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at we had thought before we met. what we had decided before we started.

Last night, after having a daily mass on the evening, K and I were sitting on a bumpy chair with trembling table in the food court we usually go to, waiting for our Vietnamese foods. K was talking about a Korean TV show, named “짝”, which I’d never watched before. According to her, the reality program is a story about men and women who seek the right person for their future, so that they make every kind of ways to seduce the desired person, only limited to hiding their names. I was thinking the idea that making names anonymous (but still exposing most of their background information, such as wealth, education, occupation, and appearance) is ridiculous and useless. K stressed a couple in the show that she was recently impressed. The most impressive to K was that, the couple, combined a men, who was half Korean and half Japanese, and a women, who was raised in Australia after her family immigrated to the island, was never affected by the other guys, eyeing each other, concentrating each other, and making a progress without any hesitation. They thought they finally met the right person. The right future spouse. But finally they took a part, leaving crying and torn hearts. They so liked to get together, but they couldn’t. The men wanted to live in Korea while the women longed to comeback to her citizenship country, Aussie island, and make a family there. The guy had never experienced a complete, and warm-aired family, while the lady had enjoyed full of happiness given from her family side. They are different. But they were so eager to be with each other. Finally, they could not overcome the differences.

K’s question was drawn.

What was the most important thing should we get before starting the new relationship? What if we are at the right age of marriage so that we are somewhat concerned with the big change in our life? Physical consideration, or just a fact that we have a person whom we love, and want to be with? It would be so costly and regretful if we have to take apart only because of that kind of physical reasons, such like different place of background or different culture of the family. We all are different. And a relationship, a marriage, and living together is a process of finding a common part, making oneself be similar to the other, and thus finally be the one. But, I pointed that, the couple K mentioned, would meet again if they fail to persuade themselves and have a new courage to overcome the issue. Love, is sometimes very materialized thing, but sometimes not.

I argued.

I was thinking of that, too, when I was 20, or 21. Now, I am increasingly worried about those things that you hate. I am afraid of meeting a person whom I do not know before, not only because I do not want to throw myself into the risky situation, but also I am a little bit tired of making myself fitted to the uncomfortable surroundings caused by the newly created relationship. I like a person who already has a familiar stuffs that I had had. Catholic culture, or willingness to accept the culture is the only one that I limit at this point, but there could be more things going along the way. I know it is not a perfect, not an ideal, not a desired thing for a relationship, but I am the one who I am like that. I became the one.

I asked her.

How about your own life? Has it been the similar with those you think?

And she replied.

It has been. I usually did.

She said she was trying to fix the differences while she dated with me. And she pointed out that I did not try as much as she did. We were so different. I thought that it should be impossible to get married with her, because of the differences that I was never able to make a reliable solution for the long term. I thought. But she tried. She tried to do something that she might think that it would work. It did not work, not only because her idea might be wrong, but also because I did not actively follow her solution. Now she turns to 31 this year, and has one more year to graduate and get doctoral degree in economics. We became friends, but were never recovered from the suture that we made.

So, we did not make any conclusion during the short time of the dinner last night. We just turned to the other topics, such as a new young girlfriend of S, or how boring the C’s class is, or so. Then, we went to my house, took my car, and went to Staples to buy some useless small supplies to make ourselves feel escaped from the school things. I then headed to her apartment, and made her got off. She said thanks and bye, and went to her place. I drove back to my apartment with some supplies, listening to some music that I usually play when I drive in evening or late night.

In a relationship, seeing each other is a process of making our own lens and decide what we want to see. We could decide the place where we stand, direction we are going to focus, composition of the frame when we put a shutter, and so on. The object is sometimes distorted, exaggerated, or even disappeared. I do not have any guilty on it. And I do not hope that I can make the person be the one whom I had longed for since I meet anyone in any situation. I do not have an ability to do so, and I believe it is not the right thing. At this moment, the only thing I have in my mind is that, I am ready to be the one who will try to understand the person whom I will meet in any time in my life, and accept any suggestion that the person will give me to make a situation better, to more positive way.

RIP: 테오 앙겔로풀로스

<안개속의 풍경> 은 중학교 시절에 처음 보았다. 무슨 생각에서 그 비디오테잎을 덥썩 짚었는지 모르겠다. 당시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유럽 영화나 미국 독립 영화를 빌려 보기 시작했는데, 이 영화는 단지 영화로서 기억속에 존재하는 차원을 넘어서서 이후 내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 그런 영화들중 하나다. (친구와 “야한 영화” 를 보겠답시고 <하몽 하몽> 을 빌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 이후 다시 한번 도전한답시고 <라스베가스를 떠나며> 를 빌렸고, 이 두 영화가 내 영화 취향의 근간을 형성하는 데에 선구자적인 역할을 했다)

맞다. 열세살, 열네살짜리 꼬마 아이가 <안개속의 풍경> 을 보고 대체 무엇을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분명히 (“definitely maybe”..) 아무 것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화를 처음 볼 당시 그 느낌만은 지금까지도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그 느낌이 더 깊은 이해로 인해 변질되는 것이 싫어 성인이 된 이후에도 이 영화를 다시 볼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강렬한 느낌이었다. 너무나 먹먹해진 가슴이 당시의 내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부풀어 올랐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이 가련한 남매의 삶을 내가 감당할 수 없었을 수도 있고, 이 영화가 가지고 있는 ‘힘’ 의 근원이 무엇인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그것을 느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이후 나의 꿈속에서, 나의 순간 순간의 무의식 속에서 이 영화의 마지막 장면은 가끔씩 되살아 났다. 그리고 그 장면이 주는 막연한 인상은 지금까지도 사라지지 않고 나의 한 구석에 자리잡고 있다. 그것이 내 삶에 어떻게 영향을 주고 있는지 언어로써 표현하는 것은 나의 능력 밖인 것 같다. 하지만 그 존재만큼은 확실히 이야기할 수 있다. 그런 영화들이 내 인생에 몇 있다.  <하나 그리고 둘> 에서 버스의 창밖으로 비친 타이페이의 거리, <빨간 풍선> 이 쓰다듬으며 지나갔던 빠리의 낡은 건물의 벽들, <미션> 의 마지막 장면에서 드니로가 보여주었던 눈빛, <비밀과 거짓말> 에서 두 여자가 서로를 마주볼 때 우러나오던 따뜻한 기운, <피아니스트> 에서 무심한 표정으로 칼을 가슴팍에 푹 질러 넣었던 이자벨 위페르. 등등등.

나는 그래서 영화에 항상 감사할 수 밖에 없다.

그런 영화를 만든 앙겔로풀로스가 오늘 소천했다. 77세의 그는 영화를 찍는 도중 교통사고를 당했다고 한다. 비극적인 그의 죽음 앞에 그저 고맙다는 말밖에 할 수 없는 나의 무능함이 미워지는 밤이다.


늘 온 힘을 다하는…
고양이처럼 매순간 진지하고…
한결 같으면서…
그른 일을 할 줄 모르고.
그렇다고 고지식하나… 하면 그렇지도 않고.
아니, 오히려 귀여운 구석이 있는데…
온통 귀여운 구석뿐일지도…

자기보다도 남의…
남의 행복을 먼저 빌어주는…
고운 성품을 가진 사람.

나도 너처럼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생각했지, 오츠.


다케히코 이노우에, 배가본드 33권 중.

Andrew Porter: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Andrew Porter, The Theory of Light and Matter, New York, NY: Vintage Books, 2008.

“Andrew Porter’s fiction is thoughtful, lucid, and highly controlled… He has the kind of voice one can accept as universal – honest and grave, with transparency as its adornment.”

– Marilynne Robinson

내가 좋아하는 여성 작가 매릴린 로빈슨의 추천사가 적혀 있는 표지. 먹먹한 파란 하늘 아래 외롭게 솟아나 – 아니 그냥 ‘걸쳐’ – 있는, 미국 교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집들의 지붕이 있는 그 표지에 반해서 샀다. 사실 더 솔직히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어느 블로그 지인분이 쓴 포스트를 통해 이 책을 처음 알게 되었다. 그리고나서 찾아본 미국판 표지의 그 먹먹한 느낌에서, 아, 이건 읽어야 겠다, 라고 마음을 먹었고, 다음날 내가 좋아하는 로컬 서점에 가서 냉큼 골랐다. 마침 딱 한권 남아 있어서 더 소중하게 집어 들 수 있었다.

총 열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다. 각 단편의 화자는 모두 ‘나’ 이다. ‘내’가 경험한, 현재의 ‘내’가 기억하는, ‘나’의 주변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필라델피아, 혹은 휴스턴, 아니 그도 아니면 코네티컷의 어느 도시의 교외 지역에 위치한, 모두 똑같은 모습을 하고 있는 집들 속에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지역성이 강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아니다. 그 어디쯤에 있을 법한, 아주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이야기들이다. 그러니까 시의성이 강하게 느껴지는 것도 아니다. 각 단편의 이야기들은 화자가 자신의 기억을 회상하는 방식으로 기술되고 있지만,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대, 혹은 이야기가 말하여 지는 시대가 딱히 중요한 것은 아니다. 한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내가 살았던 그 어디쯤, 내가 살았던 그 어느 시절쯤에 벌어졌던, 나의 주변에 있었던 그 누군가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하나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를 바라보는 ‘나’의 관찰자적인 시선이 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투영하는 또다른 이야기가 있다. ‘나’ 는 그 두 이야기속에 직접 섞여 들어가기도 하고, 철저히 관조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기만 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무언가 조용히 드러난다. 소리 없이 드러나는 그 무엇은 내가 살면서 수없이 느꼈지만 또 무심코 지나쳐 버린 달콤하면서도 씁슬한 감정의 파편들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얼굴이 붉어질 정도로 부끄럽지만, 그렇다고 기억에서 지워지지도 않는, 부딪혀 이겨낼 수 없어서 늘 피해 왔지만 결코 나의 삶에서 떨어져 나갈 수 없는, 아니 나를 오히려 지금의 나를 만든, 그런 감정의 기억들이 있다.

맨홀에 빠진 친구의 죽음을 회상하는 젊은 ‘내’가 있다. 그는 자신이 친구를 죽음에 빠트렸는지, 혹은 단지 우발적인 사고에 의한 죽음인지에 대한 기억을 고의적으로 뭉그려트린다. 그렇게 해서라도 친구의 죽음에서 빠져나오고 싶은 것이었을 게다. 늙은 교수와의 사적인 대화를 회상하는 한 여인이 있다. 젊고 잘나가는 남자친구가 있었던 그녀는 죽음을 앞둔 이혼한 노교수의 낡은 아파트에 초대받아 대화를 나누는 것이 유일한 행복이었다. 남자친구와의 결혼을 확신하면서도 노교수의 사랑에 갈구하던 젊고 어린 그녀는 결국 완전히 상반되는 두가지 사랑을 모두 가질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닫는다. 병든 아버지의 부재속에 동성애에 눈뜬 어머니를 둔 13세 소년의 이야기도 있다. 그는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야 당시 어머니가 느꼈던 깊은 외로움과 그 고독을 유일하게 이해해주고 위로해준 이웃 아주머니와의 사랑을 이해하게 된다.

모두가 외롭고, 모두가 힘들고 슬프다. 하지만 그런 우리의 옆에는 가족이 있다. 좋든 싫든 함께 살아야 하는 가족말이다. 그리고 그 가족 주위에는 이웃이 있다. 좋든 싫든 지근 거리에서 관계를 주고 받아야 하는 이웃들 말이다. 이들과의 관계는 우리의 외로움을 위로해 줄 수도 있고, 증폭시킬 수도 있다. 한쪽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것이 인생이니까 당연한 일이다. 그리고 그 와중에 삶은 흘러간다. 주욱 주욱 잘도 흘러간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고, 기억이 만들어 진다. 현재에 다다른 우리는 그 기억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 기억은 뒤틀리고 엉망진창이 될 수도 있지만, 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좋은 거울이 되기도 한다. 흘러가버린 과거의 기억들에 대한 이야기는 딱히 격정적이 될 이유가 없다. 그냥 그랬다고, 내가 그때 그랬다고, 그때는 참 그랬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면 그만이다. 이 책은 그런 이야기들의 모음집이다.

앤드루 포터에게서 레이먼드 카버를 보았다. 역시 카버를 읽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에 발간되어 있는 이 책을 한국에 사는 한 사람에게 추천했다. 추천할 당시에는 열편중 두세개의 단편만을 막 읽었을 뿐이었다. 왠지 그 사람이 이 책을 읽으면서 나를 더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막연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도 착각이었을 것이다. 이 책은 내가 그런 생각을 했던 것처럼, 다른 많은 이들에게도 자신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단지 나만이 이 책을 통해 나를 볼 수 있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먼 하늘 별빛처럼 고요히 시간 속에서 빛나는 너
오늘도 말 한마디 못한 채 안녕 혼자서 되뇌인다

나 아무리 원해도 넌 도무지 닿을 수 없이
갈수록 멀어지는 알 수 없는 나의 별

움켜진 틈 사이로 흐르는 너는 모래처럼 스르륵
비슬거리는 이마음은 마른 잎 되어 구른다

나 이렇게 너를 원해도 너에게 닿을 수 없어
갈수록 멀어지는 알 수 없는 나의 별

오늘도 말 한마디 못한 채 니 옆에 떠 있는 날 기억해
기늘게 솟아오는 눈썹달 이렇게 여윈 나를 기억해


생각이 많아지면 잠을 이루지 못하는 성격이다. 풀리지 않는 감정이 남아 있다면 새벽이 지나고 아침이 다시 찾아올 때까지 반복적으로 스스로를 자책한다. 그렇게 해서 해결되는 문제가 아님에도 그런 식으로 대처해버린다. 스스로에게 규정한 몇가지 삶의 규칙들이 그렇게 만들어 버린 것 같다. 남 탓을 하면 안된다, 거짓말을 하면 안된다, 억울해 해서도 안된다, 실수를 해서는 안된다, 항상 좋은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한다, 같은.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것들의 가짓수가 늘어날 수록 내부적으로 쌓이는 스트레스의 강도또한 높아지기 마련이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나의 삶은 점점 더 완벽에 더 가까워지고 있다. 정말 완벽한 삶을 사는 다른 누군가가 본다면 하번 피식 웃고 지나가겠지만, 내가 가진 한계와 나의 그릇을 생각하면 나는 그 상태를 완벽이라고 표현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최소한의 방향성만을 따져본다면 그러한 확신은 더더욱 굳건해진다. 나는 내가 가진 것과 가질 수 있는 것을 다 챙기지 못하는 미련함을 줄여나가는 방향으로 살아 왔다. 그렇기 때문에 원래 내가 가진 그릇의 크기에 만족할 줄 아는 법과 남들이 가진 – 내가 갖지 못한 – 재능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는 법을 동시에 배워야 했다. 어리석음을 줄여 나가는 과정은 현명함을 얻어 나가는 과정보다 훨씬 더디고 재미도 덜하다. 남들보다 뒤쳐져 출발하는 과정을 반복해야만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노력을 해야 비슷한 결과를 얻을 수 있음에 감사해야 한다. 딱히 재미있는 인생은 아닌 셈이다.

이번 겨울 방학에 괜히 이소라의 6집이 다시 듣고 싶어졌더랬다. 내가 아는 어떤이는 이소라의 6집을 들으면 가슴 한켠에 억누르고 있던 어두운 감정이 증폭된다고도 하던데, 나같은 경우에는 들으면서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편이다. 과거를 차분하게 회상하게 만들어 주는 일기장의 촉감같은 역할을 해주는 것 같다.

과거는 잊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현재와 미래를 가로 막아서도 안된다. 나는 아직 준비가 덜 된 것 같다.

Rupert Wyatt: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할리우드 영화들은 거의 모든 장면들이 낭비이고 과잉이라 매 씬마다 집중해야 할 필요성을 거의 못느끼는 편인데, 이 영화는 눈을 크게 뜬 채 손에 땀을 쥐고 봤다. 이야기의 얼개가 잘 짜여져 있을 뿐 아니라 인간보다 더 인간적인 원숭이들의 행동과 표정에 집중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컴퓨터 그래픽으로 다시 태어난 원숭이들 행성의 진화의 시작에 관한 이야기. 시저라는 영웅이 만들어 내는 대서사시. 컴퓨터 그래픽을 통해 이정도로 인물의 감정선을 잘 잡아낼 수 있다면, 제임스 프랑코같은 실사 배우들이 굳이 등장해야 할 필요성도 못느끼겠다.  할리우드의 거대 자본이 훌륭한 시나리오와 제작진을 만날 때 발현될 수 있는 미덕의 거의 대부분을 가지고 있는 영화다. 아아 시저!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모니카 마론, 슬픈 짐승, 문학동네, 2010.

한 여자가 있다. 남편과 딸아이를 두고 가정을 꾸리며 고고학자였던 그녀는 치명적인 사고 이후 자신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가 사랑임을 깨닫고 한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한다. 그 남자를 사랑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가지고 있던 다른 모든 가치들은 의미를 상실한다. 남편과 딸은 자연스럽게 그녀의 인생에서 사라졌고, 직장 생활은 무의미해졌으며, 그녀의 모든 시간은 사랑하는 남자를 만나는 시간과 그 남자를 기다리는 시간으로 정의된다. 그 남자는 아내가 있고, 그 아내를 포기하지 않는다. 여자는 그 남자과 그 남자의 아내에게 집착하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사랑 의외의 모든 가치들을 부정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남자는 떠난다. 여자는 오로지 남자가 다시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몇십년의 시간을 무의미하게 보낸다. 그녀는 자신이 사랑했던 남자의 이름조차 잊어 버릴 정도로 세상을 등졌지만, 그 남자의 채취, 촉감, 말투, 두고 간 안경까지,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에게 중요한 것은 그 남자를 사랑하는 자신의 마음뿐이었기 때문에 그 남자의 이름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 여자는 미친 것일까. 그렇다. 그녀가 사고 이후 조금씩 미쳐가고 있다는 징후는 소설의 곳곳에서 드러난다. 친구들의 증언을 통해, 혹은 그녀의 희미한 (아마도 상당히 왜곡되어 있는 듯한) 기억들을 통해 그녀가 분명 정상적인 삶을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이 미쳤다는 사실이 별로 중요하지 않다.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다만 그녀는 한 남자를 열렬히 사랑했을 뿐이다. 때문에 그녀는 미치지 않았기도 하다. 단지 사랑에 너무 많은 집착을 보였을 뿐이다. 미셸 푸코의 <광기의 역사> 와 <감시와 처벌> 을 잠시 빌려 오면 조금 더 편하게 이 소설을 이해할 수 있다. 사람이 미쳤다는 것은, 어떤 절대적인 기준에 의해 정의되어지는 것이 아니다. 광기라는 하나의 현상은 단지 한 사회가 역사적으로 축적해온 처벌의 기제중 하나일 뿐이다. 즉 그녀 자신이 자신의 삶을 스스로 지탱해 나갈 수만 있다면 그녀를 굳이 미쳤다고 말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녀는 자신의 나이 조차 잊어 버렸고 글씨를 읽을 수 없을 정도로 눈이 망가졌지만, 스스로 은행 창구에 가서 돈을 인출할 수 있고 장을 스스로 보면서 삶을 이어 나갈 수 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어떤 상상들이 펼쳐지건 간에, 그녀는 하나의 인간이 가지고 있는 존엄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이다. 때문에 미치지 않았다. 그녀는 스스로를 “짐승” 에 비유하지만, 그건 스스로를 인간 이하의 수준으로 격하시킴으로써 스스로가 저지른 일들에 대한 당위성을 획득하기 위한 레토릭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짐승들은 그녀처럼 살지 않기 때문이다. 인간이 짐승이라는 대상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를 교묘하게 활용한 것일뿐. 그녀는 여전히 인간의 삶을 살고 있고, 때문에 인간 사회의 기준에 의해 스스로를 판단해야 할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다른 한편, 광기가 “왜” 사회에 의해 규제되어지고 판단되어졌는지를 생각하면 그녀는 미쳤을 수도 있다. 다시 한번 푸코에게 의지해 보면, 정신병원과 감옥은 평균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을 평균에서 가까운 사람로부터 격리시킨다는 점에서 본질적으로 같다. 왜냐하면 평균에서 가까운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친” 사람들로부터 피해를 당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개개인의 생각이 모여 하나의 사회적 기제를 만들면 그것이 권력으로 작용하고, 그 권력은 다시 하나의 개인을 처벌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한다. 이 소설의 주인공이 세상과 등지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는 그녀가 사랑한 남자가 더이상 그녀의 집을 찾지 않기 시작하면서 부터다. 그리고 그 남자가 떠나간 결정적인 이유는, 그녀가 남자의 아내에게 그녀의 존재를 드러냈기 때문이다.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면서부터 그녀와 남자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진다. 그녀는 그 이후 모든 것을 기억과 상상에 의지한다. 철저히 세상으로부터 자신을 감추는 것이다. 일종의 처벌이다. 푸코가 <광기의 역사>에서 지적하는 모든 과정이 이 소설에 드러난다. 여자는 타인의 삶에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미친” 것으로 간주되기 시작한다. 스스로에 의해서건, 타인에 의해서건.

이 소설은 세다. 무척 강하다. 또한 단단하다. 개인의 집착적인 사랑을 독일의 현대사와 연결시키며 사회적인 부분으로까지 확장시킨다. 주인공의 사랑에 집중해서 읽어도 좋고, 그녀가 묘사하는 기억들을 짜맞추는 재미로 읽어도 좋고, 그녀에게 투영되는 독일의 역사를 생각하며 읽어도 좋다. 하나의 소설이 다양한 층위로 읽힌다는 것은 축복이다.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Barry Eichengreen, Globalizing Capital: A History of the International Monetary System, Princeton University Press, Second Edition, 2008.

이 책의 저자 베리 아이켄그린은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 경제학과의 석좌 교수다.  학자가 출간을 목적으로 책을 집필할 때에는 독자층을 미리 상정해 놓기 마련이다. 같은 주제를 다룬다고 해도 전문적인 지식이 없는 일반 대중을 상대로 쓸 것인지 이 책의 저자와 같이 상아탑에 오래 머물러 있는 “동업자”들을 대상으로 쓸 것인지에 따라 책의 성격이 많이 변하게 된다. 아이켄그린은 머리말에서 이 책의 대상 독자층이 “거시 경제학과 국제 경제학 교과서에 등장하는 이론들의 역사적 배경을 알고 싶어하는 경제학을 공부하는 학생들”  이라고 밝히고 있다. 더불어 “국제 금융 시스템의 역사적 변천 과정을 조금 더 깊은 레벨에서 알고 싶어하는 일반 독자층” 도 이 책에서 도움이 될만한 정보들을 얻어가기를 “희망” 한다고도 말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책이 목적하고자 하는 바는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변화하고 발전했는지 그 과정을 역사적으로 간략하게 밝히고자 하는 것이고, 이 책의 대상 독자들에 일반 대중들도 포함되므로 수학적인 수식이나 엄밀한 증명같은 것은 등장하지 않는다고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아무런 경제학적 배경 지식없이 도전할 만큼 호락호락한 책은 아니다.  저자는 19세기 말 등장한 금본위제도부터 2000년대 전세계를 강타한 금융위기까지 약 130여년간의 국제 금융 시스템이 어떻게 구성되거나 무너져 갔는지 각 시대별로 간략하게 정리하고 있는데, 단순히 역사적 사실들만을 나열하고 기록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들에 대한 경제학적 해석까지 곁들이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미덕, 혹은 관련 학계에 기여하는 바는 전적으로 후자의 ‘해설’이 제공하는 경제학적 통찰력에 기반하고 있고, 때문에 거시경제학과 국제 무역, 국제 금융에 대한 학부 수준의 지식은 있어야 이책을 보다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100년이 넘는 현대 국제 금융 시장에 대한 역사를 한권의 책에 담고 있기 때문에 아쉬운 점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다. 먼저 서구 학자들의 책들에서 흔히 느끼는 그런 감정이긴 하지만, 이 책 역시 서구 중심의 서술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국제 무역처럼 국제 금융 시장도 미국-유럽 중심의 서구 사회와 일본-중국 중심의 동양 사회가 하나의 시장으로 통합되어 서로 영향을 주고 받게 되기까지 (1차 세계 대전이 지나서야 일본이 비로소 등장하고, 1970년대 이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한국과 중국등 동아시아 시장에 대한 언급이 간략하게 나마 등장한다) 동양 사회의 금융 시장 발전에 대한 기술이 전혀 없는건 그 중요성과 국제적 위치를 차치하고서라도 너무하는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경제학을 전공하게 만들었던 90년대말 아시아 금융 위기에 대한 서술도 마지막장에 단 몇페이지만으로 성급하게 마무리지어버린다. 둘째, 국제 금융 시장에 집중한 책의 목적때문이겠지만, 국제 금융 정책이 각국의 정치적 입장과 다른 정책들과의 이해 관계에 의해 크게 좌우된다는 점에 기초해 볼때 각 시대에 여러 국가들이 맺고 있던 정치적인 함의들을 단지 외부적인 충격으로 치환해 분석하는 이론적인 한계에 대한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저자는 정치적인 변화가 어떻게 금융 시장에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가에 대해 이 책의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하지만 민주주의라는 대부분의 서구 사회가 가지고 있는 정치적 근간이 경제적으로 올바른 방향을 반드시 제시하지는 않는다는 사실과 1990년대까지 이데올로기의 충돌이 서구 사회 곳곳에서 빈번하게 발생했다는 점을 상기한다면, 경제학적 이론을 약간 포기하더라도 정치/사회학적인 접근에 조금 더 집중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그런 생각을 해봤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에겐 굉장한 책이다. 나는 현시대에 존재하는 경제 주체들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가를 공부하는 학생이지만, 현재에 발현되는 현상들도 일정 부분 분명 통시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마도 사학자인 아버지에게 받은 영향일 것이다) 때문에 이 책이 주는 ‘넓은’ 시선은 내가 보다 큰 그림을 그리게 하는 데에 엄청난 힌트를 가져다 주었다. 이 책에 대한 헌사중 더글라스 어윈이 상찬한 것처럼 “미래의 클래식” 이 될지는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내가 지근거리에 놓고 수시로 펼쳐보게 될 것임은 분명해 보인다.

Apichatpong Weerasethakul: Uncle Boonmee Who can Recall His Past Lives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이라는 어려운 이름을 가진 태국 출신의 젊은 작가가 깐느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듣고 ‘역시.. 이제 받을 때가 됐구나.’ 하고 생각했더랬다. 크게 놀라지는 않았고 고개를 끄덕거리는 정도의 반응. 사실 그가 만든 초기 작품인 <친애하는 당신> 과 <열대병> 도 같은 페스티발에서 상을 받긴 했으니, 깐느는 진작에 이 작가의 재능을 눈치채고 자신들의 적자로 만들어 왔던 것도 같다.

몇년전, <열대병> 과 <징후와 세기> 를 보고 친구 J 와 그의 영화에 대해 잠깐 이야기한 적이 있다.  우리의 결론은 거의 비슷했다. ‘이게 대체 뭐여..’ 하고 영화보는 내내 벙쪄 있다가 순간적인 컷 혹은 씬에서 압도당하는 듯한 경험을 느꼈다고. 내 깜냥으로 그의 영화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영화 언어를 정식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닌, 그냥 대중 관객중 하나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그가 전달하는 그만의 색깔, 혹은 느낌은 인간이기에 본능적으로 거부감없이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그의 영화를 열광적으로 지지하지는 ‘못’하지만, 최소한 그가 깐느에서 그랑프리를 받는 것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고 싶지는 않은 그런 소극적 팬이라고 할 수 있다. 최소한 그는 영화 산업의 변방에서 그만의 언어를 충실히 생산해 내고 있으니까 존재 가치를 인정받을 만한 자격 정도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독특함 이상의 묵직한 무언가가 있다.

<엉클 분미> 는 그의 전작들보다 훨씬 친절하지만, 스케일은 훨씬 더 광활해 졌다. 영화는 더이상 절반쯤에서 툭 잘라져 완전히 다른 이야기를 시작하지 않는다. (그럴뻔 하다가 다시 돌아온다) 또한 상대적으로 많은 대사들은 상당히 직설적인 방법으로 영화의 주제를 전달한다. 영화는 태국의 정글로 대변되는 신비로운 자연과 분미 아저씨와 그의 주변 사람들로 그려지는 병든 인간 사회의 교집합을 찾기 위해 노력한다. 전통 신화와 현실속의 생활들이 교차적으로 편집되는 가운데 둘 사이의 접점은 ‘전생을 볼 수 있는’ 분미 아저씨의 주변에서 환상적으로 도출된다. 분미 아저씨는 죽은 부인의 혼령의 인도를 받아 진정한 사랑을 깨닫고 더이상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게 된다. 그가 자궁과 비슷한 모양을 가진 동굴속에서 죽음을 맞이한 뒤, 그를 돌보던 여동생과 그의 가족들은 한 호텔방에서 텔레비전을 보며 현실의 생활을 지속해 나간다. 전생을 볼 수 있기에 환상적이고 신화적인 자연 세계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던 분미 아저씨는 결국 자연의 품에 안겨 삶을 마치게 되는데, 그러한 분미 아저씨의 삶의 마지막 자락과 영화에서 갑자기 등장하는 못생긴 공주와 잉어의 사랑 이야기는 자연과 인간의 교감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에 대한 감독의 시선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에 더해, 나는 영화 마지막 즈음 분미 아저씨의 독백이 흘러나오는 와중에 등장하는 스틸컷들이 상당히 인상깊었다. 원숭이털을 뒤집어쓴 사람과 군인들이 나오는 몇장의 사진들이 이 영화의 또다른 주제를 함축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인터뷰에서 위라세타쿤 감독은 태국 변방에 사는,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영화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앞서 말한 그 사진들은 원숭이 혼령이 다시 숲속으로 숨어 들어가는 내용과 함께 정치적인 압박에 의해 자유로운 삶을 살지 못하는 태국 사람들에 대한 은유가 아닌가 하고 짐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이렇게 따지면 <엉클 분미>는 그의 영화치고는 상당히 강한 어조로 주제를 말하고 있는 셈인데, 깐느에서 그랑프리를 안겨준 이유도 이러한 선명성때문은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했고.

아무튼 그의 문법은 여전히 어렵다. 하지만 어려우면서도 단순하고 명쾌하기도 하다. 많은 주제들을 담고 있지만, 그 주제들을 표현해 내는 방법은 점점 더 선명해 지는 것 같다. 엄격한 종교 중심 사회인 태국에서 동성애자이자 영화를 만드는 소수자인 감독이 태국의 전통적인 것들에 대해 강한 집착을 보이는 것은 항상 느끼는 인상적인 부분이다. 나는 그의 영화들을 보면 항상 한국에서 굳이 헐리우드적인, 혹은 프랑스적인, 혹은 고다르나 야스지로적인 문법을 따라갈 필요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 한국에서 나올 수 있는 가장 한국적이면서도 세계적인 작품은 어쩌면 한국 내부에서 주제와 소재를 찾아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긴, 이런 생각도 사실 부질없는 이유가 위라세타쿤 역시 시카고의 제도권 교육 아래에서 그의 문법을 완성한 케이스라는 거.


한국에 있는 지인들과 연락을 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도움을 받을 때면 가끔 문명의 이기에 대해 고마움을 느낀다. 돈 한푼 들이지 않고 쓱쓱 문자를 마음껏 주고 받을 수 있다니, 늙은이의 넋두리같지만 “몇년전까지는 상상도 못했던” 일이긴 하다. 낮과 밤이 달라지는 시차때문에 같은 공간에 있다는 느낌까지 받을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한글과 한국어를 통해 감정을 교환한다는 것에 대한 고픔과 그리움, 소중함 따위를 느껴본 사람이라면 소중한 사람과 문자를 주고 받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마트폰을 손에서 꼬옥 쥐고 쓰다듬기를 반복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을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친구들이 몇 있다. 그중 한 무리는 대학교때 활동했던 영자 신문사 동기들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처음 능동적으로 무엇인가를 해보려고 머리를 맞대고 모여 앉았던 친구들이기도 하고, 그 이후에도 계속 삶의 기억들을 현재형으로 나누며 함께 성장한 삶의 동반자들이기도 하다. 어설픈 실수도 서로의 눈앞에서 저질렀고, 변해가는 모습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 보았으며 그 안에서 다양한 갈등과 기쁨, 슬픔 따위의 감정들을 주고 받았다. 조금 더 친하고 덜 친한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모두 나에게는 하나같이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들과 스마트폰의 한 어플리케이션으로 문자를 주고 받기 시작한 건 최근의 일이다. 그 친구들중 특히 나와 더 가까워던 몇몇이 그네들끼리 교환하는 문자에 나를 끼워 넣어 주기 시작한 것이다. 어디서 볼까, 언제쯤 볼래, 같은 사소한 문자들이 왔다 갔다 하는 모습을 지켜 보면서 조금이나마 한국에 대한 향수를 달랠 수 있어 고마웠다. 그러던 와중 며칠 전 새로이 새댁이 된 한 친구를 축하하기 위해 다같이 만난다는 소식을 그 문자를 통해 알게 됐다. 연말정산으로 정신없는 그 새댁 친구를 위해 토요일 오전 이태원에서 만나 브런치를 함께 하자는 등의 정보가 바쁘게 오고 갔다. 그렇게 띠링 띠링하고 울려대던 스마트폰은 어느 순간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그건 아마도 그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입속에 무언가를 집어 넣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스마트폰에 등장하는 익숙한 이름들이나 그들이 던지는 익숙한 말투들을 보며 덩달아 흥분했던 내 마음도 이내 다시 가라 앉았다.

그래서 다시 읽던 책을 마저 읽고 있었는데 다시 몇차레의 알람이 울렸다. 그 친구들중 몇몇이 함께 있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보내준 것이다. 그 사진에는 내가 좋아했던 친구도 있었고, 함께 도서관에서 복학생 냄새를 풍기던 친구도 있었다. 함께 농구를 했던 친구, 포장마차에서 술잔을 함께 기울이던 친구도 거기에 함께 있었다. 반가운 마음이 다시 급하게 요동치면서 전화라도 한통 할까, 와이파이가 잡히는 곳이라면 페이스타임도 할 수 있을텐데, 하고 잠시 생각했다가 이내 그만 두었다.

오늘 저녁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더랬다. (친구들의 만남을 주선하기 위해 스마트폰의 알람음이 한참 바쁘게 요동치고 있을 무렵이었다)  붙잡을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잘 놓아주는 것도 사람이 성장하는 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물리적인 거리를 극복할 수 없다면 언제 무엇을 놓쳐야 하는지 정확하게 인지하고 있어야 그것이 떠나갈 때 마음이 조금은 덜 허전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영어로 쓰인 책을 읽고 영어로 이곳의 사람들과 대화하는 것에 조금씩 더 익숙해 질수록, 한국과의 물리적 거리가 한없이 먼 그 상태로 고정되어 있는 것을 점점 더 크게 실감할 수록, 얘들아 나한테서 멀어지지 말아줘, 하고 떨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것이 점점 더 의미가 없어지는 것 같다는 그런. 그런 저런 생각들을 했더랬다. 그래서 친구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그 서울의 이태원, 토요일 점심과 오후 사이에 있는 그곳으로 전화를 걸 수가 없었더랬다. 나의 토요일 오후는 열두시간 뒤쯤 찾아올 것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