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피. 강정. 관계.

각기 다른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커피.

요즘 커피를 다시 마시고 있다. 첫번째 대외적인 (aka 보잘 것 없는) 이유는 요즘들어 부쩍 마음이 급해질 정도로 바빠졌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논문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데 읽어야 할 논문의 수는 왜인지 모르게 점점 쌓여만 가고, 시간은 전과 다름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니 마음이 못내 초조해 진다. 전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잠들어도 왜인지 모르게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시험 전날에는 원래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긴장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을, 아니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어 나 자신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아침 잠을 떨쳐 내고 싶었고, 밤에 늦게 잠들고 싶었다. 그 안에서 리듬을 찾고 싶었다. 멋없는 레드불을 마시기는 좀 그렇고 이뇨 작용이 너무 활발한 녹차를 매일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다시 커피를 택했다. 물론 커피를 매일 마시지는 못한다. 아직 그정도로 몸이 커피에 익숙해 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사나흘에 한번, 혹은 이틀에 한번.

커피를 마시는 두번째 (aka 진짜) 이유는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다. 어렸을 때 관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경험이 하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친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그 친구가 하는 것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 나이가 먹으면 짐짓 쿨한 척 “아 그래요? 퍽 흥미롭군요.” 따위의 말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부분은 한 곳도 없을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실망감은 그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 다름을 그저 다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방치시켜 놓을 수도 있지만,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닮아 갈 수 없다면 그 다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커피에 대해 잘 모른다. 오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두 종류의 커피를 사가지고 왔는데 향과 맛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인터넷을 뒤지면서 커피의 향과 맛을 표현하는 여러 형용사들을 배웠지만 그것들중 어떤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커피에 대해서는 딱 그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추천해준 카페인이 적게 들어간 커피와 저녁 늦게 마실 수 있을 것도 같은 디카프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그라인더에 갈기 위해 봉지를 열었을 때 느껴지는 매력적인 향이 나로 하여금 계속 커피를 마실 수 있게끔 하는 것 같다. 나중에 그 친구 앞에서 커피에 대해 아는 척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친구가 내 앞에서 커피에 대해 열심히 떠들 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정도의 겸손함만 가져 갔으면 좋겠다.

강정.

그 친구와는 관계가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다면,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면, 그만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으로 그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감을 해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을 함께 한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마무리를 좋게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우면 좋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 라는 생각같은 것들. 

어제 그 친구에게 뜬금없이 사진이 한장 왔다. 어느 외국인 사진 작가가 찍은 구럼비 사진. 


이미 트위터를 통해 몇번을 반복해 전달되어 온 사진이었고, 누나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사진에 대해 충분한 설명까지 들은 터였다. 그 친구가 내게 보내온 내용은 이 사진 한장이 전부였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 사진을 받기 며칠 전 나는 그 친구에게 그동안의 관계에 대해 또다시 불만을 토로했고, 아쉬움을 토로했고, 그래서 정말 더는 힘들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 긴 하소연에 대한 답은 역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는 정말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도착한 사진은,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관계가 전혀 없는, 슬프디 슬픈 강정 마을에 관한 것이었다.

관계가 아예 없지는 않다. 우리는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바다를 구경했고, 산도 올라갔으며, 음식을 같이 해먹었고 축구도 같이 했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아마도 우리는 강정 마을을 함께 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곳에 해군 기지가 들어설 예정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강정 마을의 사진을 공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와 나는 외롭고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 왔다. 동갑은 아니었지만 동갑처럼 지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두려운 시기를 보낼 때 내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때의 고마움은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감정의 교류는 비단 개인적인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우연히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촛불을 들고 서 있기도 했고, 같은 영화를 거의 같은 시간에 보고 아마도 같은 느낌을 받은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상대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무뚝뚝한 사람 둘이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척 짧다. 하지만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그에게서 받을 마지막 사진이 되지 않을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도 같다. 그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한없는 소망과 그에 상응하는 끝없는 절망감이 언젠가는 그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관계.

이건 졸려서 못쓰겠다. 그닥 좋은 이야기도 아니다.

10 thoughts on “커피. 강정. 관계.

    • 필리핀 원두! 처음 듣는군요 +_+ 신기하다.. 어제 코스타리카 원두보고 신기해 했는데.. ㅎㅎ

  1. 전 sumaturan을 마십니더.
    코스타리칸은 미국에 살저긔 많이 마셨는디
    어딘가 모르게 grassy한 느낌이 ㅋㅋ

    • 저도 며칠전 수마트라 디카프를 사와서 마시고 있어요. 아직 카페인이 강하게 들어간 건 조금 겁이 나고요.. 맛은 되게 진하더라구요 +_+

  2. 커피와 함께 강정을 먹었다, 는 이야기인 줄 ; 아, 이런 저를 어쩌나요. ㅎ
    커피는 원산지별로 특색들을 지니긴 하지만, 로스팅된 상태나 커피 내리는 사람의 실력, 물온도, 등등에 따라 맛이 다 천차만별이라 맛만보고 눈감고 맞히거나, 이런 건 저는 많은 경우 뻥이라고 생각해요. 물론 한 곳에서의 커피에 오래 익숙해지거나, 한다면 그 차이를 알고 취향을 가질 수야 있겠지만. ㅎ 전 맛이나 가격이 무난해서 과테말라 원두를 종종시키는데, 누가 사전 정보 없이 커피를 가져와서 이 중 과테말라 커피를 맞혀보시오. 라고 하면 깨갱, 일겁니다. ㅋㅋ 찍기에 의존해야 ㅎㅎㅎ

    그나저나 제 집에 있는 디카페인 커피도 인도네시아 산인데. 그 쪽 커피가 디카페인 커피로 만들기에 좋은 조건을 가진건가, 라는 쓸데없는 의문을 품어봅니다. 실은 카페인이 없으면 그게 커피냐, 라며 절대 인정하지 않는 스타일이지만, 이제 늙어서 불면이 무서워요 ;;; ㅋㅋ

    • 커피 좋아하시는군요! 전 요즘 핸드드립을 배워볼까 생각중이예요. 프렌치프레스를 사용하고 있는데 약간 기름지다는 생각이 들어서.. 지금 드신다는 과테말라 커피도 나중에 한번 시도해 볼게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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