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학 끝물

방학이 이제 일주일 정도 남았다. 방학의 마지막 3,4일은 덴버에서 열리는 미국 경제학 대회에 참석해야 하기 때문에 바쁘게 보낼 것 같으니, 실질적으로 푹 쉴 수 있는 시간은 이제 진짜 며칠 안 남은 거다. 학기중에는 바빠서 뒤로 미루어 두었던 일들을 전부다 처리할 것 같은 의욕을 가지고 방학을 시작했지만, 학기가 끝난 후 탈진한 육체를 이길 수 있는 정신력은 가지고 있지 못했나 보다.

요즘 내 하루 생활은 아주 단조롭고 평화롭다. 녹차의 약한 카페인 기운도 이기지 못하는 것인지 밤에 쉽게 잠을 이룰 수 없는데, 잡생각이 많은 요즘도 아닌데 이상하리만치 잠을 이루지 못한다. 새벽 두세시까지 뒤척거리다가 겨우 잠들면 아침 아홉시쯤 일어난다. 씻는 것은 저만큼 뒤로 미루어 두고 컴퓨터에 앉아 녹차 한잔 하면서 자잘한 일들을 좀 보고 인터넷도 좀 한다. 열한시쯤 늦은 아침겸 빠른 점심을 간단하게 차려 먹는다. 오늘은 신정이니 특별히 나를 위해 문어 다리를 삶아 초고추장을 만들어 찍어 먹었다. 서울에 있을 때 우리 가족은 왠만하면 밤 열시, 열한시쯤에 밤참을 즐겨 먹었는데, 문어다리 삶은 것도 꽤 인기있는 메뉴였다. 한국가면 어머니께 꼭 한번 해달라고 해야지! 낮에는 5분거리에 있는 학교 rec center 에 가서 열심히 운동한다. 농구도 하고, 유산소 운동도 하고, 근력 운동도 한다. 덕분에 요즘 온몸 곳곳이 쑤시고 결린다. 그래도 이제 나이가 있는지라 운동을 해야 건강 관리가 된다. 꾸준히 하는 게 중요한데 개강하고도 시간이 날런지는 잘 모르겠다. 운동다녀와서 씻고 책을 잠깐 읽으면 다섯시가 되고, 역시 가까운 거리에 있는 성당에 간다. 성당에 다녀오면 해가 저물어 있고 저녁을 차려 먹는다. 오늘은 신정이니까 특별히 나를 위해 자반 고등어를 구워 먹었다. 집에 오븐이 있어서 쉽게 해먹을 수 있다. 동네에서 고등어를 구하는 게 쉽지 않은데 가끔 덴버에 있는 한인마트에 갈때 소금간이 되어 있는 고등어를 꼭 사와야 한다.  저녁을 먹고 티비를 보며 한숨돌리고 나면 어느새 밤이 되어 있고, 음악을 듣거나 책을 보며 소일하다가 한시쯤 씻고 잠을 청한다.

가끔 나의 현재를 버거워 할 때가 있다. 일종의 인생의 보릿고개를 넘고 있다는 느낌이 들때가 있다. 돈도 없고, 공부도 뜻대로 잘 안되고, 짝도 없으니 감정적인 부분까지 힘들어 지는 상태. 주변의 모든 상황들이 나를 짓누르는 것만 같다. 취직한 한국의 친구들의 소식을 들을 때마다 자괴감을 느끼고, 나보다 멀찍이 앞서 나가 있는 학과의 다른 친구들을 볼때 움츠러 든다. 미국 경기탓이라지만 학비 지원이 줄어들면 모든 것이 나의 잘못인 것만 같아 자책감이 가슴을 찌른다. 맛있는 것을 먹고 싶어도, 듣고 싶은 음악이 있어도 통장의 잔고를 보며 다음에 사자, 하며 억지로 마음을 달래야 한다. 작년에 옷을 거의 사지 못한 것 같다. 자동차를 팔아야 할 정도로 자금 사정에 치일 때면 이렇게까지 하면서 여기서 왜 있어야 하나 하는 생각까지 든다. 그렇다고 공부가 순조롭게 잘 되는 것도 아니다. 거대한 벽에 막혀 재능을 탓하거나 모자란 머리를 쥐어 박는 게 하루에도 열두번이다. 24시간이 너무나 짧다는 것을 절감하면서도 게을러지는 자신을 보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가족이 옆에 있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제 동갑내기 한국인 동기 친구마저 지난 겨울 결혼을 해서 한국인 동기중에서는 달랑 나만  솔로다. 가족과 함께 계신 유학생분들을 보면 가정사에 치여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을 것 같은데도 별로 스트레스를 크게 받지 않으신다. 옆에서 삶의 활력소가 될 뿐더러 책임감을 느끼니 더 집중력을 가지고 열심히 하시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일들이 어렵고 힘들다.

그래도 어제는 밤 열한시쯤에 음악을 틀어 놓고 책을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 인생에서 참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건 분명한데, 그 와중에도 이렇게 황홀하게 행복한 순간을 때때로 즐길 수 있다니 나는 정말 행운아인가 보다, 하는 그런 생각. 저금은 꿈도 못꾸고 미래는 어두운 불확실성 투성이지만 따뜻한 집안에 앉아 좋은 음악과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여유가 잠시나마 허락된다는 게 얼마나 감사하던지. 비록 값비싼 레스토랑에는 가지 못하고 좋아하는 농구 경기도 티켓값을 감당하지 못해 구경도 못가는 처지이지만,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수 있고 듣고 싶은 음악을 들을 수 있으니 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지.

요즘은 Kazuo Ishiguro 의 Never Let Me Go 를 읽고 있다. 최근에 한국에도 번역되어 출간된 것으로 알고 있다. 처음 몇 챕터를 읽은 후 바로 반해 버릴 정도로 느낌이 좋다. 지은이는 일본 태생으로 어릴 때 영국으로 이민을 와 문학을 전공한 사람인데, 정갈한 문체와 정확한 어휘 구사가 참 매력적이다. 정말 글 잘쓴다,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기술적으로 거의 완벽해 보이는 데다가 플롯 구성도 참 좋다. 문장 하나하나에 감정을 담아 내는 능력이 참 놀라웠다.

요즘은 Beach Fossils 와 Wild Nothing 의 음악이 좋다. 슈게이징의 Dreamy 한 기분과 따뜻한 정서를 잘 느낄 수 있다. 최근에야 구입해서 듣고 있는데 그냥 지나치지 않아서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주부터는 평일 낮에 영화를 보러 다닐 참이다. 주말과 평일에 따른 영화 티켓 가격이 많이 다른데, 같은 평일에서도 낮이나 오후의 영화표값은 조금 더 싼편이라 방학을 활용해 그동안 보고 싶었던 영화들을 보러 갈 생각이다. Black Swan, 127 days, True Grit, King’s speech, the kids are all right 정도. winter’s bone 과 social network 는 바쁜 학기중에 놓쳤는데 기회가 되면 이 영화들도 꼭 보고 싶다. 미국은 확실히 유럽 영화를 볼 기회가 많이 않다. 뉴욕이나 LA, 시카고같은 큰 도시면 모를까, 중소 도시의 극장들은 유럽이나 아시아영화들에까지 배려해 주는 분위기는 아니다.

아 참, 저녁을 먹고 소화도 시킬겸 쓰레기를 버리고 우체통에 들어 편지를 확인했는데 반가운 카드 두장을 받았다. 이제나 저제나 오나 기다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도착한 편지 한통과 전혀 오리라는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도착한 기분좋은 편지 한통이 우체통에 들어 있었다. 이런 맛에 죽지 않고 사는 건가보다, 싶더라.

14 thoughts on “방학 끝물

  1. 열심히 잘 살고 계신 거 같은데요 :)
    저는 New Year 연휴가 다 끝나간다는 사실에 슬퍼하고 있는 중…ㅎㅎ

    • 잘 사는 게 뭔지 한번 생각해 보게 되네요..
      마지막 남은 하루 알차게 보내시길!

  2. 인생의 보릿고개 부분.
    그걸 겪지 않고 지나친다면 꽃 피는 봄날은 오지 않겠죠.
    사람도 자연의 일부라 그것을 거스를순 없겠죠.
    그래도 사람인지라 힘들어죽겠는데 봄날이 오긴와? 라고 생각하지만
    오겠죠. 차근차근 봄날에 대해 상상해봐요. 이건 제 치료법이랄까.
    바쁘고 돈 없고 재능이 드러날때, 우울에 바닥을 치면 쓰는 치료법.
    따뜻한 차 한잔 채워서 음악 틀어두고, 책 읽는것도 제 치료법 중에 하나.
    스스로를 믿는게 중요해요.

    그 카드 손으로 다 만든거예요.
    봉투조차도.
    소식을 쉽게 전할 수 있게 되면서 점점 손으로 직접 한 무언가를
    뭐하러 귀찮게. 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마음이잖아요.
    칼질 한번에 그림 하나에.
    사소한 것이지만 마음은 무엇보다 뜨끈해지는.

    그래도 너무 늦지 않게 도착해서 다행.
    (시카고에 있는 친구는 크리스마스가 막 지나서 도착했다던데
    그 쪽이 조금 늦었네요. ^^)

    • 네, 직접 만드신 거라는 거 처음에 딱 열어보고 바로 알았어요. 사람의 손길이 느껴지는 그런 카드였거든요. 속지에 아무런 프린트도 되어 있지 않아 확신했지요. 제가 참 비싼 선물을 하나 받았구나, 하는 사실을.

      하루에도 열두번씩, 보릿고개를 넘은 시간을 사는 저를 상상해요. 다시 돌아와야 하는 현실이 약간 쓰긴 하지만, 그 때를 위해 지금 당장 준비해 두어야 하는 것들이 생각나 도움이 되기도 해요. 그러니까 예를 들면, 지금 당장 공부하기 급급해 뒤로 미루기 쉬운 것들을 부지런하게 하는 거죠. 더 나은 미래를 사는 나를 위해. 독서같은 것들.

      카드 다시 한번 감사해요.

  3. Kazuo Ishiguro 의 Never Let Me Go가 좋다구요? 기억해 두겠어요.
    127 days는 뭐, 그냥 그랬어요. 기대를 너무 많이 하고 갔나봐요. 우리가 알거나 상상할수 있는 이야기, 딱 고기까지예요. 차라리 Social network를 보심이. 전 재미있게 봤거든요. 갸가 말을 좀 웅얼웅얼 빨리빨리 하는게 있어서 정신집중을 하고 봐야됐긴 했지만요.
    뭐,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합시다. 조만간 봐요. ^^

    • 제가 제임스 프랑코를 좋아해서.. 감독은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요. 소셜 네트웤은 광고 나올때부터 엄청 보고 싶었는데 정작 개봉하고 나서는 바빠서 못봤어요. 근처에 아직 상영하는 극장이 딱 하나 있어서 내일 가서 보고 오려구요.

      Kazuo Ishiguro 정말 추천하고 싶어요. 오늘 서점에 가서 이분의 다른 소설들도 훑어 봤는데, 다 느낌이 괜찮네요. 얼른 다른 소설들도 읽고 싶어요.

    • 헉, 저도 제임스 프랭코를 좋아해서
      이번 수욜 아님 목욜날 영화 보러가려고 하는데..
      동료 말이 좀 gruesome하다는 군여.

      알트만의 the company란 영화에서 프랭코 첨 봤는데
      그때부터 주욱~ 팬..

    • 제임스 프랑코 멋있죠 ㅠ 전 milk 나올때 눈이 가더라구요. 인상이 참 좋아요. the company 는 못봤어요. 한번 봐야 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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