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카고에서 찍은 사진들.

시카고에 잠깐 다녀 왔다. 표면적인 이유는 투표때문이었지만, 시카고라는 도시에 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더 중요한 일이 있어도 그곳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2박 3일의 짧은 일정, 여기에 더해 논문을 빨리 끝내야 한다는 심리적인 압박감이 더해져 여유로운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던 것 같다. 동행했던 친구도 마찬가지 형편이어서 시카고 시내에 있는 대학교 도서관에 가서 공부를 하거나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다운타운에 있는 카페에 앉아 논문 뭉치를 꺼내 들곤 했다. 시카고는 컸다. 볼더에서는 쉽게 보지 못할 다양한 인종의 사람들도 볼 수 있었고, 아름다운 건물들과 끊임없이 불어오는 바람도 실컷 경험했다. 세계의 모든 초대형 도시들이 모두 같은 모습은 아니겠지만, 나는 시카고에서 서울의 모습을 흠칫 흠칫 본 것 같다. 촘촘히 들어선 건물들과 바삐 움직이는 사람들, 웃지 않는 사람들, 쌀쌀맞은 사람들, 바삐 움직이는 차들, 수많은 홈리스들과 그들이 추위에 떨고 있을때 그 옆에 이쁘게 만들어진 공원과 대학들에서 밝게 웃고 있는 사람들, 타고 내릴 때 운전기사에게 인사하지 않는 사람들, 어깨를 부딪히고 가도 미안하다고 인사하지 않는 사람들, 나에게 웃어주지 않는 카페와 식당 점원들, 24시간 불이 켜져 있는 던킨과 편의점들, 다시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불과 열 몇시간 전에 내가 경험한 도시의 모습이다. 지금 내가 컴퓨터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이 곳에서 볼 수 없는 모습들이었다. 샌프란시스코도 그렇고 시애틀도 그랬지만, 시카고는 그 잔상이 더 강하고 오래 남을 것 같다. 좋다, 싫다, 라고 딱 잘라 말하기 힘든, 마치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너무 잘 알고 있지만 그렇게 살 수 없는 현실에서 도망칠 수도 없는 나와 내 친구들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의 잔향이 아직 정리하지 못하고 바닥에 널부러진 캐리어 근처에 짙게 배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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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rival”

시카고에서의 마지막 스케쥴은 와이파이가 잡히는 다운타운의 한 스타벅스에서 친구와 이어폰 한쪽씩을 나누어 끼고 <하이킥3 – 짧은 다리의 역습> 마지막회를 보는 것이었다. 마지막회의 마지막 부분에 나왔던 노래가 궁금해 검색을 했더니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Arrival” 이라는 곡이었다. 이 노래의 원곡은 그룹 ABBA 가 부른 1976 버전이다. 스코틀랜드의 전통적인 백파이프 음악 느낌도 나고 사라 브라이트만이 불러서인지 크로스오버적인 기운도 물씬 풍겼는데, ABBA 의 원곡은 가사가 없이 악기 연주와 허밍만으로 이루어진 인스트루멘탈 곡이다. 위키피디아에 따르면 아바의 노래중 유일하게 가사가 없이 진행되는 곡이라고 한다. Benny Anderson 과 Bjorn Ulvaeus 에 의해 작곡됐다. 사라 브라이트만이 부른 가사는 1983년 뮤지컬 <ABBAcadabra> 를 위해 Daniel Balavoine 과 Anni-Frid Lyngstad 가 “Belle” 이라는 이름으로 재편곡하고 여기에 가사를 입힌 버젼을 기초로 한 듯 하다. 이후 많은 가수들에 의해 리메이크되었고, 그중에는 네덜란드 군악대의 연주도 있다.

먼저 아바의 원곡.

<하이킥> 에 나왔던 사라 브라이트만의 버전.

1983 년 프랑스 TV 쇼 버전의 <ABBAcadabra> 에 나오는 “Belle”.

아멜리아 브라이트만이 그레고리안 성가대와 일본에서 함께 부른 “Arrival”.

그리고 홀랜드 군악대(로 추정되는데 정확히는 모르겠음 ㅠ) 의 연주.

Francesca Woodman 의 사진들.

프란체스카 우드만은 1958년 콜로라도주의 볼더에서 태어나 뉴욕에서 활동하다 1981 년 자살한 포토그래퍼다. 22세의 나이에 생을 스스로 마감할 만큼 그녀 안에 격정적인 무언가가 있었던 것일까. 로즈 아일랜드에서 학교를 다닌 기간을 제외하면 그녀가 뉴욕에서 활동한 기간은 채 2년이 되지 않는다. 그 기간동안 그녀가 남긴 작품들은 광기 혹은 공포, 이런 단어들로는 쉽게 표현이 되지 않는 어떤 아련함이 있다. 긴 노출시간만큼이나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주기에는 세상이 너무 바빴던 것일까. 뉴욕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6월 13일까지 계속되는 그녀의 작품 100여점에 대한 전시회를 꼭 가보고 싶다.

 

 

 

 

 

 

 

 

 

아이.

총각 남자 유학생이 어린 아이들과 시간을 함께 보낼 일은 사실 거의 없다. 가정을 가진 유학생들의 집에 초대를 받을 경우 몇시간 정도 같이 노는 것이 고작이다. 한번도 아기 기저귀를 갈아본 적도 없고, 잘못을 저지르고 우는 아이를 혼내거나 달랜 적도 없다.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 것이다.

하지만 가끔 뜻 밖의 일들이 생기기도 한다. 요즘은 매주 화요일마다 일곱살짜리 남자 아이와 하루 종일 시간을 함께 보내고 있다. 박사 과정 신입생중 싱글맘이 하나 있는데, 언제부턴가 그 친구가 수업을 들어가거나 티칭을 해야 할 경우 내가 있는 오피스에 잠시 아이를 맡겨 놓고 가기 시작했다. 하필이면 일주일중 그녀가 가장 바쁜 날 그녀의 아들이 다니는 학교는 오전 수업만 하고 끝이었기 때문에 누군가 그녀의 아들을 돌봐줄 사람이 필요했다. 우리 오피스에 가장 먼저 찾아온 이유는 아마 그녀가 입학후 나와 가까워졌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 시간에 아이를 맡길 만한 사람이 나와 오피스에 있는 나의 친구들밖에 없기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이유야 어쨌든, 영어를 나보다 훨씬 잘하는 일곱살짜리 사내 아이와 하루 종일 함께 지낸다는 것이 나에게는 큰 도전이었다. 다행히 우리 오피스에는 그 친구가 좋아할 만한 것들이 몇가지 있었다. 미니 농구 골대가 벽에 걸려 있었고, 우리가 각자 사용하는 컴퓨터가 있었다. 무엇보다 내가 아이폰과 아이패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기억 속에서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을 아버지와 비슷한 또래의 성인 남자라는 존재가 셋씩이나 있었다. 그 싱글맘 대학원생이 우리 오피스에 자신의 아이를 맡기는 것을 선호했던 것도 결국 그 어린 친구의 삶에서 아버지라는 존재가 결핍되어 있다는 사실을 꽤나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아들이 우리와 많은 대화를 하기를 바랬다. 우리는 그 아이에게 농구공을 던지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그의 숙제를 도와 주었으며, 가끔 그의 어머니가 허락하는 한도 내에서 나의 아이폰을 빌려 주거나 컴퓨터의 비밀번호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C 와 S 는 아이를 다루는 데에 무척 능숙했다. C 는 특히 얼마전까지 두살배기 딸을 둔 싱글맘과 데이트를 했던 경험이 있어서인지 아이가 원하는 것과 해야 할 것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했다. 대화도 능숙했고, 아이에게 동기 부여를 하는 요령도 탁월했다. 나에게 있어 가장 큰 걱정은 외국인과의 대화 경험이 거의 없었을 그 어린 친구가 나의 부정확한 발음을 잘 알아 듣지 못할 것이라는 불안감이었다. 그 친구와 대화할 때에는 조금 더 또박 또박, 천천히 말을 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그 친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 사람이 대체 무슨 말을 하는건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긴 했지만, 걱정했던 것만큼 우리 둘 사이가 언어라는 장벽에 크게 가로막히지는 않은 것 같다. 무엇보다 나는 그 친구가 가장 원하는 아이폰을 가지고 있는, 일종의 보물창고 열쇠를 쥐고 있는 주인장과 같은 존재였다. 어머니에게 배웠을, 평소 대화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정중한 말로 아이폰을 좀 빌려 달라고 부탁하는 그의 모습에서 결국 더 나은 삶을 위한 인류의 발전은 끝이 없겠구나 라고 생각했다. 나는 그가 아이폰보다는 농구공을 더 만지길 원했고 게임을 하기 보다는 책을 더 많이 읽기를 바랬지만, 내가 거기까지 관여할 수는 없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일곱살짜리 친구와 정기적으로 시간을 보내면서 배우는 것들이 참 많다. 예를 들어 나 자신을 그 친구를 통해 바라볼 수 있다. 나는 가부장적인 가정에서 과보호를 받으며 자랐다. “해라” 와 “하지 마라” 라는 명령조의 말에 복종하며 자랐기 때문에 무엇을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할지는 잘 알고 있었지만 그것을 왜 해야 하고 하지 말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했다. 언제부턴가 부모님의 그 명령이 결국은 옳은 방향이라는 것을 깨닫고 이유를 따로 묻거나 반항하지 않았지만, 그것이 최선의 교육 방법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지금까지도 확신하지 못하고 있다. 그 아이는 미국에서 자란 미국인의 아들이다. 이 친구는 대화와 설득에 익숙해져 있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고 그 행동의 의미는 무엇인지에 대해 충분히 설명을 들어야 한다. 그리고 (아마도 가이드라인을 따라 행동하겠지만) 최종 판단은 항상 그의 몫이다. 나는 내가 배운대로 그에게 “하지 마라” 라고 먼저 말하게 된다. 그는 나의 그러한 대화 방식에 익숙하지 않다.  나는 결론을 먼저 말하기 전에 충분히 그와 대화를 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내가 그렇게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그에게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고 보면 가정 교육은 생각보다 훨씬 무시무시한 것이다. 아마 죽을 때까지 내 안 깊은 곳에 자리 잡아 나를 통제할 것이다.

결국 아이를 키우는 것과 아이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하지만 일주일에 한번 그 친구와 몇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만으로 내 안에 어떤 방식으로 질서가 형성되어 있는지 깨닫게 된다. 30년 가까이 살면서 ‘나’ 에 대한 확고한 의식이 더이상 흔들리지 않을 정도로 공고해져 있다면 이는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이를 수정하는 것이 점점 더 버거워진다는 것을 뜻한다. 하지만 아이와의 대화, 혹은 아이와 함께 하는 행동에서 전혀 다른 시각으로 나 자신을 바라볼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아이를 키운다면 지금과는 다른 느낌일까, 아니면 지금 이 기분을 조금 더 깊게 느끼게 될까. 겪어보지 않았으니 모르겠다. 하지만 아이를 반드시 키우고 싶다는 생각은 더 강해진다. 내가 나의 아이에게 좋은 스승이자 친구가 되어줄 수 있다면, 그 역시 나에게 좋은 스승 혹은 좋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을 것이다. 관계가 한쪽 방향으로 흐르지는 않을 것이다. 이 흥미로운 관계의 형성을 포기할 생각은 전혀 없다.

꿈에 나온 그 친구.

꿈얘기를 하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는 않는데, 최근에 꾼 꿈 하나가 며칠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아서 혼자 신기해 하고 있는 중이다. 내가 생각하는 꿈이란 무의식속에서 드러난 욕망이라던가 기억같은 것들이 무질서하게 혼재되어 나타나는 환각같은 것이기에 언제부턴가 꿈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지만, 이렇게 며칠이 지나도 기억속에서 사라지지 않고 잔상처럼 남아 무의식이 아닌 의식속에 존재하게 되어 버린 꿈은 현실에서의 기분을 묘하게 만드는 구석이 있다.

얼굴을 잘 인식하지 못한다. 안면인식장애라고 하던가.. ‘장애’ 라고 부를 정도로 심각한 수준은 아닌데 사람의 얼굴을 인식하고 그 얼굴과 나의 기억속에 있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연결하는 과정에서 약간의 시행착오를 거칠 때가 종종 일어난다. 그래서 학생들중 누가 찾아와도 ‘어디서 많이 본 애인데..’ 라는 생각만 떠올릴 뿐 그 친구가 누구인지는 잘 모른다. 한국에 있을 때 한번은 지하철역에서 아주 낯이 익은 사람 하나를 지나쳤는데 누구인지 곰곰히 생각하다가 그 사람이 나의 아버지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고 화들짝 놀란 적도 있다. 사람의 얼굴에서 특징을 잘 잡아내 그것을 기억하는 능력이 조금 떨어지나 보다. 혹은, 다른 사람의 얼굴에 딱히 큰 관심이 없어서 유심히 보지 않는 것일 수도 있다.

어쨌든 그런 저런 이유로 타인의 얼굴이나 생김새에 대해 무심한 편이고, 그것이 내 인생에서 큰 가치를 지니지도 못한다고 생각하며 살았다. 하지만 유독 그 친구의 얼굴만은 지금까지도 또렷하게 내 기억속에 남아 있다. 며칠 전 꾼 그 꿈에서도 가장 강한 인상으로 또렷하게 남아 있는 이미지는 그 친구의 얼굴 표정이었다. 우리는 꿈속에서 어느 건물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몇분뒤 그 친구가 생각을 바꿔 다시 나가자고 했다. 건물을 황급히 벗어나는 그 친구를 뒤따르며 내가 무어라 말했는데 그 말을 듣고 그 친구가 고개를 휙 돌려 나를 쳐다 봤다.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쳤는데 바로 그 장면이 지금까지 지워지지 않고 계속 남아 있다. 왜인지는 모르겠다. 왜 하필 그 친구가 나온 꿈이었는지, 왜 하필 그 친구가 나를 쳐다볼 때의 그 표정만이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 친구는 나에게 큰 영향을 끼친 사람중 하나이다. 그건 그 친구에게서 배울 점이 많았다거나 그 친구가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오히려 부족함이 많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나는 언제부턴가 내의 행동거지나 말투에서 그 친구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새초롬한 표정이라던가, 입술을 삐죽거리는 모습이라던가 힘을 빼고 터덜 터덜 걸어갈 때의 발걸음같은 것들에서 내가 관찰하던 그 친구의 모습이 무서울 정도로 내 몸속에 깊이 배어있음을 알게 된다. 딱히 그러한 버릇들을 바꾸고 싶은 생각은 없다. 억지로 내 몸속에 깃든 그 친구의 흔적들을 지우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래야 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다. 내 인생의 한 부분에 깊게 관여한 그 친구를 억지로 삭제한다는 것도 우습다. 내 자신을 부정하게 되어버리는 것 같기도 하니까.

아마도 그 친구를 내 인생에서 다시 만날 일은 없을 것이다. 나는 그 친구를 찾고 싶지 않고, 만나고 싶지도 않다. 그 친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아마도 그 친구에 대한 기억이나 그 친구의 얼굴, 혹은 내 몸속에 깃든 그의 행동들도 조금씩 사라져 갈 것이다. 마흔이 되고 쉰살이 되었을 때 혹 그 사람의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까. 예순이 되고 일흔이 되어 다시 혼자가 되었을 때 내가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지난 29년동안 너무 많은 사람들이 나를 스쳐 지나갔고, 그중에는 정말 중요했던 사람들, 사랑스러웠던 사람들, 고마웠던 사람들도 너무 많았다. 그들의 기억속에 내가 어떻게 남아 있을지에 대해서는 한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하지만 내가 그들을 어떻게 잊어갈 것인지에 대해서는 하루에도 수십번씩 생각하고 있다. 기억은 조금씩 사그라드는 불꽃과도 같다. 발로 퍽퍽 눌러 꺼버릴지, 바람에 흩날리는 재가 될 때까지 가만히 지켜 보고 있을지를 결정하는 것은 전적으로 나의 몫이다.

서교동이 갑자기 가고 싶어졌다.

Youth Lagoon at Larimer Lounge, Denver

사실 오늘 공연인줄도 모르고 집에서 띵가 띵가 놀고 있다가 친구가 누구 차로 갈거냐고 물어봐서 그때서야 허겁지겁 준비하고 저녁도 대충 때우고 집을 나섰다. 친구네 집에서 덴버 공연장까지는 30분 남짓 걸린 것 같다. 일요일이나 차가 막히지 않아서 생각보다 일찍 도착한 듯. 공연이 있었던 Larimer Lounge 는 덴버에 있는 venue 치고는 상당히 후지고 낡고 작다. 100명 남짓 들어갈까 말까한 크기에 무대라고 해도 네명이 서면 꽉 찰 정도의 작은 크기. 스피커도 후지고. 하지만 그만큼 뮤지션과 가까운 거리에서 대화하듯 호흡할 수 있다는 점이 큰 장점이 되기도 한다.

Youth Lagoon 은 지난해 내 페이보릿 앨범중 하나여서 덴버로 투어를 온다는 소식을 듣고 꼭 보고 싶었다. 그래서 친구를 꼬셔서 보러 갔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생각보다 훨씬 별로였다. 공연가는 길에 친구에게도 이야기했지만, 달랑 앨범 한장 발표한 신인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전국 투어를 돈다는 건 상당한 수준의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고, 또 그 투어를 돈을 내고 보러 간다는 것 역시 대단히 큰 위험 부담을 안고 가야 하는 것 같다. 예상대로 보이지 스테잇 출신의 이 젊은 뮤지션은 세팅에만 30분이 넘는 시간을 소요했고, 우리는 오프닝 밴드의 공연이 끝나고 거의 4,50분 정도를 서서 기다려야 했는데, 그 후 무대에 올라와서 연주한 곡은 앨범에 있는 달랑 10곡이 전부. 그러니까 세팅 시간과 공연 시간이 거의 비슷했던 셈이다. 설상가상으로 앵콜송으로 남겨 놓은 비장의 무기, 개인적인 페이보릿송 “17” 을 부르는 순간 경찰이 신고를 받고 출동, 노래가 중간에 끊기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미국에서 이게 가능한 일인지 잘 모르겠는데, 공연이 시끄럽다고 주변 이웃이 신고를 했나보다. 결국 아카펠라(?) 떼창으로 얼떨결에 마무리짓고 뮤지션은 황급히 퇴장. Youth Lagoon 의 공연은 샌디에고 출신 Trevor Powers 의 원맨 밴드인데, 공연에는 기타를 대신 쳐주는 세션맨을 하나 대동하고 나와서 자신은 키보드와 신디사이저, 기타 엄청 많은 이펙터들을 대동한 기계들을 만지며 노래를 진행시켰다. 공연 준비 시간을 조금만 단축시키고 조금만 더 많은 노래들을 불렀더라면 (하다 못해 신곡도 하나도 없었다!) 꽤 괜찮았다는 이야기를 할 수 있었을텐데. 아쉬운 공연이었다.

결국 돌아오는 길에 친구와 차안에서 미처 다 듣지 못한 “17” 의 후렴구를 따라 부르며 돌아 왔다. 후렴구 가사는 지금 생각해도 참 좋다.

커피. 강정. 관계.

각기 다른 세 친구에 대한 이야기다.

커피.

요즘 커피를 다시 마시고 있다. 첫번째 대외적인 (aka 보잘 것 없는) 이유는 요즘들어 부쩍 마음이 급해질 정도로 바빠졌다는 것이다. 이번 학기가 끝나기 전까지 논문에서 성과를 내야 하는데 읽어야 할 논문의 수는 왜인지 모르게 점점 쌓여만 가고, 시간은 전과 다름없이 빠른 속도로 흘러가고 있으니 마음이 못내 초조해 진다. 전보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 늦게 잠들어도 왜인지 모르게 무언가를 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시험 전날에는 원래 공부가 잘 되지 않는다. 지나치게 긴장하기 때문에 생각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일어나지 않을, 아니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증폭되어 나 자신을 옭아매기 때문이다. 아침 잠을 떨쳐 내고 싶었고, 밤에 늦게 잠들고 싶었다. 그 안에서 리듬을 찾고 싶었다. 멋없는 레드불을 마시기는 좀 그렇고 이뇨 작용이 너무 활발한 녹차를 매일 마시는 것도 부담스러워 다시 커피를 택했다. 물론 커피를 매일 마시지는 못한다. 아직 그정도로 몸이 커피에 익숙해 지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사나흘에 한번, 혹은 이틀에 한번.

커피를 마시는 두번째 (aka 진짜) 이유는 커피를 좋아하는 친구와 더 친해지고 싶어서다. 어렸을 때 관계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었던 경험이 하나 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그 친구에 대해 더 많이 알고 싶어지고, 그 친구가 하는 것을 따라 하고 싶어진다. 나이가 먹으면 짐짓 쿨한 척 “아 그래요? 퍽 흥미롭군요.” 따위의 말로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해서 내 인생에서 행복해질 수 있는 부분은 한 곳도 없을 것 같다. 누군가를 좋아할 때 가장 먼저 맞닥뜨리는 실망감은 그와 내가 다르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그 다름을 그저 다름이라는 사실 그 자체로 방치시켜 놓을 수도 있지만, 닮아 가려고 노력하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은 관계 발전을 위한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이고, 닮아 갈 수 없다면 그 다름에 대해 조금 더 자세히 알고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도 과히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나는 커피에 대해 잘 모른다. 오늘 다른 지역에서 생산된 두 종류의 커피를 사가지고 왔는데 향과 맛의 차이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며칠동안 인터넷을 뒤지면서 커피의 향과 맛을 표현하는 여러 형용사들을 배웠지만 그것들중 어떤 것도 내 것으로 만들 수가 없었다. 커피에 대해서는 딱 그정도의 수준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 친구가 추천해준 카페인이 적게 들어간 커피와 저녁 늦게 마실 수 있을 것도 같은 디카프 커피를 사서 집으로 돌아와 그라인더에 갈기 위해 봉지를 열었을 때 느껴지는 매력적인 향이 나로 하여금 계속 커피를 마실 수 있게끔 하는 것 같다. 나중에 그 친구 앞에서 커피에 대해 아는 척 자랑을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다만 그 친구가 내 앞에서 커피에 대해 열심히 떠들 때 아무 것도 모르면서 아는 척 고개를 끄덕이고 싶지 않을 뿐이다. 커피를 마시면서 그정도의 겸손함만 가져 갔으면 좋겠다.

강정.

그 친구와는 관계가 거의 끝나간다고 생각했다. 이렇게까지 해서 무언가 보이지 않는다면, 아무런 말도 들을 수 없다면, 벽에 대고 이야기하는 기분을 지울 수 없다면, 그만하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로운 관계에 대한 희망으로 그와의 관계에 대한 절망감을 해소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다만 내 인생의 삼분의 일을 함께 한 그 친구와의 마지막 마무리를 좋게 끝내고 싶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마음의 준비랄까, 그런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어떻게 지우면 좋을까, 가 아니라 어떻게 기억하면 좋을까, 라는 생각같은 것들. 

어제 그 친구에게 뜬금없이 사진이 한장 왔다. 어느 외국인 사진 작가가 찍은 구럼비 사진. 


이미 트위터를 통해 몇번을 반복해 전달되어 온 사진이었고, 누나의 페이스북을 통해 이 사진에 대해 충분한 설명까지 들은 터였다. 그 친구가 내게 보내온 내용은 이 사진 한장이 전부였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이 사진을 받기 며칠 전 나는 그 친구에게 그동안의 관계에 대해 또다시 불만을 토로했고, 아쉬움을 토로했고, 그래서 정말 더는 힘들겠다고까지 이야기했다. 그 긴 하소연에 대한 답은 역시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 친구와는 정말 이제 끝이구나 생각했다. 그러던 와중에 도착한 사진은, 우리 둘 사이에 있었던 일들과 관계가 전혀 없는, 슬프디 슬픈 강정 마을에 관한 것이었다.

관계가 아예 없지는 않다. 우리는 함께 제주도로 여행을 갔다. 거기서 다른 친구들과 함께 바다를 구경했고, 산도 올라갔으며, 음식을 같이 해먹었고 축구도 같이 했다. 이야기도 많이 나눴다. 아마도 우리는 강정 마을을 함께 가보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그곳에 해군 기지가 들어설 예정이 아니었다면 우리가 강정 마을의 사진을 공유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와 나는 외롭고 힘든 시절을 함께 보내 왔다. 동갑은 아니었지만 동갑처럼 지냈고, 내 인생에서 가장 어둡고 두려운 시기를 보낼 때 내게 큰 위로가 되어 주었다. 그때의 고마움은 평생 가도 잊지 못할 것이다. 그 감정의 교류는 비단 개인적인 일에만 국한되지는 않았다. 우연히 같은 장소 같은 시간 촛불을 들고 서 있기도 했고, 같은 영화를 거의 같은 시간에 보고 아마도 같은 느낌을 받은 것에 대해 서로 다른 상대에게 이야기하기도 했다. 무뚝뚝한 사람 둘이서 나눌 수 있는 대화는 무척 짧다. 하지만 그 안에서 따뜻함을 느끼는 것은 어렵지 않다.

아마도 그에게서 받을 마지막 사진이 되지 않을지. 하지만 그렇게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도 같다. 그와의 관계에서 느꼈던 한없는 소망과 그에 상응하는 끝없는 절망감이 언젠가는 그 끝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갖게 됐다.

관계.

이건 졸려서 못쓰겠다. 그닥 좋은 이야기도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