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3년의 공백.

내가 서울을 떠난지 3년이 됐다. 그곳에서 1년중 약 11개월을 머물고 여름 방학이 시작하면 한달 정도 서울로 돌아와 시간을 보냈다. 1년에 한달이라는 시간은 빠듯한 1,2주의 방문보다는 조금 여유있지만 그렇다고 이곳에서 ‘생활’ 을 할 수 있을 정도는 아닌, 지인들을 만나 시간을 보내며 휴식을 취하기에는 적절한 수준의 기간이다. 하지만, ‘생활’ 이 불가능하다는 것은, 그 한달동안 이곳에서 새로운 관계를 형성하거나 새로운 기억을 만들어 낼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새로운 사람을 소개받아 만나도 일회성에 그칠 수 밖에 없고, 오랜만에 만난 오래된 지인들과의 관계를 발전시킬 수도 없다. 그저 과거의 기억을 다시 끄집어 내서 추억하고 그러 소비할 뿐이다. 생산은 안되고 소비만 가능한 one sided economy 같은, 되게 weired 한 생활을 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금방 지친다. 피로해 진다. 한달동안 어머니밥을 많이 먹고 새로운 기운도 많이 받지만, 그저 소비되는 시간만을 보낸다는 생각에 정신적으로 채워지는 느낌은 전혀 없다.

한국에 와서 처음 며칠은 가족들에 둘러싸여 지냈다. 차라리 이편이 낫다. 가족은 포기할 수 없는 존재일 뿐더러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중 하나로 남아 있을 사람들이다. 그들은 어떤 조건에서든지 나를 반겨 주고, 나를 사랑하고, 나를 필요로 한다. 누나의 결혼이라는 큰 경사를 함께 하면서 내가 얻은 것은 결국 내 뒤에 끝까지 남아 있을 사람들은 가족이라는 사실이다.

월요일부터 비로소 개인적인 시간과 공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우선은 쉬고 싶었고, 침대에 누워 빈둥거리며 씨네21을 보고 싶었다. 이 소원은 지금까지 꾸준하게 실천하고 있는 중이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난 후 빈둥거리다 보면 어머니께서 아침을 차려 주신다. 각종 나물과 무침, 굴비와 곰국따위가 나오는 푸짐한 아침상. 점심이나 저녁을 주로 바깥에서 지인들을 만나며 해결할 것이기 때문에 특별히 아침을 더 신경써서 차려 주시는 것 같다. 그래서 벌써 2kg 이나 쪘다. 체중 조절은 당분간 하고 싶은 생각이 없다. 미국으로 돌아가면 저절로 알아서 원래 체중으로 돌아갈 것임을 누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월요일에는 A 를 만났다. 그의 얼굴에서나 나의 얼굴에서 문득 세월의 흔적들이 스쳐 지나감을 느꼈다. 너무 동안이고 또 절대 늙지 않을 것 같았던 그의 얼굴에 고단함이 느껴졌다. 주름살같은 육체적인 변화는 거의 발견할 수 없었지만, 그의 표정과 눈빛, 말투에서 그런 것들을 느꼈다. 이건 내가 요즘 거울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들이다.

화요일에는 Y 를 만났다. 그는 여전히 내게 관심이 없다.

수요일에는 부모님을 도와 누나의 짐을 정리하고 옮기는 일을 했고,

목요일인 오늘 점심에는 A 를 다시 만나 그의 회사 주변에서 식사를 함께 했고, 저녁에는 후배 S 와 H 를  코엑스에서 만났다. 늘 명랑하고 발랄했던 S 는 어느새 회사 생활 3년차에 접어 들었고, 나의 표현에 따르면 “세속적” 이 됐다. 회사 생활하는 젊은 여성들이 가지는 아주 전형적인 사고 방식이 그녀에게도 발견되기 시작했다. 한편으로는 아쉽고, 다른 한편으로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인다. H 는 볼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항상 독립적이고 당당하다. 생각에 있어 잡념이 거의 없으며, 그래서 행동이 항상 굵고 명확하다. 그러한 그의 성품이 지금의 그를 만들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일은 D 를 만나고,

모레는 HJ 의 웨딩 사진 촬영에 참석한 후 저녁에는 군대 친구들 모임을 위해 수원에 다녀와야 한다.

일요일 점심은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누나 내외와 함께 하기로 했고, 그 이후 시간은 아마도 J 가 소개시켜준 한 여성분을 만나러 압구정에 가야할 것이다.

월요일은..

화요일은..

그렇게 하루 하루가 간다. 나는 이곳에 3년동안 거의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내가 지금 만난, 그리고 앞으로 만날 사람들은 과거의 나를 기억할 뿐 현재 그들의 삶에 나를 포함시키지는 않는다. 앞으로 나는 짧으면 2년, 길면 몇년이 더 될지 모르는 시간동안 역시 서울에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이들과 나의 거리는 점점 더 멀어질 것이다. 내가 선택한 길이니 아쉽거나 후회스럽지는 않다. 다만, 그렇게 나와 멀어질 수 밖에 없는 사람들중 결코 잃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게 참 마음이 아프다. 마음이 약해질 법도 하지만, 지금 내가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없으니까 걸어왔던 길의 방향을 갑자기 틀어 버릴 수는 없다. 오늘 S 와 H 에게 이야기한 것처럼, 나는 만약 지금 누군가를 좋아하거나 사랑한다 해도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내가 그에게 할 수 있는 제안은 아주 극단적인 것들 뿐이다. 몇년동안 나를 기다리던가, 아니면 나를 따라 함께 미국으로 떠나던가. 미래가 불투명한 대학원생의 이런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일 여자는, 아마 없을 거다.

내가 지금 집중하고 있는 건 딱 세가지다. 사람을 만날 때는 그 사람에 대해서만 생각할 것. 사람을 만나지 않을 때에는 읽는 책에 집중할 것. 그리고 그 외의 모든 시간에는 오로지 ‘그’ 만을 생각할 것.

12 thoughts on “서울, 3년의 공백.

  1. it’s really hard to be “in” a relationship or “thinking” about being in a relationship when you’re in school. i guess it is what it is – it’s just not the right timing? good luck.

    • 요즘 계속 생각하고 있는데.. 타이밍이라는, 연애나 결혼에서 다들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개념을 더이상 믿지 않게 됐어요. 처음부터 잘 안될 사이라는 생각만 계속 드네요. “어짜피 안될거” 같은 마인드랄까..

  2. 한국에 간다거나, 또는 이전에 혼자 살 때 본가에 돌아갈 때면 차원을 이동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었어요. 저만 혼자 슥 빠져나왔다가 다시 들어갔다가 하는 기분이라.
    가족이 그런 절대적인 존재라는 면에서, 부모님이 나이 드시는 것의 무게가 갈수록 느껴지는 요즘이에요. 그와 동시에 훗날을 위해서라도 자신의 새로운 가족을 만들어야 하긴 할텐데- 라는 생각도 듭니다만. 아직은 음…? 이군요. (웃음)

    • 저도요. 부모님 나이드시는 거 보고 있자니 내가 여기서 지금 이러고 있을 게 아니구나, 싶기도 하다가 아니 그렇다고 지금 내가 뭘 어쩔 수 있겠어? 하는 마음도 들고요 ㅋ

  3. 아 저도 그런 생각 처음 미국에 왔을 때부터 몇 년 간 많이 했어요. 대학교 졸업하자 마자 미국에 와서 그 땐 아직까지 미국 유학온 친구들도 거의 없었고, 다들 한국에서 생활을 계속해 나가는데 나 혼자만 떨어져 나와 산다는 사실이 슬프더라구요. 지금은 이곳에도 기반이 생기고 대학 때 친구들도 하나둘씩 유학 오고 저와 같은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런 기분은 별로 안들어요. 저야 미국 나오고 나선 한국에 한번도 안 들어갔으니 이제 한국이 그다지 그립지도 않은. 이렇게 점점 지구촌 시민이 되어가는걸까 생각하고 있어요. ㅎㅎ

    • 아델라님처럼 가족이 기반 자체를 미국으로 옮긴 케이스와 저처럼 언젠가 한국으로 다시 돌아가야 할 케이스와는 또 입장이 많이 다른 것 같아요. 전 결국 언젠가는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늘 생각하고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한국과의 관계에 상대적으로 더 민감해 하는 것 같구요.

    • 음 저도 10년 안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까 싶어요. 미국에서 계속 살 생각은 별로 없는. 가족이 여기 있어서 아쉬움이 덜 한 건 맞겠죠.

    • 아 진짜요? 전 완전히 정착하시는 줄 알았는데 +_+

    • 지금은 그래도 젊으니까 괜찮지만 그래도 결국엔 내 나라가 제일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대학교육까지 한국에서 다 마쳤으니까 미국은 아무리 그래도 남의 나라구.^^

    • 네 부디 안정적이고도 성공적인 미래를 확 잡으셨으면 좋겠어요 ㅋ

  4. 같은 경험을 했던 사람으로서..
    아직도 상당히 폭넓은 사람들을 만나고 계시네요.
    그 폭이 점점 더! 줄어갑디다, 전.
    너무 앞을 내다보며 사람을 만나지 마세욧!

    • 저는 아직 몇년 되지 않았으니까요 ㅎ ; 좋은 말씀 명심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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