흥망성쇠에 대해 이야기하는 편이 더 명확하게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한다. 학교 폭력 문제의 본질적인 부분은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주체” 가 명확히 설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괴롭힘을 당하는 아이와 괴롭히는 아이가 관계를 주고 받을 때 이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가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한국보다 먼저 이 사회적 문제를 겪고 있는 일본에서조차 확실하게 매듭지어진 바가 없다. 때문에 (위의 문단과 맥락을 같이해) 법적으로 보호받아야 한다고 규정되는 청소년층에서 빈번하게 발생하는 이 문제에 대해 소위 말하는 “어른” 들은 손을 놓아 버릴 때가 많고, 불완전하다고 인식되어온 이 젊은이들은 폭력의 사각지대에 놓여 소모적인 도피만을 반복하고 있을 뿐이다. 왕따를 당한 희준이 전학을 감으로써 자신과 기태간에 있던 불평등한 관계의 고리를 끊으려고 했고, 전학을 간 이후 기태의 죽음에 대해 일말의 결백함을 호소하는 것도 그 나름대로 감정적인 도피를 하려고 한 결과이고, 학교를 그만두고 오해의 사슬을 끝내 스스로 풀지 못한 동윤 역시 확실한 매듭을 짓지 못한 것은 마찬가지다. 이는 <릴리 슈슈의 모든 것> 에서도 같은 주제의식으로 드러난다.

셋째,  이 영화를 학교 폭력과 관련지어 해석하지 않고 단지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관계의 미묘한 뒤틀림을 섬세하게 포착하는 이야기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보수적이고 수동적으로 이 영화를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작은 오해들이 쌓여 감정의 골이 깊어지고 그래서 관계가 뒤틀렸으며, 그 관계의 끝을 견디지 못한 구성원 중 하나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라는 서사는 뭔가 연결 고리가 중간에 끊긴 듯한 느낌이다. 왜 희준과 동윤이 기태에게 그토록 심한 말을 할 수 밖에 없었는가에 대한 충분한 설명이 필요했다. 기태를 죽인 것은 이 두 친구의 폭언때문이었고, 그 폭언의 시작점에는 사소한 오해가 아니라 눈에 보이는. 뚜렷한 실체를 가지는 폭력이 있었다. 이 폭력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남자 중,고등학교라는 독특한 구조를 이해해야 하고, 군대 문화를 고스란히 답습해 내려온 이 폐쇄적인 구조에서 십대의 남성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권력구조를 형성하는 지를 이해해야 한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이나 <말죽거리 잔혹사> 같은 쓰레기 영화들이 과장되게 표현해 온 이 불완전한 존재들이 생산하는 폭력성을 <파수꾼> 은 아주 섬세하게 그 본질부터 건드렸고, 영화의 결론은 비록 영화적인 도약을 품어야 했을지언정 그리 이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었다.

넷째, 화면 구성과 카메라 워킹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꼭 담아야 할 것만 간결하게 표현하는 점이 과식을 하지 않는 날씬한 남자의 몸을 보는 느낌이었다. 이제훈에 대해서도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이 영화에서 이제훈은 이미 대단한 성취를 이루어 냈다. <건축학개론> 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오히려 숨을 한번 고른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평범해 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굉장히 인상깊게 봤다. 섬세하고, 오만하지 않으며, 자신의 능력 밖의 것을 탐내지 않는 영화다.

9 thoughts on “윤성현: 파수꾼

  1. 한국에서 만들어진 성장 영화 중 가장 뛰어난 성취를 이룬 영화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애정결핍’에 시달리는 기태를 보면서 어떤 사람들을 좀더 이해하게 되기도 했고요.

    • 저는 이 영화를 보는 제 자신도 굉장히 흥미로웠어요. 이제 더이상 이런 영화를 저의 경험을 떠올려가며, 혹은 제 자신을 이입시켜 가며 보지 않더라구요. 물론 저의 십대 시절 기억이 많이 떠오르긴 했습니다만. 어른이 된 걸까요.

    • 댓글을 읽고 곰곰히 생각해봤는데, 어른이 됐다면, 영화 속 아이들처럼 ‘삐치며’ 성장하는 시기가 지나서 그런 것일까요. 아니면 누군가에게 이해받을 거란 희망을 잃어버린 것일까요.

    • 전 영화를 보는 제 자신이 “얘네들을 왜 아무도 보살펴 주지 않지?” 라는 관찰자적 입장을 가장 먼저 가지게 되었음을 발견했어요. 그리고 뒤이어 “대체 저 아빠란 사람은 왜 이제서야..” 라고 생각했구요. 입장과 시선의 위치가 달라진 것 같아요.

    • 보살펴야 하는 이가 있다는 걸 자각하게 되었군요.

    • 음.. 네. 보살핌을 받는 존재는 더이상 아닌 것 같아요.

    • 종혁님이 쓴 문장을 그대로 놓고 수정하다보니 문장을 제대로 쓰지 못했네요. 삭제 좀 부탁드려요. 원래 쓰려던 문장은,

      더이상 보살핌을 받지 않아도 되는 존재로 비춰지지 않는 것이 가끔은 쓸쓸하지 않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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