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 shows i attended

not chronologically ordered. just posting some live videos because i can’t sleep in this humid and hot summer night. these shows were all great and i was so happy to be there.  i would say living in boulder is cool if you like nature, music, and nice neighbors. oh yes of course organic foods, subaru car, and hiking too. (although i am not a big fan)

life sucks

I thought it was my best effort to overcome each step from the very bottom of the level to the appropriate one which makes my status equal to the normal track. I experienced the worst life style and the situation that I hated myself during preparing proposal defense, but I believe that my effort on the exam does not matter for this deepest sadness. If you do your best and you had never tried that kind of level of effort in your life, you must be proud of yourself. But somebody whom you cannot force or make an effect on says that your effort is simply less than others so that you are deserve to be depreciated and ignored, then you cannot imagine how you will be frustrated. The best option at this step is just to adopt the offer that you never expected and chuckle seeing the mirror with your ugly face. So called an authority, which has forced your every professional and ordinary behavior and direction, as well as your financial status that is so crucial to maintain your everyday life, say buying a milk or donating $10 to your church, is now arguing that you should follow its secretary but “objective” way of forcing your life without any doubt. I have heard that it is happened usually in Korea, but I have hoped that US school is much clearer in every decision making regarding to the communication between uneven classes in the same institution. I do not want to refer any fucking economics concept to criticize the bad and so bumptious decision making and stance, but I have to say that this is just not logical thing, and this is never to be in a place where logic, knowledge, fairness, diversity, and clearness are respected, simply the university. There is nothing I can do to improve any part of this situation, and I believe I had done my best effort. This is the reason why I am so frustrated.

Okay, I just needed a place where I shout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I apologize for you readers if you read this unseemly article by accident.

신문 구독

최근 구독하는 신문을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뉴욕 타임즈로 바꾸었다. 오후 다섯시쯤 우편으로 배달되는 파이낸셜 타임즈를 받아 보다가 새벽 다섯시에 문 앞으로 가져다 주는 뉴욕 타임즈를 받아 보니 기분이 새로웠다. 신문을 읽으면서 하루를 시작하고 싶었는데 드디어 그 소원을 풀 수 있게 되었다. NYT 는 FT 보다 저렴하고 공짜로 온라인 기사도 읽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FT 만큼 읽을 거리가 풍성하다. 물론 지면도 두배 가량 많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NYT 가 가지고 있는 좋은 필진과 균형잡힌 논조는 시간 낭비를 하지 않기 위해 쳐내야 하는 기사의 양을 획기적으로 줄여준다.

물론 지금도 일간지로서는 FT 만큼 가치있는 신문이 없다고 생각하기는 한다. 마치 조선일보를 읽는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던 월 스트릿 저널이나 읽을 기사가 스포츠면에 있는 토막 기사 한두개에 불과한 지역지 덴버 포스트에 비해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기사를 최소의 지면에 최대한 많이 담고 있는 것이 FT 의 장점이다. 하지만 역시 “투자자를 위한, 월스트릿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위한 신문” 이라는 정체성은 바뀌지 않고, 돈에 대한 탐욕과 정부 규제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너그럽게 용인한다는 점에서 FT 를 읽는 한계 또한 명확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조금 더 리버럴한 미국 민주당의 입장을 대변하는 NYT 가 입맛에 더 맞는다고 할 수도 있고.

파이낸셜 타임즈를 포기한 가장 큰 이유는 사실 형편없는 독자 서비스때문이었다. 이건 NYT 도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지만, 자신들 홈페이지의 전산 오류로 인해 내 주소가 엉뚱한 곳으로 저장되어 있었고 이에 대해 수차례 수정을 요구했지만 답장 한번 없었으며 급기야 내가 전화를 걸어 직접 바꾼 주소가 원상복귀되어 엉뚱한 곳으로 기록되는 에러가 다시 발생했음에도 이에 대한 해명이나 사과조차 한번도 없었다는, 말도 안되는 사건을 경험하고 다시는 미국에서 종이로 배달되는 FT 를 읽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거의 한달동안 단 하루도 신문을 받아보지 못하고 이메일과 전화로 스트레스를 받느라 시간 낭비를 너무 많이 했다.

Daily, Weekly, By-weekly, and Monthly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컴퓨터를 통해 무언가를 생산해 내는 일을 하는 나에게 컴퓨터와 인터넷에서 스스로를 떨어뜨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컴퓨터와 관련되지 않은 일을 스스로에게 강제하는 것이다. 요리를 하거나 운동을 하거나, 아니면 잠을 자거나. (데이트를 해도 참 좋을텐데 이건 해당 사항이 아니..ㅠ) 하지만 활자에 대한 고픔이 심해질 때는 종이 위에 쓰인 것들을 많이 마련해 두는 것도 좋은 탈출구가 된다. 책이 그중 가장 나은 옵션이겠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책을 펼치기 전에 상당히 많이 긴장하는 버릇이 있어서 밥을 먹고 휴식을 취할 때나 화장실에 앉아서 읽기 위해 책을 선뜻 펼치지 못한다. 그 다음으로 요긴하게 쓰이는 ‘읽을 꺼리’ 들은 신문과 잡지들이다. 한국에 있을 때에는 씨네21을 주로 읽었다. 지하철에 탑승하기 전, 혹은 잠자리에 누워 불을 끄기 전 펼쳐 읽으면 아주 좋은 잡지인데 애석하게도 미국에서는 양껏 사서 읽을 수가 없다. 그래서 꾸준히 읽을 수 있는 영어로 쓰인 신문과 잡지들을 찾아 보기 시작했다. 가장 보편적이고 안전한 선택은 the Economist 였다. 영국에서 발행되는 주간지이고, 정치/사회/경제 일반부터 간단한 북리뷰, 그리고 금융 시장에 대한 별도의 섹션이 들어 있다. 이코노미스트지의 가장 큰 장점이라면 역시 거의 완벽에 가깝게 구사되는 문장들에 있을 것이다. 허투루 쓰이는 단어나 문법을 거의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유려하고 매력적인 문장들로 가득하다. 표현 방법뿐만 아니라 하나의 완성된 글을 정해진 분량의 범위 안에서 어떻게 완성하는지 구조적인 부분에 있어서도 배울 점이 많다. 이 잡지의 가장 큰 단점이라면 역시 논조의 모호함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centerist’ 라고 칭할 정도로 중도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사실 이 잡지가 가지고 있는 철학의 근본은 친시장주의, 즉 자유주의적인 시각에 있다. 지나친 정부의 규제를 극도로 혐오하며 경제발전에 의한 위기 탈출을 주장하는 이 잡지는 부쉬와 같은 극단적으로 바보같은 보수주의 정권만 아니라면 시장의 자율성을 지지하는 정권을 지지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이코노미스트는 재미가 없고 지루하다.

주간지가 가지는 호흡을 매력적이다. 시의성을 적절히 유지하면서 현재 이슈와 흐름을 놓치지 않지만, 몇페이지에 달하는 분석 기사를 쓸 수 있을 정도의 시간적 여유도 가지고 있다. 일간지에 비해 시야도 넓은 편이다. 일간지는 매일 매일 일어나는 이슈들에 대한 사실 전달에 치중하면서 그 이슈에 대한 해당지의 입장을 간략히 전달하는 정도에 그친다. 때문에 역설적으로 해당지의 입장이라던가 철학이 더 견고하게 확립되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섣부른 판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기 때문이다. 주간지는 일간지에 비해 선택과 집중에 더 치중해야 한다는 단점도 있다. 할당되는 지면이 한정되어 있기 때문에 일간지에 비해 깊은 분석 기사를 쓰기 위해서는 그만큼 포기해야 하는 시의성 넘치는 이슈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아쉬워서 Financial Times 를 구독하기 시작했다. 파이낸셜 타임즈 역시 영국에서 발간되는 일간지이다. 이코노미스트지와 같은 모기업 아래 있기 때문에 기본적인 논조에는 큰 차이가 없다. 자유주의 근간 아래 친시장적인 정책을 지지하고 결국에는 자유로운 재화의 교역이 모두를 이롭게 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일간지가 가지는 짧은 호흡이라는 특성상 단기적으로 발생하는 정책적 오류들을 지적하는 데에 지면의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고, 이는 파이낸셜 타임즈라는 친시장적인 일간지가 가지는 순기능적인 측면을 드러낸다. 즉 이코노미스트가 이슈에 대한 분석에 치중한 나머지 좁은 시야와 세부적인 내용을 건드리지 못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반면 파이낸셜 타임즈는 넓은 시야는 완전히 포기한 채 세부적인 이슈에 대한 신속한 반응으로 조금 더 명쾌한 색깔을 띠게 되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코노미스트보다 조금 덜 지루하고 조금 더 자극적이다. 내가 파이낸셜 타임즈에서 가장 좋아하는 섹션은 comment 파트인데 여기에는 정치계나 학계의 거물들이 짧은 지면에 함축적으로 자신들의 주장을 전달하고 있어서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너무 보수적인 언론들만 접하는 것이 아닌가 싶어 반자유주의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는 대안 매체들을 찾아보기 시작했다. 그래서 Le Monde Diplomatique 와 The New York Review of Books 를 구독했다. 르몽드 디플로마띠끄는 프랑스에서 발간되는 월간지이다. 월간지치고는 상당히 지면이 빈약한 편인데 아마도 비주류 매체의 설움이자 한계이지 싶었다. 앵글로-섹슨 국가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파적 시각에 관대한 프랑스에서 발간된 매체답게 더 자유롭고 더 넓은 시각을 접할 수 있다. 절반 정도는 영어가 원문이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프랑스 원판에 쓰인 원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다. 하지만 번역이 상당히 매끄러워 읽는 데에 큰 불편함은 없다. 르몽드 디플로를 읽으면서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함을 느끼는 나 자신을 보면서 역시 정치적 성향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달았다. ㅋ 하지만 상대적으로 정치적인 이슈들에 집중한 나머지 경제 분석 기사의 깊이는 상당히 낮은 편이다. 대중을 상대로 한 월간지가 가지는 한계라면 이슈에 대해 분석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있음에도 전문적 지식을 요구하지 않는 수준에서 기사를 써야 하기 때문에 극복 불가능한 깊이의 레벨이 존재한다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 이상의 지식을 얻고 싶다면 학문 저널을 읽는 수 밖에.

NYRB 은 2주에 한번 격주간으로 발간되는 북 리뷰 잡지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읽어온 북리뷰와는 차원이 다른 깊이를 보여준다. 어쩌면 책을 리뷰한다는 핑계삼아 필자들이 주장하고 싶었던 바를 전달하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다. 주로 학계에 종사하는 학자들에 의해 작성되는 북리뷰는 시의성보다는 내용의 깊이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듯 하다. 물론 오바마의 헬스케어 시스템이라던가 하는 부분은 확실하게 건드리고 넘어가지만, 그보다는 조금 더 긴 흐름에서 장기적으로 생각해야 하는 이슈들에 대해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측면이 강하다. 예를 들어 앤디 워홀의 전시회를 리뷰하면서 그의 최근 전시에서 드러난 작가적 정체성을 다른 책들과 연계시켜 분석하는 식이다. 읽는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현재 미국에서 발행되는 거의 모든 책들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광고만 봐도 배가 부를 지경이다.

신문, 혹은 잡지는 장기적으로 반드시 소멸한다는 불행한 운명을 타고나는 매체다. 책처럼 책장 속에서 오랜 기간 보관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난 것이다. 때문에 이들은 단기적으로 조금이라도 더 주목받기 위해 자극적으로 자신들으 선전하며 그들의 짧은 호흡을 보상받으려 한다. 발행 주기에 따라 그 자극성의 정도가 달라지며,  그들이 담고자 하는 분석의 깊이도 달라진다. 인터넷에 올라오는 “플짤” 들 역시 하나의 매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들은 창을 닫는 순간 바로 소멸해 버린다. 극단적으로 자극적이고, 또 극단적으로 수명이 짧다. 궁극적으로는 책이 가장 좋은 읽을 수단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가장 오랜 시간을 들여 읽어야 하지만 그만큼 오랫동안 기억될 수 있으며, 또한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항상 책만을 읽으며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은 24시간 단위로 쪼개지며, 때로는 그 안에서 다시 몇개의 작은 단위로 분쇄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삶이 연속적인 한편 불연속적인 단위들의 집합체이듯, 우리가 선택하고 읽어야 하는 매체들도 다양하게 가져갈 필요가 있다.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 우정모텔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의 데뷔 앨범을 듣지 못했다. 그래서 이 <우정모텔> 이 나에게는 이들의 첫 앨범이나 다름없다. 두번째 앨범이 나오기 전까지 나에게 박혀 있던 이들의 이미지는 새마을운동 모자로 상징화되는 키치적인 감수성을 가진 전자음악 듀오라는 것 정도? 근데 음악을 들어보지 않아서 궁금해, 이정도. 결론적으로 <우정모텔> 은 최근 구입한 한국 음반 세장중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끔 만든 음반이다.

두번째 앨범에서는 일렉트릭한 분위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전자음이 유용하게 사용된다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구남과여라이딩스텔라가 구현하고자 하는 특정 분위기의 사운드스케잎을 실현시키기 위한 도구 정도로 쓰인다는 느낌이 든다.  옛날 음악, 즉 8,90년대 음악들이 가지고 있던 요소들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는데, 이들은 장기하와 얼굴들처럼 예전 음악들이 가지고 있던 ‘스피릿’ 을 물려 받으려고 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그 당시 음악들이 가지고 있던 정서를 환기시킴으로써 당시 시대 전체를 가져오려고 하는 것 같다. 조금 더 스케일이 크고 담대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서두르지 않는다는 것도 굉장히 중요한 정체성중 하나인 것 같다. 이들의 음악은 결코 서두르는 법이 없다. 그렇다고 이들이 모든 것을 깨달은 현자들처럼 보이지는 않는다. 그냥 릴렉스한 상태에서 무언가를 관조하는 듯한 느낌이다. 곡들의 제목에서 느껴지듯이 이들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언어 방식이 있다. 그리고 이 언어를 통해 소통하는 것이 그리 큰 장애물처럼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이들 음악이 가지고 있는 선천적인 여유로움때문일 것이다.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더 들어봐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음악은 정말 한국에서밖에 나올 수 없을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일단 기본적으로 무척 소중하다고 할 수 있다.

Idiotape: 11111101

이디오테잎의 <11111101> 에 대한 호평은 워낙 많이 들었기 때문에 처음부터 큰 기대를 가지고 플레이버튼을 눌렀다. 기대 이상으로 훌륭한 것 같다. 음악을 처음 들었을 때 받는 인상과 느낌이라는 측면에서 캐미컬 브라더스의 <Dig your own hole> 을 들었을 때의 느낌과 굉장히 흡사했다. 흥미로웠다.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감을 늦출 수 없게끔 꽉 짜여진 구조도 마음에 들었고 각각의 곡이 가지고 있는 에너지 레벨도 해외의 다른 유명 혹은 거장 일렉트로닉 뮤지션들의 그것에 크게 뒤지지 않는 느낌이다. 일렉트로닉 음악을 굳이 감상용과 플로어용으로 나누어야 할 필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중 하나인데 이 앨범은 그러한 생각에 대한 어떤 증명 자료용으로 활용할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집에서 헤드폰을 끼고 들어도, 플로어에서 춤을 추면서 들어도 좋은 곡. 댄스보다는 록음악에 가까운 정체성이 느껴진다는 점도 흥미롭고.

얄개들: 그래, 아무 것도 하지 말자

아이튠즈에 올라와 있는 것을 모르고 한국에 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가 뒤늦게 허겁지겁 다운받아 들은 앨범 세장중 하나. 웨이브나 기타 웹진에 올라온 리뷰나 인터뷰 기사, 혹은 온라인 지인분들을 통한 입소문등으로 이 앨범의 유명세를 짐작할 수 있었다. 들어본 결과는 그리 나쁘지 않다, 정도. 기타를 통해 훅을 만들면서 매드체스터풍의 리드미컬한 베이스/드럼 파트, 거기에 이언 브라운등이 단박에 연상되는 흥얼거리는 듯한 보컬 스타일까지, 8,90년대 브릿팝의 고전적인 형태를 충실히 재현하고 있다. 이런 류의 음악에서 중요한 이슈는 역시 훅을 얼마나 잘 만들어 낼 수 있느냐의 문제인데 얄개들의 음악은 이 점에서 어느 수준 이상의 센스는 확실히 가지고 있는 것 같다. 특히 앨범 초반부의 곡들에서 번뜩이는 기타 연주가 돋보이는데, 단지 고유한 스타일의 기타연주법을 창조해내었다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를 통해 밴드의 음악 정체성 자체를 확립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드체스터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다만 음반을 반복해서 듣고 난 다음에도 딱히 “얄개들의 색깔” 이 떠오르지 않고 얄개들이 선보인 음악의 레퍼런스 목록들만 머리에 가득차는 것을 보면 오리지널리티의 문제는 아직 완전히 해결하지 못한 듯 보인다. 이에 더해 보컬이 전달하는 메시지가 정확하지 않을 뿐더러 쉽게 동의할 수 없는 무기력한 내용이라는 점도 불만이라면 불만.

대화할 때의 어려움

지근 거리에서 몇년동안 지켜 봐온 사람과 대화하는 일은 한결 수월하다. 하지만 잘 모르는 상대방을 오로지 단기간동안의 대화만으로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설상가상으로 그 대화 상대가 만약 자신의 진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쿨해 보이는 취향과 멋있어 보이는 겉모습만을 강조하는 대화 방식을 택할 때 그 사람을 이해하는 일은 몇배로 힘들어 진다. 정작 정말 중요한 질문들에 대한 답은 회피하면서 현재 자신의 모습과 상황에 대한 변명만을 늘어 놓는다면 그 사람에 대한 의심은 커져만 간다. 나는 사람을 파악하기 위해 대화를 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대화를 통해 상대방을 파악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한다면 최대한 빨리, 신속하게 그 사람을 파악하고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야 그 이후의 대화에서 한결 수월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세상의 거의 모든 대화는 마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건조하고 차가운 대화가 될지 따뜻하고 정겨운 대화가 될지는 내가 그 사람을 얼마나,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와 직결되는 문제다. 반대로 내와 대화하는 상대방이 이것과 똑같은 문제를 겪지 않게 하기 위해 나는 최대한 (설사 그 사람이 원하지 않는다 해도) 나의 진짜, 가장 중요한 모습을 가장 강조해서 최대한 신속하게 보여주려고 노력한다. 그래야 그 사람도 마음이 편할 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 대화 방식을 고수한 채 몇년을 살다 보니 자신을 기만하거나 속이거나 과장되게 꾸미는 방식으로 대화하는 사람들을 조금은 더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약간 피곤하고 때로는 실망감을, 때로는 배신감을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이 것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의 대화는 상대방에게 끼어들 틈을 허용하지 않는 완고함을 가진 사람과의 대화다. 거짓으로 포장한 사람과의 대화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닐 뿐더러 때로는 지속 가능하기까지 하다. 나는 관대한 사람이니까. 하지만 자신의 편견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를 가지고 타인의 다름에 대한 관용을 전혀 배풀지 않는 사람과는 일분 일초도 대화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다. 보통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좁고 얕은 배경에서 나오는 편견이 일종의 독특한 취향이라고 주장한다. 그리고 타인(즉 자신)의 취향에 대한 관대함을 강요한다. 그러한 방식의 대화에서 느끼는 피로감은 멍청한 사람, 혹은 거짓말을 일삼는 사람과의 대화에서 얻는 피로감의 몇배에 해당하는 괴로움을 동반한다. 보통 이런 부류의 사람들은 어떤 특수한 재능이나 매력을 가지고 있고 그에 대해 잘 인지하고 있는 사람들이며, 그 재능 혹은 매력을 더이상 발전시키려 하지 않고 현실에 안주하며 스스로에게 가끔씩 찾아오는 행운과 같은 구애에 마냥 행복해 하는 사람들이다.

이제 곧 한국에 가서 본격적으로 한국어를 이용해 여러 사람들과 다양한 방식의 대화를 나누게 될 것이다. 올 여름에는 내가 잘 모르던 사람, 그동안 만나오지 않았던 사람, 혹은 전혀 다른 루트의 삶을 살고 있던 사람을 만날 계획이다. 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얼마나 많은 스트레스, 혹은 흥미로운 자극을 받게 될지 궁금하다.

20대 끝.

나의 20대가 끝나간다. 개개인이 얼마나 살았는지를 챙겨주는 것보다 다같이 똑같은 라인에서 다시 출발하는 것이 훨씬 중요한 한국사람들만의 이상한 나이 셈법을 완강히 거부한 채 전세계인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나이 셈범으로 꿋꿋하게 20대라고 우기며 버텼으나 이제 그조차 더이상 통하지 않게 되었다. 한달이 채 남지 않은 나의 마지막 20대는 아마 볼더의 한 구석탱이 낡은 집에서 논문과 씨름하며 흘러가게 될 것 같다. 그리 나쁘지 않은데?

나의 20대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대학교를 다니며 도서관에서 좋은 책을 많이 읽었고 이쁜 여자친구와 정말 열심히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 농구도 많이 하고 술도 많이 먹었다. 군대도 정상적으로 다녀 왔다. 군대는 내게 그렇게 나쁘기만 한 곳은 아니었다. 복학해서 공부도 열심히 해보고, 다시 이쁜 여자친구와 데이트를 열심히 했다. 농구도 많이 하고 술은 예전보다 적게 마셨다. 유학을 준비했고, 미국으로 유학을 와서 다시 공부를 열심히 했다. 적응하느라 고생했고, 영어로 말하고 듣고 쓰고 읽는 법과 자동차 운전하는 법을 배웠다. 경제학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 중간에 잠깐 이쁜 여자친구를 만나서 또 데이트를 했다. 지금은 혼자 공부를 열심히 하고 있다.

군대 2년을 제외하면 그렇게 낭비한 시간이 있었던 것 같지도 않다. 중간에 진로를 바꾸거나 시행 착오를 겪지도 않았기 때문에 같은 길을 가는 다른 사람들보다 약간은 더 빠르게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천성이 게으르기 때문에 중간 중간 짬을 내어 열심히 놀았고, 때문에 남들보다 열심히 살았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을 것 같다.

20대에 가장 기억에 남는 사람을 딱 하나 꼽으라면 역시 S 를 골라야 할 것 같다. 첫번째 여자친구와 헤어진 뒤 만난 동아리 선배 누나. 겁나게 이뻤고 또 되게 똑똑했다. 지금도 여전히 이쁘고 똑똑하다. 매력이 넘치는 사람이었고, 그래서 홀딱 빠져 지냈다. 그런데 그 양반은 여자친구 이상의 무언가를 내게 주었던 것 같다. 많은 것을 그 사람에게서 배웠고, 그래서 지금도 무척 감사해 하고 있다. 지금은 나처럼 미국에서 대학원 공부중이다. 나중에 보스턴 갈 일 있을 때 꼭 들려서 얼굴봐야지. 내가 그 사람을 지금도 좋아하고 기억하는건 그 사람도 나를 굉장히 소중하게 대해 주었고 지금도 나를 소중하게 기억해주기 때문이기도 하다.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은 나의 20대에서 딱 1년 정도였을 뿐이지만, 그 1년이 그 이후 거의 모든 시간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어 주었다.

그리고 또 한사람을 꼽자면 그건 아마도 Y 가 될 것이다. 2001년에 처음 만났으니 벌써 10년동안 알고 지낸 셈이다. 그 친구처럼 나와 잘 맞는 사람, 아다리가 잘 맞는 사람이 앞으로 내 인생에서 또 나올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나와 무척 잘 어울렸다. 그 어울림이 우정 이상의 것이라 생각했고 또 그런 기대를 했는데 그 이상으로 관계가 나아가지는 못했다. 그래서 앞으로 그는 내 인생에서 조금 덜 중요한 사람이 될 것 같다. 그 사람이 그 쪽을 택했다. 나중에 땅을 치며 후회하겠지만 뭐, 그 사람의 선택을 존중한다. Y 는 나의 20대를 지근거리에서 함께 하면서 지속적으로 나에게 영향을 준 사람이다. 그래서 S 처럼 큰 영향은 없지만 이 친구가 없는 나의 20대는 훨씬 더 건조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 20대의 처음부터 끝까지 때로는 가깝게 때로는 멀게 내 곁에 있어 주었다는 점에서 어쩌면 이 친구를 통해 나의 지난 10년을 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의 20대, 10년간의 삶을 간단히 글자 몇개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생각만 해도 그냥 가슴이 벅차오른다.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익명성


어제 쓴 글 하나를 지웠다. 부모님이 내가 앞으로 만날 여자에게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는지를 기록한 글이었는데 두고 두고 읽을 가치는 떨어지는데 쓸데없는 이슈들만 만들어 낼 것 같아 그냥 지우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했다.

그 글에서 내가 진짜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온라인상에서 익명성을 포기하는 행위에 대한 것이었다. 나는 몇년전 블로그와 트위터, 텀블러, 그리고 내가 활동하는 유일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용하는 닉네임을 나의 실명으로 일괄적으로 교체했다. 이유는 크게 네가지 정도가 있었다. 첫째, 유치하게 느껴졌다. 실명 의외의 다른 이름을 가진다는 것이.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전적으로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다. 둘째,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익명성 뒤에 숨은 나를 찾아낼 수 있다. 이 바닥이 생각보다 좁아요. 콜로라도에서 경제학을 공부하는 한국 남자 사람은 끽해야 대여섯명. 그 중에 결혼 안한 사람은 두 세명. 그 중에 잘생긴 사람은 딱 나 하나. 셋째, 익명성 뒤에서 거짓을 생산해 내고 싶은 마음이 없었고, 그렇게 deviate 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해 두고 싶었다. 익명성을 바탕으로 온라인에서 거짓을 만들어내는 행위는 현대 사회에 존재하는 가장 큰 쾌락중 하나다. 근데 나랑은 좀 안 맞는 것 같다. 넷째, 언젠가는 익명성을 반드시 포기해야 하는 시점이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싸리 이 시점부터 포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난다 작가의 블로그를 읽으면서 익명성과는 별개로 젊은 시절의 나의 모습을 지속적으로 기록해 두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사실 사진에 찍히는 것을 굉장히 좋아하지 않는 편이다. 사진은 현실을 기록하는 중요한 수단이지만 왠지 내 얼굴만은 사진은 왜곡의 기술이라는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의 변형을 일으킨다는 느낌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한 순간적인 불쾌함때문에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내 과거 모습을 단지 기억에만 의존해서 꺼내보는 것은 상당히 큰 리스크를 감수하는 행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떻게 사는지를 지속적으로 기록해 두기로 했다. 나의 이십대는 이제 거의 끝나가지만, 30대는 20대보다 조금 더 많은 기록을 남겼으면 좋겠다. 내가 너무 잘생겨서 혼자 보기에는 아깝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