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911

아침 일곱시에 일어났다. 시험 기간에 밤중 차를 몰고 가다가 난생 처음으로 경찰에게 잡힌 적이 있었다. 내가 잘못을 저지른 건 아니었다. 차의 오른쪽 헤드라이트가 갑자기 나가서 수리를 요한다는 경고를 주려고 세운 것이었다. 떨리는 가슴을 쓸어 내리며 경찰이 요구하는 운전면허증과 자동차 등록증, 그리고 보험 카드를 꺼내서 보여주려는데 어라, 보험 카드를 깜빡하고 차에 넣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 친절한 경찰은 내게 재판에 참석하라는 티켓을 끊어 주었고, 나는 한국에서도 한번도 가본 적이 없는 약식 재판에 회부되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편지가 한통 왔는데, 티켓 발부 당시 커버가 되는 보험에 가입되어 있었음을 증명하면 본 사건을 기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불행중 다행. 아침에 일어난 이유는 이것때문이었다.

아홉시쯤 볼더 재판소에 들어갔고, 아홉시 10분쯤 나왔다. 보험 카드를 복사해 철하는 것으로 모든 절차가 끝났다.  DMV 에서 자동차 등록하는 것보다 몇십배는 쉽고 간단했다. 가슴을 쓸어 내렸다. 보험 카드를 차안에 넣고 다녀야 한다는 생각은 정말 매번 했는데, 설마 내가 그것을 까먹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대단한 실수였고, 그에 대한 따끔한 질책을 받은 셈이었다. 다음부터는 절대 실수하지 말아야 겠다고 다짐했다.

학교로 가서 두가지 일을 처리했다. 하나는 국제학생 담당 오피스에서 I-20 에 싸인을 받는 것.  이 싸인이 있어야 다시 미국으로 들어올 수 있다. I-20 에는 싸인을 받을 수 있는 공간이 세줄이 있는데, 나도 이번에 싸인을 받음으로써 세줄을 다 채웠다. 아마 다음에 한국에 나갈 일이 있을 때에는 (이제 졸업전까지 없을 것 같지만..) 새로운 I-20 를 발급받아야 한다. 다른 하나는 누나와 매형에게 줄 선물을 사는 것이었다. 장고끝에 악수둔다고, 나는 결국 학교 티셔츠를 커플룩으로 선물해 주기로 했다. 우리 학교의 대표색은 실버 & 골드지만 대부분의 학교 셔츠에 개나리색 노랑이 들어간다. 나는 – 당연히 – 노란색 티셔츠를 골랐다. 신혼여행에서 입고 인증샷을 찍어 올리라고 말할 계획이다.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던 일들이 의외로 간단히 끝나 모든 일을 마쳤을 때에는 채 열한시도 되지 않았다. 덴버를 다녀오기로 했다. 덴버에 있는 Twist & Shout 라는 레코드샵에 가서 씨디를 몇장 집어 오기로 했다. 날씨가 너무 좋았고, 걱정했던 일들도 다 잘 마무리되어 기분이 한껏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아케이드 파이어의 노래를 들으며 순식간에 덴버에 도착했다. 덴버에 처음 나갈 때에는 마치 서울에서 대전가는 거리만큼 느껴졌는데, 요즘에는 그냥 휙하면 도착하는 정도의 거리로 느껴진다. 더 빨리 달리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주차할 곳을 못찾아 레코드샵 주위를 몇바퀴 돈 뒤에야 겨우 차를 세울 수 있었다. 운전자로서의 내가 가진 시그네쳐 무브라고 할 수 있는데 -_-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부터 또다른 여행이 시작된다..  차를 세운 곳은 레코드샵 옆의 로컬 서점. 보더스나 반스 엔 노블이 아닌 대형 로컬 서점은 처음이었는데 분위기가 그럴싸했다. 책들도 오히려 브랜드 서점들보다 더 많은 것 같고, 정리도 더 가지런하게 잘 되어 있었다. 책을 구경하기 위해 덴버까지 나올 일은 없겠지만, 씨디를 사기 위해 이 레코드샵에 들렀을 때 한번쯤 들려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레코드샵에서 앨범들 구경하는 건 항상 재밌다. 시간가는 줄 모른다. 게다가 이 가게는 이쁜 티셔츠도 많이 판다. 조이 디비전 티셔츠를 살까 말까 많이 고민했는데, 결국 또 한번 참기로 했다. 고심끝에 세장의 씨디를 집어 들어 계산했다. 총 38불. 오프라인에서 사는 것 치곤 그리 나쁘지 않다. 다만 여기도 수입반은 가격이 많이 비싼편이다. 놀랍게도 매닉 스트릿 프리쳐스의 앨범은 20불정도다. 돌아오는 길에 양초를 하나 더 샀다. 선물용으로. 계산대앞에서 기다리다가 힐끗 옆을 보니 꽤 이쁜 팔찌가 50% 세일중이었다. 그것도 냉큼 집어 들었다. 그가 팔찌차는 것을 좋아하는지를 기억해 내기 위해 노력한 건 그 다음이었다.

집으로 돌아와 라면을 끓여 후루룩 먹고는 금새 낮잠이 들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후 일을 마치고 돌아와 아무런 부담없이 잘 수 있는 하루가 나에게 일년에 며칠이나 주어질까. 오늘은 그중 하루였다. 날씨는 금빛같았고, 창문 사이로 바람이 솔솔 들어오는 가운데 나는 아주 편안하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일어 났을 때는 목이 칼칼했다 -_- 다시 한번 잠을 잘 때에는 문을 닫고 자야 한다는 교훈을 얻었다.

평일 미사에 갔다가 저녁식사 초대를 해주신 김교수님댁에 가는 버스에 타니 J 선배가 타고 있었다. 선배는 내일 아침 출발한다. 나보다 하루 일찍 한국에 간다. 선배는 3년만의 한국행이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수녀원에 들어가셨고, 부모님은 조금 더 늙으셨을 것이다. 선배가 등뒤에 지고 있는 짐은 나보다 훨씬 무겁다. 그는 이제 잡마켓에 나갈 것이고, 한국에서 부모님을 모시며 사는 것을 원하고 있다. 부디 모든 일이 잘 풀릴 수 있기를. 그리고 그 전에 이번 한국 여행이 부디 그녀에게 좋은 기억만을 남기기를 진심으로 바랬다.

김교수님댁이 어디에 있는지 잊어 버려 버스를 잘못 내렸고, 덕분에 한참을 걸어야 했다. 그래도 좋았다. 왜냐하면 내일 해야할 공부가 없으니까! 아침에 일찍 일어나야 할 일도 없으니까! 다시 한번 이런 하루가 내게 일년에 며칠이나 주어지는지 생각해 봤다. 많지 않았다. 그만큼 소중한 하루였다. 기억되어야만 하는 하루였다.

식사는 교수님댁 내외분과 아들 승재, 그리고 동기 S 와 그녀의 남편까지 총 여섯명이 함께 했다. 교수님댁 아들 승재는 또 많이 컸다. 이젠 옷을 선물해 주려고 해도 얼마나 자랐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고 사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S 는 최근 임신을 했고, 그래서인지 대화는 아이를 키우는 학자 부부의 피곤함에 대한 충고와 예비 교육쪽으로 흘러갔다. S의 남편분은 영국에서 성장하셨는데 그래서 영국 유머에 대한 프라이드가 대단하셨다. 언제 한번 접할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 대체 얼마나 웃기길래.. S 는 학업을 마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과 테뉴어를 받지 못한 상태에서의 육아에 대한 걱정과 두려움이 컸다. 그리고 김교수님 내외분은 그녀의 걱정이 얼마나 현실적인지에 대한 조언을 해주셨다. 나에게도 멀지 않은 미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유심히 들었다. 지난번 노라와의 커뮤니케이션 이후 아기와의 관계맺음에 있어 훨씬 안정적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승재역시 나를 싫어하지 않았다. 특히 놀라웠던 건 노라와 승재 모두 아이폰에 대한 흥미가 굉장히 높고 적응도가 굉장히 빠르다는 점이다. 노라는 가르쳐주자마자 바로 아이폰의 터치와 슬라이드 기능을 이해했고, 승재 역시 아직 손가락 조절 기능이 미숙해 직접 하지는 못했지만 손가락으로 화면을 움직여 사진을 넘긴다는 기본 개념을 바로 이해했다. 스티브 잡스를 다시 한번 찬양하며.. 아이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결혼과 육아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더라. 열한시가 넘어서야 잠시 잠들었던 승재가 깨어나 울면서 비로소 김교수님께 인사를 드리고 나올 수 있었다.

집에 돌아와 썬더와 그리즐리스의 3차 연장전까지 가는 혈투의 결과를 알 수 있었고, 5월 초에도 히터를 틀어주는 학교 아파트측의 친절함에 다시 한번 감사하며 감기약을 하나 삼키고 내일 싸야할 짐들을 다시 한번 점검했다.

내일은 짐을 싸고, 키를 넘겨준 후, 잠시 쉬었다가 새벽에 일어나 공항으로 향한다. 꿈에 그리던 한국에 간다.

14 thoughts on “050911

  1. 저도 미국 살저긔 pulled-over 당한적이 몇번 있음더
    (대부분 과속..시속 20/40mile이런데서 너무 빨리 달렸다는 거죠..
    모두 경고로 끝났음니다만..)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 보내세요!

    • 어우 저 처음이라서 엄청 깜짝 놀랐어요. 미국 경찰은 왠지 모르게 기분나쁘더라구요. 즐겁게 놀다 오겠습니다.

  2. Have a nice & safe trip!!!

    FYI, I’m still here in NJ. Lots of things going on including internet problems! I will be posting soon though. Just wanted to let you know. ^^

  3. 저는 이 긴 글을 읽는데 뜬금없이 종혁씨가 운전하는 차에 한번 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하핫

    welcome to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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