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meron Crowe: Pearl Jam 20

내가 친구 J 와 친해지고 싶어서 레코드샵에서 오천원짜리 테이프를 사기 시작한 때가 1995년, 그러니까 내가 중학교 1학년때부터다.  커트 코베인이 자살한 것은 내가 국민학교 6학년에 재학하던 1994년 4월이었고, 그날 배철수 아저씨는 침통한 목소리로 두시간동안 코베인 추모 특집 방송을 했다. 펄잼은 내가 스키드 로우와 너바나를 배운 뒤 핫뮤직 등의 잡지에서 “명반 50선” 따위의 쓸데없는 짓을 할 때 항상 등장하던 <Vitalogy> 앨범을 사기로 결심하면서 부터 알게 됐다. 아마도 1995년, 혹은 1996년일 것이다. 이 후 이들은 한 때 너바나보다 더 사랑하는 밴드가 되었으며, J 와 쉬는 시간마다 떠는 수다에서 “살아 남은 펄 잼이냐 죽어서 산화한 너바나냐” 라는 주제로 등장하는 단골 손님이 되기도 했다. <No Code> 앨범을 고등학교 재학중 어느 서늘한 여름날 큰 맘먹고 산 헤드폰으로 듣다가  펑펑 운 적도 있다. <Yield> 앨범까지는 실시간으로 구입했던 것 같지만, <Binaural> 과 <Riot Act> 는 산 기억조차 나지 않는다. 전자는 아마도 고3 기간에 발매되었기 때문에 모르고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고, 후자는 군대가기 직전 한참 연애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에 음악을 거의 듣지 않았으므로 또한 지나쳤을 가능성이 높다. 2006년 발매된 <Pearl Jam> 은 발매한 사실은 인지했으나 평점이 좋지 않은 관계로 패스했다. 그리고 지금 내 아이팟에 있는 이들의 유일한 앨범은 2009년 발매된 <Backspacer> 뿐이다. 그러니까 나는 이들을 1995년 처음 알게 되었고, 그 이전에 발매된 앨범들은 “역사” 로서 되짚어 갔으며, <Yield> 이후에는 단절되었고, 2009년에야 비로소 다시 이들을 듣게 되었지만, 이조차 내가 듣는 다른 음악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비교하여 한정된 예산 제약하에서 신중하게 선택한 앨범에 들어갔을 뿐이다.

아마도 많은 이들이 나와 같은 소역사를 가지고 있을 것 같다. 펄잼과의 관계에 대한 역사 말이다. 나는 이들을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악과 음반속 해설지, 그리고 가끔 음악 잡지에 나오는 기사와 사진으로만 접해 왔다. 그러다가 인터넷이 발달하고 그런지가 미디어에 의해 사형 선고를 당한 뒤 이들에 대한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게 되었을 때 이들은 미디어와 대중의 관심에서 사라졌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이 누리던 독보적인 지위에서 내려와 다른 수많은 밴드들 사이로 숨어 버린 것이다. 자의던 타의던 간에 그들은 더이상 “현존하는 최고의 미국 락밴드” 가 아니었고, 과거의 영광을 팔아 먹는 배나온 아저씨들도 아니었으며, 그렇다고 놀라운 에너지로 창조적인 음악 세계를 이어 나가는 천재 집단도 아니었다. 그들이 2000년대 발표한 앨범들은 상업적으로나 음악적으로나 이전과 같은 성공을 이루지 못했다. 그렇다고 눈살이 찌푸러질 정도로 망가지지도 않았다. 그냥 펄 잼은 그냥 펄 잼의 음악을 했고, 기대에는 못미치지만 걱정보다는 항상 훌륭한 음악을 만들어 냈다. 대체 이들에게는 어떤 일들이 있었던 걸까. 모두가 알고 있는 그들의 처음 10년과, 아무도 관심이 없었던 그들의 나머지 10년. 그 두 시기를 깔끔하게 정리한 다큐멘터리 필름이 나왔다. 그것도 토드 헤인즈과 더불어 음악을 가장 잘 이해하는 미국인 감독으로 알려진 카메론 크로의 손에 의해서.

다큐멘터리는 밴드의 시작부터 현재까지를 골고루 비춘다. 줄거리라고 할 수도 있을 이들의 역사를 열거하는 것은 내가 할 일이 아닌 것 같다. 나는 95년 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행동을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리고 2000년, 이들이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말을 했으며 어떤 곡을 어떤 장소에서 불렀는지 궁금했다. 그리고 그 당시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들과 같은 시간대를 살아 왔지만 한번도 그들을 보지 못했던 나에게 이 다큐멘터리는, “나는 이렇게 살아 왔어. 너는 어떻게 살았니?” 하며 싱긋 웃으며 물어보는 아저씨들의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92년으로 기록된 비디오에서 보이는 근육질의 청년은 이제 후덕한 주름살을 간직한 배나온 아저씨가 되었다. 나는 여드름 팍팍 터지던 십대 중반의 덜자란 아이에서 서른을 막 통과하는 바쁘고 정신없는 청년이 되었다. 나는 그들을 열렬히 좋아하기도 했고, 무심히 지나치기도 했다. 그들을 기억하고 있던 시간에도, 기억하고 있지 않던 시간에도 그들은 그들의 삶을 살았고, 이 다큐멘터리는 그들의 삶이 어떠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영웅적이지도 않지만, 부끄럽지도 않은, 한 때 뮤직씬을 뒤흔들었던 다섯명의 젊은이들이 어떻게 늙어 가는지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다. 반가웠다. 무척 반가웠다. 그리고 올해 혹은 내년 초에 발매될 이들의 새 앨범이 기다려졌다.

사소한 인생 계획 수정

추수감사절 방학을 맞아 게으르게 지내고 있다. 공부는 잠시 때려 치우고 느긋하게 집안에 틀어 박혀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고 있는데, 이 덕분에 학기말에 해야할 일은 쌓여 가고 기말고사 기간에 받게 될 스트레스는 배가되겠지만 중요한 사실 하나를 환기하는 기회를 얻었다: 책읽기과 영화보기의 즐거움. 앞으로 틈날 때마다 책을 읽고 영화를 봐야 겠다고 다짐했다. 늘 해오던 것들이지만, 유학 생활 후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것들이다. 아니, 조금 더 자신에게 솔직해져야 겠다. 뭐냐 하면,

나는 아주 오래 전부터 책을 읽어온 사람도 아니고, 영화를 보아온 사람도 아니다. 일종의 단절기가 몇번 있었다. 중학교 시절 아버지와 어머니의 책장에서 책을 한권씩 빼내어 읽기 시작한 것이 독서 생활의 시작이었고 마침 그 무렵 비디오 가게에서 무심코 고른 <안개속의 풍경> 으로 시작된 유럽 영화에 대한 사랑이 영화 감상 생활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고등학교 3년동안 하루 종일 학교에 갇혀 지내며 책과 영화에서 멀어져 있었고, 그러다가 대학에 들어가면서 다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군대에서 보낸 2년동안 제대로 된 독서 생활과 영화 감상 생활을 할 수 없었고, 제대후 본격적으로 다시 책을 읽고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유학을 와서 정신없는 3년을 보냈고, 그 기간동안 전공과 관련없는 책과 영화는 거의 접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거칠게 말하면 책과 영화에 한해서는 내 인생에서 일종의 공백기가 몇번 존재하는 셈이다. 그 기간동안에 나온 책과 영화는 온전히 구멍으로 남아 있다. 음악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이제 다시 책을 읽을 수 있고 영화를 볼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허락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건 아니다. 사실 그러한 여유는 허락되지 않았을 확률이 높다. 해야할 일은 항상 산더미니까. 문제는 내가 하루에 주어진 24시간을 어떻게 쪼개서 쓰느냐는 것이고, 그 시간 관리에 있어서는 예전보다 지금이 조금 더 나아졌다고 약간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조금 편집증적으로 이야기하면,
나는 하루에 일곱시간 자야 한다. 그 이하로 자면 하루 생활이 헝클어 진다.
밥은 반드시 하루에 세끼를 먹어야 하고, 한 끼를 먹을 때에는 최소한 한시간의 여유가 허락되어야 한다. 단, 점심은 걸어가며 샌드위치를 먹어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잠자고 밥먹는 시간을 제외한 하루 열 네시간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문제인데,
공부와 논문쓰는 시간을 경험적으로 계산해 보면 하루에 여덟시간 내외인 것 같다. 많을 때는 열두시간 정도인데 평균적으로 따지면 그렇게 되는 것 같다.
여섯 시간의 자유 시간이 주어지는데 이중 두 세시간 정도는 이동 시간이나 청소, 설거지, 요리등으로 보낼 확률이 높고,
결국 하루 두세시간 정도의 휴식 시간이 평균적으로 주어지는 것 같다.

하루 두시간, 혹은 세시간의 자유시간동안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유학을 온 이후 나는 대부분의 자유 시간을 스포츠 중계와 신문 혹은 잡지를 읽는 데에 할애한 것 같다. 그러니까 소파에 몸을 던지고 ESPN 을 틀어 놓은 후 이코노미스트지 따위를 읽는 식으로 휴식 시간을 보냈고, 침대에 꽁그리고 누워 아이폰을 만지작거리며 잠이 오기 전까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제목에 적힌 것처럼 사소한 인생 계획 수정은 스포츠 중계 시청 시간을 줄이는 대신 책과 영화에 조금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한다는 거다.
두시간이면 영화를 한 편 볼 수 있다.
두시간이면 영어책은 50~60페이지, 한국어책은 100~150 페이지 정도를 읽을 수 있다.
하루에 두시간씩 책 혹은 영화에 시간을 투자하면 게으르게 관리한다 쳐도 일주일에 영화 두세편, 영어책 한권, 혹은 한국어 책 두세권 정도는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아싸 흥분된다!

물론 인생이 이렇게 계획처럼 흘러가지는 않는다.
하지만 난 계획 세우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일단 내일부터 한번 실천해봐야 겠다.

아침에 학교에 가서 열심히 논문을 마무리하면서 중간에 미사를 보고 여섯시쯤 집으로 돌 아와 저녁을 챙겨 먹은 후 책을 읽다가 잠이 드는 것이 내일의 계획이다. 특이 사항으로는 내일은 절대 티브이를 켜지 않을 것. 랩탑은 학교에 두고 올 것. 읽고 있는 책은 반드시 정해진 분량까지 읽을 것. 그리고 과일을 꼭 챙겨 먹을 것.

Denis Villeneuve: Incendies

(스포일러 있습니다)

캐나다 감독 드니 빌눼브의 네번째 영화이자 희극을 원작으로 한 영화라고 한다. 베니스, 선댄스, 토론토등 각종 영화제에서 화제를 모았으며 부산 국제 영화제에 소개되면서 국내에서도 작은 파장을 일으킨 것으로 알고 있다. 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그을린 사랑>. 원작은 불어로 화재 혹은 방화를 일컫는 단어인데 이게 명사에서 온 건지 동사에서 온 건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원제가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뜻한다면 국내 개봉명은 그 불이 다 꺼진 후에 남는 것을 묘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퍽 흥미롭다. 영화는 두시간 내내 활활 타오르다가 마지막 5분동안 그을린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영화를 본 한국의 수입 배급사 관계자들은 한국 관객들이 그 마지막 5분에 더 집중할 것이라고 생각한 것일까. 궁금하다.

나는 유희열의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한 이동진이 언급한 이후 언제나 한번 볼까 생각하고 있다가 땡스기빙을 맞아(?) 아이튠즈에서 다운받아 아이패드로 봤다. 아이패드로 영화를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데 두시간동안 집중하기에 그리 나쁘지는 않은 디바이스같다. 화면은 작지만 그만큼 화면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니 별 문제될 것이 없고, 해상도 역시 크게 불만을 가질 정도는 아니다. 아무튼,

영화의 충격적인 반전과 다중 교차 내러티브 방식의 꼼꼼한 구성, 그리고 곳곳에 숨겨 놓은 상징들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주제와 끈끈하게 얽혀 들어간다. 구성은 상당히 촘촘하고, 초반에 등장한 상징들은 후반에 반전을 두차례 겪으며 새로운 의미를 부여받는다. 예를 들어 영화의 오프닝신에 등장하는 분노에 가득찬 한 아이가 비극의 한 가운데 있게 될 것이라는 사실은 영화가 끝나기 10분전까지 눈치챌 수 없다. 영화를 다 본 이후에도 각 장면들에 대해 계속 생각해 보게 만든다는 점에서 최소한 나쁜 영화는 아닌 것이다. 주제 의식도 그만하면 훌륭한 편이다. -레바논으로 강력하게 의심되는- 중동의 한 국가의 종교 분쟁이 평범할 수도 있었을 한 가정의 삶을 어떻게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방식은 전달 측면에서 효과적이다. 그러니까 아프리카의 한 아이가 굶어 죽어가는 사진을 보여주는 쪽이 1년에 몇명의 어린이가 아프리카에서 죽어가는지 통계 자료를 통해 보여주는 것보다 모금 방식에서 훨씬 효과적인 것과 같은 이치다. 아마도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은 중동의 피비린내나는 참극에 대해 고개를 절래 절래 흔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영화를 ‘좋은 영화다’ 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충격적인 반전을 차치하고서라도 말이다. 오이디푸스적인 근친상간 자체를 혐오하는 것에서부터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을 시작하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 그건 영화에서 굉장히 중요한 장치였고 그 장치로 인해 한 가정의 비극을 생생히 전달할 수 있었다. 때문에 그 두번에 걸친 반전은 영화의 주제와 완벽히 맞아 들어갔고, 나는 그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마도 역겨워 할 그 부분은 굉장히 올바르게 쓰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영화의 형식적인 측면에서 봐도 후반으로 갈수록 교차 편집이 기술적으로만 쓰일 뿐 주제 의식과 점점 동떨어져 가는 것을 알 수 있는데, 이건 첫번째 반전 이후부터 도드라져 보인다. 첫번째 반전과 그 이후 이어지는 가빠지는 호흡이 기술적인 결함을 압도해 나가는 형국이다. 엔딩 부분에 다다르니 까지 관객은 잔느-시몽 남매와 시선 및 호흡을 같이 하게 되는데 이게 일종의 면죄부처럼 적용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이 부분 역시 짚고 넘어가고 싶지 않다는 것.

이 영화에 대한 비판은 그보다는 오히려 그 비극으로까지 한 여성을 끌고 가기 위한 장치들이 너무 작위적이고 인위적이었다는 데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같다. 수많은 우연들이 겹치고 겹쳐 이 가여운 어머니는 아들에게 강간을 당하게 된다. 아들이 어머니에게로부터 떨어져 고아원에서 길러지고 그 고아원이 가톨릭계 집단에 의해 테러를 당하자 무슬림 집단으로부터 훈련을 받게 되고, 그 이후 뛰어난 스나이퍼가 되어 공적을 세우지만 체포되는데 또 죽지는 않는다. 하필이면 고물 기술관으로 다시 재창조되어 우연히고 자신의 어머니가 수감되어 있는 감옥으로 보내지게 된다. 어머니는 또 어떠한가. 어떤 이유에서인지 무슬림과 사랑하게 되고, 또 어떤 이유에서인지 학생 운동에 가담한 뒤 암살 계획에 동참하게 되며, 임무를 무리없이 수행한 뒤 15년동안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이겨낸다. 그곳에서 아들을 만나고, 강간을 당한 뒤 조직에 의해 캐나다로 보내져 고문관의 자식이자 자신의 자식인 쌍둥이와 캐나다에서 공증인으로 삶을 마감한다. 이 쌍둥이 남매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나가는 과정은 또 우연의 연속이자 비논리성의 연속이다. 공증인은 처음부터 이들을 진실로 인도할 수 있었음에도 이 남매에게 스스로 역사를 찾아 나서기를 강요한다. 남매는 각기 다른 방법으로 서서히 흔적을 발견해 나가게 되지만 이 역시 이들에게 그냥 ‘주어지는’ 것이다. 그것도 아주 기적적인 확률을 가진 것처럼 적재 적소에 어머니의 흔적을 알려주는 사람이 나타나는데, 이 모든 것은 공증인의 도움으로 이루어진다. 왜 하필 이러한 방법을 통해 쌍둥이는 어머니의 과거를 알아야만 했고, 자신들의 아버지이자 형제인 사람에게 어머니의 편지를 전달해야만 했을까. 그리고 대체 어머니는 어느 순간 용서를 결심했단 말인가. 수영장에서 아들의 뒤꿈치를 본 이후? 아니면 그 이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 쌍둥히 남매가 어머니를 위해 결국 비석을 세우고, 그 비석앞에 서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은 그래서 굉장히 어색해 보였다. 이거 뭐야, 뭔가 뒤틀린 것 같은데? 하는 불편함이 엔딩 크래딧과 함께 찾아 왔다. 결국 어머니와 그의 첫번째 아들, 그리고 그 첫번째 아들이 어머니를 통해 낳은 쌍둥이가 겪어야만 했던 모든 과정들은 감독이 주제 의식을 전달하기 이해 억지로 창조한 것이고 그것들이 구성상의 미덕으로 인해 다행스럽게도 잘 짜여져 있을 뿐, 사실 그 어디에도 고개를 끄덕거릴 만한 개연성은 존재하지 않은 것 같다.

희극이 원작인 이 작품은 생각보다 빈틈이 많은 영화다. 그리고 그 빈틈을 치밀한 구성과 충격적인 반전으로 잘 가리고 있다. 이 영화에서 나는 불쾌감은 그리 크게 느끼지 않았고, 다만 진심을 읽지 못했을 따름이다. 말하려고 하는 주제가 뭔지 잘 알겠고 이리 저리 짜임새도 무척 좋은 것도 잘 알겠다. 그리고 마지막에 생뚱맞게 “우리 모두 용서하고 이 사슬을 끊어 버리자” 라고 말하는 것도 그래 대충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에서 단지 흥미를 위해 이 영화를 만든 것은 아닐까 하는 의구심을 지울 수 없었다. 나는 <칸다하르> 를 본 이후 중동 문제를 다룬 그 어떤 영화에도 뜨겁게 반응할 수가 없었다. 단순히 내부자의 시선인가 외부자의 관찰인가의 문제는 아닌 것 같다.

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한국의 소식은 인터넷의 포털 사이트를 통해 접하는 것이 고작인 이 곳에서 최근 발간된 한 소설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 책을 구입하게 된다는 것이 흔한 일은 아니다. 소설을 자주 읽는 편이 아닌 내게는 더더욱 그렇다. 두가지 결정적인 계기가 있었다. 검정치마의 “antifreeze” 가 소설에서 중요하게 쓰인다는 것과 (나중에 알고 보니 릴리 슈슈의 “glide” 도 나오더라)  70년대 후반, 혹은 80년대 초반에 태어난 “젊은이” 들이 자녀가 아닌 부모의 신분으로 소설속에 등장한다는 것. 이 소설과 김애란이라는 젊은 작가의 이름은 내가 들르는 거의 모든 인터넷 공간에서 최소한 한번은 회자되었다. 그러다 논문에 필요한 자료를 구하기 위해 한국의 한 인터넷 서점에서 책을 주문해야 할 일이 생겼고, 배보다 배꼽이 더 큰 배송비가 아까워 전부터 사고 싶었던 책들을 마구 끼워 넣던 중 이 책의 이름이 생각나 함께 주문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나는 이 책을 아주 좋게 읽었다. 단지 유쾌한 버전의 “병원 24시” 라던가 츠지 히토나리의 <사랑을 주세요> 의 한국 버전이라서가 아니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오히려 상투적이라는 표현이 더 알맞을 것이다. 주제에서 오는 무거움과 그것을 떨쳐 내는 긍정의 기운이 오묘하게 섞여 있는 이 소설의 독창성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어쩌면 기술적인 장점이 될 수는 있을 것이다. 나는 이 작가가 진심을 다해 글을 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분 부분 상투적인 표현들과 어쩔 수 없이 전개해야 하는 비소설적인 구성, 예를 들어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오르게 만드는 (이건 대부분의 현대 소설이 가지는 고질적인 병폐라고 할 수 있다) 묘사들이 발견되기는 하지만, 최소한 그러한 단점들이 이 소설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그 무언가를 퇴색시킬 정도는 아니다. 어린 부모와 늙은 자식의 이야기는 덜 자란 부모와 지나치게 성숙한 자식의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작가가 프롤로그에서 밝히고 있듯이 부모를 통해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바라보고 자식을 통해 – 역시 – 자신이 가지 못한 길을 바라보는 마주봄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나는 작가가 아주 섬세한 사람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그는 억지로 상황을 만들어 내는 어리석은 창조주가 아니다. 묘사에 집착해 큰 그림을 보지 못하는 우를 범하지도 않는다. 그는 아마도 자신이 그려내는 한 가족의 담담한 일상을 통해 어떤 ‘선’ 을 보여주고 싶어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인터뷰는 아직 전혀 읽어보지 않았다) 내가 이 소설에서 받은 인상은 일종의 직선같은 것이었다. 비뚤비뚤하게 그어져 있을 수도 있고, 어떤 구간에선 희미하게 표현되어 있을 수도 있지만, 결코 어느 한쪽으로 치우처져 있지 않은 곧은 모습의 선. 그 선은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몸부림치지 않는다. 그냥 주욱 앞을 향해 갈 뿐이다. 그 선에서 무엇을 얻을 것인가. 당장 내일 먹고 살기 힘들어서 받는 고통, 혹은 삶을 더이상 영유할 수 없다는 극한의 슬픔, 그런 것들과는 상관없이 존재하는 어떤 일상이 있다. 거대한 담론속에 함부로 묻혀버릴 성질의 것이 아닌, 사람과 사람이 나누는, 그리고 나누어야만 하는 따뜻함이 있다.

그래서 아예 희망이 없는 존재를 주인공으로 선택했는 지도 모르겠다. 거대한, 장기적인 희망이 없는 상태에서 삶의 작은 부분에 대한 가치를 일깨우는 일은 조금 더 쉬웠을 테니까. 그리고 우리는 우리의 삶속에서 가장 큰 희망, 혹은 가능성을 상실한 그 존재가 영롱하게 빛나는 순간 얼굴이 벌개짐을 느낀다. 최소한 “아, 나보다 안좋은 상황에 있는 사람을 생각하면서 더 열심히, 더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야 겠구나” 같은 기계적인 교훈때문은 아니다. 그건 아주 기술적인 교훈이고 우리가 얻고자 할 때 언제든지 얻을 수 있는, 일종의 소모품과 같은 감동이다. 이 소설은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있다. 그건 아마도 내가 이 소설을 읽으며 최소한 일곱 여덟번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가졌던 생각이기도 한데, 굳이 의미가 통하는 단어를 선택하자면 “마주보다” 정도가 될 것 같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눈을 내리 깔거나 고개를 돌리지 않고 똑바로 응시하며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그런 모습을 이 소설에서 느꼈다.

2011년 6월에 초판 1쇄가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내가 구입한 26쇄는 9월에 찍힌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에 괜한 안도감을 느낀다. 아마도 이 소설이 가지는 트렌디함과 늘어지지 않는 적당한 가벼움, 그리고 극적인 반전이 주는 구성에서의 매력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소설에서 좋은 것을 발견한다. 그것때문에 잘 읽었다, 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알랭 드 보통: 공항에서 일주일을


알랭 드 보통은 수다스럽다. 그는 지구상에서 한정된 조건 혹은 자원을 가지고 가장 많은 문장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존재일 것이다. 사람들은 그런 그의 재능을 좋아한다. 그리고 그들중 일부는 보통이 만들어 내는 맛깔나는 문장들중 대부분이 쓸모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의 글을 계속 읽기 원할 것이다. 그는 가끔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다운 문장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또 때때로 아주 깊은 수준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그가 묘사하는 대부분은 알지 않아도 굳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필요없는 잔가지들이다. 더 흥미로운 점은 특정 사실을 묘사하거나 해석할 때 보다는 그의 머리속에서 만들어 낸 상상의 작용들을 묘사할 때 그의 재능이 더 빛을 발한다는 사실이다. 나는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이후 단 한번도 그의 책에서 특정 수준 이상의 감흥을 느껴보지 못했다. <여행의 기술> 은 무척 지루했고, <우리는 사랑일까> 는 진부했다. <행복의 건축> 은 아직 읽어보지 못했다. 하지만 별로 읽어보고 싶지 않다. 그는 지적으로 늘 자극을 주는 존재라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에게 삶에 유익한 지적인 자극을 받아본 기억은 거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가보다 비싼 운송비를 지불해 가며 그의 에세이 <공항에서 일주일을: 히드로 다이어리> 를 구입한 이유는 (아마 영어로 쓰였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굳이 한국어로 번역된 책을 구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내가 공항을 좋아하기 때문이고,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이야기꾼인 보통의 손끝을 빌려 묘사된 공항의 모습이 무척 궁금했기 때문이다.  어쩌면 앞서 기술한 바 한정된 장소, 대상 혹은 시간에 구속되어 글을 쓰는 데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보통에게 공항만큼 흥미로운 도전도 없었을 것이다. 약간의 수고를 들여 찾아본 여러 블로그들에서도 꽤나 좋은 평을 받기도 했고.

하지만 책의 첫장을 넘기기 전부터 약간의 불쾌함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이 책은 알랭 드 보통이 쓴 글과 리처드 베이커가 찍은 사진이 정확하게 절반씩의 지분을 가진 채 실려 있다. 베이커의 사진은 보통의 글과 유기적으로 얽히며 두페이지당 한페이지씩 공간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의 표지에는 보통의 이름밖에는 없으며, 베이커의 이름은 보통이 쓴 감사의 말에서야 잠깐 등장할 따름이다. 이 책은 명백히 콜라보레이션이다. 누가 주도했든 간에 말이다. 더 놀라운 사실은 보통의 글보다 베이커의 사진이 더 깊은 통찰력을  보여준다는 점이다. 설사 보통이 시키는 대로 사진을 찍었다고 할지라도 베이커의 사진이 주는 울림의 폭은 보통의 건조한 문체보다 더 활발하게 살아있는 편인데, 그 이유는 아마도 우리가 공항에서 받는 거의 대부분의 느낌들이 시각에 의해 전달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공항의 높은 천장에 반사되어 돌아오는 각종 소음들과 친절하지 못한 냄새에도 익숙해져 있지만, 그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살아가는 도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풍경들에 먼저 압도당하기 마련이다. 베이커의 사진은 그 찰나의 순간들을 명민하게 포착해 낸다.

그에 반해 보통의 글은 여전히 수다스럽고 아주 유쾌하며 때때로 고개를 끄덕거리게 만들지만 대부분은 지루하고 장황하다. 그는 일반 승객들이 갈 수 없는 공간에 고개를 들이 밀고 만날 수 없는 사람에게 말을 건넬 수 있는 권한을 일주일동안 부여받았지만, 결국 관찰에 의한 사색이 아닌 관찰에서부터 출발한 상상에 의존한 채 글을 써 내려 간다. 나는 그점이 따분했는데, 또 어떤 이들은 그점에서 보통의 매력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아주 쉽게 읽히는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축복받은 능력이다. 그리고 그 재능을 쓸데없는 곳에 쓴다는 것은 대단히 슬픈 일이다. 보통은 여전히 대단히 좋은 글들을 쓰고 있으며, 소소한 재미를 전달할 수 있는 몇안되는 작가이다. 하지만 나는 보통이 역사에 기록될 만큼의 존재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잘 모르겠다. 이러한 의구심은 그의 책을 한권 한권 더 읽어 나가면서 점점 더 깊어지고 있다.

술자리

언젠가부터 술 자체를 즐기지도 않고, 많은 이들이 꽤 쿨해 보이는 듯 하게 하는 말처럼 “술보다는 사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가 좋은거죠” 라는 생각도 그닥 들지 않기 시작했다. 왜 굳이 술을 마시면서 이야기를 해야 하는가에 대한 의구심부터 출발한 것 같다. 술에 의지해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 행위는 약간 겁이 많은 사람들이 하는 행동처럼 보였다. 긴장이 이완된 상태에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더 잘 나오는 지는 잘 모르겠다. 과학의 영역이니까. 하지만 평소에 솔직하지 못한 사람이 술에 취해 솔직해 지는 모습을 보면 도대체 그동안 얼마나 많은 가식과 위선이 그 사람과 나 사이의 공기를 뒤덮고 있었던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게 까지 멀리 나가지 않더라도 술이라는 비정상적인 방법으로 자신의 육체를 뒤틀은 후에라야 무언가 더 재미있고, 더 흥미롭고, 더 적극적이고, 더 진실된 상황들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 자체가 겁이 많은 사람들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건 한국이나 미국이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여자를 꼬실 때 함께 술을 마신다던가, 좋아하는 여자에게 마음을 고백하기 전 술을 잔뜩 마신다던가, 술에 취해 길거리에서 춤을 춘다던가, 그동안 쌓여 있던 묵은 감정들을 풀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 면전에 대고 “그동안 정말 섭섭했습니다 과장님” 류의 대화를 한다던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조금 더 큰 목소리로 여러가지에 대해 주장할 수 있다던가 하는 그런 것들. 혹은 모두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는 논리적이지 않은 것들도 모두 용납이 되는 그런 상황들. 그런 것들이 딱히 싫다거나 그런 상황들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왜 꼭 술이 필요할까, 하는 궁금증이 드는 거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술을 즐기지 않게 되었는데, 술을 멀리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마 내 자신을 완벽하게 컨트롤할 수 없는 상황에 다다르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따지면 나도 다른 쪽으로 겁이 많은 건가?) 나는 내 정신이 똑바른 상태에서 고백하고 싶었고, 내가 모든 상황을 인지하고 있는 상태에서 상대방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고, 내 손가락 끝 하나까지도 모두 온전히 가눌 수 있는 상태에서 데이트하고 싶었다.

술을 즐기지 않게 된 시점부터 아마 거짓말을 의도적으로 피하기 시작했던 것도 같다. 거짓말은 또 다른 거짓말을 낳는다. 때문에 아예 처음부터 모든 것에 솔직해 지는 것이 중요하고, 이건 스스로에게 완전히 발가벗겨 져야 한다는 것을 뜻한다. 누구나 실패하는 것이 두렵고, 약한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참 싫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 모두는 자신이 별 가치가 없거나 보잘 것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보잘것없음을 인정하는 순간부터 비로소 가치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는 반전이 있다. 거짓말을 통해 잔뜩 부풀어 있던 거품을 제거하는 그 순간부터 진짜 자신의 가치를 차곡 차곡 쌓아 나갈 수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오묘한 사실을 서른이 가까운 나이에 다다르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즈음부터 술이라는 도구를 이용하지 않고도 내가 하고 싶은 모든 것들을 할 수 있게 되었던 것 같다. 물론 그 결과가 항상 좋지는 않았다. 완벽하지 않기에 당연한 결과였고, 나는 그렇게 살아가는 쪽이 참 좋다.

때문에 술을 마실 때 새롭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욕망같은 것들도 거의 없는 편이다.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에게 문자를 보내고 싶다거나, 길거리에서 소리를 지르고 싶다거나, 신나게 춤을 추고 싶다거나 하는 그런 억눌려진 욕망들을 술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풀고 싶은 생각이 거의 들지 않는다. 술을 사람들과 함께 마시는 행위는 일종의 사회 활동이기 때문에 그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친구들이 여럿 모이는 자리에는 어련히 술이 따라 붙기 마련이고, 그렇게 ‘업’ 된 분위기 속에서 더 재미있게 놀기도 한다. 나는 그 분위기를 해치고 싶지 않고, 그들이 원하는 대로 선선히 따라 주는 것이 그들이나 나나 편하게 느껴지기에 대부분 그렇게 한다. 만약 어떤 누군가가 나와 단 둘이서 술을 먹고 싶어 하고 내가 피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 (대부분 피하긴 하지만..) 기꺼이 응대해 준다. 다행히 술이 약하지 않은 편이라 상대방이 취하기 전에 먼저 취한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정신력으로 버티는 측면이 없지 않아 있지만…

하지만 술이라는 음료 자체의 ‘맛’ 을 즐기는 것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는다. 즉 술을 마심으로써 얻는 ‘취함’ 이라는 결과물을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술만이 줄 수 있는 미각쪽에서 오는 쾌감은 분명히 존재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와인의 향이라던가 목을 넘어갈 때 주는 미묘한 느낌은 대단히 매력적이다. 소주 한잔을 원샷했을 때 입속에서 퍼지는 알콜 냄새도 여러가지 느낌을 환기시켜 준다. 농구 한게임 뒤 마시는 맥주 한 캔의 매력도 무시하지 못할 정도다. 아주 좋은 위스키를 먹었을 때의 느낌도 좋아한다. 칵테일을 즐기지는 않지만 가끔 친구들의 소개로 맛보게 되는 다양한 맛의 칵테일들은 각기 다른 즐거움을 준다.

땡스기빙 브레이크가 지난 금요일에 시작됐고, 지난 이틀동안 두번의 술자리가 있었다. 금요일 저녁에는 대학원 친구들과 펍에서 파티를 했고, 토요일에는 한국인 대학원생들과 근처 한인 식당에서 저녁을 먹은 후 한 선배의 집에 모여 새벽까지 술을 마셨다. 금요일 술자리에는 한국 사람이 한명도 오지 않았고, 중국인 친구 한명과 내가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우리 학교 경제학과에는 미국인이 절반, 동양인이 절반 정도다. 같은 경제학과 대학원 박사과정 아래 있는 사람들이지만, 그들은 철저히 구분된다. 아니 스스로를 상대 그룹과 구분짓는다. 동양인들중 미국 문화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스스로를 동화시키려고 노력하는 이들은 극히 소수다. 나를 비롯해 학과 내에 두세명 정도. 중국인들은 중국인들끼리, 한국인들을 한국인들끼리 어울린다. 나는 미국인 친구들과 더 친하지만, 한국인들과 어울리지 않을 수 없다. 양쪽 모두 다리를 걸치고 있는 셈이다. 그들은 나누는 대화도 완전히 다르고, 술자리 문화도 완전히 다르다. 미국인들이 시끄럽게 웃고 떠들며 스트레스를 푸는 데에 초점을 두는 반면, 한국인들은 식탁앞에 안주를 두고 둘러 앉아 공통된 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데에 집중한다. 앞서 말했듯이 그 어느 집단도 완전히 솔직해 지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은 지금 술에 취했고, 그래서 조금 더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다는 것을 대화 상대에게 보여주고 싶어할 뿐이다. 딱히 어느 술자리가 더 좋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끔은 지겨운 군대 이야기보다는 필라델피아에서 가장 맛있는 버거집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 것이 더 좋다가도, 영어를 잘 알아 듣지 못하는 답답함에 질려 한국말로 조근 조근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을 찾고 싶어 지기도 한다. 미국에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인 이유로 주로 미국인들과 술자리에서 어울리지만 그들과의 술자리가 최상의 선택인 것은 아니다. 술자리 상대가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가끔 그들이 자신들을 솔직해 졌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나에게도 그와 비슷한 수준의 솔직함을 강요하는 건 똑같다. 그 과정은 주로 술을 억지로 마시게 하는 행위로 드러난다. 술을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은근히 실망하는 표정을 짓는다던가 하는 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마찬가지인 것 같다. 관계가 가까울 수록 더 심해지는 것 같다. 나는 술먹고 다음날 숙취가 걱정될 뿐이고, 술자리에 참석함으로써 잃게 되는 것들을 항상 생각하게 된다. 예를 들어 그날 저녁에 읽을 수 있었던 책의 쪽수라던가 볼 수 있었던 스포츠게임의 재미 정도같은 것들.

모르겠다. 술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여자를 만나고 싶다. 술을 먹지 않고도 항상 즐겁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그런 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그런데 금요일 밤 친구들이 나의 이상형이 누구냐고 물어 봤을 때 나의 대답은 스스로에게도 퍽 흥미로운 것이었다. 나는 나에게 잘해주기 보다는 남들에게 잘해주는 여자가 좋다고 말했다. 어짜피 나를 좋아한다면 나에게 잘 해주겠지만, (혹은 잘 대해주지 않아도 좋아하는 마음만 안다면 별 문제될 것이 없지만) 남들에게 잘 한다는 건 그 사람의 인격을 드러내 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한국의 고부 갈등에 대한 이야기를 이해시키려고 노력했으나 왠지 실패한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냥 일반적으로 잘 모르는 사람에게도 싱긋 웃어주고 예의를 확실히 지키는 그런 이미지라고 얼버무렸다. 이 대답이 흥미로웠던 건 10년전 나의 생각과 완전히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흔히 “나에게만 잘 해주는 사람” 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다른 사람에게는 무뚝뚝하더라도 나에게만은 자상한 그런 사람이 왠지 더 좋아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지금은 그와는 완전히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음을 그날 알게 됐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지금 생각이 더 좋은 것 같다.

Lykke Li – Wounded Rhymes

꽤 예전에 산 앨범인데 찾아 보니 아직 리뷰를 쓰지 않은 것 같아서..

스웨덴 출신 여성 싱어송라이터 Lykke Li 의 두번째 앨범이다. “Lykke Li” 는 스테이지 이름이고 스웨덴식 본명은 Li Lykke Timotej Zachrisson. 86년생이다. 포토그래퍼인 어머니와 뮤지션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나 스웨덴과 리스본, 모로코, 네팔, 인도등에서 생활했다. 19세가 되서 브루클린에 잠깐 다녀온 뒤 첫번째 앨범 작업을 시작했고, 2007 년에 EP 를 발표한 뒤 2008년 정식으로 첫번째 앨범 <Youth Novels> 를 발표했다. 이후부터는 승승장구. 거침없이 음악활동을 하며 2011년 두번째 앨범을 내 놓았다.

PJ Harvey 와 Lily Allen 사이 어딘가 위치한 듯한 그녀의 음악은 고딕, 드림팝, 매드체스터등의 80년대 감성을 성공적으로 물려 받으면서 2000년대 확고하게 메이저 장르로 자리 잡은 일렉트로닉을 매끈하게 접목시킨다. 현악기등 다양한 악기의 사용은 그녀의 음악을 조금 더 풍성하고 따뜻하게 만들어 준다. 독특한 음색과 그보다 조금 더 독특한 춤사위를 보여주는 그녀는 분명 범상치 않은 정체성을 가지고 있을 것으로 추측되지만, 그렇다고 음악이 마냥 어렵거나 아방가르드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개인적인 이야기를 오밀조밀하게 잘 조립해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접근성이 또래 여성 싱어송라이터들보다 더 크다고 할 수도 있다. 한번 들으면 계속 듣게 되는 중독성이 있다.

coming back to “my” life

최근에 좀 정신없이 바빴다. 이번 학기에는 두 과목을 수강하는데, 한 과목에 대한 중간 고사를 봤고 다른 과목에서 제출해야 할 논문을 오늘까지 제출해야 했다. 한국 나이로 서른살이 되어서도 시험에서 자유롭지 못함에 한탄하며 본 시험은 그럭 저럭. 나도 이제 늙었는지 짧은 시간에 암기력과 창의력을 동시에 발휘해야 하는 시험에는 더이상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더라. 생각보다 못봤다고 생각했는데 자비로운 교수님 덕택에 점수는 잘 나올 것 같다. 논문은 경제사 과목을 위한 거라 내 전공과는 상관없는, 평소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썼다. 평소에 많이 생각해 오던 것이라고 해도 특정 학문 분야에서 요구하는 “언어” 의 “문법” 에 맞춰 써야 하는 것이기 때문에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어려움이 조금 있었다. 그래서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고, 데드라인에 맞추지 못할 것 같아 약간 당황했다. 그래서 급기야 오늘은 평소에 절대 하지 않는, 새벽 여섯시에 일어나 일곱시까지 학교에 가는 만행을 저지르고야 말았다. 아침에 특히 잠이 많은 편인데 일출을 보면서 학교에 가는 기분이 참 새롭더라. 지금까지 이 동네에 3년 넘게 살면서 볼더의 아침 햇살이 그렇게 강렬하고 이쁜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이 매우 부끄러웠다. (논문을 한번 올려 보려고 했는데 안 올라 가네요..;)

중간고사를 본 과목은 일종의 계량 경제학 이론 강의인데, 내가 통계나 계량과는 별로 친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수학가지고 논다는 생각으로 듣고 있다. 경제사는 관심은 많지만 내 전공으로는 삼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학위를 받은 다음에야 본격적으로 건드릴 수 있을 것이다. 지난 몇주동안 내 전공과는 전혀 상관없는 것들에 초집중하며 보내다 보니 쓰다 잠시 멈추어 둔 내 논문이 다시 보고 싶기도 하고, 관련 논문이 읽고 싶어 지기도 하고.. 사람 마음은 이래서 참 간사한 것 같다. 지긋지긋하다고 생각한 때가 얼마전인 것 같은데 또 떨어져 있으니 그립고 그렇다. 마침 이번주 금요일에 UCSC 에서 내 전공 관련 대가 한분이 오셔서 세미나를 하신다. 나는 몇달전 다른 대가를 만나 홍역을 치룬 후로 (내 논문에 대한 조언을 좀 구하고자 찾아 갔으나 별 관심이 없다는 태도로 일관하셔서 마음의 상처를 받음 -_-) 아무리 명성이 높은 대가가 학교를 찾아도 절대 개인적으로는 만나 보지 않으리라 다짐했는데, 내 지도 교수님이 친히 이메일을 보내셔서 “야, 너 꼭 만나야 하는 거 알지? 내가 알아서 약속 잡아 놨으니까 알아서 나와라.” 라고 하시길래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만나야 할 것 같다. 결국 이번 다시 이렇게 자의반 타의반으로 빠른 속도로 내 전공으로 돌아 오게 됐다. 전공으로 돌아간다는 게 뭐 딱히 큰 변화는 아니다. 수강하는 과목에 소홀하지 않으면서 쓰고 있는 논문을 마저 끝내고 관련 논문들을 꾸준히 읽는 것 정도다. 그래도 어쨌든, 세계 경제가 요동치고 국제 금융 시장이 미친 듯이 돌아가는 이 시점에서 더이상 한발 물러난 어정쩡한 자세로 FT 나 읽으면서 리서치 아이디어만 수집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얼른 첫번째 논문 완성하고 교수님 보여 드린 후 두번째 논문으로 넘어 가고 싶다. 두번째 논문은 내년에 졸업하고 한국으로 돌아가실 예정인 동기 형님과 공동 집필할 예정인데 (말이 공동 집필이지 사실상 나를 거두어 주시는 것이다. 경제 연구소에서 7년 이상 계시면서 그쪽 분야에서는 베테랑이 되신 후 미국으로 넘어 오신, 애기들이 셋이나 있는 40대 가장분..) 그 분은 거시 계량쪽이 전공이고 나는 거시 모델링이 주특기이니 둘이 힘을 합쳐 하나 쓰면 뭔가 작품이 나오지 않을까, 하고 혼자 김칫국부터 마시고 있는 중이다.

그냥 요즘내 머릿속이 이런 상태다. 내일 무엇을 해야 할지 그 전날에 이미 계획이 꽉 차 버린다. 무슨 책을 먼저 읽어야 하지, 뭘 어떻게 써야 하지, 자료는 어디서 구할까, 누구를 만나서 자문을 구할까, 학생들은 언제 찾아온다고 했지, 수업 준비는 제대로 했나, 등등등. 이런 상태에서 대체 다른 무엇이 머리에 들어 올까.  그러니까 연애 관련 이슈는 완전히 잦아들었다는 말입니다. 며칠 지내본 결과 내가 아직 연애같은 즐겁고 행복하며 달콤하고 기쁜, 뭐 그런 수식어들이 어울리는 행위를 할만한 정신 상태가 아니라는 결론에 도달했다. 딱히 여자를 만나서 손을 잡고 싶은 생각도 안 들고, 아오 저 입술! 하면서 수작을 걸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아 상대방이 매력적이지 않은 건 절대 아니었다. 친구들 말로는 경제학과 대학원생 중 최고 미모라는데 (하지만, 음.. ) 지금 내 머릿속에서 최고 매력적인 사람은 지금 읽고 있는 책의 저자? 뭐 이런 상황.. 그러니까 대학원 생활 절대 오래 하면 안된다는 짧고도 굵은 결론이 하나 더 나온다. 얼른 학위받고 사람들과 교류도 하고 정상적으로 출퇴근도 할 수 있는 그런 생활을 하고 싶다. 퇴근하고 술도 한잔 먹을 수 있고, 주말에는 일 생각 안하고 막 티비 보면서 쉴 수도 있는 그런 생활.. 과연 내가 할 수 있을까? 영원히 집-학교-집-학교를 반복하며 살아갈 것만 같은 안좋은 예감이 든다.

그래도 하루 종일 공부만 할 수만은 없기에 가끔 딴 짓도 한다. 오늘은 “NEW GIRL” 이라는 FOX 에서 하는 코미디를 봤는데 꽤 재밌었다. 그 유명한, 인디 힙스터들의 여신, 주이 드샤넬이 직접 프로듀싱과 주제가 작곡까지 참여한, 드샤넬이 만드는 드라마라고 할 수 있는데 생각보다 센스가 있는 편인 듯. 되게 이쁘고 매력적인데 엄청 주책맞은 귀엽고 재밌는 아가씨 베스가 남자 세명과 한집에 살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다. 남자들끼리 나누는 대화가 마치 나와 내 오피스 메이트 두명이 나누는 대화와 너무 흡사해서 -_- 그 점도 마음에 들고, 드샤넬이 직접 선곡한다는 배경 음악도 마음에 들고, 무엇보다 나는 눈 큰 여자가 하는 뱅 헤어가 너무 좋은 거다.

그 외.. “Community” 는 세번째 시즌에 오면서 힘이 많이 떨어진 느낌이다. 별로.  “Person of Interest” 는 놀란이 만드는 CBS 드라마인데 (감독 말고 작가 동생..) 놀란식의 스릴러를 잘 버무린 느낌이라 가끔 본다. “Pan Am” 은 60년대 스튜어디스들 이야기인데 오랜만에 크리스티나 리치를 봐서 반가운 마음에 가끔 본다. “하이킥” 은 마음먹고 실기간으로 따라가려고 했는데 생각보다 집중이 안되어서 그냥 보지 않고 있다. “무한 도전” 은 꾸준히 보고 있는데, 예전보다 재미는 확실히 덜해 졌는데 그냥 애정과 감사함으로 무던히 보고 있다.

돈이 없어서 다른 소비 생활은 못하고 있다. 밥먹기도 벅찬데 무슨 사치를 할쏘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