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자리

언젠가부터 술 자체를 즐기지도 않고, 많은 이들이 꽤 쿨해 보이는 듯 하게 하는 말처럼 “술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가 좋은거죠” 라는 생각도 그닥 들지 않기 시작했다. 왜 굳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부터 출발한 것 같다. 술에 의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행위는 약간 겁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긴장이 이완된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평소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술에 취해 솔직해 지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식과 위선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공기를 뒤덮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까지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술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를 뒤틀은 후에라야 무언가 더 재미있고, 더 흥미롭고, 더 적극적이고, 더 진실된 상황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겁이 많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를 꼬실 때 함께 술을 마신다던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전 술을 잔뜩 마신다던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춤을 춘다던가, 그동안 쌓여 있던 묵은 감정들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면전에 대고 “그동안 정말 섭섭했습니다 과장님” 류의 대화를 한다던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여러가지에 대해 주장할 수 있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혹은 모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논리적이지 않은 것들도 모두 용납이 되는 그런 상황들. 그런 것들이 딱히 싫다거나 그런 상황들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꼭 술이 필요할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 거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술을 즐기지 않게 되었는데, 술을 멀리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내 자신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다른 쪽으로 겁이 많은 건가?) 나는 내 정신이 똑바른 상태에서 고백하고 싶었고, 내가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내 손가락 끝 하나까지도 모두 온전히 가눌 수 있는 상태에서 데이트하고 싶었다.

술을 즐기지 않게 된 시점부터 아마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에 솔직해 지는 것이 중요하고, 이건 스스로에게 완전히 발가벗겨 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렵고, 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참 싫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이 별 가치가 없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가치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반전이 있다. 거짓말을 통해 잔뜩 부풀어 있던 거품을 제거하는 그 순간부터 진짜 자신의 가치를 차곡 차곡 쌓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오묘한 사실을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다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도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완벽하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였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쪽이 참 좋다.

때문에 술을 마실 때 새롭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욕망같은 것들도 거의 없는 편이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다거나,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거나, 신나게 춤을 추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억눌려진 욕망들을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풀고 싶은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술을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 활동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친구들이 여럿 모이는 자리에는 어련히 술이 따라 붙기 마련이고, 그렇게 ‘업’ 된 분위기 속에서 더 재미있게 놀기도 한다. 나는 그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선선히 따라 주는 것이 그들이나 나나 편하게 느껴지기에 대부분 그렇게 한다. 만약 어떤 누군가가 나와 단 둘이서 술을 먹고 싶어 하고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부분 피하긴 하지만..) 기꺼이 응대해 준다. 다행히 술이 약하지 않은 편이라 상대방이 취하기 전에 먼저 취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하지만 술이라는 음료 자체의 ‘맛’ 을 즐기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술을 마심으로써 얻는 ‘취함’ 이라는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술만이 줄 수 있는 미각쪽에서 오는 쾌감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와인의 향이라던가 목을 넘어갈 때 주는 미묘한 느낌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소주 한잔을 원샷했을 때 입속에서 퍼지는 알콜 냄새도 여러가지 느낌을 환기시켜 준다. 농구 한게임 뒤 마시는 맥주 한 캔의 매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아주 좋은 위스키를 먹었을 때의 느낌도 좋아한다. 칵테일을 즐기지는 않지만 가끔 친구들의 소개로 맛보게 되는 다양한 맛의 칵테일들은 각기 다른 즐거움을 준다.

땡스기빙 브레이크가 지난 금요일에 시작됐고, 지난 이틀동안 두번의 술자리가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대학원 친구들과 펍에서 파티를 했고, 토요일에는 한국인 대학원생들과 근처 한인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한 선배의 집에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금요일 술자리에는 한국 사람이 한명도 오지 않았고, 중국인 친구 한명과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우리 학교 경제학과에는 미국인이 절반, 동양인이 절반 정도다. 같은 경제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아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아니 스스로를 상대 그룹과 구분짓는다. 동양인들중 미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스스로를 동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다. 나를 비롯해 학과 내에 두세명 정도.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끼리, 한국인들을 한국인들끼리 어울린다. 나는 미국인 친구들과 더 친하지만,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양쪽 모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나누는 대화도 완전히 다르고, 술자리 문화도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 초점을 두는 반면, 한국인들은 식탁앞에 안주를 두고 둘러 앉아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집중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 어느 집단도 완전히 솔직해 지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은 지금 술에 취했고,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대화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어할 뿐이다. 딱히 어느 술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지겨운 군대 이야기보다는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맛있는 버거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다가도, 영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는 답답함에 질려 한국말로 조근 조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싶어 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인 이유로 주로 미국인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지만 그들과의 술자리가 최상의 선택인 것은 아니다. 술자리 상대가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가끔 그들이 자신들을 솔직해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솔직함을 강요하는 건 똑같다. 그 과정은 주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은근히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다던가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인 것 같다. 관계가 가까울 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술먹고 다음날 숙취가 걱정될 뿐이고, 술자리에 참석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들을 항상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날 저녁에 읽을 수 있었던 책의 쪽수라던가 볼 수 있었던 스포츠게임의 재미 정도같은 것들.

모르겠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술을 먹지 않고도 항상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금요일 밤 친구들이 나의 이상형이 누구냐고 물어 봤을 때 나의 대답은 스스로에게도 퍽 흥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나에게 잘해주기 보다는 남들에게 잘해주는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 어짜피 나를 좋아한다면 나에게 잘 해주겠지만, (혹은 잘 대해주지 않아도 좋아하는 마음만 안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남들에게 잘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고부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왠지 실패한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냥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싱긋 웃어주고 예의를 확실히 지키는 그런 이미지라고 얼버무렸다. 이 대답이 흥미로웠던 건 10년전 나의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만 잘 해주는 사람” 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뚝뚝하더라도 나에게만은 자상한 그런 사람이 왠지 더 좋아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음을 그날 알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금 생각이 더 좋은 것 같다.

6 thoughts on “술자리

  1. 안녕하세요. ㅎㅎ 다락방님이 여기 알려주셔서 가끔 들어와서 재밌게 봤는데, 술자리에 대한 생각은 저랑 거의 일치하셔서 동질감에 댓글을 남기지 않을 수가 없네요. ㅎㅎㅎ

    저도 술기운을 빌어 무엇을 한다, 라고 하는 것에 대해서 매우 부정적인 편이에요. 물론 세상에는 술기운이라는 게 필요할 수 밖에 없는 사람도 있겠지만, 스스로 그런 사람이 되는 건 저 역시 용납할 수 없을 뿐더러, 그런 스스로를 마주하고 싶지도 않아서 딱 취하기 전까지만 마셔요. (그게 맥주 한캔에서 최대 두캔이라는 건 참 슬픈 현실 ㅜㅜ) 술자리를 좋아한다는 건 그 자리에 술이 있기 때문이라기보다는 그냥 그 사람들과 만나서 자연스레 하는 일이 술을 마시는 일이기 때문인 것 같고요.

    대신 전 우울하거나 화가날 때 맥주를 마시는 걸 좋아해요. 사실은 그 때 마시는 술 그 자체보다는 ‘에잇, 술이나 마시자’ 라고 말하는 것 자체가 좋달까요. 이런 말은 좀 웃기죠. 그리고 술을 마시면 기분이 좋아진다기보다는 (그렇게 몽롱한 상태에서 좋아진 기분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고) 그냥 씁쓸한 게 내 속으로 들어간다는 자체가 좋은 것 같아요. 그리고 이상하게도 맥주는 겨울에 더 맛있다는 걸 얼마 전에 깨달았아요. ㅎㅎ 여름이 되면 이 믿음을 배교할지도 모르지만. ㅎㅎ

    암튼 글 재밌게 잘 읽고, 이 재밌는 글에 왜 댓글이 없나 의아해하면서 첫 댓글 남깁니다. 언젠가 술에 대한 생각을 저도 좀 정리해서 남겨보고 싶은데, 이렇게 명로하고 재미있게 쓸 자신은 없네요. ㅎㅎ 이제 인사했으니 종종 댓글 남길게요. ㅎㅎㅎ

    • 반갑습니다. 정식으로 인사를 드리게 되어서 기분이 무척 좋아요. 댓글이 없는 이유는 이 블로그를 찾는 분들이 별로 안계시고, 그분들마저 굉장히 수줍음을 많이 타시기 때문이라고 답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ㅋ

      겨울에 맥주가 맛있다는 이야기에 귀가 솔깃해 지네요. 사실 맥주를 마시면서 어울리는 계절을 생각해 본 적이 없거든요. 맥주는 땡길 때와 땡기지 않을 때가 명확히 구분되는 술 같아요.

      자주 찾아 뵐게요. 다시 한번 반갑습니다.

  2. 종혁씨는 확실히 그동안 내가 만나왔던 사람들과는 꽤 다른 면을 가지고 있어요. 내가 그동안 생각해왔던 ‘정도의 수순’을 종혁씨는 그대로 밟아나가는, 그런 사람인 것 같아요. 바람직한 청년의 느낌이랄까.
    나는 ‘술기운을 빌어’ 고백할 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고 또 이해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술기운의 고백을 즐겁고 기꺼이 받아들이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정말 내게 하고 싶은 말이었다면 그것은 술기운을 빌어서 할게 아니라 맨 정신에도 할 수 있어야 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거든요. 물론, 나 역시 그렇구요. 가장 손쉽게 사랑 고백을 예로 들자면, 나는 누군가에게 사랑 고백을 할 때 혹은 들을 때, 알코올이 전혀 들어가지 않은 상황이기를 원해요. 그때만큼은 다른것의 힘을 빌지 않기를 원하죠.
    내가 나 자신을 콘트롤 할 수 없는 걸 싫어하는 건 나도 같은데, 나는 그런데 그것이 ‘술’에서 나타나지 않고 ‘약’에서 나타나요. 나는 약이란걸 먹고 그것이 내 몸에서 일으키는 작용들이 두렵고 무서워요. 그것을 내가 통제할 수 없을것 같거든요. 그러나 술이라면 얘기가 달라지죠. 나는 이 정도의 선에서 그만 마셔야 취하지 않는다, 혹은 필름이 끊기지 않는다를 알 수 있으니까요. 물론, 이것도 빨리 마시면 그 선을 짐작하지 못해 계단에서 구르기도 하는등의 낭패를 보이지만.
    술은, 나는 다른 이유로 좋아해요. 모두가 싫어하는 그 ‘취기’를 나는 즐겨요. 나는 술이 들어가서 내 온 몸이 뜨거워지고 열이 나고 몽롱해지는 그 상황이 좋아요.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확실히 유쾌해져요.
    전 종혁씨의 포스팅을 읽으니 나는 결코 종혁씨가 좋아할 만한 여자는 될 수 없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슬퍼요. ㅎㅎㅎㅎㅎ
    전 해야 할 말들은 술을 마시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게 좋고, 그러나 같이 술을 마시면서 서로의 잔을 채워주기도 하고 혹은 자신의 잔을 자신이 따라도 전혀 상대에게 부담도 미안함도 주지 않을 수 있는 그런 남자와의 술자리가 좋아요. 남자와 술이 함께하면 성인 여자로서는 꽤 극도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쾌락의 끝이랄까요.

    • 다락방님은 제가 가끔 언급하는 ‘좋아하는 여자에 대한 기준’ 을 파괴시켜 버리는 수준에 계시죠. 때문에 일희일비하실 필요 없어요 ㅋ

      다락방님은 글뿐만이 아니라 댓글에서도 끈적함이 느껴지는군요 +_+ 좋아합니다.. 저도 얼마전까지 말씀하신 그 취기를 좋아하는 편이었는데요, 이제는 확실히 늙었는지 (죄송합니다) 이 취기와 세트로 항상 함께 딸려 오는 다음날의 숙취를 먼저 걱정하게 되더라구요. 술을 마신 뒤 다음날 겪게 되는 비생산적인 반나절에 대한 두려움이 점점 커진달까요.

  3. 홍상수 감독 ‘생활의 발견’에서
    예지원 케릭이 ‘전 술 맛으로 마셔요’ 했던 대사가 생각 나네요.

    좀 콘트롤 프릭이신듯 (죄송)
    좀 흐트러져도 좋은듯 (술로 ‘엉키는’ 문화는 저도 싫어욧 ㅎㅎ)

    • 맞아요 자기 절제에 취미를 붙였다가 중독이 된 경우죠 ㅋ
      술먹고 흐트러지는 경우 종종 있습니다. 스스로에게 대단한 익스큐즈를 주는 듯 생각하지만 남들이 볼때는 그저 술에 취한 하루에 불과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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