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과의 데이트

오늘 난생 처음 “정식” 으로 미국인과 데이트를 했다. 뭐 술을 마시거나 밤을 같이 보내거나 막 그런건 전혀 아니고 같이 점심 한끼 먹은 게 끝. 서로 일정이 바빠서 금요일 오후에 겨우 짬을 내어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한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었다. 전부터 가보고 싶어 했고, 또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그쪽에 관심도 많은 친구라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꽤 괜찮게 하는 그 식당에 한번쯤 데려가고 싶었다. 요즘 한국 정부의 모 부처에서는 이성간에 (이걸 또 꼭 “이성” 으로 고정하는 센스도 참..) 두번 이상 만나면 정식으로 교제한다고 정의를 내려 버렸던데, 한번 더 만나기 전에 (..) 생각해 볼 것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우선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대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 이건 전적으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내 사정 탓이다. 친한 친구들과 단 둘이 있을 때 느꼈던 긴장감은 이제 많이 해소됐지만, 데이트는 또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두려움을 최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오늘에야 비로소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이 친구를 만나기 시작한 게 한달 조금 넘은 것 같은데 확실히 아리따운 여성분 앞에서 일대일로 대화할 때 조금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 물론 영어는 늘 계단식으로 발전하니까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스스로는 잘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 내가 이정도 수준까지 하네? 하고 갑자기 깨닫게 된다. 오늘 그랬다. 문법은 여전히 엉망이고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여전하지만, 그 데이트에서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맥락” 과 “분위기” 그리고 “유머” 를 적절히 견지할 정도의 수준은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무엇보다 나의 유머는 이제 언어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라고 하는 엄청한 희망을 목도했음. (제가 친해지면 개그가 좀 됩니다)

둘째로 이게 더 중요한 건데, 과연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온 외국인과 과연 친구 이상의 감정을 교류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을까, 라는 의구심에 대한 해소가 어느 수준 이상은 된 것 같다. 물론 약간의 운이 따르긴 했다. 그 친구는 아시아쪽 아버지와 유럽쪽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국인 친구도 꽤 있는 편이고 비록 한국어는 전혀 못하지만 최소한 한국에 대한 친밀함은 상대적으로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조금은 더 나은 편이 – 라고 대화하면서 느꼈 – 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적인 차이라던가 살아온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완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이라고 해서 그것에 방점을 찍고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가까워 질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이나 문화적 차이 말고도 둘이서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일단 나는 이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친해지게 됐는데, 기본적으로다가 나는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유창하게 하는 편이니까 (..) 그쪽으로 도움이 되줄 수 있는 이야기를 초반에 많이 했다. 전공 선택이라던가 대학원 생활, 교수님들에 대한 정보나 향후 진로같은 것들.. 그러다가 조금씩 더 가까워 지면서 일상 생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서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런 이야기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 어? 이거 한국 여자 만나는 거랑 거의 차이가 없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가니 피부색이나 언어, 문화적 배경같은 것들 보다는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건 결국 한국에서 연애하던 거랑 거의 비슷한 거다. 그쪽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왜냐하면,

결국 걔도 밀땅하더라!

난 한국인만 그런거 하는줄 알았음동.

아무튼,

처음 도움을 요청한 것도 그 친구였고,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친구였고, 오늘 데이트도 그 친구가 신청한 거였다. 이거 이러면 안되는데.. 싶기도 하다. 뭔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시점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해야할 행동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인 것 같다. 이런 테크니컬한 부분은 결국 마음이 가는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최고다, 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친구는 바쁘고 정신없는 1년차 시기를 보내고 있고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내쪽에서 챙겨줄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이렇게 널부러져 있다. 덕분에 되게 되게 오랜만에 뭔가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 라는, 그리고 마음속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라는 좋은 느낌을 갖게 되어서 요즘 삶이 참 기운 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결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이걸 미리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엄청 미련한 짓..) 느낌이 뭐 그닥 긍정적이진 않다. 이건 (먼) 나중에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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