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 마르크스: 자본 I-1; 경제학 비판

카를 마르크스 지음, 강신준 옮김, 자본 I-1 경제학 비판, 도서출판 길, 2010년 1판 4쇄

김수행 교수의 번역본은 영문 번역판을 다시 번역했는데 반해 강신준 교수의 번역판은 독일어 원판을 번역한 것이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자본> 은 총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고,  “경제학 비판” 이라는 소제목을 달고 있는 부분은 전체 <자본> 의 첫번째 부분에 해당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자본> 의 1권에 해당하는 경제학 비판만이 마르크스 생전에 출판되었고, 2권 “사회주의 비판” 과 3권 “경제학의 역사” 는 그의 사후에 엥겔스를 비롯한 사람들의 주도하에 정리되고 출판되었다.

마르크스가 <자본> 1권에서 다루는 내용은 크게 세가지이다. 먼저 자본주의 사회에서 가치의 의미와 생성 과정, 그리고 잉여 가치와 자본이 축적되는 과정을 이론적으로 다룬다. 그 과정에서 기존의 경제학을 비판하고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한다. (아마 이 부분이 마르크스의 <자본> 을 세계적으로 유명하게 만든 주된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노동에 의한 잉여 가치의 축적을 현실에서의 노동 문제와 연결시키고, 이것이 계급간의 갈등으로 전화되는 과정을 적시한다. 마르크스는 자신의 이론적 토대를 공고히 하려는 노력에 버금갈 정도로 그 당시 열악했던 노동 문제에 대한 상세한 묘사에 힘을 쏟는다. 그의 눈에 비친 생산 과정에서의 노동자에 대한 불합리한 처우는 반드시 수정되어야 할 사회적 문제였을 것이고, 그는 천재적이고도 명쾌한 분석으로 계급 투쟁을 위한 이론적인 토대를 마련했다.

하지만 2010년에 이 책을 다시 읽으면서 마르크스의 이론에 여전히 동의를 하는 것은 분명 멍청한 짓일 것이다. 그의 이론은 시간이 지나면서 많은 반박을 받아 왔고, 마르크스 주의자들에 의해 많은 부분에서 수정이 되어 왔다. 더이상 그의 이론은 신선하지도 않고 이론저으로 냉철하지도 않다. 그는 때로는 감정에 치우쳐 현실을 호도하기도 하고, 불합리한 가정을 앞세워 주장을 관철시키려고 노력하기도 한다. 현대 경제학에서 모두가 동의하는 부분들도 그의 책에서는 철저하게 무시당한다. 심지어 당대의 경제학자들이 가지고 있던 기본적인 상식들도 제대로 다루어지지 않을 때도 있다. <자본> 은 확실히 낡았다. 때문에 만약 누군가가 아직도 마르크스와 <자본> 을 들먹이며 노동 운동을 하려고 한다면 그는 아주 멍청하거나 아주 미련한 사람일 것이다. 현대의 노동 운동은 반드시 새로운 패러다임 아래에서 다시 설계되어야 하며 최소한 현대 맑시즘이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는지, 기존 맑시즘의 한계를 어떻게 극복해 나가고 있는지 정도는 살펴 봐야 한다. 마르크스가 주창한 노동 문제는 현대에도 여전히 유효하며 그 울림의 폭은 여전히 크다. 하지만 마르크스가 그토록 주장했던 것처럼 이론적 토대가 갖추어져 있지 않은 정치적 주장은 공허하고 나약하다. 나는 과거 노동 운동 혹은 학생 운동을 했던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나 이 <자본> 을 정독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들이 그 시대에 어떤 수준 이상의 신념이나 믿음을 가질 정도의 단단한 이론적 토대는 더이상 이 책에 없다. 나의 선배들중 몇명이 마르크스-레닌 주의에서 탈출했는지, 혹은 그것을 극복했는지 잘 모르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나는 많은 이들이 <자본> 을 읽기를 희망한다. 마르크스는 아마도 인간에 대한 근본적인 애정을 가지고 있었던 마지막 경제학자였을 것이다. 그는 아주 뜨거운 심장을 가지고 있었고, 그 심장이 어리석어 보이지 않게끔 해주는 냉철한 머리도 가지고 있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는 일개 대학원생이 바로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논리적 오류들이 가득한 이 책은 그래서 아직 매우 소중하게 다루어져야 하고 여전히 토론되어야 한다. 우리가 공부를 왜, 하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에 들어 있기 때문이다.

Xavier Beauvois: Des Hommes et Des Dieux


이 영화는 90년대에 알제리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던 Trappist 수도회 수사들의 이야기다. 영화의 처음 20분은 이들의 생활을 보여주는데 할애된다. 마을 사람들을 무료로 진료하고,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해 공문서 작성을 도와주며, 마을의 대소사에 참석해 그들의 이슬람 문화에 동참한다. 수사들은 코란을 읽으며, 이슬람식 종교 행사에 참석하고, 마을 사람들에게 가톨릭을 딱히 선교하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던 중 알제리에서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과 정부군 사이에 내전이 일어났고, 알제리 정부는 수사들에게 안전상의 이유로 알제리를 떠나 프랑스도 돌아갈 것을 권유한다. 수사들은 고민에 빠지지만, 결국 신념과 소명을 이유로 알제리 탈출을 거부하고 수도원에 계속 남을 것을 결심한다.

일곱, 혹은 여덟명의 늙은 수사들은 이 작은 마을의 공동체를 위해 평생을 헌신했다. 그들은 마을 사람들과 함께 늙어 갔고, 마을 사람들은 수도원이 없었다면 이 마을도 없었을 것이라며 항상 고마워한다. 그런 그들에게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들이닥치고, 의료품을 요구한다. 수도원장인 크리스띠앙은 이를 거부하고, 이들은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위험을 대처하기 위해 결단을 내려야 함을 직시한다. 이들에게 다가올 위험이란 곧 죽음이다. 총을 든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이 프랑스에서 온 가톨릭 선교사들을 어떻게 대할 지는 명백하다. 수도사들의 마음속에 제일 처음 자리잡는 것은 바로 이 죽음에 대한 공포다. 어서 빨리 이곳을 떠나 더 안전한 곳으로 가자고 주장하는 수사들에게도 굳건한 믿음과 종교적 신념은 여전히 존재한다. 다만 이들은 이런 식의 죽음은 전혀 생각하지 않은 채 이곳에 왔을 뿐이다. ( “집단 자살을 하기 위해 수도원에 들어온 것은 아닙니다” ) 이들의 고민은 이슬람 테러리즘에 반대하는 종교인으로서의 신념보다는, 내 생명이 곧 끝날지도 모른다는 개인적인 문제에서 출발한다.

영화는 이들이 죽음의 공포를 극복하고 수도원에 계속 남아 소명을 다하기로 결심하기 까지의 과정을 담아내는 데에 영화의 거의 대부분을 할애한다. 어쩌면 이들은 개인적인 공포를 끝까지 극복하지 못했을런지도 모른다. 이들이 근본주의자들의 인질로 잡혀가기 전날 밤 “백조의 호수” 가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와인 두병으로 조촐한 최후의 만찬을 즐기는 장면은 그래서 특히 인상적이다. 이들은 음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와인잔을 기울이며 오랜만에 환하게 웃다가, 곧 이어질 죽음을 생각하며 눈물을 흘린다. 이들은 부패한 정부의 보호를 끝까지 거부하며 부상당한 반군을 치료해주기까지 한다. 원장 크리스띠앙은 수도원을 제일 처음 발견한 반군 지도자의 시체앞에서 그를 위해 기도를 한다. 하지만, 결국 어느날 새벽 대부분의 수사들은 반군의 인질로 끌려가게 되고,  역사적 사실이 기술하고 있는 대로 그들에 의해 죽음을 당한다.

원장 크리스띠앙과 그의 동료 수사들이 지키고자 했던 가치는 평화였다. 영화는 그들을 성인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그들은 매순간 두려움에 떨고, 총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 침대 밑으로 숨기도 한다. 인간적인 두려움과 나약함을 그대로 간직한 채, 이들은 아주 무거운 한걸음을 내딛는다. 크리스띠앙은 반군과 대화할 때 코란의 한 구절을 인용해 그들과 자신들 사이에 다름이 없음을 강조하지만, 그러한 자신의 이상이 현실앞에서 무력하다는 사실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저를 극단적인 이상주의자라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담보로 지키고자 했고 누군가에게 보여주고자 했던 가치는 그들이 평생을 바쳐 지켜온 한 작은 마을의 평화와 그 평화를 유지해야 한다는 소명 의식이었을 것이다.

영화 <미션> 과 비교될 수 있을 것 같다. <미션> 은 이 영화보다 훨씬 투박하고 직선적이다. 남아메리카 오지로 들어간 선교사들은 “미개인” 들을 개화시켜 가톨릭 신자로 만들고 이들을 말살하려는 정부군에 맞서 싸우다가 장렬히 죽음을 맞이한다. <미션> 의 가장 큰 약점은 서구 문화와 남미 오지 문화를 동등한 선상에 놓지 않는다는 잘못된 가정이었다. 하지만 <Des Hommes et des dieux> 는 그러한 우를 범하지 않는다. 이 영화는 종교인들에 대한 영화지만, 이들이 부르는 그레고리안 성가를 제외하면 종교적인 대사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수사들은 늘 알제리 마을 사람들과 똑같은 어깨 높이에 서 있으며, 사랑에 빠진 마을 처녀에게 자신도 사랑에 빠져본 적이 있노라고 수줍게 고백할 따름이다. 이들이 결국 죽음을 택하게 되는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마을 사람들에 대한 사랑때문이었을 것이다. 더 우월한 문화가 열등한 문화를 개화시키는 이야기가 아니라, 폭력에 반대하고 평화를 추구하는 한 공동체가 어떻게 그 신념을 지켜나가는 지에 대한 이야기다.

또한, 이태석 신부와 샘물 교회를 생각한다. 이들은 모두 위험한 볼모지로 스스로 걸어 들어 갔다. 한쪽은 평생을 다해 마을 사람들을 돌보다 그곳에서 죽음을 맞이했고, 다른 한쪽은 인질로 잡혀 정부측의 도움으로 풀려나 한국으로 귀국했다. 어쩌면 샘물교회 사람들과 이 영화의 주인공인 수도회 수사들의 이야기는 똑같아 보일지도 모른다. 다른 종교를 가지고 있는 국가에 들어가 종교활동을 했고, 그래서 인질로 잡혔다. 하지만 이들이 마음속에 가지고 있는 목적과 신념도 똑같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수사들은 자신들이 성인처럼 비추어 지게 되는 것 조차 두려워 했다. 그들은 이슬람 문화를 사랑했으며, 단지 그들과 함께 살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샘물교회 사람들의 목적이 ‘선교’ 에 있지 않았다면 그들은 아마 그 위험한 지역으로 들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이 영화의 제목은 <Des hommes et des dieux> 이다. 우리 말로 굳이 바꾸자면 “인간들의, 그리고 신들의” 라는 어정쩡한 말이 되어 버리는데, 내 눈에 큼지막하게 들어온 건 복수형태로 씌어진 “신들” 이라는 단어였다. 가톨릭에서 말하는 신이 있다면, 이슬람에서 말하는 신도 있을 것이다. “사람들” 은 각자의 신을 믿는다. 그냥 그러면 된다. “너는 왜 나의 신을 믿지 않니” 라며 닥달하고 싸울 하등의 이유가 없다. 당신이 만약 당신이 믿는 신만이 절대적으로 옳다고 확신한다고 해도, 우리가 사는 이 인간 세상에서 당신의 생각을 강요해야 할 이유는 도저히 찾을 수 없을 것이다. 그건 폭력이기 때문이다. 평화가 아니다. 굴복을 강요하는 것이지 평화로운 공생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폭력을 가르치는 신은 없다.

개신교를 조금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내가 자주 가는 카페에 책을 좀 추천해주십사 글을 올렸고 답변을 몇개 받았다. 곧 주문해서 읽어볼 생각이다. 나는 정말 그들의 생각이 궁금하다.

참, 2010년 깐느 영화제 그랑 프리 수상작이다. 깐느가 항상 옳지는 않지만 믿고 볼만 합니다.

Woody Allen: Midnight in Paris


줄거리는 대충 이렇다. 주인공 Gil 은 할리우드의 잘나가는 극작가다. 나사가 하나쯤 빠져 있는 듯한 그는 이쁘고 섹시한 피앙세 Inez 의 부모의 초대로 잠시 빠리에 와 있다. Gil 은 자신의 첫번째 소설을 완성하기 위해 애쓰고 있지만, 피앙세를 비롯해 대부분의 주변인들은 그의 꿈을 무시하고 다시 할리우드로 돌아가 성공적인 작가 생활을 이어가기를 바란다. 이쪽에서 치이고 저쪽에서 구박받으며 힘겨운 빠리에서의 휴가 생활을 이어가던 중 그는 밤 열두시쯤 빠리 한가운데서 길을 잃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자정을 알리는 종소리와 함께 도착한 100년쯤 전에 생산된 듯한 푸조 한대. 그 안에는 콜 포터와 조세핀 베이커가 타고 있었다. 그들과 함께 도착한 한 파티장은 마치 1920년대의 한 장면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 했는데, 어리둥절해 하는 Gil 의 앞에 나타난 여자는 스캇 피츠제럴드의 애인 젤다였다. 피츠제럴드가 소개해 준 사람은 헤밍웨이. Gil 은 헤밍웨이에게 자신의 습작을 보여주기를 바라고, 그와 함께 찾아간 오픈 하우스에서 파블로 피카소와 그의 애인 아드리아나를 만난다. Gil 은 매일같이 자정을 기다리며 헤밍웨이를 만나고, 아드리아나와 사랑에 빠지다가 달리, 브뤼넬과 상담을 하고, 급기야 아드리아나와 함께 1890년대로 가서 드가와 고갱을 만난다. 티에스 엘리엇과 합승한다던가 마티스와 담소를 나누는 건 에피소드 축에도 못낀다.

우디 앨런이 빠리에서 찍은 필름. 이미 그는 뉴욕을 벗어나 런던에서 <매치 포인트> 와 <스쿠프>를, 바르셀로나에서 <비키 크리스티나 바르셀로나> 를 찍었다. 그리고 이제 빠리에서 이 영화를 찍었는데, 개인적으로 무척 재미있게 봤다.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낄낄거리게 만들다가 결국 묵직한 한방과 뼈있는 농담으로 마무리하는 ‘그다운’ 영화랄까. 개인적으로는 <인셉션> 에 대한 우디 앨런식 비틀기로도 읽혔다. 뭐 자세한 이야기는 생략. 이 영화는 그냥 보고 즐기면서 느끼면 그냥 딱 명확하게 보이는 영화다. 영부인 깔라 브루니와 에이드리언 브로디등의 까메오들이 깨알같이 등장하는 것도 재밌고, 역사속 인물들의 이야기와 영화속 현실이 절묘하게 만나거나 약간씩 비틀어지면서 쏟아지는 유머들에서는 그 인물들에 대한 배경 지식이 있다면 조금 더 크게 웃을 수 있다. 우디 앨런은 우리가 알던 그들에 대한 지식이 맞다고 순순히 인정할 때도 있고 (예를 들자면 피츠제럴드의 사생활)  사실 그게 아니었다고 능청을 떨기도 한다 (예를 들자면 피카소 그림에 얽힌 일화). Gil 의 피앙세이자 부잣집 딸로 나오는 레이첼 맥아담스와 아드리아나역의 마리옹 꼬띠야드는 너무 이쁘고, 주인공 Gil 역의 오웬 윌슨은 불세출의 연기를 펼친다.

 

Manic Street Preachers: Postcards from a Young Man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 (이하 매닉스) 가 2010년 발매한 앨범인데, 나는 최근에서야 구입할 수 있었다. 아이튠즈 미국 사이트에서는 최근까지 판매가 이루어 지지 않았고, 아마존에서 구입할 수 있는 수입반은 턱없이 비쌌기 때문에 선뜻 손이 가지 않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이 앨범에 대한 언급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탓이 가장 클 것이다. 하지만 핑계를 구구절절 댈 필요도 없이, 전작 <Journal for Plague Lovers> 를 무척 좋게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한번 이들의 음반을 선택하지 않은 건 전적으로 나의 게으름탓이다.

매닉스는 나에게 특별한 밴드다. 90년대 중후반쯤, 음악을 좋아하는 십대 소년이 적은 용돈을 쪼개 구입할 수 있었던 음악 잡지는 크게 핫뮤직, GMV, 서브등이 있었다. 물론 성문영때문에 나중에 서브를 주로 읽었지만, 내가 제일 처음 샀던 잡지는 핫뮤직이었다. 96년 2월호로 기억하는데, 당시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거금 오천원을 주고 산 그 잡지의 표지 모델이 바로 매닉스의 보컬리스트이자 기타리스트인 제임스 딘 브랫필드였다. 종이 냄새가 물씬 풍겨나오는 두꺼운 잡지를 손에 집어 들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그 순간의 기억이 생생하다. 덕분에 지금까지도 표지에 실렸던 브랫필드의 시큰둥한 얼굴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 당시 발매됐던 앨범이 이들의 3집 <Everything Must Go> 였다. 아마도 매닉스를 알고 있는 거의 모두가 사랑하지 않는다, 라고 말할 수 없는 그 앨범. 그리고 약 15년의 세월이 흘러 이들은 2010년에도 여전히 음악을 만들고 있었다. 전작 <Journal for Plague Lovers> 가 실종된 전 멤버 리치 제임스가 쓴 가사를 이용해 곡을 만들고 초기의 응집된 펑크 스타일의 음악으로 회귀해 2집 <Holy Bible> 과 비교가 되었다면, 2010년 신작은 이들을 수퍼스타로 만들어준 3집과 주로 비교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렇게 직선적인 비교를 하는 것은 약간 유치할 뿐더러 사실 별 의미도 없다. 그냥 그렇게 1대1로 매칭을 시키고 싶게 만들 정도로 과거 사운드를 심하게 다시 불러 일으킨다는 점 정도만 이야기하면 될 듯 한데,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들의 최전성기 시절 수준의 완성도를 완전히 회복했고 이에 더해 원숙미가 더해져 입이 떡 벌어지게 만드는 엄청난 음악이 나왔을 뿐이라는 것이다. <Everything Must Go> 는 내가 막 음악을 듣기 시작할 무렵 접한 거의 최초의 브릿팝 음악들중 하나였고, 그래서 일평생 잊혀 지지 않을 단단한 뿌리같은 음악이다. 그런데 감히 그 명작과 동등한, 아니 어쩌면 더 큰 감동을 지금 <Postcards from a Young Man> 을 들으며 느끼고 있다는 사실이 참 재밌으면서도 신기하다.

이들만큼 현악을 완벽하게 사용하는 록밴드가 이세상에 몇이나 있을까. 단지 기타 리프 하나만으로 엄청난 훅을 만들어 내는 영국 밴드가 몇이나 있을까. 곱씹어 보게 만드는 깊이있는 가사가 음악과 전혀 따로 놀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들이 처음 밴드를 결성한 때가 1986년, 지금으로부터 무려 25년전이다. 그런데 이들은 아직도 대단히 창의적이고, 여전히 생산적이다. 이들과 동시대에, 혹은 더 나중에 나온 뮤지션들중 지금까지 전성기와 비슷한 수준의 음악을 만들어 내는 이들이 몇이나 있을까. 쉽게 떠오르지 않는다. 굳이 다른 이들을 깎아 내리지 않더라도, 이들은 참 좋은 음악을 만들어 낸다. 여전히 세상을 잘 살아 가고 있다. 밴드의 “Driver” 였던 리치 제임스를 잃은지도 벌써 16년. 그래도 여전히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며 세상을 외면하지 않고 있다. 영웅적이라는 표현도 어울릴 법한 아우라다.

앨범 속지에 적힌 T.S. Eliot 의 한마디로 어쩌면 많은 것들이 설명될 수 있을 것 같다.

“Great Simplicity is only won by an intense moment or by years of intelligent effort.”

행복

나는 요즘 행복하다. 걱정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다. 시험을 보고 통과를 해야 ‘다음’ 이 주어지는 생활을 20년 넘게 하고 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저축은 한번도 제대로 해보지 못할 정도로 항상 가난과 맞닿아 있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몸은 늙어 간다. 그래도 행복하다. 하루 세끼 밥을 다 챙겨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돈은 항상 통장에 있고, 몸을 편히 뉘일 수 있는 집이 있으며, 앉아서 무언가를 읽거나 쓸 수 있는 책상과 의자가 있다. 건강한 몸과 남들에 비해 많이 뒤쳐지지는 (hopefully) 않은 머리도 가지고 있다.

여기까지는 항상 생각하는 것들이다. 요즘은 여기에 더해 관계에서 오는 행복감도 상당한 편이다. 적당한 사람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는 것. 나를 괴롭히는 타인의 존재를 쉽게 찾을 수 없는, 그리고 내가 피해를 주는 사람 역시 (hopefully..) 딱히 없는, 딱 그정도의 거리감. 그 누구와도 감정적인 갈등을 빚지 않고, 또 그 누구에게도 나로 하여금 발생하는 고통을 안겨주지 않는 그런 상태. 나는 지금 현재 그게 너무 행복하고 좋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긴다면 아마도 조금은 달라지겠지. 그런데 사랑하는 사람을 만난다는 건 이 나이쯤 되어서 생각해 보니, 그건 그저 우연에 의한 이벤트일 뿐이다. 그걸 운명이라는 말로 이쁘게 채색하는 것은 당사자들의 희망에 달려 있겠지만, 그것이 일어나지 않은 상태의 사람에게는 그저 언제 올지 모르는 우연적인 사건 사고중 하나에 불과할 따름이다. 그 가치를 애써 외면하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누구’ 를 만나는 것이 이제 내겐 더이상 크게 중요하지 않게 됐다. 어떤 이를 언제 만나던지, 그 사람을 만나는 내 자신이 이젠 더 중요하고 흥미롭다. 그러니까 지금의 나는, 적당한 사람들과 적당히 떨어져 있는 지금의 고요함을 적당히 즐길 권리와 의무가 있다는 말이다.

지난 여름이 내게 준 교훈이다.

(진심으로) 생일 축하한다.

편지

편지가 한통 도착했다.

이제 정말 끝이라는 생각으로 인해 무겁게 가라 앉는 마음에서 괜시리 편안함을 느꼈다.
되돌아온 이 편지 한통으로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무 것도 되돌이킬 수 없고, 사람의 마음또한 치유될 수 없다. 이 편지로는.

사람 하나를 잃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갑자기 무서워 지다가도,
그 사람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 거의 아무 것도 남아 있지 않다는 생각에 자포자기의 심정이 가져다 주는 안도감을 반기기도 한다.

다음주 월요일에 큰 시험 하나를 치루고 나면,
열흘 정도의 짧은 휴가를 다시 얻는다.
휴가라고 해봤자.. 특별한 것은 아무 것도 없겠지만.

논문을 쓸까 책을 읽을까 여행을 갈까, 잠깐 고민하다가

이 편지를 돌려준 사람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꾸 떠올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것만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벗어나려고 발버둥치고 싶진 않은데,
그렇다고 계속 붙잡혀 있기에는 그이에게 너무 미안하다.

역시
한국에는 당분간 들어가지 말아야 겠다.
취직을 해서 삶이 확 변하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