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nis Villeneuve: Incendies

(스포일러 있습니다)

캐나다 감독 드니 빌눼브의 네번째 영화이자 희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베니스, 선댄스, 토론토등 각종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으며 부산 국제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작은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그을린 사랑>. 원작은 불어로 화재 혹은 방화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게 명사에서 온 건지 동사에서 온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원제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뜻한다면 국내 개봉명은 그 불이 다 꺼진 후에 남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퍽 흥미롭다. 영화는 두시간 내내 활활 타오르다가 마지막 5분동안 그을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본 한국의 수입 배급사 관계자들은 한국 관객들이 그 마지막 5분에 더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궁금하다.

나는 유희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동진이 언급한 이후 언제나 한번 볼까 생각하고 있다가 땡스기빙을 맞아(?) 아이튠즈에서 다운받아 아이패드로 봤다.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두시간동안 집중하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은 디바이스같다. 화면은 작지만 그만큼 화면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별 문제될 것이 없고, 해상도 역시 크게 불만을 가질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영화의 충격적인 반전과 다중 교차 내러티브 방식의 꼼꼼한 구성, 그리고 곳곳에 숨겨 놓은 상징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끈끈하게 얽혀 들어간다. 구성은 상당히 촘촘하고, 초반에 등장한 상징들은 후반에 반전을 두차례 겪으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영화의 오프닝신에 등장하는 분노에 가득찬 한 아이가 비극의 한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나기 10분전까지 눈치챌 수 없다. 영화를 다 본 이후에도 각 장면들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최소한 나쁜 영화는 아닌 것이다. 주제 의식도 그만하면 훌륭한 편이다. -레바논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중동의 한 국가의 종교 분쟁이 평범할 수도 있었을 한 가정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방식은 전달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아프리카의 한 아이가 굶어 죽어가는 사진을 보여주는 쪽이 1년에 몇명의 어린이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지 통계 자료를 통해 보여주는 것보다 모금 방식에서 훨씬 효과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중동의 피비린내나는 참극에 대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충격적인 반전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오이디푸스적인 근친상간 자체를 혐오하는 것에서부터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치였고 그 장치로 인해 한 가정의 비극을 생생히 전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두번에 걸친 반전은 영화의 주제와 완벽히 맞아 들어갔고, 나는 그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역겨워 할 그 부분은 굉장히 올바르게 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봐도 후반으로 갈수록 교차 편집이 기술적으로만 쓰일 뿐 주제 의식과 점점 동떨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건 첫번째 반전 이후부터 도드라져 보인다. 첫번째 반전과 그 이후 이어지는 가빠지는 호흡이 기술적인 결함을 압도해 나가는 형국이다. 엔딩 부분에 다다르니 까지 관객은 잔느-시몽 남매와 시선 및 호흡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게 일종의 면죄부처럼 적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 비극으로까지 한 여성을 끌고 가기 위한 장치들이 너무 작위적이고 인위적이었다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 이 가여운 어머니는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로부터 떨어져 고아원에서 길러지고 그 고아원이 가톨릭계 집단에 의해 테러를 당하자 무슬림 집단으로부터 훈련을 받게 되고, 그 이후 뛰어난 스나이퍼가 되어 공적을 세우지만 체포되는데 또 죽지는 않는다. 하필이면 고물 기술관으로 다시 재창조되어 우연히고 자신의 어머니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으로 보내지게 된다. 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슬림과 사랑하게 되고,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생 운동에 가담한 뒤 암살 계획에 동참하게 되며, 임무를 무리없이 수행한 뒤 15년동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 그곳에서 아들을 만나고, 강간을 당한 뒤 조직에 의해 캐나다로 보내져 고문관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인 쌍둥이와 캐나다에서 공증인으로 삶을 마감한다. 이 쌍둥이 남매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또 우연의 연속이자 비논리성의 연속이다. 공증인은 처음부터 이들을 진실로 인도할 수 있었음에도 이 남매에게 스스로 역사를 찾아 나서기를 강요한다. 남매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서서히 흔적을 발견해 나가게 되지만 이 역시 이들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적적인 확률을 가진 것처럼 적재 적소에 어머니의 흔적을 알려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은 공증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왜 하필 이러한 방법을 통해 쌍둥이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아야만 했고,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람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대체 어머니는 어느 순간 용서를 결심했단 말인가. 수영장에서 아들의 뒤꿈치를 본 이후? 아니면 그 이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 쌍둥히 남매가 어머니를 위해 결국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은 그래서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이거 뭐야, 뭔가 뒤틀린 것 같은데? 하는 불편함이 엔딩 크래딧과 함께 찾아 왔다. 결국 어머니와 그의 첫번째 아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낳은 쌍둥이가 겪어야만 했던 모든 과정들은 감독이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이해 억지로 창조한 것이고 그것들이 구성상의 미덕으로 인해 다행스럽게도 잘 짜여져 있을 뿐, 사실 그 어디에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개연성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희극이 원작인 이 작품은 생각보다 빈틈이 많은 영화다. 그리고 그 빈틈을 치밀한 구성과 충격적인 반전으로 잘 가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나는 불쾌감은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고, 다만 진심을 읽지 못했을 따름이다. 말하려고 하는 주제가 뭔지 잘 알겠고 이리 저리 짜임새도 무척 좋은 것도 잘 알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뚱맞게 “우리 모두 용서하고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 대충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단지 흥미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칸다하르> 를 본 이후 중동 문제를 다룬 그 어떤 영화에도 뜨겁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내부자의 시선인가 외부자의 관찰인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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