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및 계획.


대학원에 진학하고 3년동안 일종의 생활 패턴을 형성하고 그것에 집착하는 것이 새로운 습관으로 점점 굳어지게 되었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하는 일의 거의 전부를 미리 계획하고 이를 실행해 나가는 것에 희열을 느끼거나 지키지 못한 자신을 책망하는 일에 익숙해 지게 된 것이다. 사람이 가진 아주 중요한 특징중 하나가 미래를 예측하지 못한다는 것인데, 때문에 하루에도 몇번씩 예상치 못한 변수가 튀어나오게 되고 이에 대응해 나가는 것이 삶의 중요한 이슈중 하나이고, 이러한 쪽에서 생각할 때 나처럼 계획을 타이트하게 세우는 유형의 사람은 어떤 면에서 살아가는 것이 약간 피곤하게 느껴질 때도 있다. 더군다나 이곳에서의 생활은 거의 아무에게도 터치받지 않고 지낼 수 있는 여건이 형성되어 있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이곳에서 누군가가 내 삶에 침투해서 계획했던 패턴을 무너뜨리게 될 때 역시 약간의 피곤함을 느끼게 된다. 하지만 이 역시 점점 계산 범위내에 들어 오게 되었고, 이러한 변수들까지 고려해서 조금 더 현실적이고 효율적인 계획을 세우게끔 진화(?) 하는 것이 내 삶에 일어난 작은 변화중 하나이다.

이런 의미에서 1년중 유일하게 무계획하에 생활할 수 있는 기간은 5월과 6월 무렵이다. 약 9개월간 쉼없이 달려온 육체에게 약간의 휴식을 줌과 동시에 머리에도 텅빈 공백을 주는 것이 5,6년간의 긴 마라톤같은 대학원 생활에서는 무엇보다 중요하고, 때문에 방학을 막 시작하는 단계인 5월과 6월의 대부분은 한국에서 아무 생각없이 쉬거나 이곳 볼더에서 게으름을 벗삼아 지내게 되는 것 같다. 그리고 내 생일이 있는 7월 초를 기점으로 해서 다시 몸과 마음을 긴장시키기 시작한다. 야구로 치면 일종의 스프링 트레이닝 캠프인 셈이다. 더군다나 이번 여름의 끝자락, 그러니까 8월 초쯤에 중요한 시험이 하나 있기 때문에 그 일정에 맞춰 조금 일찍 공부를 시작해야 한다. 이에 덧붙여, 시험이 끝나고 개강까지 주어진 2주간의 짧은 휴식 기간동안에는 논문을 하나 마무리해야 하고, 다음 학기 중간에 또 하나의 큰 시험이 있으며 두개의 과목을 수강해야 한다. 올해 연말까지는 눈코뜰새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더 노골적으로 지난 한달동안 원없이 놀았나 보다.

앞서 말한 ‘탁월한 계획’ 을 위해 궁리를 하는 중이다. 점점 나의 하루 생활 패턴은 직장인의 그것과 비슷해져 가고 있는데, 물론 약간 더 많은 유연성은 존재한다. 아침에 조금 늦게 일어나도 닥달하는 상사가 없으며, 야근하고 돌아와도 수고했다고 위로해주는 친구도 없다. 이 유연성은 공부하는 입장에서 약간 더 불리학 느껴질 때가 많다. 어짜피 해야 하는 공부의 양은 양의 방향으로 발산할 뿐 어느 지점으로 수렴하진 않는데 시간은 유한하기 때문에 결국 아침에 더 일찍 일어나야 하고 저녁에 더 늦게 잠자리에 들 수 밖에 없다. 이 문제는 시험이 다가올수록 극한으로 치닫게 되고, 데드라인이 몰려 있는 기말고사 기간, 그리고 거기에 더해 일년에 서너번씩은 꼭 전쟁을 치룬다. 이 고통을 줄이는 방법은 -천재가 아닌 이상에는 – 미리 미리 준비하는 것외에는 없는 것 같다. 조금 더 일찍 공부를 시작하고, 조금 덜 노는 것이 유일하고도 가장 효율적인 해결 방법이다. 나는 아침잠이 특히 많기 때문에 이 버릇을 고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한국에 다녀오고 나면 시차가 망가져 저녁에 일찍 잠들고 새벽에 일어날 때가 있어 괜시리 기뻐하기도 했는데 그것도 보름 이상은 못가더라. 요즘도 그래서 항상 새벽 두시가 되어서야 잠을 잘 수 있다. 이건 습관 이상의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즉 내일에 대한 걱정과 스트레스가 잠에 쉽게 들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한국에 도착하고 내일에 대한 걱정없이 마냥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에는 잠도 참 일찍 잘만 잤다. 요즘처럼 걱정이 많고 내일에 대한 고민이 많은 시기는 잠을 쉽게 이루지 못한다. 아직 정신 수양이 부족한 탓일게다.

우야돈동, 앞으로 6주의 방학동안 나의 계획은 이러하다. 아침 여덟시부터 오후 다섯시까지 점심시간 제외 하루 여덟시간동안은 딱 자리에 앉아서 공부하기. 더이상 하면 오히려 질려 버릴 것 같아서 컴팩트하고 임팩트있게 여덟시간만 딱. 저녁 시간은 비전공서적을 읽으며 머리를 리프레쉬. 아직 책장에는 읽지 않고 쌓아둔 책들이 몇권 남아 있다. 이것들을 얼른 처리해야 이제 월요일에 날아올 네다섯권의 책들에 부끄럽지 않을 수 있다. (..) 주말은 되도록이면 공부하지 말기. 물론 나머지 공부는 항상 있어왔고 앞으로도 있을 것임을 알지만, 되도록이면 금요일 저녁에 딱 책 덮고 노트북 딱 덮고 일어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티비와 술보다는 책과 음악에 둘러싸여 시간을 보내고 싶다.

책 이야기가 나와서 약간 덧붙이자면, 작년부터 영미문학쪽으로 집중을 하기 시작하는 것 같다. 이제서야 비로소 조금씩 영어 문장들이 읽히기 시작하면서 조심스럽게 원서로 된 문학책들에 도전해 보고 있는데, 아직 너무 어렵고 힘들지만 그래도 책은 원서로 읽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쉽게 포기하지 않고 있다. 각 작가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한 문체와 어법을 확인하는 재미도 쏠쏠하지만 가끔 맥락을 놓쳐 나중에 네이버를 검색해 보고서야 ‘아 이 책이 이런 내용이었어?’ 하기도 하는 씁쓸함도 있다. 내가 참고하고 있는 레퍼런스는 Times 선정 20세기 100대 영미문학 리스트다. 여기서 가즈오 이시구로와 이언 매큐언을 처음 알았다. (아 매큐언은 영화 어톤먼트가 먼저인가..) 결국 가슴에 남는 건 고전밖에 없다, 라는 약간 고지식한 독서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권위를 인정받은 작품들부터 먼저 읽고 싶은 마음이 컸고, 그런 의미에서 위의 리스트는 아주 유용한 레퍼런스로 기능하고 있다. 최근에 주문한 책들은 토마스 핀천의 책 두권과(!) 코맥 맥카시, 리처드 포드, 매릴린 로빈슨의 책들이다. 핀천의 책은 과연 내가 읽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지만 일단 책장에 꽂아 두고 싶었고, 맥카시의 책은 한국에 번역이 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 사람답지 않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고 해서 주문했다. 굳이 취향을 따지자면 페미니즘에 대해 우호적이기 때문에 로빈슨의 <Housekeeping> 도 흥미로워 보여서 주문했고, 포드의 <The Sportswriter> 는 제목을 보고 흥미를 갖게 됐다가 줄거리를 읽고 사야지 마음먹게 됐다. 이 책들을 언제 읽을 수 있을지는 정말 모르겠다. 영어로 씌어진 책들은 한국어로 씌어진 책들보다 훨씬 느리게 읽는다. 정말 더디다. 그래서 영어 원서책을 집어 들어 읽기 시작할 때는 약간의 긴장감마저 느낀다. 조금씩 나아지기만을 바랄 뿐이다.

남은 방학기간, 글의 서두에 걸어둔 Amiina 의 음악처럼 조용하고 차분하게 흘러 갔으면 좋겠다. 내 마음을 어지럽히는 그 어떤 사건 사고도 제발 일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2 thoughts on “근황및 계획.

  1. 전 박사 논문 쓸때도 그랬어요.
    9-5까징 죽을쓰든 글을쓰든 책상에 딱 앉아있고
    담에 운동하고, 저녁먹고 저녁시간은 프리~~
    규칙적이지 않으면 안되는 일인듯!

    • 네 정말 그래요. 시험 공부는 조금 덜하지만 논문 쓰는 건 정말 자칫하다가는 확 늘어져 버릴 위험이 너무 큰 것 같아요. 하지만 오늘은 운동을 먼저 해버렸다는.. ㅠㅠ 밤에 일찍 자는 것이 관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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