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int Eastwood: Flags of Our Fathers

Clint Eastwood 가 <Million Dollar Baby> 로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뒤 만든 후속작으로, <Letters from Iwo Jima> 와 연작으로 구성되어 있다. 꼭 보고 싶었던 작품인데 영화가 공개된지 5년만에야 겨우 보게 됐다.

영화는 태평양 전쟁에서 미국이 가장 큰 희생을 치뤄야 했던 이오지마 전투를 배경으로 한다. 여기서 미군은 이오지마를 탈환하기 위해 약 2만 8천명에 가까운 사상자를 감수해 내야 했고, 며칠만에 끝날 줄 알았던 이 전투는 한달이 넘는 기간이나 계속됐다. 약 2만 2천명의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던 그 섬이 함락된 뒤 생존해 있던 일본군의 숫자는 천명을 갓 넘었을 뿐이었다. 그리고 AP 통신의 조 로젠탈은 여섯명의 미군이 이 섬의 정상에 성조기를 세우는 장면을 찍어 퓰리쳐 상을 받았다. 이 여섯명중 전투에서 생존한 세명, John “Doc” Bradley, Rene Gagnon, Ira Heyes 는 미국으로 송환되어 전쟁 기금 펀드를 모금하는 캠페인에 동원된다. 이들은 사진 한장으로 인해 전쟁 영웅이 되었고, 긴 시간동안의 캠페인을 마무리한 뒤 각자의 삶으로 돌아간다. 하지만 조 로젠탈이 찍은 위의 사진은 replacement picture 였다. 원래 세웠던 최초의 깃발은 따로 있었고, 사진에 찍혀 유명해진 저 장면은 상부의 명령으로 큰 깃발로 대체한 뒤 다시 찍은 것이다. 영화의 제목이 “Flags” 인 이유다.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존 브래들리의 아들 제임스 브래들리가 당시 전투에 참가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인터뷰하여 그당시 상황을 재조립한 동명의 책을 원작으로 그의 커리어에서 최초의 전쟁 영화를 만들었다. 폴 해기스와 윌리엄 브로일스가 각색한 이 영화는 전쟁 영웅이 되어 캠페인을 수행하는 세명의 젊은 군인의 모습과 전쟁 회상 장면, 그리고 존의 아들 제임스가 인터뷰하고 책을 집필하는 현재의 모습을 담담히 교차적으로 보여 준다. 제임스의 아버지 존은 성실한 위생병이었고, 헌신적으로 전우들의 죽음을 막으려고 애썼지만 거의 대부분 실패한다. 얼굴이 잘생긴 르네는 전쟁후 영웅이 되는 과정 자체를 즐긴다. 인디언 출신 이라는 영웅이 아닌 자신이 영웅으로 취급받는 현실에 괴로워 한다. 영화는 기본적으로 미디어와 국가주의가 어떻게 전쟁 영웅을 필요에 의해 만들어 내는지 그 과정을 그리고 있다. 별로 특별한 것이 없는 주제다. 우리는 이미 실제 일어난 일과 미디어가 꾸며서 보여주는 것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존재하는 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여기서 멈추면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아니겠지. 그는 몇발 더 나아간다. 그는 아마도 현존하는 감독들중 배우의 얼굴을 클로즈업하지 않고도 인간의 내면을 가장 잘 보여줄 수 있는 감독일 것이다. 이스트우드가 일평생 천착했던 주제는 아마도 인간다움이란 무엇인가, 일 것이다. 그리고 그는 가장 비인간적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가장 극단적인 면을 여실히 보여주는 전쟁터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풀어 놓는다.

영화 초반 약 20분여에 걸쳐 보여지는 미군의 이오지마 상륙 장면이 좋은 예다. 이 씬은 단순히 전쟁의 참혹한 모습을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는다. 카메라는 톤이 한껏 다운된  – 거의 흑백에 가까운 톤으로 – 픽픽 쓰러져 가는 미군들의 모습을 담는다. 더 나아가 어둠속에 가려져 얼굴조차 보이지 않는 일본군의 시선으로 쌓여 가는 시체들의 모습을 바라본다. 전쟁 영화가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는 스펙타클이나 액션, 긴장감따위에는 별로 관심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런 관습적인 매력도 함께 느낄 수 있긴 하다) 그저 죽어 나가는 미군의 모습속에서 인간이란 과연 뭐냐, 하고 질문하는 듯 느껴진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해 생각할 시간까지 주는 것 처럼 느껴진다. 그게 아니라면 그렇게 오랜 시간 전쟁 장면을 보여줘야 할 이유가 없을 것이다. 그 이후 간간히 등장하는 전쟁 회상씬은 아주 짧게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리고 이 질문은, 개인적인 영역에 그치지 않고 사회적인 영역으로까지 확대된다. 영화는 세명의 주인공이 영웅으로 만들어 지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국가라는 거대한 실체, 혹은 실체는 없지만 현실의 개인에 영향을 주는 무형의 존재가 인간다움을 완성시키는 존재인지, 혹은 그 반대인지에 대해 사유한다. 이들은 영웅으로써의 용도가 폐기된 후 각자의 삶으로 돌아가지만, 그 누구도 영웅으로서의 경력을 인정받지 못한다. 그리고 – 존과 이라의 경우 – 영웅이라는 정체성 자체를 평생 거부하며 살아간다. 이라는 인디언들이 모인 집회에서의 초청 강연에서 “나로 인해 미국이 인디언을 보는 시각이 발전했다는 점에서 자랑스럽다.” 라는 말을 할 수 밖에 없지만, 그는 식당에서 쫓겨나고 상급자에게 “썩어빠진 인디언들” 이라는 모욕을 받는 신세다. 르네는 세명중 미디어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듯 보였지만, 결국 지방 경찰서에도 취직이 되지 않아 공장으로 출근한다. 존은 자신이 지키지 못한 동료들에 대한 기억으로 평생을 괴로워 해야 했다. 국가가 만들어낸 이미지는 이들의 실제 삶과 다르다. 하지만 문제는 이러한 이미지가 완전한 허구에 바탕을 두지 않고 있을 법한 사실 위에, 그리고 실제로 존재하는 인물들 위에서 가공되었다는 사실이다. 전쟁에서 살아 남은 세명의 주인공은 자신들이 전혀 사실과 다르게 꾸며지고 보도되는 것에 대항할 힘조차 갖지 못한채 꼭두각시처럼 끌려 다닐 뿐이고, 그 사이에서 방황하고 고통스러워 한다. 결국 이스트우드는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에 대해 사유하면서 국가의 역할과 미디어의 역할까지 함께 짚어 보고 있는 것이다.

<밀리언 달러 베이비> 의 마지막 장면은 결코 잊을 수 없는 쓸쓸함을 담고 있다. 우리는 그의 뒷모습밖에 볼 수 없었지만, 뒷모습에서 그가 죽을 때까지 가지고 가야 하는 슬픔의 무게를 보았다. <Flags of our fathers> 의 마지막 장면도 대단히 인상적이다. 이스트우드가 직접 작곡한, 기교라고는 전혀 없는 아름다운 연주곡이 들릴듯 말듯 흘러 나오면서 이오지마섬 한켠에서 바닷물에 몸을 적시며 한가로운 한때를 보내는 군인들의 모습이 천천히 지나간다. 이 영화의 제목에는 “our” 라는 단어가 들어간다. 이스트우드는 어쩌면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억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함께 생각해보기를 원했을런지도 모르겠다.

가슴이 무거워짐과 동시에 먹먹해지고, 또한 한편에선 따뜻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이런 느낌은 <체인질링> 을 봤을 때와 무척 흡사한데, 얼른 이 영화의 반쪼인 <Letters from Iwo Jima> 도 봐야 겠다. 대단히 좋은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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