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인과의 데이트

오늘 난생 처음 “정식” 으로 미국인과 데이트를 했다. 뭐 술을 마시거나 밤을 같이 보내거나 막 그런건 전혀 아니고 같이 점심 한끼 먹은 게 끝. 서로 일정이 바빠서 금요일 오후에 겨우 짬을 내어 동네에 유일하게 있는 한식당에 가서 한국 음식을 먹었다. 전부터 가보고 싶어 했고, 또 한국 문화를 좋아하고 그쪽에 관심도 많은 친구라 조미료를 사용하지 않고 꽤 괜찮게 하는 그 식당에 한번쯤 데려가고 싶었다. 요즘 한국 정부의 모 부처에서는 이성간에 (이걸 또 꼭 “이성” 으로 고정하는 센스도 참..) 두번 이상 만나면 정식으로 교제한다고 정의를 내려 버렸던데, 한번 더 만나기 전에 (..) 생각해 볼 것들이 좀 있는 것 같다.

우선 한국어를 전혀 하지 못하는 상대와 데이트를 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컸다. 이건 전적으로 영어를 능숙하게 구사하지 못하는 내 사정 탓이다. 친한 친구들과 단 둘이 있을 때 느꼈던 긴장감은 이제 많이 해소됐지만, 데이트는 또 다르다고 생각했다. 그 두려움을 최근 극복하기 위해 노력했고,  오늘에야 비로소 상당 부분 해방되었다고 느꼈다. 이 친구를 만나기 시작한 게 한달 조금 넘은 것 같은데 확실히 아리따운 여성분 앞에서 일대일로 대화할 때 조금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다. (..) 물론 영어는 늘 계단식으로 발전하니까 내가 영어를 얼마나 잘하는지 스스로는 잘 감지하지 못한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어, 내가 이정도 수준까지 하네? 하고 갑자기 깨닫게 된다. 오늘 그랬다. 문법은 여전히 엉망이고 손짓 발짓으로 이야기하는 것도 여전하지만, 그 데이트에서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한 “맥락” 과 “분위기” 그리고 “유머” 를 적절히 견지할 정도의 수준은 된 것 같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무엇보다 나의 유머는 이제 언어의 제약을 거의 받지 않는다 라고 하는 엄청한 희망을 목도했음. (제가 친해지면 개그가 좀 됩니다)

둘째로 이게 더 중요한 건데, 과연 완전히 다른 문화권에서 자라온 외국인과 과연 친구 이상의 감정을 교류하는 데 있어서 아무런 제약이 없을까, 라는 의구심에 대한 해소가 어느 수준 이상은 된 것 같다. 물론 약간의 운이 따르긴 했다. 그 친구는 아시아쪽 아버지와 유럽쪽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시아권 국가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리고 지금은 미국 국적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알고 지낸 한국인 친구도 꽤 있는 편이고 비록 한국어는 전혀 못하지만 최소한 한국에 대한 친밀함은 상대적으로 평균적인 미국인들보다 조금은 더 나은 편이 – 라고 대화하면서 느꼈 – 다. 하지만 그렇다고 문화적인 차이라던가 살아온 배경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을 완전히 극복하는 건 불가능한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다른 문화권에서 살아온 사이라고 해서 그것에 방점을 찍고 그래서 우리는 더이상 가까워 질 수 없어, 라고 생각하는 것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배경이나 문화적 차이 말고도 둘이서 나눌 수 있는 대화의 주제는 무궁무진하다. 일단 나는 이 친구에게 공부를 가르쳐 주면서 친해지게 됐는데, 기본적으로다가 나는 전공과 관련된 이야기를 조금 더 유창하게 하는 편이니까 (..) 그쪽으로 도움이 되줄 수 있는 이야기를 초반에 많이 했다. 전공 선택이라던가 대학원 생활, 교수님들에 대한 정보나 향후 진로같은 것들.. 그러다가 조금씩 더 가까워 지면서 일상 생활 이야기도 많이 하고, 서로 어떻게 살아 왔는지 그런 이야기들도 하고.. 그러다 보니까 어느 순간 어? 이거 한국 여자 만나는 거랑 거의 차이가 없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어느 선 이상을 넘어가니 피부색이나 언어, 문화적 배경같은 것들 보다는 이 사람이 어떤 생각을 하는가, 이 사람이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에 집중하게 되는데 이건 결국 한국에서 연애하던 거랑 거의 비슷한 거다. 그쪽도 마찬가지였을 거라고 추측하는데 왜냐하면,

결국 걔도 밀땅하더라!

난 한국인만 그런거 하는줄 알았음동.

아무튼,

처음 도움을 요청한 것도 그 친구였고, 먼저 만나자고 한 것도 그 친구였고, 오늘 데이트도 그 친구가 신청한 거였다. 이거 이러면 안되는데.. 싶기도 하다. 뭔가 적극적인 모습을 보여야 할 시점인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해야할 행동에 대해 생각이 많아지는 시기인 것 같다. 이런 테크니컬한 부분은 결국 마음이 가는대로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최고다, 하는 나름대로의 기준을 가지고 있다. 그 친구는 바쁘고 정신없는 1년차 시기를 보내고 있고 나는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으니 내쪽에서 챙겨줄 부분이 더 많을 것 같다. 뭐 이런 저런 생각들이 이렇게 널부러져 있다. 덕분에 되게 되게 오랜만에 뭔가 연락하고 만나는 사람이 있다 라는, 그리고 마음속에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라는 좋은 느낌을 갖게 되어서 요즘 삶이 참 기운 넘치는 것은 사실이다.

결말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은데 (이걸 미리 생각한다면 그것 또한 엄청 미련한 짓..) 느낌이 뭐 그닥 긍정적이진 않다. 이건 (먼) 나중에 다시.

민주주의에서 투표라는 행위.

정치글을 쓰면 항상 논란이 생겨서 왠만하면 참는 편인데 그래도 트위터나 기타 인터넷들을 보다 보면 이번 서울 시장 선거에 대한 생각이, 아니 더 나아가 민주주의를 바라보는 시선이 같은 ‘진영’ 내에서도 첨예하게 갈리고 있음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고, 이에 대한 내 생각을 확실히 정리해 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다.

현대 민주주의에서 투표는 주관식이 아니라 객관식이다. 그리고 이 투표는 최종 정책 결정 단계가 아닌, 정책을 결정하고 집행하는 대리인을 선출하는 행위이다. 이거 나 국민학교 다닐 때 배운 내용이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내가 진짜 원하는 최선의 결과를 투표를 통해 도출해 내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왜냐하면 우리는 사람을 뽑는 행위를 하고 있는데 내가 정말로 궁금한 건 이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 즉 미래의 결과물에 대한 기대이기 때문이다. 많은 수의 젊은 이들이 자신이 정말 원하는 최선이 없기 때문에 투표를 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그런 논리를 통해 투표를 하지 않는 행위가 마치 자랑스럽고 떳떳한 냥 지껄인다. 객관식 문제에서 각 개인이 정말 원하는 답안지가 존재할 확률이 얼마나 될까? 현대 정치에서 정당 체제는 그래서 존재한다. 유권자의 철학, 혹은 자신이 원하는 정책 방향과 가까운 정당에 투표함으로써 그 대표자들이 유권자들이 원하는 정책을 실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이다. 그것이 현대 민주주의에서 유권자들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최근 한국은 두개의 거대 정당이 자신들의 정책, 혹은 정치적 노선을 매우 흐릿하게 설정함으로써 유권자들로 하여금 제대로 된 선택을 할 수 없게 만들었고, 이것이 “정당의 위기” 라는 비판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정당을 보고 투표할 수 없다면, 각 후보자가 내세우는 공약을 읽어 보고 투표하면 된다. 후보자들중 자신의 입장이나 철학과 “가장 가까운” 후보자를 투표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행위이다. 다시 한번 말한다. 자신과 가장 가까운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 후보를 선택하고 그에게 투표하는 것이 자신의 입장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후보가 없다는 이유로 투표하지 않는 것보다 현명하다. 게임 이론 용어로 말하면 weakly dominant strategy 다.

이유는 간단하다. 가정으로 다음 세가지 보기가 있다고 가정하자.
1. 10/10 – 10이라는 나의 기대치에 10만큼 충족하는 후보.
2. 5/10 – 10이라는 나의 기대치에 5만큼만 충족하는 후보.
3. 1/10 – 10이라는 나의 기대치에 1만큼만 충족하는 후보.

그리고 만약 투표한 후보가 당선되었을 경우 충족하는 부분만큼의 효용을 얻게 된다고 가정하다. 더 나아가 만약 투표를 하지 않거나 투표하는 후보가 낙선하였을 경우 얻게 되는 효용은 당선된 후보의 충족치/2 라고 가정하자. 마지막 가정은 투표를 하지 않기로 결정하였을 경우 차선 (혹은 차악) 을 택해 투표했을 경우보다 그 후보에 대한 지지도가 상대적으로 낮고 때문에 만약 그가 당선되었을 경우 얻게 되는 효용이 상대적으로 낮을 것이라는 추측에 근거한다. 더 나아가 투표하지 않음으로써 얻고자 하는 일종의 목적함수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판단에 근거하기도 한다. 대체 투표를 하지 않음으로써 주장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고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이건 나중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고.

시나리오 1 – 1,2,3번 후보가 모두 나온다:  의심의 여지 없이 1번 후보를 선택한다. 1번 후보가 당선하였을 경우 10만큼의 효용을 얻게 되는데, 각 후보가 당선될 확률이 모두 같다고 가정한다면 나의 효용 기대값은 10/3 + 5/6 + 1/6 = 26/6 = 13/3

시나리오 2 – 1번 후보가 나오지 않기로 결정해서 2번 후보와 3번 후보간의 양자 대결로 압축이 됐다. 이경우 서브 시나리오가 발생한다.

시나리오 2-1. 투표하지 않는다 : 내가 얻게 되는 기대 효용은  5/4 + 1/4 = 6/4 = 3/2

시나리오 2-2. 차선의 (혹은 차악의) 후보에게 투표한다. 기대값은  5/2 + 1/4 = 11/4

시나리오 3 – 3번 후보만의 단독 출마. 이 경우도 경우의 수는 두가지. 결과는 같다. 최악의 후보에게 투표하는 것이 투표하지 않는 것보다 더 높은 효용을 가져다 준다.

이 간단한 모형이 설명하고자 하는 것은 최악의 후보만 남은 극단적인 경우라도 민주주의에서 허용하는 일반 시민의 권리이자 의무인 투표 행위가 정치권에 대한 무관심보다 비교 우위에 있다는 것이다.

박원순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한나라당 후보는 싫은데 박원순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흔히 말하는 양비론이 판친다. 한나라당대 반한나라당 구도가 몰상식대 상식이라는 주장에 토를 다는 사람까지 있다. 여기서 잠깐, 한나라당의 행태나 그들이 주장하는 바가 그들 안에서 “상식” 이라면, 이건 그렇게 주장하는 사람이 정신적인 아노미상태에 빠져 있다고 봐도 된다. 상대방을 존중해 주는 것은 좋지만 최소한의 기준까지 무너뜨리면서까지 배려해 주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그렇게 따지면 법도 없어야 하고 도덕이나 윤리도 사라져야 한다. 각자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니까, 각자 생각하는 대로 행동하면 다 맞는 거니까. “그들의 상식과 우리의 상식” 이라는 교묘한 레토릭은 그래서 매우 위험하다. 옳고 그름에 대한 최소한의 판단 기준마져도 상실해 버리고 때문에 “그들” 에게 이 모든 싸움이 대단히 기술적이며 주변적으로 흘러가도록 만들 여지를 제공해 버리기 때문이다.

암튼, 나는 정당의 크기 여하를 막론하고 현재 한국에서 각 개인의 “입장” 을 대변할 수 있는 정당이 꽤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한나라당, 민주당, 그리고 민노당과 진보신당, 참여당과 사회당 등이 있다. 이정도면 진보 세력 내에 존재하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소화할 수 있는 충분한 가짓수라고 생각하는데, 사람들은 그러니까 그냥 각자 자신들이 원하는 정당을 지지하면 된다. 그리고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행동이 자신의 뜻에 맞지 않을 경우, 그 때마다 다시 판단을 하면 된다. 간단한 일이다. 최악의 경우 마음에 드는 정당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면 자신이 직접 나서서 정당을 만들거나, “차선” 의 정당을 선택하면 된다. 이 부분이 중요한 것 같다. 차선이냐 차악이냐의 판단 여부.  마음에 드는 정당이 없다고 “무관심” 이라는 행위를 선택한다면, 다시 말해 “내가 좋아하는 정당이 생길 때까지 나는 투표하지 않을거야” 라고 주장한다면, 이 주장이 설득력을 갖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가정들이 필요하다.

1. 그 마음에 쏙 드는 정당이 빠른 시일내에 출현해야 한다.
2. 투표외에 다른 방법을 통해 그 정당의 출현을 도와야 한다.
3. 만약 그 정당이 빠른 시일 내에 출현하지 않을 경우 정당이 아닌 다른 방법으로 자신의 정치적 의사를 표현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나는 그토록 쉽게 무관심이라는 방법을 택하는 사람들이 2 나 3의 방법을 택하리라고는 보지 않는다. 흔히 경제학에서 말하는 habit consistency 를 위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냥 입만 벌리고 먹이는 왜 안 넣어 주냐며 막연히 1만을 기다리고 있는 행위가 그리 똑똑해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마음에 쏙 드는 정당이나 후보가 존재하지 않을 경우 차선, 혹은 그들이 말하는 차악을 택하면 어떤 일이 발생할까.

여기서 “방향” 을 잘 봐야 한다. 민주주의는 경제처럼 한번에 확, 하고 발전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국민 개개인의 의식이 서서히 성장하고 이것이 하나의 응집된 세력으로 표출되어서 법에 영향을 주는 형태로 발현이 되어야만 비로소 민주주의가 발전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법을 만드는 사람들을 선출할 수 있는 꽤 큰 권리를 가지고 있다. (이걸 그냥 포기한다는 것이 매우 우습지만 일단 이건 차치하고) 민주주의는 서서히 발전한다. 아마도 내가 죽기 전에 한국에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정착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나의 한표를 통해 그 제대로 된 민주주의로 가는 방향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방향만 제대로 잡히면 시간의 흐름속에 서서히 그쪽으로 가게 될 것이고, 그러면 나의 다음 세대, 혹은 다음 다음 세대에는 지금보다 조금 더 나은 정치 체계속에서 살게 될 지도 모른다.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건 그 정도 까지이다.

박원순에게 투표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일까, 아니면 나경원에게 투표하는 것이 더 나은 방향일까. 박원순은 정답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한다. 그렇다고 투표를 하지 않거나 양비론의 탈을 뒤집어 쓰는 것이 박원순에게 투표하는 것보다 더 나은 행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나경원에게 투표하는 것이 이 사회가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녀에게 그냥 투표하면 된다. 물론 당선 후 나경원이 구속되지 않는다는 기대가 있어야 겠지만.

마지막으로, 많은 사람들이 지지하는 정당의 대표들이나 유력 인사들이 하나같이 모여 단 한사람을 지지하고 있다면, 대체 내가 지지하는 정당은 왜 저 사람을 지지하는 것일까, 라고 한번쯤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 유시민과 손학규, 이정희와 노회찬이 모여서 박원순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 이건 우리가 지지하는 많은 사람들이 무언가 공통적인 것을 원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그게 이명박 정부에 대한 심판이든, 서울시 전시 행정을 막아 보자는 의지의 표현이든 그건 각자 알아서 판단할 일이고. 그리고 진짜 마지막으로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왜 박원순같은 사람 지지하냐고) 생각하고 투표하지 않기로 결정했다면 그에 합당한 책임도 함께 가지고 가야 한다는 것을 명심했으면 좋겠다.

트위터에도 썼지만, 지난 대선 기간에 참 많은 사람들이 노무현을 조롱하고 이명박을 찬양했다. 내가 속해 있었던 대학가부터 아파트 단지, 그리고 인터넷의 게시판들까지 거의 모든 곳에서 하나같이 같은 말을 해댔다. 노무현 나쁜놈, 이명박이 경제를 살려 줄거야. 그 정도면, 그리고 드러난 대선과 총선의 결과를 놓고 보면 정말 많은 이들이 그때 진짜 이명박을 좋아 했던 것 같다. 지금 그들중 누가 반성을 하고 있는가? 아무런 반성도 없이 지금 또 똑같은 어조로 이명박을 조롱하고 비난하고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의 인격을 철저히 무시하고 경멸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그 당시 이명박에게 투표했지만 지금 그 행위가 잘못됐다고 느낀다면 그냥 반성하면 된다. 그리고 만약 당신이 그 당시 의도적으로 투표를 하지 않았다면, 그 역시 그냥 반성하면 된다. 왜 반성하지 않는가. 반성은 부끄럽거나 창피한 일이 아니라 떳떳하고 칭찬받아야 하는 행위이다.

대학원생과 결혼하고 싶은 여자

어제 K 와 이런 저런 잡담중에 유학중인 남자 대학원생이 솔로일 경우 이 사람이 과연 어떻게 결혼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견이 갈렸다. 나는 당연히 애인이나 배우자가 없는 상태에서 유학을 와버렸다면 공부를 마칠 때까지 아무런 기회가 없을 것이라는 가정을 하고 있었는데 K 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이 아는 이 경우에 속하는 거의 대부분의 남자들이 유학 중간에 선이나 소개팅 혹은 기타 등등의 방법을 통해서 결혼에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녀는 유학중인 대학원생과 결혼하고 싶어하는 여자들이 상당수 존재하며 이들을 시장에서 발견하는 것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리고 여자의 경우는 완전히 다르다는 참고사항까지 -씁슬한 표정과 말투로- 덧붙였다.

“그러면 왜 내 주변에는 그런 여자가 한명도 없지??”

라는 나의 우매한 질문에 K 가 답하지 않음으로써 이 대화는 간단하게 마무리되긴 했는데.

나는 아직도 이해가 잘 되지 않는다. 그녀의 주장대로 방학때 한국에 들어가 소개팅이나 선을 통해 자신을 선호하는 여자를 만난다고 가정해도, 과연 3개월이 채 되지 않는 짧은 기간동안 결혼이라는 엄청난 이벤트를 결심할 수 있을런지? 되게 많이 불타 올라야 하는 거 아닌가. 그것도 난생 처음 만난 사람을 상대로.. it’s not my thing. 그리고 이건 여자쪽에서도 대단히 큰 위험부담이라고 생각하는데, 무턱대고 유학생 따라와서 그 냄새나고 칙칙한 생활을 짧게는 1,2년, 길게는 4,5년씩 버틸 수 있을 지에 대한 의구심이 지워지지 않는다. 나라면 못해. 그러니까 지금 내 주변에 있는 유학생 형님들과 결혼해서 함께 오신 형수님들에 대한 존경심이 팍팍 생기는 거다.

울타리 밖

대학원 생활은 단조롭다. 이번 학기 생활은 대충 이렇다. 잔뜩 긴장한 채로 잠들기 위해 이불 속에서 뒤척이기를 한시간쯤 한 뒤 겨우 잠들고 아침에 일어나 늘 허겁지겁 아침도 제대로 챙겨 먹지 못한채 학교로 향하면 전날 어지럽게 늘어 놓은 책이며 논문 뭉치며 낙서인지 메모인지 모르는 종이 조각들이 가득한 책상과 다시 인사를 나누게 된다. 월요일과 수요일은 티칭과 세미나 수업, 오피스 아워가 몰려 있어서 점심을 제대로 때우기 힘들 정도로 정신이 없다. 오후 다섯시가 되면 겨우 일과가 끝나는데 몸이 녹초가 되어 저녁에 무언가를 할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화요일과 목요일은 아무런 스케쥴이 잡혀 있지 않아 오롯이 학과 공부 혹은 논문 작성에 시간을 할애할 수 있는데, 가끔은 월요일과 수요일에 쌓인 피로가 채 풀리지 않아 다음날 아침까지 늘어지는 경우도 있고, 이른 아침부터 햇빛 한줌 안들어 오는 오피스에 고개를 처박고 있어야 하는 내가 스스로 너무 처량해 갖은 핑계를 대며 집에서 버티고 앉아 있기도 한다. 어쨌든,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논문을 쓰든 논문을 읽든, 혹은 공부를 하든 우야돈동 오피스에서 버티고 앉아 있고, 토요일에는 집에서 풋볼을 보거나 책을 읽거나 하며 잠시 여유를 부리다가 일요일부터 다시 다음주 티칭수업과 세미나 준비를 하기 위해 학교 주변에서 분주하게 움직인다. 지난 여름부터 아침과 저녁 식사는 늘 집에서 챙겨 먹으려고 노력중인데 쉽지 않다. 아침은 늘 시간이 없어서, 저녁은 늘 반찬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부실하게 먹게 되는데 이 점이 못내 아쉽다. 저녁을 먹고 나면 다시 학교로 올라갈지 여부를 결정하고, 집에 남아 있기로 결심한다면 집에서 해야 할 일들, 예컨데 빨래며 청소, 혹은 설거지나 기타 우편물 처리라던가 장을 본다던가 하는 일들을 해치우기도 한다.

생활이 이렇다 보니 만나는 사람도 한정적이고,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대부분 예측 가능하거나 감당할 수 있는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지금 오피스를 함께 쓰는 미국인 친구 두명은 1년차때부터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들이고, 학교에서는 주로 이들과 대화를 많이 나눈다. 대화라고 해봤자 심각한 이야기보다는 이번주 풋볼 누가 이길까, 판타지 풋볼 트레이드 어떻게 해야 할까, 새로 들어온 1년차 애들은 왜 이렇게 시끄러운 걸까, 등등의 가벼운 수다들이다. 그렇게 해서 풀리는 스트레스가 있으니 이런 가벼운 대화들도 반갑고 고맙다. 위로 한학년 아래로 한학년 정도는 대부분 알고 지내고 또 세미나 수업도 같이 듣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좁은 학과 건물에서 만나면 인사를 나누거나 가끔 수다를 떨기도 한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는 함께 성당을 다니는 J,K 선배와 가끔 이야기를 나누는 정도이고, 이번에 새로 들어온 두명의 1년차분들을 가끔 챙기기도 한다. 어쩌다 가끔 한달에 한두번, 주말에 술을 먹기도 한다. 술을 먹는 친구들도 위에서 말한 그렇고 그런 사이들이다. 오피스 메이트 절친 두명과 술을 먹을 때 가장 편하고, 또 이들과 있을 때만 마음 놓고 망가질 수 있다. 가끔 판이 커지면 3년차 친구들이나 2년차 친구들이 붙기도 하는데, 그렇게 대략 열명 정도 함께 술을 마시거나 마음을 터 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들이 학과내에 있는 것 같다.

생활하는 것도 학과 안, 만나는 사람들도 대부분 학과 사람들이다. 학과 밖에서 따로 왕래하는 사람은 아버지의 제자 출신으로 사학과 교수로 부임하신 K 교수님 내외분 정도. 그 외에는 전혀 다른 인맥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완전히 닫혀진 세계에서 살다 보면 가끔 답답하기도 하고 슬럼프에 빠지기도 한다. 나에게 가장 알맞은 삶은, 루틴한 삶의 반복 속에서 비정기적으로 아주 미세한 파동이 일어나는 것이다. 나는 예측 가능한 삶을 선호하고 계획에 따라 움직이는 편을 좋아하기 때문에 내 삶의 큰 방향이나 축이 강하게 흔들리는 것을 원치 않는다. 가뜩이나 부족한 에너지를 오로지 공부에만 쏟기 위해서는 그 외 나머지 일들을 최대한 단순하게 만들어야 했고, 일상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최소화시키는 방법은 그것들을 몸속에 체화시키고 습관화시키는 것이 가장 그럴듯해 보였기 때문이다. 다만 완벽하게 짜여진 틀 속에서 살다 보면 재미도 없고 생산성도 그리 좋지 않기 때문에 큰 그림을 훼손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어나는 작은 사건 사고들은 재량껏, 긍정적으로 삶 속에 내재화시킬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혹은, 반복되는 일상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쌓여만 가는 스트레스의 무게를 조금이라도 가볍게 하기 위해 몸과 마음을 잠시 쉬게 하는 과정마저 루틴하게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그 중 하나가 매일 오후 다섯시, 평일 미사에 가는 것이다. 다행히 오피스에서 멀지 않은 곳 (걸어서 십분 정도) 에 학교 부속 성당이 있고, 그곳에서는 매일 오후 열두시와 다섯시에 평일 미사가 있다. 오후 다섯시면 하루 일과를 대충 끝내거나 최소한 정신없는 한 때를 마치고 한숨을 돌릴 정도의 타이밍이므로 미사를 보기에 과히 나쁜 시간대는 아니다. 나는 거의 매일 평일 미사를 보지만 스스로를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해 본 적은 없다. 흔히 말하는 ‘믿음’ 이 강한 편도 아니고, 현재 로마 가톨릭 교황청에서 공시하는 교리를 곧이 곧대로 받아 들이고 그것을 신념화시켜 지키려고 노력하는 사람은 더더욱 결코 아니다. 예를 들어 낙태는 반대하지만 동성애는 찬성하고, 고백성사나 주일미사 참여같은 신자로서의 의무는 굉장히 싫어하지만 미사에 늦는 것은 또 굉장히 싫어하는.. 그냥 한마디로 제멋대로다. 신을 믿는다기 보다는 신에 대해서 생각을 하는 편이랄까. 일단 평일 미사에 가면 그냥 가만히 앉아서 머리를 식히고 비우는 작업부터 한다. 그러다가 새로운 리서치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하고, 완전히 새로운 마음으로 오늘 대체 내가 왜 그랬지, 하고 뼈저린 반성을 하기도 한다. 3,40분 남짓한 평일 미사 시간에 주로 내가 하는 생각은 그날 하루 내가 했던 일과 생각들에 대한 되새김질이다. 대체 무엇이 잘못 되었고, 또 그것을 수정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 생각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생각한다. 한국에 있는 나의 가족과 친구들을 생각할 수 있는 아주 좋은 시간이다.

그렇게 매일 평일 미사를 간지 2년이 조금 넘은 것 같은데, 최근에 길거리에서 나를 알아보는 성당 사람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변화다. 오늘은 혹시 컴퓨터 사이언스 전공 아니냐고, 그쪽에서 나를 본 것 같다면서 한 백인 친구가 말을 걸어 왔다. 아쉽지만 아니라고 했지만 어찌어찌하여 통성명도 하고 십분 정도 수다를 떨었다. 며칠 전에는 대학원 후배 과외를 해주러 그쪽 아파트에 들어 갔는데 어떤 백인 친구가 불쑥 나타나더니 너 방금 미사보고 나왔지, 나 너 봤다, 하며 말을 걸었다. 공통적으로 그 친구들이 나에게 한 말은 “난 너 매일 봤어” 였다. 아무래도 그 성당에 오는 거의 유일한 아시아인이라서 그럴까, 눈에 띄였던 것 같다. 성당 크기도 작고 신자들도 대부분 학생들, 혹은 학교 주변에 거주하고 있는 학교와 관련된 일에 종사하는 주민들이다. 1년 전에는 내가 가르치던 학생이 세례를 받겠다고 열심히 성당에 나오길래 격려를 해준 적도 있고, 내가 속한 농구팀이 지난 시즌 플레이오프를 치룰 때 심판을 보던 친구가 성당 사람이어서 인사를 한 적도 있다. 그 친구가 한 말도 “너 성당에서 자주 봤다” 였다.

학과 밖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 그 것도 한국과 상관이 없는, 그야 말로 생면 부지의 사람들과 관계를 시작한다는 것이 아직은 많이 낯설고 두렵다. 나는 집과 학교만을 반복하며 오직 학과 사람들과 관계를 맺어 오며 지난 3년을 살아 왔다. 나의 대화 상대는 늘 경제학을 공부하는 사람들이었고 함께 공부를 하는 사이, 라는 확실한 관계의 이름이 존재했다. 지금까지 나 자신이 그 관계 의외의 것을 생각해 본적도 없다는 사실이 퍽 놀라웠다. 아직 미국에서 살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성당이라는 또다른 집단에 속할 마음의 준비가 아직 되어 있지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반갑게 다가오는 그들이 싫은 것도 아니다. 지금이라도 당장 내가 마음만 먹으면 성서 모임이든 운동 모임이든 대학원생 친목 모임이든 참여할 수 있다. 그 첫발을 떼기가 참 두려운데 (그들이 나쁜 사람들도 아니고) 아마도 이 두려움의 근원은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라는 점, 그리고 아마도 그곳에 가면 나 혼자 백인이 아닐 것이라는 점에 대한 걱정일 것이다.

울타리 밖으로 나가 세상을 구경하는 것이 이리도 힘들다.

Wilco: The Whole Love

시카고 출신 밴드 Wilco 의 새 앨범이다. 이 밴드는 이미 <Yankee Hotel Foxtrot> 으로 영미 대중음악사에 한획을 그었고, 이제 얼마나 완만한 속도로 정점에서 내려오느냐의 문제만 남은 것처럼 보였다. 물론 그들은 그 후에도 굉장한 앨범들을 계속해서 생산해 냈다. 2002년에 이미 엄청난 물건을 세상에 내놓은 밴드가 음악적으로 완전히 새롭게 태어나는 변신을 하지 않고도 (라디오헤드처럼..) 10년동안 양질의 앨범을 지속적으로 쏟아 낼 수 있다는 건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들의 통산 여덟번째 앨범 <The Whole Love> 은 밴드가 같은 패턴안에서 다른 창조성을 가지면서 생명력을 지속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물이다. 많은 미디어들이 이 앨범을 두고 “윌코의 앨범들중 가장 완성도가 뛰어난 앨범은 아니지만 가장 선호하는 앨범이 될 수 있” 다고 표현하며 (Guardian) “모험적이고” (BBC) “inconsistency” (Pitchfork) 라고 공통적인 평을 한다는 점이 퍽 흥미롭다. 내 귀에 들리는 이들의 음악은 한결같다. 제프 트위디는 늘 한결같은 목소리로 세상을 걱정하거나 음미하며 탄탄한 기타팝 음악은 여유로운 듯 빈틈을 허용하지 않는다. 물론 12분에 이르는 대곡 (“One Sunday Morning”) 에서 반복적인 기타리프를 통해 흔히 말하는 “실험적” 이라는 평을 이끌어 낼 수도 있겠지만 그러한 시도가 전에 없었던 것도 아니고, 특히나 이 곡은 “Jane Smiley 의 남자친구에게 바칩니다” 라는 부제가 달려 있을 정도로 스케일이 무지막지하게 큰 곡도 아니다. 이들은 가히 전미 최고라고 할 수 있는 공연 퍼포먼스를 통해 실력을 다져 왔고, 단 한장의 앨범도 제대로 실패해 본 적이 없을 정도로 진중하다. 개인적으로는 “미국 밴드도 진짜 훌륭할 수 있구나” 하는 점을 깨닫게 해준 고마운 밴드이기도 하며, 내 인생 최고의 생일을 보낼 수 있도록 엄청난 공연을 선물해 준 밴드이기도 하다. 아무튼, 그들은 여전히 모험중이며, 그 모험의 여정은 되게 믿음직스럽다.

Girls: Father, Son, Holy Ghost

샌프란시스코 출신 2인조 밴드 Girls 의 통산 두번째 앨범이다. 하지만 두장의 졍규 앨범 사이에 발표한 EP 도 워낙 좋았기 때문에 사실사 이들의 족적은 세장의 앨범으로 정리되어야 할 듯 싶다. 지난 두장의 앨범에서 보여준 이들의 정체성은 달콤 쌉사름한 팝에 얹힌 유치하지만 심각한 사랑-을 가장한 섹스-노래였다. 뭐 가끔 우정 얘기도 하고. 한국말로는 찌질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이고, 영어로는 childish 하다고 표현할 수도 있을 이들의 가사는 사실 이 밴드의 정체성을 확립하는 중요한 코드중 하나이다. 밴드의 알파요 오메가라 할 수 있는 Christopher Owens 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 나가는 이들의 가사는 나르시즘에 빠진 덜 자란 성인의 자기 자랑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아주 솔직하고 군더더기없이 아주 간결하다. 그래서 더 크게 와닿는 맛이 있기도 하다.

새앨범은 잔뜩 어깨에 힘을 주고 나왔다. 비틀즈, 폴 사이먼, 엘비스 코스텔로, 엘리엇 스미스등을 레퍼런스로 달고 나왔던 지난 앨범들에 비추어 보면 상당히 어두워지고 무거워진 느낌이다. 첫싱글이라고 할 수 있는 “Vomit” 은 6분을 훌쩍 넘기고 “Forgiveness” 는 8분에 가까운 대곡이다. 이런 시도가 전작들에서 없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밝고 경쾌한 팝넘버가 주를 이루던 분위기에서 대곡 지향의 무거운 분위기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변화 정도만 짚고 넘어가도 될 듯 하다.

이들 음악의 가장 큰 미덕은, 과거 올드팝들에서 짜집기한 듯한 음악을 선보이지만 그 누구도 “Girls 같은 음악” 이라고 할 만한 것을 만들지 못할 정도의 확고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은 단지 두장의 앨범만을 발표했을 뿐이지만 어느새 이쪽 씬에서 하나의 자리를 떡하니 차지하고 있는 거물이 되어 버렸다. 그들만의 색깔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피치포크는 이례적으로 9.3 이라는 후한 점수를 줬다.

Björk: Biophilia

Björk 은 내가 아는 한, 현대 영미 대중음악계에서, soundscape 을 가장 창의적이고 효율적이며 파괴적으로 구축하는 뮤지션이다. 그녀는 자신이 원하는 세계를 설계하고 구축함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며, 더 나아가 청자로 하여금 그녀가 만든 세계를 마음껏 유영할 수 있도록 편의를 제공함에 있어서도 소홀함이 없다. 그녀를 표현하기 위해 제공되어야 하는 레퍼런스가 거의 필요없다는 점에서 그녀의 “세계 창조” 능력은 독보적이다. 이것은 공부를 하거나 노력을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차원의 것이 아님을 느끼게 한다. 다른 뮤지션들의 도움을 받아 정체성을 확립해 가던 시기를 지나 이제 다른 뮤지션들, 아니 예술 영역의 다른 장르들까지 지배하고 이용함으로써 이 새로운 세계의 창조주로서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한다. 그녀가 발표한 거의 대부분의 앨범의 표지는 그녀 자신인데, 앨범마다 상이한 정체성을 나타내는 또다른 ‘자아’ 로서의 그녀를 표현한다고 볼 수 있다. 그만큼 그녀는 각 앨범의 ‘색깔’ 혹은 ‘컨셉’ 이 단지 음악의 (기술적인) 특정 부분에 있어서의 변화나 수정, 혹은 발전을 드러내는 데에 국한되지 않고 아예 그녀 자신의 또다른 자아, 혹은 그녀가 창조하고자 하는 세계관을 완벽한 형태로 구현하게끔 하는 데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약간의 매너리즘을 느끼게 했던 2009년작 <Voltaic> 에서조차 이러한 그녀의 능력은 변함없이 드러났다. 그리고 2011년 발매된 신작 <Biophila> 에서 마침내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 뮤지션인지를 거의 완벽하게 증명해 주는 것 같다. 그녀는 자신이 설계한 세계를 씨디, 혹은 엘피 한장에 들어가 있는 몇십분의 음악으로만 표현하려고 하지 않고 다양한 형태의 경험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다. 이 앨범의 상당 부분은 iPad 를 통해 완성되었다고 알려져 있는데, 그러한 뒷얘기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앨범 발매전 먼저 app store 에 공개한 app 을 통해 그러한 그녀의 목적을 확인할 수 있다.

첫 곡 “Moon” 부터 “자, 이제 우리는 환상적인 여행을 잠시 떠날거야.” 라고 조용하지만 묵직하게 말은 건네는 Bjork 은, 거의 모든 곡이 5분 이상 진행되는 상당히 무거운 구조로 앨범을 구성했음에도 불구하고 본인이 추구하고자 했음직한 긴장감을 단 한순간도 놓지 않는다. 올린 “Cosmogony” 에서 느껴지는 환상적인 아름다움은 Bjork 이 아니면 그 누구도 만들어 내지 못했을 법한 창조물이다. 단연코 올해의 싱글이라고 불릴 만한 결과물이다. “Virus” 에서는 그녀의 특기인 기묘한 분위기의 코러스 라인이 단촐한 악기 구성임에도 불구하고 깊고 어두우면서도 환상적인 앨범의 분위기를 극대화시킨다. 7분여에 다다르는 대곡인 “Hollow” 에서 방점을 찍고 “Dark Matter” 에서 오히려 불안감을 증폭시킨 뒤 그녀의 또다른 특기인 전자음악을 십분 활용한 “Nattura” 에서 기대를 완전히 무너뜨리는 결말을 선보인다. 앨범을 하나의 통일된 분위기로 묶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그 안에 스토리를 담아 내는 것도 왠만하면 할 수 있는 일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오로지 자신의 안에서 창조해 내고 그 안에서 마무리지으면서 완전히 새로운 하나의 세계를 창조해 내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누군가는 Bjork 의 뒤틀리고 위악적인 목소리 자체를 좋아하지 않을 수도 있고, 앨범마다 항상 똑같은 구조의 노래만 만든다고 싫증을 낼 수도 있다. 개인의 자유다. 하지만 가끔은 평론가들이 감지해 내지 못하는, 그들보다 더 높은 곳에 위치한 뮤지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만 언급해 두고 싶다.

Feist: Metals

캐나다 캘거리 출신의 싱어송라이터 Feist 의 세번째 스튜디오 앨범. 데뷔 앨범 <Let it Die> 이 댄서블한 인디팝을 그녀의 매력적인 아우라위에 멋들어지게 덧입혀 새로운 인디 스타의 탄생을 알렸다면 소포모어 앨범 <Reminder> 는 기대와는 정반대의 소박함을 추구한, 퍽 로파이적이고 어쿠스틱한 작품이었다. 상이한 색깔을 지니는 듯한 이 두장의 앨범을 가로지르는 단 하나의 코드는 그녀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색깔의 목소리였고, 거기에 두세가지를 더 덧붙이자면 결코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 리듬, 혹은 훅, 그리고 그에 상응하는 뮤직비디오였다. 한마디로 그녀는 자기만의 색깔을 다양한 레퍼토리 위에서 자유자재로 (그것이 사운드건 비주얼이건 간에) 가지고 놀 수 있음을 증명했고, 이는 그녀의 세번째 앨범이 어디로 튈지 모른다는, 발전하는 젊은 뮤지션을 바라보는 입장에서는 아주 흥미롭고 재미있는 불확실한 기대감을 갖게 만든 것이 사실이다.

세번째 앨범은 전작에 비해 훨씬 다양한 악기들을 이용해 사운드의 구석 구석을 채워 넣었다. 마지막 편곡 과정까지 세심하게 공을 들인 흔적이 역력하고, 때문에 전작에 비해 그녀의 목소리는 압도적인 세기로 앨범의 처음부터 끝까지 장악해 나가지는 않는다. 많은 곡에서 스트링이 삽입되고, 또 많은 곡들에서 가스펠적인 코러스가 덧붙여 지는 것을 보면 이건 의도적이라고 추측할 정도이다. Bon Iver 의 기운이 묘하게 느껴지는 앨범의 첫곡 “The Bad in Each Other” 에서부터 그녀가 가지고 있는 야심, 혹은 이 앨범에서 드러내고 싶어하는 스케일의 크기가 짐작이 되는데, 이는 소박했던 전작 <Reminder> 에 대한 반작용으로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인디록의 감성을 한껏 많이 흡수했으며, 팝댄스보다는 기타팝에 더 큰 비중을 둔 것도 눈에 띄는 변화이다. 하지만 그녀만이 – 아마도 본능적으로 – 가지고 있는 리듬과 훅에 대한 감각은 여전히 살아서 펄떡거린다. 이에 더해, 전작들에 비해 획기적으로 달라졌다고 느낀 또다른 점은 바로 메시지의 전달력이다. 훨씬 또박 또박 정확한 발음으로 후렴구를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전달하고자 하는 그녀의 메시지는 전작에서 중얼거리는 듯 했던, 혹은 어물쩡 넘어가는 듯 했던 모호한 정체성을 보다 확실하게 드러낸다.  그녀의 삶 주변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었던 좌절의 순간들을 담담하게 묘사한 뒤 그 속에서 삶에 대한 강한 희망과 의지를 전달하려는 가사와 힘이 잔뜩 들어간 곡의 구성이 잘 맞아 떨어진다.

개인적으로 Feist 는 내가 힘들었던 시기에 나를 잡아 주었던 고마운 뮤지션들중 하나다. 복학 후 유학 준비를 하면서 학과 공부에 허덕일 때 Eels 와 Feist 의 음악을 참 많이 들었고, 힘을 낼 수 있었다. 그래서 음악의 질이 좋고 나쁨을 떠나서 애정을 항상 가지고 지켜보는 뮤지션중 하나다.  외모도 내 취향이고.. +_+ (네 저 이런 여자 좋아하는 남자입니다)

10kg 감량 후기.

오늘 아침에 체중계에 올라갔더니 69kg 라는 숫자가 찍혀 깜짝 놀랐다. 이렇게까지 살이 많이 빠질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어쨌ㄷ느 6월 중순에 다이어트를 시작해서 10월 초에 이르러서 10kg 을 뺐다. 이제 살을 뺀다는 생각은 관두려고 한다. 근육을 조금 더 붙이고 살도 좀 더 붙이려는 생각으로 오늘은 맛있어 보이는 군것질거리도 몇개 샀다. 칩/살사랑 빵이랑 케잌이랑 뭐 이런 것들.. 이제 마음껏 먹어야지! 한국에 있을 때 가장 많이 나가던 때가 79kg 이었고 평소에도 76~77 kg 을 유지했다. 6월 중순경 미국으로 돌아와 채식을 결심했고, 이왕 식습관을 바꾸는 김에 살도 한번 빼보자 싶어 다이어트를 시작했다. 근데 생각해 보면 다이어트라고 해서 딱히 크게 한 것도 없다. 살을 빼기 위해 딱히 많이 노력하지도 않았고, 먹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거나 하기 싫은 운동을 억지로 한 적도 사실 몇번 없다. 대충 정리해 보면 나는 지난 3.5 개월간 다음과 같은 변화를 겪었다.

1. 채식 – pesto 단계의 가벼운 채식. 닭, 돼지, 소 고기를 전혀 먹지 않았고,  계란도 전혀 먹지 않았다. 우유는 두유로 바꿔 보려고 노력했지만 실패해서 현재 우유는 마시고 있다. 하지만 전보다 마시는 양이 많이 줄었다. 생선도 먹는다. 주로 초밥이나 회덮밥을 먹거나 집에서 고등어를 구워 먹을때 섭취한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다. 육류를 전혀 섭취하지 않기로 결심하다 보니 두려움이 덜컥 생겼다. 지난 몇십년간 유지한 영양상의 밸런스가 무너지는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크게 들어서 영양소를 챙겨서 한끼를 먹기 시작했다. 단백질은 의도적으로 많이 섭취하려고 노력했고, 탄수화물과 지방, 비타민과 철분같은 것들도 먹는 음식에 들어 있는지 먹기 전에 한번 생각하고 먹었다. 그러다보니 혼자 살면서 대충 때우던 한끼 한끼에 조금 더 신경을 쓰게 된 것 같다. 특히 고기 성분이 조금이라도 들어가 있는 음식들을 제외하다 보니 라면같은 불량 식품들을 전혀 먹지 않게 되고 샐러드등을 꾸준하게 먹게 되는 결과도 얻게 됐다. 아, 과일도 무지 많이 먹었다. 군것질은 거의 하지 않았음. 근데 군것질은 원래 별로 안좋아한다.

2. 운동 – 처음엔 유산소 운동을 하면 살이 빠질 줄 알고 그것만 했다. 근데 나는 애초에 살이 많이 찌지 않고 옆구리나 배 부분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무산소와 유산소 운동을 적절하게 섞어서 하는 쪽이 더 효과적임을 한두달쯤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유산소 운동을 하기 전에 근력 운동을 약간 해주고, 유산소 운동으로는 근력 운동과 함께 할 수 있는 로잉 머신을 주로 했다.  근력 운동이라고 해봤자 가슴 운동, 배 운동, 스쿼트가 고작이었다. 귀찮아서 잔근육같은건 키우지도 않고.. 걍 푸쉬업과 크런치 정도. 다 해봤자 30분도 안걸렸을 것 같다. 농구도 많이 했다. 농구는 사실 몸에 좋은 운동은 아닌데, 잘만 활용하면 근지구력 향상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 (근데 근지구력 향상에는 로잉이 짱임!)

3. 그외 – 사실 위의 두개가 끝이다. 적어 놓고 보면 아무것도 한 것이 없는데 살만 빠졌네. (..)  결국 내 결론은 살이 찌고 빠지는 건 철저히 체질 문제라는 것이다. 살이 잘 찌는 체질의 사람은 그만큼 노력을 더 많이 해야 하고, 나처럼 살이 잘 찌지 않는 사람은 조금만 노력해도 살이 왕창 빠지는 거다. 우선 나는 채식을 시작한 것에 무지 감사하고 있다. 채식을 시작했기 때문에 내 영양분 섭취에 뭐가 문제였는지 찾아낼 수 있었다.

암튼,
나를 지난 몇년간 꾸준하게 보아온 사람들도 내가 살 몇키로 빠졌다고 이야기하면 그제서야 알아 볼 정도로 사실 겉으로는 티가 잘 나지 않는다. 하지만 옷을 입어보면 뭐가 다른지 확실히 안다는거!! 폴스미스 옷을 사고 싶었지만 너무 비싸서 포기. 사실 셔츠는 폴스미스가 진짜 이쁜데. 그리고 이제 살을 뺐고 가슴 근육도 제법 키워서 그쪽 셔츠도 소화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너무 비싸다. -_- 암튼 미국에선 이상하게 떨이로 처분하는 DKNY 에서 이쁜 셔츠를 발견해서 바로 질렀다. 으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