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기 끝.

오늘 기말 고사 하나를 봤다.
보기 전에 생각해 보니 이 시험이 내 대학원 시절 마지막 필기 시험이었다.
기분이 묘하더라.
1년차때부터 수강했던 많은 과목들에 대한 짧은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이제 금요일까지 논문 하나를 제출하면 이번 학기도 끝이다.
그것도 이미 다 써두어서 가벼운 오타 수정 정도만 하면 된다.
앞으로 더이상 들어야 할 과목은 남아 있지 않다.

그렇게 3년 반이 지나 갔다.
졸업이란 것은 당최 오지 않을 것처럼 보였는데, 1년 반밖에 남지 않았다.

오늘 시험을 마친 기념으로 어머니와 오랜만에 길게 통화를 했다.
기말 고사 이야기부터 논문 진행 상황, 공부할 때 언어라는 ‘tool’ 이 갖는 의미, 교수님과의 관계같은 대학원 생활과 깊이 관련된 이야기까지 할 수 있는 것이 너무 좋다.
어머니와 아버지는 대학원 생활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이미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내가 그 지점에 다다르기 전까지는 절대 그것에 대해 말씀하지 않으신다.
내가 그 지점에 다다른 뒤 엄마, 이건 이렇더라구요, 라고 말하면 그때서야 그래, 그건 그렇지, 너도 이제 알았구나, 하고 대답하신다.
미리 말해 봤자 자식이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을 알고 계셔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내가 어렸을 때 너무 많은 것을 미리 알려 주신 것을 자책하신 탓일 수도 있다.
어쨌든 나는 좋다. 내가 나에 대해 그 어떤 것을 말해도 부모님은 다 알고 계시니까.
물론 미국 생활과 관련된 것은 알지 못하신다.
whole foods 가 어떻고, safeway 가 어떻고 하는 것 따위.
하지만 그건 그것대로 또 모르는 상태에서 듣는 것이 더 재미있을 것이다.

겨울 방학은 공식적으로 이번주 금요일부터 시작이다.
알라딘을 통해 미리 주문한 책들은 타이밍도 절묘하게 금요일에 도착할 예정이다.
방학의 첫 주말은 한글로 쓰여진 책을 보며 보내야 겠다.
이번 겨울 방학은 교수님과 함께 하는 다정한 논문 작성 기간으로 정했다. (정해졌다)
뉴욕 여행은 이러 저러한 이유로 인해 취소되었는데, 가서 뵙고 싶은 분들에 대한 생각만 제외하면 그리 많이 아쉽지도 않다.
나는 왠지 동부에서 보고 듣고 먹고 느낄 것들보다 여기에서 내가 써 나갈 것들에 대한 기대치가 더 큰 것 같다.
머릿속에는 생각이 한가득.
하지만 그것과는 상관없이 키보드 자판과 모니터 위로 떠오르는 글씨들을 통해 형상화되는 나의 ‘글’ 은 완전히 다른 흥분감을 불러 일으킨다.
전문적인 글쓰기에 대한 트레이닝을 받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글쓰는 것은 참 어렵고 힘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감내할 만한 가치가 있고, 그만한 재미와 즐거움이 있다.

글을 읽는 것도 재밌고, 쓰는 것도 재밌다. 그것에 비할 수 있는 즐거움을 아직 찾지 못했다.

한가지 궁금한 건,
나는 글쓰는 법을 영어로 배우기 시작했는데,
과연 한국어로도 논문을 쓸 수 있을까?
한국어로 쓰여진 논문은 아직 거의 읽어보지 않았다.
나중에 쓸 일이 있을 것 같은데, 그 때 다시 글쓰는 방법을 배워야 하나.

어쨌든,
나의 일곱번째 학기가 끝났다.

오늘 갑자기 브뤼겔의 그림이 떠올랐다.
아마도 플릿 폭시스의 음악을 들으며 공부를 했기 때문이겠지.


보고 싶은 사람들이 두어명 정도 있다.

5 thoughts on “학기 끝.

  1. 신기하네요. 며칠 전 문득 피테르브뢰헬 그림이 보고 싶어서 그림책을 샀었는데 말이죠. 여기서 보니 괜히 더 반갑고. ㅎㅎ 영어로 논문쓰는 법을 먼저 배우면 한국어로 글을 쓰는 일이 걱정스러울 수도 있는 거군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해보지 않았는데, 생각해보니 그럴 수 있겠다 싶네요. 그렇지만 또 결국 방법을 조금 익혀서 쓰기 시작하면, 모국어의 자유로움이 주는 기쁨을 만끽하게 되지 않을까요? ㅎㅎ

    • 아 브뢰헬이라고 읽는 거였군요 +_+ 하나 배웠습니다. 전 한국어를 까먹지 않기 위해 블로그에 글을 쓰기도 해요. 낙서장에 쓸데없는 글이라고 끄적거리는 것도 언어를 기억하는 데에는 나쁘지 않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거든요. 오히려 미국에 와서 한국어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된 부분도 있어요. 그럴 때에는 참 기분이 좋아요.

    • 진짜로 발음하는걸 들어보지는 못해서 잘은 모르겠어요 그냥 저는 책 제목이.. ㅎㅎ 진중권 책에서는 피터브뤼겔이라고 봤던것도 같고요… 저질 기억력이라 잘은 모르겠네요 ㅎㅎ 그냥 저는 제게 익숙한 이름으로 썼을뿐 :-)

    • 감사합니다 ㅋ 그쵸 겨울에는 해가 너무 빨리 사라져요. 하지만 그 맛이 또 있는 것 같기도 해요. 일찌감치 어둑어둑해졌을때 코 끝으로 느껴지는 차가운 공기가 주는 느낌이 괜찮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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