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바람의 그림자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문학과 지성사, 2005.

다니엘이라는 소년이 있다. 어릴적 어머니를 잃은 이 어린 소년은 서점을 운영하는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간 ‘잊혀진 책들의 묘지’ <바람의 그림자> 라는 소설을 발견하고 이내 매혹된다. 소설에 등장하는 악마의 이름을 가진 라인 쿠베르라는 얼굴없는 이가 이 소설의 저자인 훌리안 카락스가 쓴 모든 소설을 불태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후, 소년은 수수깨끼의 인물인 훌리안 카락스의 정체를 찾아 나가기 시작한다. 소년의 십대는 카락스라는 인물에 점점 가까워지는 것으로 압축된다. 그의 주변에 카락스를 알고 있는 점점 더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게 되고, 다니엘은 스스로의 성장과 함께 카락스에게로의 접근도 점차 완성해 간다.

이 소설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이 많은데 짧고 간략하게 정리하기 위해 노력해본다. 먼저 이 소설은 여러모로 영화의 시나리오나 연극을 위한 희곡을 연상시키는데, 이 소설의 저자인 사폰이 영화계에 몸담았고 시나리오 작가로도 활동했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 소설을 마치 영화화되기 전의 원작소설과 같은 느낌으로 쓰고 있다. 모든 장면에 대한 세세한 묘사와 스릴러적인 긴장감을 조성하는 네러티브 구조는 전통적인 소설의 형식이라기 보다는 두시간짜리 영화를 위한 짧은 호흡의 기승전결에 가깝다. 십대 소년의 성장기와 미지의 인물에 대해 한꺼풀씩 벗겨 내는 스릴러 구조의 묘한 대구는 퍽 명민한 구성방식이다. 카락스는 다니엘의 거울이고, 다니엘은 카락스의 복제판이다. 유치할 정도로 세부적인 묘사를 통해 이 두명의 과거와 현재를 대구로 연결시키면서 한 소년이 호기심 가득한 철부지 어린 아이에서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역사를 반복하는 주체가 될 때까지의 과정을 그려내고 있다. 너무 영화적이고 또 시각적이어서 사실 소설을 읽는 맛을 크게 느끼기는 어렵다. 단어 하나 하나에 집착하지 않고 빠르게 읽어 나가도 이야기의 흐름을 파악하는 데 결코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불필요한 문장들이 넘쳐 나는데, 이 문장들이 문학적인 완성을 위해 쓰이는 것이 아니라 영화적인 구성을 위해 쓰인다는 점을 알고 나면 더더욱 글자들에 집중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된다. 소설을 읽는 것이 아니라 보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그래서 흡인력은 아주 강한 편이다. 저자는 독자들이 갈구하는 정보들은 적당한 긴장감을 유도한 뒤 아주 솔직하게 던져 주는 편이다. 독자는 소설의 시작 부분에서 카락스와 다니엘이 결국 같은 운명을 반복할 것임을 알고 있고, (웰메이드 무비로서 기능하고자 한다면) 소설의 결말은 그 기대를 살짝 비틀면서 헤피엔딩으로 끝마치게 될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읽는 내내 지루함은 전혀 느낄 수 없다.

읽으면서 영화 <타인의 삶> 이 계속 생각났다. 이래저래 비슷한 점이 많다. 전후 세대의 공허한 정서를 타인에 대한 집착과 광기로 풀어 내고 -다시- 타인에 대한 숭고한 희생으로 극복하게 된다는 기본적인 정서가 우선 그렇고, 영화의 결말과 아주 유사한 형태의 결말이 그러하며, 결말 부분에 이르러 얻게 되는 뭉클한 감동의 유사함이 그러하다. 영화 <타인의 삶> 도 그렇고 소설 <바람의 그림자> 도 그렇고 굉장히 잘 만든 상업적인 목적을 가진 완성된 예술작품같다.

개인적으로 그 어떤 등장인물로부터도 ‘감정’ 을 느낄 수 없었는데, 굉장히 평면적으로 묘사된 캐릭터에 기인하기 때문일 것이다. 등장인물의 표정이나 몸짓, 성격등은 너무 명확하고 또렷하게 각인되지만 그 인물의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고통의 심연에 대한 묘사는 아주 직설적이고 투박한 어체로 표현되고 있다. 구체적으로 묘사된 행동들을 통해서 저 인물의 심리상태는 이렇겠구나, 하고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명확한 줄거리와 기승전결, 확실한 긴장감과 그에 어필하는 뚜렷한 결말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아주 좋아할 만한 작품이고, 인물에 대한 구체적인 심리 묘사나 철학적인 사색, 조금 더 역사적인 관점에서 인간을 관찰하는 쪽을 선호한다면 그럭 저럭 읽어 나갈 수 있는 소설같다. 개인적으로는 오랜만에 읽은 – 한글로 번역된 – 픽션이어서 그런지 기대보다 못한 게 사실이다. 나는 속도가 약간 떨어지더라도 성실하고 깊숙히 들어가는 문장들이 얽혀 있는 책이 좋다. 이 책은 내게 너무 빠르고 급한 감이 있었다. 얼른 – 방학이 끝나기 전에 – 다른 작품을 읽어야 겠다.

씨네 21에 하도 광고가 많이 나와서 대체 뭐길래, 하는 호기심에 제목을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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