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0611

어제 늦게 잔다고 잤는데 아침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생활 패턴이란 게 생겨 버린 것 같다. 이번 학기는 그런 학기였다. 아침 여덟시가 되면 몸이 먼저 긴장하고 저절로 눈이 떠지는. 하지만 잠을 자는 것은 영 다른 문제로 다가왔다. 일어나기는 하는데 쉽게 잠들지 못하는 나날이 계속되는 학기였다. 성적이 나오기 전까지는 매일 매일이 재판을 기다리는 용의자의 심정일 거라고 생각하니 잠에서 깨는 것조차 괴로웠다. 멍하니 컴퓨터를 켰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성적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설마, 벌써, 아직 아닐거야, 라고 속으로 중얼거리긴 했지만 사이트 주소를 입력하고 로그인한 뒤 버튼을 몇개 눌러 성적을 보는 데까지 걸리는 30초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 심장은 쿵쾅거렸다.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가는 와중 성적이 덜컥 나와 버렸고,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길게 내쉴 수 밖에 없었다. 한동안 그렇게 모니터를 멍하니 쳐다보며 가만히 있었다. 거의 한 10분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부모님께 우선 이메일을 보냈고, 이번 학기동안 많은 도움을 주신 교수님과  친구 한명에게도 감사의 이메일을 썼다. 페이스북에 pass 라는 네글자를 입력한 뒤 스캇에게 문자를 보내 세상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B 를 받았다고 알려줬다. 뒤이은 안도와 축하의 메시지들을 받으며 지난 1년간 감내해야 했던 마음 고생이 어떠했는지 떠올려 보려고 했다. 쉽게 잊혀지지 않을 줄 알았던 그 감정들이 쉽게 기억나지 않았다. 지난 1년간, 아니 2년간 내 마음속의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던 고통이었는데도 갑자기 공백상태가 된 듯하게 거짓말처럼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 웃겼던 건, 아니 아직까지 웃기는 건, 난 이제 뭘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거다. 어쩌면 그 고통이 지난 2년간 나의 삶을 지탱하고 이끌어준 원동력이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그렇다면 너무 슬픈데. 기쁨과 희망이 아니라 고통과 절망이 나를 잠자리에서 일어나게 하고 밥을 먹게 하며 학교에서 늦은 시간까지 공부하게 만든, 그 힘의 원천이었다는 건지. 쉽게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학교로 운동을 하러 갔다. 오랜만에 로잉머신을 하니 허버지와 등쪽이 뻐근했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망가진 몸은 한두번의 운동으로 쉽게 회복되지 않을 것이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꾸준히 운동을 해야지, 하고 다짐했다. 한국으로 나와 함께 가는 짐속에 비좁더라도 운동복과 농구화를 집어 넣어야 겠다고도 생각했다.  오늘은 졸업식 이틀째였다. 그래서 학교 렉센터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농구 코트에는 나를 제외하고는 무언가를 수리하는 스태프 두어명과 자랑스러운 딸을 따라 잠깐 구경하러 들어온 노부부 두명 정도밖에는 보이지 않았다. 슛폼을 가다듬으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작 2,3주 정도 하지 않았을 뿐인데 그새 폼이 무너져 내린 것인지. 드리블도 뜻대로 되지 않았다. 아무려면 어때.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청소를 시작했다. 집안 곳곳에 쌓인 먼지를 털어 내고 설거지를 한 후, 청소기를 한번 돌렸다. 보통은 이정도에서 청소가 마무리되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뭔가를 더 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창고에서 캐리어를 꺼내 펼쳐 놓고 한국으로 가져갈 짐들을 하나 둘씩 툭툭 던져 넣기 시작했다. 지저분했던 책상과 책장도 말끔히 정리했다. 청소하는 와중에 아마존에서 CD 가 도착했다. 이때부터 지금까지 계속 Explosions in the sky 와 Low 의 신보를 듣고 있다. 둘다 너무 좋다.

오후 세시쯤 됐을까, 딱히 뭘 사야 겠다는 생각도 없이 옷을 갈아 입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가끔씩 들어오는 바람이 너무 시원하고 청량해서, 이대로 집안에 있으면 왠지 안될 것 같았다. 한국으로 가기 전까지 차는 되도록이면 운전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오늘은 여기 저기 돌아다닐 것 같아 일단 끌고 나갔다. 우선 생활용품점에 들려 어머니께 드릴 선물을 샀다. 한국집을 떠난지 3년이 다 되어 가기 때문에 지금 뭐가 필요하신지 전혀 모른다. 괜히 어중간한 것들을 사갔다간 중복된다고 쿠사리를 먹을 것이 뻔했다. 그래서 이것 저것 기웃거리다가 조그마한 주방의 소품들, 아이디어 상품들을 몇개 끌어 모았다. 손목이 약한 어머니를 위한 병따개, 딸기 꼭지 따개 (이거 되게 재밌을 것 같다), 와인 코르크, 플라스틱 손잡이가 있는 집게 등등. 아버지를 위해서는 와인 두병을 준비하기로 했다. 양주를 좋아하시지만 와인을 더 많이 드시라는 의미에서.. 누나와 매형의 선물은 쉽게 결정하지 못했다. 백화점에 들러 나를 위한 옷도 두벌 샀다. 별거 없었다. 그냥 어두운 색 면바지 하나와 한국에서 입을 반팔 폴로 셔츠 하나. 집에 와서 보니 셔츠는 너무 커서 내일 가서 바꿔야 겠다.  저번에 봐둔 양초를 하나 사려고 앤쓰로폴로지에 들어가서 몇개 맡아 봤는데, 한국 가기 5일전에 양초를 굳이 사야할 이유가 있나 싶어 그냥 돌아 나왔다. 나중에 집에 와서 저녁 냄새가 잘 빠지지 않는 것을 보고 아이쿠, 그때 살걸 하며 후회했다.

성당에 도착하니 30분 정도 시간이 남았더랬다. 그래서 학교쪽으로 다시 걸어 내려가 레코드샵에 들어 갔다. 사고 싶었던 앨범이 몇장 있었는데 아마존에서 주문하면 혹여나 늦을 것 같아서 주문하지 못한 것들을 사려고 들어 갔더니, 그만 새CD 는 전혀 없고 중고 CD 들만 한구석에 쌓여져 있었다. 그 유명한 점포 정리. 이로써 볼더에 있는 로컬 레코드샵 두 곳 모두 문을 닫게 생겼다. 대단히 슬펐다. 그래서 힘을 좀 실어 주려고 살만한 거 없나 살펴 봤는데, 없었다. 그래서 그냥 나왔다. 내일 덴버에 있는 레코드샵에 가볼 생각이다.

성당에 가서 미사를 드리고 나와 집으로 돌아 왔다. 오래된 돼지고기에 오래된 김치를 넣고 찌개를 끓였다. 어머니께서 주신 귀중한 냄비, 내가 태워 먹은 그 냄비는 마술처럼 또다시 맛있는 김치찌개를 완성시켜 주었다. NBA 플레이오프를 보면서 밥을 후다닥 먹고, 서류들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비자 관련 서류들, 임금 계약(?) 서류들, 세금 관련 서류들, 음악 관련 서류들을 다시 한번 정리했다. 소화도 시킬겸 편지함에 다녀왔다. 코트에 출석하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려주는 귀중한 편지 한통과 전데 구독한 저널 하나, 그리고 마그니피캇 6월호가 도착해 있었다. 스팸 광고 하나 없이 중요한 편지로만 채워져 있는 편지함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돌아와서 주방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나는 사는 것도 잘하고 버리는 것도 잘한다.  음식은 더더욱 그렇다. 꼭 먹어야지, 다짐하고 사는 음식의 절반도 먹을까 말까다. 생활이 불규칙하기도 하거니와,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있다 보니 집에서 차분하게 무언가를 생각하고 만들 엄두가 쉽게 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 어머니께 전화가 왔다.

한참을 통화하고 끊으니 댈러스가 레이커스에 대역전승을 거두고 시리즈를 3-0으로 만들어 버렸다. 노비츠키를 보면서 전율이 느껴졌다. 그는 독일 태생의 선수로 지난 10년간 최고의 레벨에서 항상 플레이해 왔지만, 우승과는 늘 인연이 닿지 않았다. 그의 눈빛과 표정에서 단순한 열망 이상의 무언가를 느꼈다. 나같은 평범한 인간이 욕망의 대상을 향해 갖는 그런 하찮은 감정따위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책상에 앉아 이제 무엇을 할까, 생각해 보려고 해도 생각 자체를 잘 할 수가 없었다. 머리 속의 큰 부분이 텅 비어져 있는 느낌이 하루 종일 계속된다. 시간은 참 느리게 가고, 나는 무언가를 더 해야 했다. 그래서 냉장고를 아예 싹 비워 버렸다. 그렇게 주방까지 완전히 정리를 끝낸 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와 다시 책상앞에 앉아 이 일기를 쓰고 있다. 이제는 몸이 좀 더 피곤해 져서 잠을 잘 수 있을까. 나는 잠을 왜 자야 했던 것일까. 고통속에서 몸부림치면서도 잠을 자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제했던 이유는, 단지 그 고통의 끝에 다다르기 위해서였던 것일까. 이제 그 끝을 지나 더이상의 고통이 없는 상황에 다다른 지금, 진짜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 시험이 끝나면 하고 싶었던 수만가지 것들이 단 하나도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다. 책장에는 읽고 싶었던 책들이 쌓여 있고, 보고 싶었던 영화 목록도 어디엔가 있을 것이다. 하다 못해 책상 한켠에는 미완성 상태로 남아 있는 내 첫번째 논문이 얼른 더 수정해 달라고 재촉하듯이 놓여 있다. 해야 할 것들, 할 수 있는 것들, 하고 싶은 것들은 주변에 얼마든지 있다. 그런데 무엇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오늘 하루 더 잠을 청해 보고 내일 아침이 되면 조금은 더 정리가 되어 있기를 기대해 볼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10 thoughts on “050611

    • 한국가는 비행기는 다음주 수요일에 타요. 또 한 24시간쯤 걸리겠죠 뭐.. ㅋ

    • ㅎ 그런 단어들 몇개씩 가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렸을 때부터 계속 듣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쓰는 옛날말들이요.

  1. 읽는 내내 난 왜 그동안, 그동안 난 왜., 라고 생각했어요. 진짜 오랜만이네요. 반가워요. ‘진심’이에요. 그리웠지만 참았더랬어요. 얼마나 지났다고 낯선 걸까요. 그렇지만 이제 좀 제자리에 서 있는 기분이에요. 노래 정말 좋네요. 아아 정신이 없어요.

    • 오오 살아 계셨군요! 정말 걱정 많이 했어요. 이제 좀 괜찮아 지신 건가요?

    • 음. 괜찮아졌어요^^ 라고 하고 싶지만, 솔직히 그렇지는 않아요.
      그래도 상황이 많이 바뀌었긴 하니까 감사하며 살려구요.
      사실, 너무 바빠서 정신 없기도 하고ㅎㅎ

      그런데! 한국 오신 건가요?!!!! 아아아아아ㅠㅠ 뵐 수 있으면 좋을텐데..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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