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용주: 건축학개론

 

어둠의 경로를 통해 <건축학개론> 을 보았다. 정식으로 돈을 지불하고 본 영화가 아니기 때문에 이에 대한 감상을 쓴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지만,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짤막하게 느낀 점을 적어 본다.

이 영화는 감독에게 있어 일생 일대의 작품이며, 아마도 감독은 이 영화와 같은 성취를 일평생 다시 이룰 수 없을 지도 모른다. 마치 <원스> 가 감독과 배우들의 인생에서 기억에 남을 단 하나의 영화인 것처럼,  건축학도 출신으로 90년대를 학생으로 보낸 뒤 한가인의 집을 직접 지은 감독에게 이 영화는 아마도 지금까지 살아온 자신의 인생 그 전부를 쏟아 부어 만들었기 때문에 딱 그만큼의 가치를 지닐 것이다. 시나리오의 짜임새있는 구성과 영화의 극적인 순간을 효과적으로 잡아내는 능력은 앞으로도 그의 이름을 다른 영화를 통해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라는 희망을 완전히 죽여 버리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 조차 이 영화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영화는 무척 잘 만든 상업 영화이고, 이 감독의 일생일대의 작품이 될 것이며, 딱 거기까지인 영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에는 오리지널리티가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90년대 감성을 자극해서 영화의 주 소비층을 분명히 한다는 점에서는 <나는 가수다> 혹은 <유희열의 스케치북> 의 코드를 거의 그대로 가져 왔고,  소년 소녀의 풋풋한 기억을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다는 설정으로 되살린다는 점에서 <좋아해> 의 포멧을 그대로 가져왔다. 또한 이미 갈 곳이 정해져 있는 남녀가 만나 서로의 감정을 확인한 채 각자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 간다는 “쿨” 한 줄거리와 결말은 <원스> 와 너무나 흡사하다. 전람회의 주제가격인 노래를 제외하면 배경 음악을 거의 사용하지 않으며 영화를 진행시킨 뒤 남녀 주인공의 감정이 절정에 다다르는 클라이막스신에서 사용한 방법론도 사실 너무 상투적이다. 그게 제일 효과적이긴 했겠지마는..

영화는 또한 출연하는 배우들의 기존 이미지에 적극적으로 기대어 모멘텀을 획득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한다. 납득이 역의 조정석을 제외하면 네명의 주인공은 정형화된 자신의 이미지를 깨트릴 생각없이 다분히 관습적으로 영화의 캐릭터를 직조해 가는데 이는 감독이 애초에 캐릭터를 위해 배우의 이미지를 희생할 생각이 없었음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어린 남자주인공 역의 이제훈 정도만이 (기존에 가지고 있는 색깔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이 영화를 통해 어떤 성취를 이룬 배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엄태웅은 사실상 조연에 가까운 역할을 통해 서포트를 충실히 해주고 있고, 가장 문제가 많은 두명의 여자 주인공은 그냥 감독이 찍고 싶었던 광고에 출연하는 셀레브리티의 느낌이다. (한가인을 닮은 여자를 대학교 1학년때 좋아해 본 적이 있는가! 그런 여자가 서른 살이 넘어서 다시 찾아온 적이 있는가! 에라이! 차라리 디아블로3에 나오는 추종자 요술사와의 대화가 더 현실적으로 내 마음을 두근거리게 할 것 같다..) 한가인은 무척 이쁘지만 그냥 이쁜 여자로 나오는 것 같고, 수지는 연기 연습 열심히 하는 아이돌의 모습 그 이상은 아니다.

이 대단히 비현실적인 남성 판타지에 다수의 남자들이 동조하며 소주잔을 기울이는 현상은 퍽 흥미롭다. 여기서 이 영화가 가지는 유일한 미덕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자신의 연기를 한 이제훈이 “찌질하다” 며 까이는 이유도 사실은, 대다수의 남자들이 이제훈이 연기한 어린 남자 주인공의 모습에 자신을 투영할 수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오직 어린 남자 주인공만이 현실의 남자들로 하여금 각자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며, 그 과정을 통해 남자들은 영화관을 나와 대학교때 친구를 불어 내어 포장마차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인을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한가인을 닮은 여자 친구, 아니 짝사랑하던 여자 조차 없었다. 하지만 우리는 대학교 새내기 시절 치기 어린 마음에 담배를 배웠고, 잘 마시지도 못하는 소주를 마시고 길거리에 구토를 했으며, 지금 생각하면 손발이 오그라드는 방식으로 누군가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선물을 사고 고백을 준비했다. 이 영화가 한국의 대부분의 남성들의 마음 속에서 체화되는 과정은 그 어떤 다른 영화들보다 더 현실적으로 구체적이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철저히 남성들의 영화이고, 더이상 판타지가 아닌, 전람회의 노래를 입에서 계속 흥얼거리게 되는 그 정도의 현실성을 가진 영화로 되살아 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카카오톡을 통해 대학교 1학년때부터 지금까지 가장 친하게 지내오고 있는 남자 친구들과 문자를 주고 받았다. 구체적인 여자들의 이름이 오고 가고, 술 먹고 싶다는 이야기부터 한가인의 미모에 대한 이야기까지, 시시껄렁하고 유치한 수다들을 한참 주고 받았다. 이 영화가 나에게 준 선물은 이런 소소한 재미들이다. 그래서 고맙다. 한국에 가면 그 친구들을 불러 모아 한강 잠원 지구가 되었든 마포 서강대 근처 포장마차가 되었든 불러내서 소주 한잔을 해야 겠다. “그때 너 정말 유치했는데” 하며 낄낄거리며 놀려대면서 놀아야지.

7 thoughts on “이용주: 건축학개론

  1. 이용주 감독이 데뷔작인 ‘불신지옥’을 꽤 영리하게 만들어서 후속작을 기대했는데, 줄거리를 들으니 볼 마음이 나지 않더라구요. 대신 자세한 줄거리와 감상평을 귀로 듣고 읽는 걸로 만족했는데, 그간 제가 짐작하고 있던 바와 매우 다르군요!

    전 이 영화가 감독의 “일생일대의 작품”이 될 거라 상상조차 안 했거든요. ‘불신지옥’을 보니 이 감독은 사람들이 ‘지금’ 무엇을 좋아하는지 머리로 알고 예상하는 사람 같아서요. 대놓고 지금 딱 흥행할 법한 시대인, 90년대 대학생활을 추억하는 이들을 타겟으로 삼았기에 감독이 의도적으로 영화의 줄거리와 감성 코드의 오리지널리티를 추구하지 않은 줄 알았어요. 더불어 이재훈은 이미 ‘파수꾼’을 통해 자기만의 것을 보여준 개성있는 배우라 생각했는데 팬심이었나 싶네요. ^^;

    종혁님의 감상평을 읽으니 직접 보고 싶기도 한데.. 그냥 제가 틀렸으려니 하려구요. 그런데 한 감독의 일생일대의 작품은 대개 인생을 관통하는 주제를 다루는 법인데, 이 영화가 감독의 최고의 작품으로 남는다면 좀.. 남다른 사람일 듯.

    • 일단 제가 언급하신 두 영화 다 보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제가 더 무지한 상태에서 툭툭 뱉은 글일 가능성이 더 크네요 ㅋ 영화 두편 마저 보고 다시 댓글 읽을게요.

    • 김태용 감독의 ‘만추’를 지금 막 보고 종혁님의 만추 포스팅을 봤는데, 애초에 저와 영화를 받아들이는 방식이 꽤 다른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해요. (물론, 전 ‘건축학 개론’을 안 봤기에 평이랄 수 없지만;;)

      전 ‘만추’가 비선형적이긴 하나 매우 유기적이고, “이해가 되지 않는 구석”이 없었거든요…. 더불어 감독이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말” 또한 다른 것이라 생각했어요. ㅎㅎ

    • 아.. 네. 근데 비선형적인 영화라는 건 어떤 의미죠?

  2. 사건과 그 해결을 위해 인물들이 움직이는 외적 갈등 중심의 영화는 필연적으로 선형적으로 진행되잖아요. 주인공이 달성하려는 특정 목표를 위해 순차적으로 미션을 달성하는 형식으로요.

    하지만 만추는 그렇지 않더라구요. 만추는 내적 갈등이 중심이라 사건이 왜 벌어졌고, 어떻게 해결되는지가 아닌, 인물들의 감정 흐름이 중요하잖아요. 그래서인지 앞선 행위를 연상시키고, 상기시키는 반복을 통해 관객의 이해를 돕는 장면들이 꽤 눈에 보이더라구요.

    예컨대, 애나가 시애틀 버스 타며 감자칩을 입에 넣을 때, 7년 전 편지를 찢어 입에 넣던 장면을 떠올리게 하고, 애나와 훈이 마켓을 뛰어가는 모습은 놀이동산에서 환상처럼 본, 남녀가 다른 속도로 걸어가다 같이 춤을 추는 모습과 연결되잖아요. 더빙한 두 남녀의 대화는 애나와 전 애인이 오랫만에 뒷뜰에서 마주했을 때 진짜 하려했던 대화와 다름없고, 포크 이야기도 지금이 아닌 7년 전 사건을 비유하잖아요.

    꼭 페스츄리처럼 한 겹을 얇게 깔고 바로 그 위에 한 겹을, 또다시 한 꺼풀을 보태는 식으로 두터워지는 영화로 봤기에 ‘비선형’적이라 표현했어요.

    • 그렇군요.. 어떤 의도로 그렇게 표현하셨는지 이해했습니다.

  3. 요컨대, 관객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방식으로 영화가 진행된는 점에서 비선형적이라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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